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어렵게 태어난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이니 금지옥엽이다. 하지만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답지 못하게 부모를 기쁘게해준 아들은 못된다. 스스로 배우자를 찾지 못해 부친이 나서서 배우자를 찾아줬다. 모친인 사라가 부친보다 먼저 죽었지만 아들이 모친의 장례를 감당하지 못해 늙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대신해 배우자의 장례를 진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주변머리가 없었음을 증명한다.
어제 아내의 7순이지만 하나뿐인 아들은 엄마의 생일에 관심조차 없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내가 아들에게 연락해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야 했다. 원래 계획은 식당에서 만나 엄마를 놀래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화장실 쓸일이 생겨 집을 먼저 들렀다고 하였다. 다행히 그시간 아내는 운동중이라 맞닥드리지 않았지만 곧이어 아내도 귀가를 했고, 아들이 화장실에 있는 동안에 내가 먼저 출발을 해 식당에서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를 않아 전화를 해보니 뭣하러 식당에서 식사를 하느냐 그냥 집에서 식사하기로 했다는 것.
하지만 식당에서는 이미 상을 차려놓은 상태라 취소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식당에 도착해 마지못해 식사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아내의 불평불만은 끊이지를 않았다. 문제는 식사후 아들의 태도이다. 자기를 인천 집에 까지 태워다주면 자기가 돈을 내겠다는 것. 하지만 비가내려 길바닥도 미끄럽고해서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마무리를 하고 헤어졌다.
나로서는 돈은 돈대로 쓰면서 당사자나 아들로 부터도 반갑지 못한 반응을 받아야하니 마음이 씁쓸할 뿐. 더군다나 아들의 태도가 못내 서운하다. 약속을 했으면 엄마를 설득해서라도 식당으로 인도를 해야함에도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 자세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결국은 식사비 부담하는 것이 아까워서 였음을 알게되니 한심한 마음에 속이 상한다. 그야말로 이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0이 지나 얻은 아들이다보니 귀한 자식으로 취급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하나이니. 어쩌면 그러한 환경이 아들을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극단의 이기주의자로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개역한글)
애곱의 열두아들중 요셉은 본의아니게 누구보다 많은 연단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빛난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자녀를 너무 보호위주로 키운 부모는 자녀때문에 후회할 수 밖에 없음을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