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를 남기지 않을 시 무통보삭제 될 수 있습니다.사이트명만이라도 출처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출처 : 필사 노트 속 문장
낮과 밤이 등을 맞대고 앉아
서로를 외면하던 날들은 지났다
계절이 가고 또 지나고 보니
다짐은 그리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길상호 / 잠잠
창밖에서 고양이가 우는 동안 끝날 것 같지 않은 노래를 듣고 있었다 단지 고양이가 울 뿐인데
우리는 버려진 무덤을 떠올리고 무덤 너머 앙상한 숲을 떠올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노래의 처음을 기억하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잠들지 못한 아이들이 성장하려는 무릎을 주무르는 밤, 가까이서 고양이가 울고
먼 곳에서 웃고 있을 불안을 우리는 복기했다 함께 모인 이유와 흩어지지 못한 소리와 지금을 버티게 하는
긴긴 시간을 누구도 놓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내성을 참았다 골목의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무수한 걸음들,
집이 창문을 건네는 구석에서
고양이는 울고 우리는 깊이를 놓치고 노래가 멈출 때까지 움츠린 것들을 위무했다 길을 찾고 길을 잃은 방향이
우리 틈에 모여들었다 여럿이 등진 밤이 짙어지면 고양이가 바라보는 쪽으로 검은 얼굴들이 기울고 있었다
고양이가 울 뿐인데/ 정영효
그렇게, 네가 있구나 하면 나는 빨래를 털어 널고 담배를 피우다 말고
이불 구석구석을 살펴본 그대로 나는 앉아 있고 종일 기우는 해를 따라서 조금씩 고개를 틀고 틀다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오는 방향으로 발꿈치를 들기도 하고 두 팔을 살짝 들었다가 놓는
너가 아니 너의 비슷한 모양으로라도 오면 나는 펼쳤 다가 내려놓는 형편없는 독서
그때 나는 어떤 손짓으로 어떻게 웃어야 슬퍼야 가장 예쁠까 생각하고 그렇게 나,
나를 날개처럼 접어놓는 너 너 너의 것들 너머로 어깨가 쏟아질 듯 멈췄으면
다시처럼 떠올려 무수히 많은 다시 다시와 같이 나를 놓고 앚아 있었으면 나를 눕히고 누웠으면
그렇게 가만히 엿보고 만지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밋밋한 한 곳을 가리키듯 막막함이 그려져
손으로 따라 걸어 들어가면 그대로 너를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숨이 타오름이 재가 된 질식이 딱딱하게 그저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그녀
그건 너가 아니라 기실, 나는 네 눈 뒤에 서 있어서 도저히 보이질 않는 너라는 미로를
폭우 쏟아져 내리는 오후처럼 기다려 이를 깨물고 하얗게 질릴 때까지 꽉 물고 어떻게든 그러므로,
너로부터 기어이 너가 오고
너가 오면 / 유희경
세계를 보존하는 일은 간단해
흥분하지 않기
엎지르지 않기
니스를 칠하기 윤이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해
첫 작품은 훔친 의자였어
껍질이 벗겨진 세상이 반짝였지
니스는 은유가 벗겨진 세계의 은유
아빠의 등은 흐렸고 엄마의 목은 서툴렀지
밤마다 벽을 보고 앉아
우린 서로의 등에 니스를 칠했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반짝이고
신드바드의 융단이 반짝이고
새벽엔 반짝이는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지 어쩌면
베니스였거나 어쩌면
달이었는지도
니스 / 여성민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
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
영원한 이별을 베꼈다
오늘 아침 국 속의 붉은 혁명의 역사는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든 고요를 베낀 밤하늘
밤하늘을 베낀
베낀 / 허수경
길게 이어지는 약속을 좋아해요
색다르게 부푼 아침
소멸하는 뒤꿈치를 따라
가벼워진 굽의 무게로
자꾸만 흐려지는 당신의 무늬를
바닥 가까이 흩어 놓는 일
뜨거운 무늬로 얽혀 있는 하루
따뜻한 상처들로 채워진 발바닥 아래는
무지개 송어처럼 예쁜 이름을 숨기고
부드러워진 뒤꿈치를 따라
지워진 문항의 뒤를 밟는 일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음 계절로 사라지는 남자들
자꾸만 낮아지는 여자들을 따라
눈이 내리기 전에 뒤돌아 가요. 구두코에 올린 커다란 통증 같은 장식들은 떼어 버리고
플랫슈즈 / 조혜은
푸르스름한 혀를 내밀고 너무 많은 말을 했어 너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그러나 어떤 말을 해도 벌어지고야 마는 꽃잎들, 하나씩 사라지려고 하는 밤의 질문들,
바깥에서 피고 지는 것들이 나를 향해 돌진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피어나고 있다
빨간 의자가 척추를 세우고 악ㅡ악ㅡ대는 건 내가 붉지 않은 탓,
붉게 피어났다면 나는 좀더 붉었을까?
붉게 피어났다면, 피어났다면, 이런 생각들이 하나둘 이파리처럼 떨어지고 있다
피어났으므로 지고 있다
혼잣말의 계절 / 김지녀
켜켜 햇빛이 차올라 저 나무는 완성되었을 것이다
꽃이 피는 순간을 고요히 지켜보면 어린 나방은 마침내 날개를 펴, 공중
으로 날아올랐을 것이다
바스러질 듯 하얗게 삭은 세월이 우체국을 세워 올렸을 것이다
숲과 별빛과 물풀들의 기억으로 악어는 헤엄쳐 나가고 행성은 궤도를
그리며 우주를 비행했을 것이다
천만 잔의 독배를 마시고 나서 저 책은 완성되었다
자, 이제 저 책을 펴자
잎사귀를 펼치듯 저 책을 펼치고 어깨를 구부리듯 저 책을 구기자
나무의 비린내와 꽃과 어린 나비가, 악어와 우체통이 꾸역꾸역 게워져
나오는 저 책
저녁의 우주가, 어두운 허공인 내게 환한 손을 가만히 넣어 줄 때까지
구부린 책 / 송종규
천국에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천국에도 있는 것이 이 세계에도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가,
이 세계에도 있는 것이 천국에도 있으면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아, 달빛은 메아리 같아. 꼬리가 흐려지고…… 떨리는…… 빛과 메아리. 달빛은 비밀을 감싸기에 좋다고 생각하다가,
달빛은 비밀을 풀어헤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달빛은 스르르 무릎을 꿇기에 좋은 빛, 달빛은 사랑하기에 좋은 빛, 달빛은 죽기에도 좋은 빛,
오늘밤은 천사의 날개가 젖기에도 좋은 빛으로 온 세상이 넘쳐서, 이 세계 바깥은 없는 것 같구나. 우리 도시의 지하에는 커브를 그리며 돌아다니는 열차가 있고, 열차에는 긴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긴 의자에 앉으면 천국의 사람들처럼 죽은 듯이 흰자위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속에서도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의 눈송이 같은 귀에다 뜨듯한 입김을 불며 속삭여주었다.
인간을 사랑하느냐고 나는 물었고, 그리고 오랫동안 대답을 기다렸다.
천사에게 / 김행숙
당신은 사는 것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게는 그 바닥을 받쳐줄 사랑이 부족했다. 봄비가 내리는데,
당신과 닭백숙을 만들어 먹던 겨울이 생각난다.
나를 위해 닭의 내장 안에 쌀을 넣고 꿰매던 모습.
나의 빈자리 한 땀 한땀 깁는 당신의 서툰 바느질.
그 겨울 저녁 후후 불어 먹던 실 달린 닭백숙
봄비 / 박형준
당신 손목 있잖아
책을 펼쳐 내 쪽을 향해 보여줄 때
약간 비틀어진 모양,
난 그게 나무 같더라
물기 없는 갈색
나 거기서 태어난 거 같아
연노랑 잎맥으로
연노랑은 노랑의 이복 자매
가을이 떨어트린 약속
당신 지느러미 있잖아
내 미래 같더라
새벽에 자꾸 떨어지니 주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발꿈치를 들고 침대 주위를 배회하며
물고기 흉내를 내볼까
당신은 잠
미래는 강
전부를 맡기고 흘러가볼까
당신이 물고기로 잠든 밤 / 박연준
첫댓글 손목이 나무같단 표현에 와 순간 !!시는 진짜 너무멋진거같아요 어떻게 저런표현을ㅜ
비유들이 어쩜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너무 신기해요ㅠㅠㅠㅠ 그러면서도 다 이해가 되고...
허수경 시인 님은 진짜 글을 잘 쓰시는구나 우와 ><
봄비 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ㅠㅠ
첫댓글 손목이 나무같단 표현에 와 순간 !!시는 진짜 너무멋진거같아요 어떻게 저런표현을ㅜ
비유들이 어쩜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너무 신기해요ㅠㅠㅠㅠ 그러면서도 다 이해가 되고
...
허수경 시인 님은 진짜 글을 잘 쓰시는구나 우와 ><
봄비 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