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잘 아시다 시피 경주최씨 문중은 경상도 경주 일대에서 수백년에 걸쳐 적덕을 쌓아온 집안으로 문중에서 지켜오고 있는 가훈은 요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가훈으로 내려오는 여섯 가지의 가훈과 세상을 사는 처세에 대한 처세 육연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 초계정문의 명현이신 동계 정온 선생의 간략한 일대기와 경주최씨 문중에서 정씨문중으로 시집와 종가를 지키고 있는 최희 할머님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몇 해 전 나는 경주를 무던히도 열심히 찾았다. 신라의 문화유산을 찾아 경주 시내 곳곳을 누볐다. 경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 문화재를 찾아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맸던 것이다. 그때 찾아든 곳이 교동 최씨가다.
고풍스런 집채를 보고 마당 안으로 깊숙이 들어섰지만 인기척이 없어 마당을 둘레둘레 둘러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이 집이 바로 그 유명한 경주 최 부자 집이었다. 민속주 경주법주의 본산이었던 것이다.
경주 최 부자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해서 사랑채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바뀌어 살기가 좋아진 때문일까. 이제 최 부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과객이 없어진 것일까. 인기척을 해도 메아리 없는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 속담에 3대 거지 없고 3대 부자가 없다고 하지만 경주 최씨가는 12대 300년을 부자로 살아온 집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 가문이 수십 대를 이어서 부를 누리는 집안은 세계에서도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
최씨가가 이렇게 명문의 집을 이루게 된 까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가훈 육훈'과 '처세 육연'이 그 비밀일지도 모른다. 왕건이 훈요십조로 고려를 이끌어 왔다면 최씨가는 육훈과 육연으로 수백년 명문가를 이루어 온 것이리라.
여섯 가지 가훈이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
진사는 초시에 합격한 정도로 벼슬아치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양반, 명문가의 전통을 잇는 정도가 감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사로서 명문가의 전통을 잇고자 할 따름이었지 높은 벼슬로 화를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온갖 정변 속에서도 가문을 지켜온 것이라 믿어진다.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말 것.
요즘 부자들을 보면 이른바 재벌이라는 대기업들이 아이들 코 묻은 돈까지 다 끌어 모으지 않나, 골목 식당까지 다 접수하려 들지 않나, 돈 되는 일이면 크고 작고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최씨가는 만석 이상의 돈은 모으지 않았다. 만석이 넘는 재산은 모두 사회에 되돌려주었다. 가난한 이웃에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늘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며 살아간 것이다.
넷째,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 것.
지금의 장사꾼들은 흉년을 돈 벌 수 있는 기회로 삼아 매점 매석을 일삼지 않는가. 최씨가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빌미로 돈을 모으지 않았다. 파장에 물건을 값싸게 사지도 않았고 흉년에 굶주린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지도 않았다.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는 시집 온 지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을 것.
돈 많은 부자들은 온갖 액세서리로, 금은 보석으로 치장을 하건만 최씨가에서는 검소를 생활철학으로 삼게 했던 것이다.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이웃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고 편안히 저만 먹고 살 수 있을까. 같은 하늘밑 북녘에서 동포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데 3000원도 안되는 돈을 보내놓고도 북한에 퍼주기라고 욕을 해서야 되겠는가.
'처세 육연'은 이렇다.
- 자처초연 : 처신은 초연하게
- 대인애연 : 남을 대할 적에는 화기 애애하게
- 무사징연 : 일이 없을 때는 물이 맑듯이
- 유사감연 : 일이 있을 때는 과단성 있게
- 득의담연 : 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
- 실의태연 : 뜻을 잃었어도 태연하게
이와 같은 가풍이 살아 있는 최씨가가 300년 명문가를 지탱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명문가를 이루고 싶다면 최씨가의 6훈 6연을 익혀 배울 일이다.
요즘 명문의 후손이 아닌 사람이 없고, 양반 아닌 사람이 없다. 하지만 진짜로 명문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조선 초기에는 성을 가진 사람이 30%를 겨우 넘어섰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확한 족보의 내력을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양반 30%에 속하기보다는 성도 없었던 상민 70%에 들어갈 확률이 더 높은 것은 아닐까?
나는 초계 정씨 정배걸의 28세손이다. 우리 초계 정씨 가운데 출세한 인물이 누구인가? 내가 무식한 탓이긴 하지만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후배 교사 한 사람이 초계 정씨가 그렇게 명문이냐며 묻는 것을 보았다.
자기 친구가 초계 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너무도 가풍이 심하여 시집살이를 톡톡히 한다는 것이다. 집밖으로 나갈 적에는 반드시 시부모님께 큰 절로 인사해야 하고 또 돌아와서도 큰 절로 인사한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여름 거창에 갔다. 거창엔 초계 정씨의 자랑 동계고택이 있었다. 동계가 누구인가? 동계 정온은 선조, 광해, 인조 세 임금대에 걸쳐 활동한 큰 학자다
동계의 6대조인 정전은 고려 우왕 3년에 실시한 국자감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그의 후손인 승지공이 거창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승지공은 동계의 조부로, 동계고택은 50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동계가 46세 때다. 광해 임금이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친형 임해군과 외조부 김제남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하자 동계는 죽음을 각오하고 갑인봉사로 일컬어지는 상소를 올렸다.
광해 임금이 승지가 읽는 이 상소를 듣다가 '임금은 패륜을 저지르고 있으니 죽어서 선왕들을 어찌 만나시겠느냐'는 대목에서 밥상을 걷어차 시녀와 승지의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되었다. 승지는 즉석에서 파직되고 동계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서 10년 동안 위리안치 형을 받게 되었다.
후에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동계의 일을 전해듣고는 감동하여 동계고택을 방문, '충신당'이란 현판을 적고 갔다고 한다.
1636년 삼전도의 항복이 있자 동계는 임금을 욕보인 신하는 죽어야 한다며 할복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덕유산 자락의 모라리에 숨어살면서 죽을 때가지 백이숙제처럼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 까닭으로 동계가 살았던 곳은 채미헌으로 전해지고 동계의 제사에는 미나리와 고사리를 빠트리지 않는다고 한다.
동계의 현손 정희량은 영조 4년 무신란을 주도했다가 실패, 역적으로 몰려 강동마을 30여 명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20여 년 동안 뿔뿔이 흩어져 숨어살아야 했다.
반란자의 집안이 복구가 된 것은 동계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사대부층의 여론에 따라서 영조 때 제사가 허락되었고 그 뒤 야옹 정기필이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거창에서 나는 초계 정씨, 우리 가문이 양반임을, 충신의 후예임을, 명문의 자손임을 느낄 수 있었다.
동계고택 앞에 이르자 안노인 몇 분이 그늘나무 밑에 앉아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동계고택을 찾아서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그늘나무 밑에서 더위를 식히던 할머니 한 분이 잠시 후 우리를 따라 들어왔다.
그 분이 바로 동계의 14대 종부 최희 할머니였다. 초계 정씨 일가라며 정이 대단하다. 안방까지 들게 해서 다과를 내놓는 것이 아닌가. 벽 가운데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고 할머니가 손수 짓고 쓴 가사가 눈에 들어왔다.
옛날 명문가에서는 딸을 시집 보낼 적에 그 어머니가 시집살이 지침으로 가사를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내방가사다. 나는 그 내방가사의 전통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따로 챙겨주는 두루마리 가사를 받고 이들 가사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서 벽에 걸린 그 창호지를 소중히 뜯어서 빌려왔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다 가는 지금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할머니의 가사를 선보이게 되었다.
최희 할머니. 그는 누구인가. 바로 저 유명한 경주 최씨 최부자 집 딸이다. 할머니가 자란 방은 신라 때 설총의 어머니 요석공주가 살았던 바로 그 터라고 한다. 명문가의 딸답게, 명문가의 종부답게 곱게 늙은 얼굴에 풍기는 교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여든이 다 되어 가는 연세에도 젊은 시절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지 할머니는 망부가를 벽에 붙여놓고 저승에 간 낭군을 그리고 있었다.
망 부 가
- 최 희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어느봄날 창문을 반쯤열고 하염없이 앉았으니 옛일이 새로워라 안마당에 피는꽃은 지난밤비에 만발하다 아름다운 자태색조 뉘를 위해 반기려나 벌나비 춤을추니 이내심사 참담하여 사랑마당 철축꽃과 동산의 해당화는 방긋방긋 웃는 모양 화려한 목단화는 자태향기 그윽하다 구곡에 맺힌 회포 내심회를 자아내니 하물며 이는춘풍 어이하여 풀어낼꼬 우리인생 초목만도 못하니라 한심하다 고대광실 큰집에서 홀연히 혼자앉아 고진감래 흥진비래 오는일을 상상하니 심중의 무한정수 가는길은 구천이라 자식자손 가득하나 내마음을 어찌알리 가신양반 더듬어서 지난일을 회상하니 텅빈듯한 이내심사 미치는듯 취하는듯 빙청에서 통곡한다 철따라 의복이며 침구등절 손질하나 어느날에 반길까요 생시와 다름없이 조석으로 문안해도 아는기척이 없사오니 내회포를 자아내어 통곡도 하였으나 부질없는 일이로다 남이알까 조심이라 진애세상 하직하고 가신양반 상봉하여 심곡에 쌓인회포 속시원히 자아낼꼬 횡설수설 그렸으니 보는이는 웃지마소 (정축 삼월 순수일 동계 십사대 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