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발발(1939.9.1.)
1939년 8월 23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다. 서로를 불구대천으로 여기고 있던 두 독재자가 별안간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조약 체결국은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다.
2.조악 체결국의 한 쪽이 제 3국의 공격을 받으면 상대방 조약 체결국은 조약을 체결한 나라를 공격한 제3국을 일절 원조하지 않는다.
3.조약 체결국 쌍방은 상대를 적대하는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다.
4.조약 체결국 사이에 생긴 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또한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 분할 점령(서쪽의 ⅓은 독일, 동쪽의 ⅔는 소련이 점령)에 합의했다. 연합국 측 첩보 기관이 이 비밀 의정서 내용을 밝혀냈으나, 폴란드 정부와는 공유하지 않았다.
독일은 1차대전 후 폴란드로부터 상당히 많은 것을 잃었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을 누르기 위해 연합국은 독일 동부 일부를 잘라 폴란드에게 주었고 이로 인해 제2제국의 본향인 프로이센과 독일본토가 떨어지게 되었다.
소련 역시 1차대전 직후 발발한 폴란드와의 전쟁 결과 우크라이나 서쪽 일부와 지금의 벨로루시를 내주게 되었다.
독일과 소련 모두 서로 직접 부딪히기 전에 폴란드를 손봐줘야 한다는 공통인식 속에 2년도 채 못 버틸 기만적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다.
원래 히틀러는 1934년 집권하자마자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나 1939년무렵에는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적대의식을 숨기지 않았고 소련 역시 영토문제로 사사건건 폴란드와 충돌해왔다.
폴란드가 믿고 있던 건 영국과 프랑스가 발행한 공수표. 즉 상호원조조약이었다. 1938년 뮌헨협정 당시 한 발 물러섰던 체임벌린은 1년도 지나지 않아 히틀러가 동유럽을 향해 으르렁거리자 부랴부랴 동유럽국가들과의 상호방위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폴란드, 루마니아, 그리스 등에 ‘외국 세력으로부터 독립을 보장해준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폴란드는 독일이 침공해오면 일단 버티고 영국과 프랑스의 원조를 기다린다는 구상 하에 군 현대화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아무리 빨라도 1940년이 지나야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판 하에 1940년대 초에 산업화와 군현대화를 완료한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독일의 폴란드에 대한 기습 공격은 8월 26일 오전 4시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8월 25일 영국 이 ‘폴란드 독립은 영국-폴란드 양국의 동맹에 따라 정식으로 보장받는다’고 발표하자, 히틀러는 예정된 기습을 취소하고 공격 개시 일자를 9월 1일로 연기했다.
그 사이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의사를 떠보고자 양국을 상대로 교섭을 진행하였고, 히틀러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더라도 영,불이 독일을 배후에서 공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확증을 얻었다.
8월 29일 독일은 폴란드에 대해 폴란드 회랑 할양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폴란드는 이를 묵살했다.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폴란드와의 교섭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폴란드군은 전쟁 발발에 대비했다. 8월 30일 폴란드 해군 구축함 함대를 영국을 향해 출항한다. 좁은 발트해에서 압도적인 독일 해군에 전멸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같은 날 폴란드의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Edward Rydz-Śmigły) 원수는 “전시 동원”을 포고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 동원령을 철회하라고 폴란드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는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1939년 8월 31일 당시 독일령으로 있던 글라이비츠(폴란드명 글리비체) 시의 라디오 방송국에 알프레트 나우요크스 친위대 소령이 이끄는 특수 공작 부대가 침입해 독일 내의 폴란드계 주민에 대해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폴란드어로 방송했다. 이 자작극은 폴란드가 독일 영토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을 습격한 사건으로 보이게 할 목적이었다.
같은 날 라이히슈타크에서 “국경을 침범한 폴란드”를 맹비난한 히틀러는 선전포고에 해당하는 연설을 한다. 이 시점에서 폴란드군은 동원예정의 70%(예비역도 포함시킨 전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다수의 부대는 아직 대형을 정비하지 못한 채 각자 주어진 전선의 수비 위치를 향해 급히 이동하게 되었다.
대규모 군사 행동은 선전 포고가 있은 뒤 1939년 9월 1일 오전 4시 40분에 개시되어, 독일 공군이 폴란드의 비엘룬을 기습 공격하고, 폭격으로 도시의 75%를 파괴, 약 1,200명의 시민을 살해했다. 5분 뒤 오전 4시 45분 구식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단치히 근교 베스테르플라테의 요새에 포격을 가했다. 더불어 독일군은 폴란드 국경의 3방면에서 일제 진격을 개시했다.
흔히 폴란드 전역이 유명한 전격전의 효시라고 알려져 있으나 폴란드 전선의 주도권은 보크나 룬트슈테트 같은 노장급 장성들에 있었다. 이들은 프리드리히 이래 쓰인 프로이센 군 특유의 기동전을 구사했다.
폴란드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폴란드에 대한 구체적인 원조를 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거의 모든 전력(기갑 부대의 85%, 공군의 60%)이 폴란드 공격에 나섰지만, 프랑스는 독일을 공격하지 않았기에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은 조용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가짜 전쟁(영어:phony war, 프랑스어:Drôle de Guerre, 폴란드어:Dziwna wojna, 독일어:Sitzkrieg)라고 불렀다. 만일 이 시기에 영국군과 프랑스 군이 곧바로 독일 서쪽을 공격했다면, 전쟁은 조기에 독일의 패배로 끝났을 수도 있다.
폴란드군은 국경 부근의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체적인 상황에서는 독일군의 전략적, 전술적, 수적 우위를 이기지 못했다. 전쟁 발발 2주가 지난 시점에서 폴란드의 당초 계획했던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폴란드의 유일한 희망은 동남부로 후퇴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영불연합군의 개입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일시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9월 17일, 소련이 80만 명의 병력으로 일제히 폴란드 동부 국경 지대를 침공하고 만다.
애당초 스탈린은 폴란드 전역이 족히 2,3개월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예상보다 빨랐다. 폴란드를 양분한다는 비밀의정서가 자칫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음을 우려한 스탈린은 급히 원정군을 꾸릴 것을 명령한다.
소련은 “국가 붕괴가 임박한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계 주민과 벨라루스계 주민의 보호”를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소련군의 침공은 폴란드 정부가 저항을 포기한 결정적 요소였다. 17일 당시 95만의 폴란드 군 중 75만 명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폴란드는 아직 독일과 싸울 능력와 의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소련, 2개의 강적에 직면한 폴란드 정부는 폴란드 영토의 방어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폴란드 정부는 항복이나 일체의 교섭을 거부한 채 전군에 폴란드에서 탈출, 프랑스에서 군대를 재편성할 것을 명령한다. 사실상의 망명선언이었다.
전쟁 개시부터 독일군 제1목표였던 바르샤바는 민간인까지 참전해 처절한 저항을 계속했으나, 9월 28일 함락되었다. 바르샤바 북부의 모들린 요새는 모들린 전투라 불리는 16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9월 29일 항복했다. 고립된 폴란드군 일부는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격렬한 전투를 계속했다.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폴란드 군 63,000여 명이 전사하고 133,700여 명이 부상했다. 독일군은 전사 17,016명, 실종 5,029명, 부상 36,995명의 피해를 입었다. 또한 전체 차량의 1/2를 손실했으며, 항공기의 피해도 상당했다. 소련도 3,000여 명 전사, 10,000여 명 부상의 피해를 입었다. 한편 약 14만명의 폴란드 군이 루마니아, 리투아니아,라트비아 등을 통해 탈출에 성공했다.
전격전의 서막으로 알려진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이 입은 피해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며, 탄약이 고갈 직전에 이른 상태였다.(침공 종료 당시 탄약이 2주 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공군 역시 탄약재고는 비슷했다. 하지만 폴란드 침공에서 얻은 교훈을 댓가로 1940년 강대국 프랑스를 완파한다.
통상적으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2차대전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독일의 프라하 진주, 혹은 1937년의 노구교 사건을 그 개전 시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2차대전의 전사자는 약 5천만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만약 중일전쟁을 전쟁의 개시로 본다면 그 희생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인종청소와 대량학살로 점철된 2차대전의 비극은 서전인 폴란드 전역에서 그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소련군은 침공 초반부터 폴란드 포로들을 가차없이 학살했고 규모는 작지만 폴란드 역시 테러행위를 이유로 독일계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물론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은 이러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인에 대한 훨씬 큰 규모의 학살을 자행한다. 아우슈비츠와 다하우 같은 유대인 학살캠프가 들어선 곳도 폴란드였다.
1939년 오늘, 인류역사상 최대규모의 전쟁이자 비극인 2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ps. 폴란드 전역의 잘못된 상식 중 하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폴란드군이 독일 전차부대에 기병돌격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기병은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 대규모로 운용되고 있었고 독일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리에 진주하는 독일군 기병대
게다가 11개 여단 규모의 폴란드 기병대는 75mm 야전포, 경전차, 정찰용 전차, 37mm 대전차포, 40mm 대공포 등 근대무기를 장비했을 뿐만 아니라, 윙드 후사르의 후예답게 폴란드군 최졍예로 꼽히기도 했다.
전쟁 개시일인 9월 1일 ,구데리안이 이끄는 기갑군의 측면을 보호하던 독일군 제76 보병 연대에 대해 마스테라시 대령이 이끄는 폴란드 제18 경기병 부대가 “기병 돌격”을 감행해온다.
구데리안의 회상에 따르면, 말로만 듣던 기병 돌격에 대한 독일군의 공포가 극에 달해 원군이 개입할 때까지 제20 자동차화 사단은 더 이상 진격을 거부했고, 재편성으로 몇 시간을 허비하여 일시 퇴각까지 검토할 정도였다고 한다. 구데리안은 장갑차를 원군으로 보내 폴란드 기병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마스테라시 대령의 기병대는 능수능란하게 탈출했다. 전투에 참가한 800명의 폴란드 기병 중 29명이 전사했을 뿐이다.
다음날 현장을 취재한 독일의 동맹국 이탈리아 기자 한 사람이 영웅적인 폴란드 기병이 랜스와 사브르로 전차에 돌격했다는, 이탈리안 특유의 허풍섞인 기사를 작성했다. 이 만들어진 이야기는 독일의 선전부서에 힌트를 주며 “현대적인 전차에 군마로 돌격한 우매한 폴란드인의 전형”으로서 빈번하게 선전되었다. 이 이야기는 또 한 번 소련에 이용되어, 우둔한 폴란드군 지휘부가 전쟁 준비를 하지 않고, 전차에 대한 돌격이란 무모한 행위를 감행해 병사의 생명을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선전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