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14: 33. 하나님의 아들
마 14: 33. 하나님의 아들 -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배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른 고백이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단지 사람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셨다.
1]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절하며(*, 프로스퀴네오) - 헬라어의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경배하였다고 하는 말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 앎으로써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전적인 신앙 고백의 준비가 마련된 계기가 되었다.
* 마 16: 16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2]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상당하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한 칭호로 예수를 불렀던 첫 번째 경우이다.
* 마 16: 16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 26: 63 -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마 27: 40, 43, 54 –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 칭호는3: 17에서 계시된 바 있고, 광야 시험 중 사탄도 사용했다.
* 마 4: 3, 6 –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아들'이라 부른 경우도 있다.
* 마 11: 25-27 –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하늘과 흑암의 세력과 또한 땅의 무리들 및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시는 완전한 구주요 메시야이셨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다. 그러자 바람이 그쳤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바른 고백이었다.
제자들을 돕기 위해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셨다.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확신하자.
바다 위로 걸어오실 수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경의 진실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또 어려운 일이 많은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과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자.
제자들을 위해 물 위로 걸어서라도 오셨듯이, 주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오실 것이다.
* 사 41: 10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사 43: 1-2 –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굳게 믿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산 기도와 철야기도를 힘쓰신 것을 본받아, 연약한 육신을 가진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자.
3] 하나님의 아들 예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바다 위를 거니신 주님을 본 제자들에게는 경이로운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말았다.
신앙은 경이에서 출발하여 경배에 이른다. 본문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 하며 절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1)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그는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며 계시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라고 한 제자들의 고백은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 것이다. 현대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를 한 인간으로만 생각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에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초대 교회의 에비온파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모양으로 교회를 넘나들며 신앙을 파괴하려던 이단의 시험이 있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고 단순한 인간의 도덕적인 모본(模本) 자라면 우리는 그를 믿을 필요가 없다.
마태는 그리스도 예수를 왕으로 묘사하고, 마가는 종으로, 누가는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으나, 요한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그의 구주성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그의 자칭호로 늘 '인자'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이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오실 메시야라는 뜻에서 불리운 것이다.
(2) 그는 우리 주이시다.
구약에서 '주', '아돈'이라는 말은 '여호와'의 대명사였다.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함부로 읽기를 꺼리는 이스라엘인들은 '주 하나님'이라 불렀다. 그러나 신약 당시 '주'라는 개념은 노예들의 상전에서 그 배경을 가졌다고 본다.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는 것은 이런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는 물론 강력한 지배자이며, 또 두려운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믿음으로 인식하고 고백할 때 그것은 지극히 큰 은총의 지배가 된다.
(3) 그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와 같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아 그 직무를 맡았다.
그들은 모두 백성과 하나님과의 중보자로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 또는 메시야의 예표였다.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마리아에게서 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한 분으로서 완전하신 중보자였다. 그는 완전하신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 형상을 보여 주셨다.
* 요 1: 18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요 14: 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십자가 위에서 세상 죄를 지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단번에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
* 히 9: 28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는 오늘도 성도들의 마음에 좌정하셔서 영원히 지배하시는 왕의 왕이다.
(4) 성도의 왕 노릇 - 첫째 부활의 특권
* 계 20: 6 -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①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의 십자가 증거를 위해 비진리와 싸우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진리를 사수하다 목 베임을 받은 천천만 순교자가 첫째 부활에 참예했다가 천년 왕국이 이루어질 때 세세토록 왕권을 받게 된다.
* 계 6: 9-11 –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 사 26: 19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 살전 4: 16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히 11: 35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 고전 15: 50-52 –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 요 5: 29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②복이 있고 거룩하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복이 있으며 거룩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Beasley- Murray)
* 고전 15: 54 -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③ 둘째 사망이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
이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둘째 사망'은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육체의 사망을 가리키는 첫째 사망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불신자들이 맞게 되는 사망이다.
이것은 불못에 던지는 심판을 가리킨다(계 20: 14-15. 21: 8).
첫째 사망은 영적인 사망이라면 둘째 사망은 육적(肉的)인 사망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은 둘째 사망과 전혀 상관이 없어서 불 못에 던져지는 일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성전에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제하는 자들이었으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었다.
이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를 소유한 자들로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어 다시 사망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을 말한다(요 14: 20-23, 계 21: 3-7).
④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된다.
* 출 19: 6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 벧전 2: 9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계 5: 10 -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⑤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왕권을 소유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게 된다(4절).
(5) 우리의 신앙고백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시요'(마 16: 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다'(행 4: 12)하신 말씀은 불변의 진리다.
예수만이 영적으로 또한 육적으로 우리의 그리스도시요 구세주이시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사 육신을 입으사 '예수'가 되시고 그 예수가 역사적으로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성역이 인간 구원의 산 손길이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여기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비밀이 있고 생명이 있다. 이 비밀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영적으로 부요하게 하며, 우리의 활동을 언제나 생동력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4] 파도속에서(마 14: 22-33) - 홍정길목사
풍파 속에 주님이 누워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죽게 된 줄로 알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일어나신 주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 때,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에게 있다는 믿음이 이런 위기 때 정말 값어치 있느냐?" 물으셨던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거의 같은 환경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때는 낮이었는데 지금은 밤입니다. 그 때는 주님께서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는데 지금은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왕관을 만들어 그 머리에 씌우려고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무리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먼저 벳세다로 가라. 내가 나중에 가리라."고 명하시고 사람들을 모두 흩으신 다음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반대편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밤 사경 그러니까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거센 바람을 거스릴 능력이 없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합니다. 아마 어두웠기 때문에 목표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 친히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지금 바람과 파도와의 싸움으로 두려움에 꽉 차 있던 그들 앞에 이상한 물체가 바다 위로 저벅저벅 걸어오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유령이다."고 외치는 소리에 주께서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저들을 안심시킬 때 시몬 베드로는 주님께 요청합니다. "주님, 만일 당신이 주시거든 나를 명해서 당신처럼 바다 위를 걷게 해주소서." 주께서 "오라" 명령하시니까 그는 바다를 육지처럼 걸어서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걷다가 갑자기 그의 시선이 바람이 만들어내는 큰 파도, 울렁거리는 파도에게로 옮겨지자 주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져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외쳐댑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서 저를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파도 속에 있습니다. 저번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계시지 않는 상황, 외롭게 나 홀로 싸우는 싸움을 계속 해야되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내게 오늘 이 시간 주께서 하시고 싶은 첫 번째 말씀은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기도할 때 병도 낫습니다. 기도했더니 안 되는 일이 되어집니다. 그의 믿음 생활이 점점 다양해지자 욕심이 생깁니다. 내가 예수님 같은 기적을 꼭 하나 하고 싶다. 기적 중에서도 물위를 걷고 싶다. 그리고는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 믿습니다." 하고는 바다에 들어갔는데 풍덩 빠졌어요. 그래놓고 친구에게 하는 말이 "믿어도 안되더라."입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야, 너와 베드로의 형편은 다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라고 해서 갔는데 주님께서 너보고 바다로 오라고 그랬니?" 자기 확신, 자기 신념을 믿음이라고 강조하는 설교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가장 큰 적입니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 그 말은 내 의지대로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우리 주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시면 당신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다를 육지처럼 걸을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만 걸을 뿐 아니라 나도 걷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나로부터 시작하려고 듭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나에게로부터 우리 주님께로 신뢰의 대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정말로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있는가? 나의 구속주 되신 주님을 믿고 있는가? 어느 때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믿고 신뢰하는가를 다시 점검해보십시오.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주님을 온전히 알고 신뢰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이 물위를 걷는 것 당연합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이 물위를 걷게 해주실 전능하신 분이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의 명령 따라서 물위를 걷습니다. 그러다가 앞에 나타난 파도를 보고 빠져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 두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이 있다면 믿어도 똑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기질대로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중간이 없습니다. 전부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든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당신을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습니다. 이 때, 시몬 베드로는 확신에 차서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되도다. 이를 알게된 것은 네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안다. 네가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
그랬는데, 몇 절을 더 읽어가면 그 구세주와 주님으로 오신 주님께서 자기의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얼마 있다가 관원들에게 붙잡혀가서 모진 고난을 당한 다음에 십자가에서 죽으리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금새 "그리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바로 전까지 "주는!"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야 되는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에 "주님, 말 같은 소리하지 마시오.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리 저리 말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발을 씻기니까 숨 죽인 채 말도 못하고 황공무지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베드로는 자기 앞에서 예수님이 수건을 가지고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기려고 드니까 "주님, 다른 사람은 씻겨도 나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없다." 그랬더니 "주님, 그러려면 내 전신을 다 씻어주시옵소서." 안한다고 그랬다가 전체를 다 씻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때에 제자들이 다 떠난다는 예언을 듣고 그는 외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날지라도 나는 당신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곁에 있다가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 조그마한 칼을 뽑아 말고라는 사람의 귀까지 잘랐습니다. 용감무쌍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더 어려운 핍박이 오니까 그는 한 계집종의 신랄 앞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아니,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나중에는 저주하며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어도 똑같이 믿지 않습니다. 요한은 요한 같이 믿고 베드로는 베드로같이 믿고 바울은 바울처럼 믿습니다. 바울은 담즙질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그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 20:24) 담즙질은 목표를 한번 세우면 죽어도 합니다. 그러니까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합니다. 기질대로 믿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기질은 우리 믿음의 반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기질을 통해서 예수님 믿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기질에 의지하는 믿음이면 안됩니다. 내 기질을 성령님께서 주장하실 때, 가장 아름다운 기질로 쓰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때까지 베드로는 기질대로 믿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시험에 질 때를 자세히 살피면 이미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다 이루시고 해결해주신 사건 앞에서 다시 반복해서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지금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파도가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노한 풍랑이 배를 흔들고 있었고 파도는 배를 삼킬 듯이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그 정황 속에서 주께서 오라 하니까 갔습니다. 그 파도가 베드로를 삼키지 못한 채 예수님의 명령 따라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잘 가다가 이미 주께서 해결해 놓은 그 파도를 보고 빠졌단 말이예요. 우리가 이렇게 실패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해서 고통을 받았지만 주께서 그 실패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잘 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실패와 비슷한 경우가 닥치니까 믿음을 포기하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또 과거에 지었던 죄, 우리 주님께서 내 모든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졌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내 죄를 도말하신 주의 완전한 용서를 믿습니다. 내 죄가 주홍처럼 붉을지라도, 먹장처럼 검을지라도, 흰눈처럼 양털처럼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해결해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잘 살다가도 어느 날 비슷한 죄의 유혹이 닥치면 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너집니까? 이미 주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혹 앞에 무너져버린다면 무서운 파도를 보고 믿음을 잃고 물 속에 빠져버렸던 베드로와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에 아무리 파도가 크게 불어닥쳐도 머리털 하나 젖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믿음이 흔들려서 파도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베드로 같은 내 모습을 삶 속에서 얼마든지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우리 주님을 찬양해야겠습니다. 믿음이 너무 연약하고 부족해서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돌보지 않을 것 같지만 "나를 구원해주소서."라고 손을 뻗치는 베드로의 외침에 주님은 사랑의 손으로 그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말 한마디로 "그대로 떠올라라." 라고 하면 떠올랐을 텐데 사랑의 주님은 직접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풍랑 속을 걸어오신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첫째로 우리 주님은 풍랑으로 고통받는 제자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저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분입니다. 먼저 보낸 제자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망할 때, 아무도 나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의 가사 처럼 "누군가 날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롭고 지쳐서 넘어져있을 때 누군가 날 위하여 기도하네" 우리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이 험한 인생의 풍파를 헤치면서 살아가는 나를 향해서 기도하는 주님이십니다.
두 번째로 그 분은 보시는 분입니다. 같은 내용을 마가복음 6장에서 기록한 것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막 6:48)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 해협을 지나가 호숫가에서 배 저어가는 제자들을 보셨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추측키로는 그 캄캄한 밤에 보이기는 뭐가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께서 세상에 보지 못하는 것이 없으신 눈으로 제자들이 고통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내 한숨도 들으십니다. 내 억울함도 보십니다. 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을 우리 주님은 보십니다. 주님 앞에는 빛과 어둠이 일반입니다. 세상에 주님 앞에 감추인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주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외치자 이사야 4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우리 주님은 나를 보시는 주님입니다. 노 저어 가는 내 인생 항해 길에서 고통받아 기진해 쓰러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그 때도 나를 찾아오신 주님입니다.
그 찾아오심은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양 한 마리가 높은 산에 홀로 도망갔을 때, 목자이신 주님은 끝까지 찾아가서 그 양을 목에 안았습니다. 그 때까지 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구덩이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불을 뚫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 도저히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서운 풍파를 헤치고 걸어가십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그 길에 물은 중력의 법칙을 버리고 아스팔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어디나 찾아가십니다. 누구와도 함께 가십니다. 내가 믿음이 약해서 쓰러져 바다에 휩쓸리려고 들 때도 사랑의 손길로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감사한 것은 "너 믿음이 없다. 왜 네가 믿음이 없느냐?" 그렇게 꾸중하지 않고 "네가 믿음을 갖기는 가졌었어. 그래서 물위를 걸을 때도 있었어. 그렇지만 네가 믿음이 적구나. 만약 네가 큰 믿음을 가졌다면 마치 저 홍해를 끝까지 걸었던 너희 조상 믿음의 선조들처럼 역사상 처음으로 호수 위를 걸어 육지까지 가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네가 나를 믿었다면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믿었다면 너는 끝까지 승리했을 텐데... 그러나 네가 믿음은 가졌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너는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너를 지금도 사랑한다. 내 구원의 손을 붙잡아라. 내 사랑의 손을 붙잡아라"라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 주님입니다. 내 모든 고통의 현장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분들 계십니까? 그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겉도 아시고 속도 아시고 밖의 표현도 아시고 속의 생각도 아시는 그 분, 모두 보시는 주님은 내가 힘이 없어 기진할 때도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나를 찾아오심을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그 분은 내가 쓰러졌을 때의 적은 믿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해주실 주님입니다. 믿습니까? 이 주님을 오늘도 찬양합시다.
그 주님을 평생 섬겼던 토플레디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4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교도였는데, 얼마나 병을 많이 앓았던지 사람들은 그를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했습니다. 평생을 아픔과 고통 속에 살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찬양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아는 찬송가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를 작사했습니다. 또 우리에게 늘 격려를 주고 위로를 주는 귀한 찬송을 남겨주었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태평성세가 되어서 고요한 바다로 항해하는 그 때를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은 바뀝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무서운 노도광풍이 부는 풍랑의 밤에도 그는 믿고 있습니다. 이 바람이 나를 침몰시킬 수 없다는 것, 단지 이 흉맹한 바람은 기껏해야 내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며칠 가야될 것을 단숨에 가게 만드는 지름길로 인도하는 운반기구에 불과하다고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항해 인생길 갈 때 주님께 간구해야 될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주여, 내게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이 항해 길 인생 가는 동안 주여,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 찬송가 503장을 의미를 생각하며 같이 찬양하겠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합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아멘"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설교 감사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