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천 가는 길
조영심
푸른 안개 더듬어 갑니다 한 겹의 안개를 열고 또 한 겹
다시 겹겹의 안개를 헤치며 앞인지 옆인지 옆의 옆인지 앞의 앞인지 여긴지 거긴지 발치를 분간할 수 없는 길로 생의 물결이 맴도는 사이
그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그것 같은 애매함을 품고
짓무른 안개의 허리를 틀어 길을 내어 봅니다 안개는 저를 지웠다가 다시 저를 여미며 시작과 끝을 지우고 맙니다 나는 안갯속 물 알갱이의 기억만으로 내 처음 숨결을 떠올릴 뿐 한 발짝 디딘 발길에 다시 한 발을 얹어 한 걸음씩 나아갈 뿐
더딘 숨, 젖을 대로 젖은 남루함
안개가 안개를 삼키고 내가 안개를 삼키고 다시 안개가 나를 삼켜 이미 들어선 길 놓친다 할지라도 햇살과 달그림자와 별빛으로 각인된 내 모천의 숨길 만은 지워지지 않는 생과 생의 일방 통로
눈 뜬 채 눈 먼 내 모천은 아득하여
끝을 알 수 없는 강을 따라 거슬러 거슬러만 갑니다 그곳에 이르는 길이 하, 소삽한 꿈길일지라도 기어이 내가 당도할 거기
동냥 중
조영심
동냥질도 유행하는 패션이 있다 찢긴 벙거지, 때에 전 낡은 옷으론 어림없는 일
미다스의 손을 탄 것일까 머리에서 발 끝 숨소리까지도 금박이 된 한 사내가 지팡이 하나 짚고 허공에 용케 앉아 있다 토굴 속 수도자의 자세로
땅바닥에 엎어놓은 모자가 이 패션의 완성인가 땡그랑, 굴러 떨어지는 둥근 적선에 금가루 시선으로 답례하는 거렁뱅이 신사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든 말든 코앞까지 들어와 눈을 맞추든 말든 손 벌리지 않고 살아가려는 나만의 혹독한 수련의 방식으로 너의 주머니를 열게 할 치열한 생업 정신으로
있지만 없는 듯 없지만 있는 듯 판을 깔고 지금 당신은 동냥 중
우리는 동냥 중
새를 쫓는 사람들
조영심
손바닥에 모이를 올려놓고 무작정 기다려본다 너를 불러들이려고 미끼를 단 셈이다
무거운 렌즈를 어깨에 둘러 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한 쪽은 낚싯밥을 내걸고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다른 한 쪽은 떡밥을 들고 제 발로 찾으러 나선 것이다
저 높은 곳에서 내 손의 먹이를 본 것인지 저를 기다리는 나를 본 것인지
붉은 목도리를 두른 초록빛 깃털의 네가 내려앉는다
미끼를 미끼로 여기지 않는 너 때문에 잠시 나는 키 작은 나무가 되기로 했다 너를 향한 마음을 그토록 몰라주었던 그때의 나처럼 눈 맞추고도 딴청을 부리는 것인데
새를 찾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간 이들은 이미 숲이 되었고 새를 불러놓고 꼼짝도 못하는 나는 나뭇가지가 되어
타드랑, 발을 묶어
조영심
타드랑, 두 발이 묶였다 이렇듯 때론 리듬도 쇠사슬이다 어디, 먼 곳에 있을 거라 여기던 한 남자의 그림자도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나를 울리고 있다
연주에 귀가 홀려 무턱대고 자리를 잡았던 것인데, 오래 들여다볼 요량으로 살짝 지갑을 꺼냈던 참인데
모자에 떨어지는 동전과 동전의 틈새로, 넘너리 바닷가에 걸쳐두고 온 하늘 한 자락이 찢겨져 여독처럼 쌓이는데
검은 이마의 연주자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술을 실룩이더니 이내 턱을 끄덕인다 저이의 커다란 눈망울과 배불뚝이 사내의 완고한 완장 사이에서 각자의 삶이 색깔을 바꿔가며 몸부림친다
무엇이 저들을 묶고 있는가 한 평 남짓한 악기 좌판, 저 판을 접고 펴는 일밖에 다른 재주가 없었을 낡은 옷소매가 한 접시 오므라이스를 덮을 밥상보 같아
타드랑 거리면서도 콩작거리지 않는 리듬이 내 발걸음마다 타드랑, 저녁 어스름 기어들고 오늘도 갈 길은 멀고도 멀어 타드랑 타드랑,
알고 보면,
누구나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