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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9: 24-29
노아가 술이 깨어
술에 의지하는 한 노아의 선지자적인 기능은 철회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그의 교회 안에 추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취기가 제거되자 그의 예언자적 기능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자녀에 대하여 상한 마음으로 권징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대상은 함, 곧 가나안의아비였습니다. 그에게는 저주와 종의 종이 되는 하나님의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셈에게는 그에게 신중한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야벳은 그 의 형 셈에게 연계시켜서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가나안이 종의 종이 되게 하신다는 판결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 야벳이 종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으로 확증되고 있습니다.
1. 본문 24절은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입니다.
비록 노아가 진노의 원인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다지 겸손함과 엄숙함이 없이 처신했던 것으로 어떤 자들에게는 보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슬퍼해야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회개에 대한 상태에 대한 증거를 제시했어야 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치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그의 아들에 대하여 아주 지나친 가혹으로 큰 소리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노아가 분노와 화로 상기되어 퍼부었던 책망들은 전혀 묘사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예언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노아를 소개하고 있는 데에 그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거룩한 사람이 그의 잘못을 의식하고 정말로 겸손해졌다는 사실은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응분의 벌에 대하여 정직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은 사죄함을 받고 정죄가 완전히 제거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자로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공손한 기질도 부여받고 가장 훌륭한 부모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 거룩한 사람은 마음의 비통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이 선고를 자기 아들에게 내리게 되는 사실은 절대로 의심이 될 수 없습니다. 노아께서는 몇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아들 함이 기적으로 보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아주 소중한 꽃 가운데 참여하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의 입으로 그를 하나님의 교회와 분리시키라는 강요를 받고 있을 때 그는 틀림없이 아들의 저주를 정말 뼈아프게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본보기로 하나님은 어느 때에라도 우리가 우리와 가장 밀접하게 연합된 자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신앙의 끈질긴 강인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우리의 정신들이 절대로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그 가혹성을 발휘해야 할 때는 가차없이 발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연민의 정까지 냉정하게 무시하고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하는 것 외에는 그다지 모진 선고를 내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형벌의 엄격성으로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부모들에 대한 불경건한 경멸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가를 마땅히 추론해 보게 합니다.
그런 부모에 대한 경멸은 자연의 신성한 질서를 그릇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범위와 권위를 해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리에서 관할하라고 명령하신 자들의 인격 가운데 그처럼 자연의 질서가 파괴되고 그분의 권위를 위해하는 것을 바로 이 부모에 대한 경멸로 보고 계십니다.
2. 본문 25절은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입니다.
1) 먼저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노아가 자기 아들들에게 저주를 선고하는 대신에 아들이 받았어야 할 가혹한 형벌을 무죄한 손자들에게 내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친의 범죄에 대하여 자녀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입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모순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대답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비록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계시지만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신다고 해서 절대로 무죄한 자들에게 화를 내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자신들도 역시 잘못을 범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아버지들의 죄에 대한 보복을 타락한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가하는 것에 전혀 애매한 점이나 억울한 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박탈시킨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그분의 진노를 내리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자기의 손자들을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범죄의 주동자인 자기 아들 함에 대하여는 침묵 가운데서 슬쩍 넘어가 버린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을 상상하기를 이렇게 한 이유는 특별한 호의를 따라 가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함에게 그토록 엄청난 존귀를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저주가 그에게서 그의 아들에게로 옮겨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공상은 무가치합니다. 그 형벌이 그것의 가혹성을 더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려고 그의 후손에게까지 옮겨진 것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호와께서 공개적으로 선포하기를 한 사람만을 형벌에 처하는 것은 그분을 만족시키지 않고 그 형벌을 범죄한 자의 자손에게도 부과해서 계속되는 세대에 걸쳐 연장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함 자신은 그 형벌을 면제받는 것은 사실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그와 함께 형벌에 포함시킴으로써 오히려 그분 자신의 정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십니다.
2) 그리고 또한 다른 문제가 제기되어질 수 있습니다.
함의 아들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한 사람만을 그렇게 형벌을 내리시려고 택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의 호기심을 여기서 지나치게 방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헛되지 않고 ‘대단히 깊은’것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판단에 복종하거나 또는 차라리 우리의 어리석은 무모함에 복종되는 것은 그분에게는 정말로 낮추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언젠가는 그분의 재판석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심판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들 안에서 그분의 은혜와 은총의 견본을 내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른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그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무서운가를 입증할 수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록 인간의 마음이 눈뜬 소경처럼 보지 못하지만 우리 각자는 자신들의 유약성을 깨닫고 미친 자처럼 무모한 짓을 행함으로 끝없이 깊은 심연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의 모든 자식들을 저주를 피할 수가 없는 자들로서 붙들고 계시는가 하면 특별히 가나안을 불러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저주를 그에게 내릴 자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우리는 그 일이 그 사건 자체로서 입증되었기 때문에 이 심판이 하나님에게 선고되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됩니다. 가나안의 상태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는 노아도 인간의 수단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모호하고 감추어진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은 그의 혀를 지휘하셨습니다.
3) 성경이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를 삼 사대까지 복수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이런 제한를 가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언급되고 있는 복수는 그 자체가 자연히 십대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은 하나님에 관한 율법을 묘사하려고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한을 멀찍이 제쳐놓으시고 네 대가 지난 후에도 죄를 마음대로 벌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관찰해 볼 수 가 있는 것은 형벌과 은혜와의 사이에 설정된 비교입니다. 그 사실로 우리는 하나님이 비록 범죄를 꼭 보복하시는 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불쌍히 여기시는 쪽으로 기울어져 계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하시고자 하면 언제든지 시간에 제약 없이 죄를 복수하실 수 있는 그분의 자유에 대하여 전혀 의문을 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4)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에서 유대교 사상은 가나안이 모든 종들 가운데서도 맨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섬기는 종의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 종들의 상태보다 더 천한 생활을 할 것이다’ 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청천벽력 같은 이 엄격하고 무서운 예언도 어딘가 약하고 가공적인 것같이 보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힘에 뛰어나고 부(富)에도 남 못지 않게 월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굉장한 통치력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살이라는 말은 어디에다 두고 하는 말입니까?
첫째로 비록 인간을 위협하고 계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내리신 것을 즉시 집행하시지는 않으셨으나 하나님이 한번 내리신 선언은 절대로 영원히 약화되지 않고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을 언제나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도록 집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육신적인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게 집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종살이의 멍에를 팽개쳐 버린 가나안은 그들 자신들의 힘으로 제국을 휘어잡으려고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얼마동안은 승리한 것 같았지만 그들의 상태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직도 해방된 운명에 있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마치 신실한 자들이 사악하게 압박을 받을 때 그리고 포악하게 악인들로 말미암아 경건한 자들이 괴롬을 당할 때도 아직 소멸되지 않고 건재해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그분의 종에게 통치하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이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이 멸망하게 하신 사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증거로써 우리로 하여금 만족함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교황은 아주 진지하게 주장하기를 그는 때때로 마치 가야바가(요11:51)했던 것과 같이 예언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서 그 자신을 장식하고 있는 그 칭호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가나안에게 내려주신 똑같은 의미로 ‘그는 종들 가운데 종이 될 것이며’ 라고 명명해 준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3. 본문 26절은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입니다.
노아는 그의 다른 아들들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축복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것은 노아가 셈을 가장 존경받는 자리에 앉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아들를 축복하면서 노아가 왜 사람의 인격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희귀하고 아주 기상천하의 탁월한 것에 대하여 말할 때는 먼저 그들의 사고를 하나님께로 올려 가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장 풍성한 은혜가 자기 아들 셈에게 고정되어졌다는 사실을 이 거룩한 사람이 깨닫게 되자 먼저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육신적인 이성으로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밀하신 호의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먼 후대의 기간에까지 연장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 말씀으로 셈의 복이 신적인 것이요 하늘나라의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4. 본문 27절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입니다.
주석가들이 “창대” 라는 말을 ‘확대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만약 이 해석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말의 의미는 당분간 흩어지고 셈의 장막에서 멀리 떠나가게 될 야벳의 후예들은 마침내 그 수가 증가되어 거의 그들보다 더 많은 자손이 될 것이며 공통된 집에서 그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다른 역본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 번역은 ‘하나님이 야벳을 평탄하게 다시 데려오시리라’ 또는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리라’ 는 말입니다. 어느 역본의 해석을 따르든지 간에 노아의 예언은 비록 그가 그의 가족으로 두 사람을 잡아 두어 함께 지내게 하지만 셈과 야벳 사이에는 잠정적인 알력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그 두 사람을 자기의 합법적인 상속자들로 일컫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그 같은 분쟁이 당분간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노아는 그 후에 때가 되어 그들이 다시 한 무리로 아물어 붙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한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일들에 관하여 제시되고 있는 예언이라는 것이 가장 절대적인 확실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큰 일로서 그 일을 주장하시고 창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2천 수 백년이 지나서야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동일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셈의 아들들은 그 중에 상당히 많은 수가 반기를 들고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들로부터 지속되던 관계를 단절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셈의 모든 아들들이 다시 모여들어 한 장막 밑에서 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랜 세월동안 방랑자들이었으며 도망자들이었던 야벳의 후손들인 이방인들은 역시 한 장막 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양자로 하나님이 분리된 자들을 가지고 한 백성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서로 이간되었던 파당들 간에서 형제적인 연합을 결속시켜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말씀으로 되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아직까지 날마다 그 성취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흩어진 양들을 한 우리 안으로 불러들이시며 장차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게 될 사람들을 사방에서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소명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서 작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족장의 입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있다는 것은 진실로 우리의 신앙을 특별히 지원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유산으로 받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된 것이 우연히 또한 저절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라는 표현 형식이 반드시 존재하고 신실한 자들 가운데서 고이고이 간직될 상호간의 사회를 묘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셈의 후손에게서 한 교회를 자신에게 택하여 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에 그분은 다시 그들과 함께 이방인들도 이와 같은 조건으로 택하여 생명의 언약의 행렬에 참가하고 있는 그 백성들에게 그들 자신들이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5. 본문 28-29절은
“(28)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29)향년이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 입니다.
1) 비록 모세가 거룩한 사람의 나이를 대략적으로 언급하고 그의 연대와 그가 지내온 동안 잊지 못할 사건들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확실하며 그 일에 대하여서 성경이 그 밖에서도 기념하고 있는 일이며 또한 그 사실은 우리들의 뇌리에서도 다시 회상되어야 할 것입니다.
150년 내에 그의 세 아들의 자손들은 아주 수없이 많아져서 하나님의 복이 크고 효과 있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충분하고 풍부한 증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는 복이 효력을 발한 사실에 대하여 넘치는 증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손자들이 한 도시를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그리고 자기의 씨가 단지 300 가족들로 확장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에게서 많은 민족이 될 것이며 그들이 장차 광활한 지역을 점유하게 될 것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된것을 보고 있습니다
2) 이 놀라운 증가는 실제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을 향하신 신적인 호의에 대한 본보기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틀림없이 헤아릴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그를 채워 주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거의 50세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의 선조인 노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많은 일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 하나님께서 펼쳐 놓으신 그 일들이 그의 거룩한 가슴을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메어지게 했을 것입니다. 노아는 셈의 가족에게서 하나님의 성소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소로 야벳의 아들들이 들어가도록 허락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성소가 파괴되고 황폐되며 갈기갈기 찢기게 될 것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아버지가 그의 본래의 위치를 버리고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장막을 건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무리가 남아서 순수한 신앙을 고수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쓰라린 아픔을 주는 고통을 수반하고 있는 이 무서운 혼란이 그에게 굉장히 마음의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말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가 없는 지독한 혼란이었습니다.
이 사실에서 그의 믿음의 눈이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 통찰력으로 그와 같이 악인들이 완전히 판을 치는 죄악 투성이가 된 시대에서 교회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서나마 분명하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