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47]동생의 호(號)를 지어주다
아버지쪽 친척으로 작은집이 딱 하나 있다. 할머니가 숙부를 낳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8대 독자. 손이 귀해 자손들이 200년(7대)을 번창하지(뻗어나가지) 못하다 ‘복(福)할머니’ 덕분에 아버지가 4남3녀, 숙부가 2남2녀를 낳았다. 100세 아버지 아래로 증손까지 총생이 50여명이 되었으니, 두 집안이 각별한 까닭이다. 1년에 한두 번 만날까말까하는 나보다 11살 아래(68년생) 사촌동생이 공기업(한국가스공사) 어느 지역의 지사장이라는데, 서예를 익힌다며 가끔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온다. 기특한 일인데, 나보고도 늦지 않았다며 붓 잡기를 권한다.
동생과는 재밌는 추억이 있다. 전주 작은집에서 3년여 같이 살았는데, 동생이 태어난 게 내가 초딩5년 때인 것같다. 애기를 좋아하고 예뻐하는 나는 학교만 갔다오면 동생 손가락을 빨아대 급기야 그 어린 손톱이 빠졌다고 한다. 만나면 손해배상을 하라고 한다. 마침 친구가 인사동에서 고희기념 서예전을 개최, 제수와 함께 와 공부 삼아 보고 밥을 먹자고 했다. 이렇게 밥 한끼 같이 할 때, 그리고 내가 사줄 때가 가장 흐뭇한 순간이다.
동생이 내가 친구들의 호를 많이 지어준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한문을 배우면서 친구와 친구 부인 80여명에게 20여년 동안 호를 지어줬다. 호설(號說. 호를 지은 이유를 500여자의 글로 쓴 것)을 모아 소책자로 만들기도 했다. 그날 불쑥 “자호(自號) 愚松(우송)을 쓰는데 너무 평범한 듯해요. 형님이 이번에 제 호를 지어주면 낙관(落款)을 새길 게요” “그래, 좋은 일이야. 생각해 볼게” 답변한 지가 1주일이 흘렀다. 오늘 새벽 동생의 호를 ‘艸菴(초암. 풀 초, 나무 무성할 암)’으로 지었다. 평소 마른 편에 키가 뻘쭘하게 커 ‘풀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고, 산림청 근무를 하신 숙부가 나무 등 식물을 사랑하고 잘 키우셨다. 정년이 3년도 남지 않았다는데, 자연을 사랑하고 서예를 익히면서, 제2의 삶을 천성처럼 깨끗하고 고고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형으로서의 바람이 실렸다고 여기면 좋겠다. 서예가로선 늘 따라다니는 호로선 무난한 것같았다. 초암 최영식(崔瑛植). 동생이 이 호를 애용해주면 작호가로선 기분이 좋을 듯하다. 친구처럼 일흔이 되어 인사동에서 서예전을 열면 한 점은 꼭 사주겠다.
예로부터, 호를 짓는데 나름 4가지 원칙이 있는데, 이를 ‘4소(四所)’라 했다. 첫째는 소처(所處)로 태어나거나 살았던 곳, 자연공간의 이름 등이다. 밤골에서 태어난 이이는 율곡(栗谷), 못 옆의 서재에서 철학을 궁구한 서경덕은 화담(花潭). 둘째는 소지(所志)로 삶의 태도나 가치관, 좌우명 등이다. 공직을 물러나 시냇가에서 학문에 정진하고자 한 이황은 퇴계(退溪), 채소반에 숨어 살고자 한 정몽주는 포은(圃隱). 셋째는 자연이나 가치있는 물건, 동식물에서 따오기도 한다. 매화와 달을 특히 사랑한 김시습은 매월당(梅月堂). 넷째는 소우(所遇)로, 시대적 상황이나 삶의 특별한 계기 등에서 짓는다.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범부가 소원인 김구는 백범(百凡). 자기가 지을 수도 있으나 대부분 스승이 지어주고, 선배나 형 등이 지어줄 수도 있다. 언젠가 사돈이 호를 지어달라고 해 지어준 적도 있다. 나의 호는 2004년 종친어른이 첫글자 '우(愚)를 지어놓고 1년동안 두 번째 글자를 무엇으로 할까 생각중이라 해, 내가 동네이름 '샘 천(泉)'자를 붙여달라고 했다. 친구들이 워낙 내 호를 애용하다보니 본명을 까먹을 때가 많다해 웃기도 한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편지 40신]사돈의 호號를 익재益齋로 지었습니다 - Daum 카페
아무튼, 동생이 내가 지은 호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고, 애용하기를 바란다. 이때 ‘풀 초’는 草가 아니고 싹이 돋아나는 모양의 '艸'자로 쓰면 좋겠다. 마음에 들면 우리나라 으뜸가는 전각예술가 친구에게 낙관을 새겨달라고 하겠다. 하는 김에 두인(頭印)도 새겨라. 두인에 들어갈 문구는, 동생이 기독교 장로이니만큼 ‘愛信望’(사랑 믿음 소망)이 어떻겠느냐? 계산은 가난한 형이 못하겠다. 하하. 형도 나이 70에 처음으로 붓을 잡아볼 용기는 없다만, “조상님이 형님을 주목하고 있다”는 너의 말을 잊지 않고, 올 가을 신중해 결정하겠다. 우리 초계최가의 중시조 신재 최산두(1482-1536) 할아버지를 염두에 둔 말임을 내가 왜 모르랴.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신재 할아버지는 화순 동복에서 18년 동안 유배살이를 한 ‘호남 유학의 종장(宗匠)이고, 조선명필첩에도 필적이 실렸다는 것을 네가 알고 있어 고맙더라. 조상도, 역사도, 총체적인 과거도 잊지 않아야 "사람"이다. 서예계에 입문한 너의 용맹정진을 빈다.
덧붙임: 어제 쓴 <100년 전 한-중 지식인의 우정> 졸문에 쓴 창강 김택영 선생이 1913년 중국에서 전라도 구례땅의 왕씨 4부자의 시집을 펴내며 쓴 제자(題字) <開城家稿>이다. 본관이 화개(花開) 김씨임을 밝혀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