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53
3월5일[재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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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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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dwio74U5HI
[끈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 강주현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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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반드시 우리 모두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경, 남유다는 휘황찬란한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높고 든든한 성벽도 쌓아 올리며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것 같습니다. 잘 나갈 때 더 겸손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데, 매사가 안정적이다 보면 즉시 나태해지고 안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런 순간에 등장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요엘이었습니다. 그는 경신례에도 밝고 언어 구사가 탁월한 문학가였습니다. 그는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차게 선포했습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요엘 예언자가 불쑥 등장해서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를 남발하니, 군중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가야할 길을 걸어가며, 외쳐야 할 말을 가감 없이 외쳤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달프고 황량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서 달콤한 하느님 위로의 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격려나 칭찬, 해방의 기쁜 소식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섬뜩하기 그지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강력한 경고, 공포로 가득한 멸망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울부짖으라고 외쳤습니다.
“사제들아, 자루옷을 두르고 슬피 울어라. 제단의 봉사자들아, 울부짖어라. 내 하느님의 봉사자들아, 와서 자루옷을 두르고 밤을 새워라. 너희 하느님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요엘 1,13)
그러나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코너로 몰아넣지만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있는 회개와 참된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질 것임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2-13)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닥친 대재앙, 그로 인한 시련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죄와 부족함이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옷만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고 강조합니다. 형식적이고 외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내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또한 그는 특정한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의 회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범국민적, 범국가적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또 다시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손톱만한 도토리들입니다.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내가 더 높네. 내가 더 크네. 내가 더 대단하네.’ 외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잠시 떠다니다가 하느님 자비의 품을 향해 사라질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광대무변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잊지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내가 원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하며 어깨에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영원한 결핍성과 티끌보다 작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이요, 진한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재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타고 남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무가치한 것, 허무한 것,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를 머리에 얹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본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먼지요, 티끌, 무(無)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토록 보잘것없는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여기 서 있지만, 주님의 흘러넘치는 자비가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과거에도 저는 흙이었지만, 지금도 흙과 다름없는 존재요, 언젠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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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5UM4R-Um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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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를 태우면, 심장은 사랑을 위해 뛰기 시작한다 >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선과 단식과 기도에 대한 필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는 신앙인이 싸워야 할 세 욕망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이 세 욕망을 한 마디로 육체적 욕망이라고도 합니다. 이 유혹을 이길 때 청빈과 정결과 순명이라는 덕이 맺히게 됩니다.
이 욕망에게 힘을 주는 것이 심장입니다. 그런데 심장이 육체를 위해 뛸 때는 영혼을 위해 뛸 에너지를 잃습니다. 심장이 육체를 위해 뛸 필요가 없어질 때만 사랑을 위해 뛰기 시작합니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공동체 평화의 오아시스, 임 파우스티나 수녀가 쓴 ‘복녀 끼아라 루체 바다노’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좀 길지만 원문 그대로 써 봅니다. 어떻게 육체를 향한 심장이 약해질수록 사랑을 향해 심장이 뛰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복녀 끼아라 루체 바다노는 2010년에 시복되었습니다. 끼아라 루체는 1971년 이탈리아 사셀로에서 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는 신심 깊은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록 바다노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없는 결혼 생활은 상상할 수 없었던 아빠 루제로는 성모님께 봉헌된 성지에 가서 11년 동안 하느님께 생명의 선물을 주시길 기도하여 오랜 기다린 후에 드디어 끼아라를 품에안게 되었습니다. 투명하고 큰 눈을 지닌 끼아라는 “맑고 밝다”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삶도 그러했습니다. 생기있고 활발한 끼아라는 스케이트, 자전거 타기, 테니스 등의 스포츠를 좋아했고 특히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끼아라는 9살 때 포콜라레 운동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포콜라레는 끼아라 루빅 여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폐허가 된 세상에 ‘서로 간 사랑과 모든 이의 일치’를 위해 1943년에 창설한 영성 운동입니다.
끼아라는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끼아라 루빅과 영적 모녀 관계를 맺었습니다. 특별히 투병 중에 끼아라 루빅 여사로부터 “끼아라 루체”라는 새로운 이름과 편지를 받기도 합니다.
17살 때 테니스 경기 도중 어깨에 강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 후 결과는 암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기로 악명높은 골육종이였습니다. 이름대로 뼈에 생기는 종양이었습니다. 진단 결과를 알게 된 끼아라는 울지도, 반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즉시 침묵 속에 깊이 잠겼지만, 25분이 지난 후 그녀의 입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네”라는 응답이 흘러나왔습니다. 새로운 고통이 닥칠 때 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원합니다.”라고 하며 단호하게 말하며 자신의 고통을 바침으로써 모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항구한 결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끼아라는 매일 미사를 통해 성체 모시며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한 줌씩 빠지기 시작했을 때 끼아라는 “예수님, 이 고통을 십자가에서 저를 구원하신 당신을 위해서예요.”라 말하며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육신의 고통의 강도는 점점 커졌으나 끼아라는 예수님과 함께 그 고통을 잘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끼아라가 예상치 못한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이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두 번째 수술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엄마는 끼아라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끼아라야, 예수님께서는 다리가 없는 너에게 날개를 주실거야.” 끼아라는 “엄마, 제가 걷는 것과 천국에 가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천국 가는 걸 선택할 거예요. 지금 제 마음을 끄는 것은 천국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너희들은 지금 예수님과 내 관계가 어떠한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거야… 하느님께서 내게 무언가 더 큰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느껴. 어쩌면 오랫동안 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내게는 하느님의 뜻만이 소중하고 현 순간에 그것을 잘하는 것이야.
지금 사람들이 내게 걷는 것을 원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야. 이 상태의 내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치 어두운 굴 안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온 힘 다해 사랑하려고 나 자신을 다시 던졌고 빛은 되돌아왔다.” “순간을 잘 산다면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만약 그 끔찍한 고통의 순간을 예수님께 선물로 드린다면, 이 끔찍한 순간까지도….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한 의미 있는 선물로 바친다면 고통은 그냥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끼아라는 작은 종이에 성모님께 바치는 글을 적었습니다. “천상의 어머니, 제가 회복될 수 있는 기적을 당신께 청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굴복하지 않는 힘을 제게 주시기를 청합니다.”
끼아라는 투병 중에도 빛나고 환한 미소를 절대 잃지 않았습니다. 평온하고 강하게 남으며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수했고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끼아라는 아주 활동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통해 또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사랑을 다 해 맞음으로 오히려 그녀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밝은 모습으로 힘과 용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간 친구들은 도리어 그들이 위로받고 돌아갔습니다.
1990년 여름, 의료진은 끼아라에 대한 치료를 중단하기로 하였습니다.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끼아라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십자가상의 수난을 나누고자 하는 원의와 명료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진통제인 모르핀 투약을 거부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고통만을 바칠 수 있는데 모르핀은 제 정신을 흐리게 해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제 고통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을 가능한 한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 끼아라에게 하루는 햐안 옷을 입은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빛으로 싸인 천사는 끼아라의 손을 꼭 잡아주며 “힘을 내렴!”하고 말하고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병은 진전되었으며 고통도 늘어났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그녀의 입에서는 “예수님, 당신과 함께;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만 나왔습니다.
끼아라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께 오셔서 천국으로 나를 데려가시기를 청하지 않아요. 그분과 조금이나마 십자가를 나누기 위해, 그분께 내 고통을 계속 바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녀 없이 홀로 남게 될 것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계속해 말하기를 “하느님께 믿고 맡기세요.
끼아라는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두었습니다. 장례식에서 부를 노래, 꽃들, 머리 모양, 신부가 입는 흰 드레스에 분홍색 리본 허리끈까지.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저를 준비시킬 때 이렇게 계속 말하셔야 해요: 지금 내 딸 끼아라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
아주 고통스런 밤이 지난 후 1990년 10월 7일 새벽 정배는 그녀를 데리러 왔습니다. 끼아라는 아직 18살. 그녀의 19번째 생일 파티는 하늘에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되자 끼아라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천국으로 갈 거야.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정말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안녕! 엄마! 나는 행복하니까 엄마도 행복해야 해.”
키아라가 병에 걸리기 전에 하던 일들을 계속했다면 그만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육체는 영과 반대입니다.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습니다. 그래서 육체에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써야 합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머리에 재를 얹는 것입니다. 복녀 키아라 루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저에게는 아직 심장이 있고 그렇기에 언제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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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잇몸 치료를 받았습니다. 작년 2월부터 했으니 1년이 되었습니다. 치료받으면서 늘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취’입니다. 만약에 마취가 없었다면 잇몸 치료 과정이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저는 마취의 도움을 몇 번 받았습니다. 2012년 다리에 골절이 있었을 때도 척추 마취를 받고 수술받았습니다. 의학 분야에서 마취가 있을 때와 마취를 할 수 없을 때는 인류의 삶의 질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취의 고마움을 생각하며 예전에 읽었던 책이 떠오릅니다. 인류의 건강과 생명에 도움을 준 10가지 발명품입니다. 여러분도 ‘아!’ 하면서 수긍할 것입니다. 의학과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인들은 많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졌고, 수명도 늘었습니다.
‘마취제 (Anesthesia)’가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에테르와 클로로포름 등의 마취제가 도입되면서 외과 수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극심한 통증을 동반하던 수술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항생제 (Antibiotics)’가 있습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면서 감염성 질환 치료의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이후 다양한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세균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줄었습니다. ‘백신 (Vaccines)’이 있습니다. 천연두, 홍역, 소아마비 등 치명적인 질병을 예방하는 백신의 개발은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제너의 천연두 백신(1796년)이 그 시작이었고, 이후 다양한 백신이 개발되었습니다. 지난번 코로나 팬데믹도 백신이 개발되면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X선 (X-ray)’이 있습니다.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면서 내부 장기를 비침습적으로 볼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 생겼습니다. 이는 질병 진단과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슐린 (Insulin)’이 있습니다. 1921년 프레더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가 인슐린을 발견하면서 당뇨병 환자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치약과 칫솔 (Toothpaste & Toothbrush)’이 있습니다. 구강 위생은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치약과 칫솔이 대중화되면서 충치와 잇몸병 예방에 이바지했습니다. ‘페니실린 외 기타 항균 소독제 (Antiseptics & Disinfectants)’가 있습니다. 조지프 리스터가 1860년대에 소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외과 수술에서 감염률이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는 병원 위생과 수술 성공률을 크게 향상했습니다. ‘심장 박동기(Pacemaker)’가 있습니다. 1950년대에 개발된 심장 박동기는 부정맥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심장이 정상적으로 박동하도록 전기 신호를 보내는 기기입니다. ‘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영상)’가 있습니다. 1970년대에 개발된 MRI는 인체 내부를 정밀하게 스캔할 수 있는 기술로, 뇌졸중, 암, 신경계 질환 등의 진단과 치료에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정수기 및 상하수도 시스템 (Water Purification & Sanitation Systems)’이 있습니다. 깨끗한 물의 공급은 건강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정수기, 하수 처리 시스템, 염소 소독 기술 등의 발전으로 수인성 질병(콜레라, 장티푸스 등)의 발생이 크게 줄었습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성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입니다. 그 밖에도 묵주, 십자가, 성경, 성가, 성수, 성모상, 초, 성지순례, 구유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풍요롭게 합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신앙인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4가지를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희생의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희생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희생입니다. 양보하는 것도 희생입니다. 신앙은 희생이라는 밭에서 피는 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본당에서도 사순시기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마련한 사순 특강에 참여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셋째는 단식입니다. 단식하는 의미는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선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 저금통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2025년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정화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희생, 기도, 단식, 자선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함께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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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복음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실천하며 이 시기를 잘 계획하도록 초대합니다. 특히 자선과 기도와 단식, 이 세 가지를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숨은 일도 보시는 분께서 갚아 주실 것(마태 6,6 참조)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하며, 단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야 합니다.
자신이 자선, 기도, 단식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하느님과 내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 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피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집중하려는 노력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과 친밀해지도록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자 하셨다.”(35항)
이 같은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사순 시기에 우리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믿고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애쓰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예수님께서 자주 산 위에 혼자 올라가셨던 것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은 그 자체로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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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 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이 재의 예절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삶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앙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자체가 나팔이다.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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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1) ‘재의 예식’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묵상하라는 예식이고, 동시에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식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 작가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5-6)
여기서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이라는 말은, 인간이 먼지로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우리를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하실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으로는, 또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온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 실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믿음의 방향과 신앙생활의 방향을 올바르게 바로잡는 일이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일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서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일이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입니다. 사실 믿음과 회개는 하나입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혹시, 회개는 하지만 믿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회개 자체를 아예 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재의 수요일’에 듣는 복음 말씀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위선자가 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선, 기도, 단식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간에 ‘위선’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죄입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극기고행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은혜로운 때인데, 동시에 위선자들이 가장 많이 생기는 때입니다. 진심으로 행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극기고행으로만 멈추면, 그것은 모두 위선입니다.
<외국의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 벌이는 카니발, 즉 ‘사육제’는, 지금은 하나의 문화로, 또 전통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지만, 원래는 사순절의 극기고행을 앞두고 미리 실컷 먹고 마시려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사순절의 극기고행은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켜야 하니까 목요일에 미리 고기를 먹거나 토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 단식재를 지키기 전에 미리 배불리 먹거나 지키고 나서 배불리 먹는 것, 그런 경우에도 그 금육재와 단식재는 모두 위선입니다. 금육재를 지키려고 고기를 안 먹지만, 그 대신에 고기보다 더 비싼 횟집에 가서 회를 먹는 것도 위선입니다.>
4)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하여라.”인데, “너 자신도 모르게 하여라.”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자선을 베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말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루카 17,10)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자선을 베풀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실천한 선행을 잊어버려도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인데, 거꾸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니까 너 자신은 잊어버려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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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나와 벗>
마태오 6,1-6.16-18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하느님과 나와 벗>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4)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7-18)
기도
하느님께로
자유
나를 떠나
하느님께 가다
하느님을 만나다
하느님을 만나는 나를 만나다
나를 만나시는 하느님을 만나다
나의 하느님과 하느님의 내가 만나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오직 하느님
오직 나
그밖에 아무도 없게
그리하여 오롯이 만날 수 있게
단식
나의 것으로부터
자유
나의 것을 치우고
나에게 가다
나를 만나다
나를 만나는 나를 만나다
하느님 품에서 나와 내가 만나다
나와 나 사이에
오직 하느님
오직 나
그밖에 아무도 없게
그리하여 오롯이 만날 수 있게
자선
나로부터
자유
나를 열어
벗에게 가다
벗을 만나다
벗을 만나는 나를 만나다
나를 만나는 벗을 만나다
하느님 품에서 벗과 내가 만나다
벗과 나 사이에
오직 하느님
오직 벗
오직 나
그밖에 아무도 없게
그리하여 오롯이 만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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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종민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부터 우리 교회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오늘 ‘재의 수요일’부터 ‘성 목요일 주님만찬 미사’ 전까지입니다. 이 사순시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축제를 준비합니다.
사순이라는 말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40일은 매우 중요한 일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사순시기 동안 희생과 극기의 표징으로 금육과 단식을 실천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금주와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과 극기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이마에 재를 바르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또는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라는 말을 듣습니다.
사순시기는 이처럼 나의 근원을 생각하고 나의 현재 처지를 돌아보는 시기입니다. 오늘과 내일부터 토요일까지 삼일 간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의 자세와 십자가의 의미, 단식의 의미, 회개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의로운 일을 하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기도하거나 단식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자신의 의로운 일이나 기도, 단식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겸손할 것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겸손을 의미하는 라틴어 humilitas와 인간다움을 의미하는 humanitas는 그 어원이 흙을 의미하는 단어 humus에서 유래 하였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흙에서 왔음을 기억하고 흙과 같이 낮아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옛날 어떤 곳에 성자(聖子) 한 분이 살았습니다. 그의 생활은 참으로 경건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까지 이 성자의 삶에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사들은 땅으로 내려와 겸손한 그 성자에게 은혜를 더 주려고 이런 말했습니다. "앞으로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성자는 천사의 제안을 듣더니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느님이 친히 하셔야지... 감히 인간인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은혜를 사양합니다.”라고 그 성자는 말했습니다.
천사들은 다시 말하길 “그럼 그대가 말만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는 힘을 드리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러자 성자는 같은 대답으로 “저는 그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천사들이 그 성자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도대체 무슨 은혜를 원하십니까?” 성자는 대답했습니다. "예, 한 가지 바라는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천사들은 성자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의논한 끝에 결정했습니다. 그 성자의 그림자가 비칠 때 그 그림자 안에 들어오는 모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그리고 모든 죄인들이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화에 나오는 성자처럼 겸손을 갖추게 되면 학자가 되어도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용사가 되어도 힘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자가 되어도 돈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의 자랑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애청자 여러분! 우리가 하는 의로운 일과 단식과 기도를 누가 보상해주면 좋겠습니까? 사람이 보상해 주는 것이 더 좋습니까? 하느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것이 더 좋습니까?
나의 의로운 일과 단식과 기도를 사람에게 보상 받으려면 사람들 앞에 드러내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보상 받으려면 드러내지 않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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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로 더 가까이 오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마태오 복음 6장 6절.18절)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돈독하게 해 주는 도구들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고, 자선은 기도의 열매를 이웃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단식은 우리가 무례하게 탐닉하고 착취해온 피조물과의 관계를 잠시 멈춤으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한 존중을 회복하는 사랑입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인간의 기본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는 수고와 희생, 인내가 따릅니다. 그래서 사랑과 절제와 거룩함의 척도가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타인에게 그러저러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코스프레가 아니라 숨어 계신 아버지와 우리 자신 사이의 내밀한 사랑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있어서 율법이 정한 격식을 공개적으로 행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기존 종교 권력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은 죽은 문자의 엄수보다 우리의 진정한 마음을, 사랑을 원하시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요엘 예언자의 입을 통해 주님의 바람이 선포됩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예언서 2장 12절)
주님은 사실 백성이 바치는 갖가지 재물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세상 모든 것이 원래 당신의 것이니 무엇도 모자라고 갈급하실 리 없으시지요. 그분은 당신이 주신 것 중에서 무언가를 다시 되 바치는 인간의 마음을 보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마주 나가야 하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합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코린토 2서 6장 2절)
주님은 교회의 전례주년을 통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좋은 지향을 품고 살면서 이웃의 어려움까지 헤아려 주지만, 번번이 죄에 걸려 넘어지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지금"은 우리 마음과 영혼을 다시 새롭게 정화해 주님 앞에 거룩히 설 수 있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시 그 "지금"이 우리 앞에 펼져졌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뭐라고 만물의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 마음을 얻고자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시는지 놀랍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가 뭐라고 엇나가고 빗나가도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며 새롭게 해 주시는지 송구할 따름이지요.
작년에 이어 <팬데믹> 상황에서 두 번째로 맞는 올해의 사순 시기는 주님과 더 내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숨어 계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 온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을 조용히 이웃과 나누며, 형제인 피조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비우는 은총의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매일 매 순간 다가오는 "지금"을 충실히 채워나가면서 고요히 신앙과 사랑의 내공을 쌓는 시간되시길 축원합니다. 더 단단해지고 더 충만해진 영혼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껴안는 그날까지 서로 격려하고 나아갑시다. 이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행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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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전쟁은 수천 년 전부터 끊임없이 계속됐고,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여기저기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전쟁의 원인에는 사람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탐욕이 커지고 커져서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탐욕에 당당히 맞서 희생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평화)을 누립니다.
국가 간의 문제에서만 이 원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도 탐욕이 점점 커지면서 크고 작은 다툼이 계속됩니다. 이 다툼에서 이겨야 나의 욕심을 채우면서 평화를 얻겠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어떤 다툼도 끝낼 수가 없습니다.
누구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라 하지만,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전쟁을 멈추고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 있을 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며 감사할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만을 강조하셨던 이유를 묵상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세상의 탐욕 속에서 멈추지 않는 전쟁을 당장 멈출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재의 수요일인 오늘입니다. 참회의 상징인 재를 축복해서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를 시작인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는 자선과 기도와 참회에 대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자선과 기도와 참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즉,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또 칭찬받으려는 마음을 갖고 이 중요한 덕목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려는 자선, 기도, 참회이기에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서 “열심히 산다.”라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없기에 하느님에게서 그 어떤 상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창세기의 말씀인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 3,19 참조)라는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생명은 오로지 하느님께 달렸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연결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하느님 뜻인 사랑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잘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에 집중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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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날이지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고 그분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며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마 위에 재를 얹습니다. 재를 얹는 예식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중 하나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재를 얹는 예식은 우리에게 늘 하늘나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숨 쉬고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언젠가는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는 세상에서 얻었던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동시에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재의 예식을 통해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의 삶 안에서 하나하나 미리 쌓아 놓은 보화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즉 살아생전에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소중합니다.
재의 수요일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하루를 지내며 우리의 작은 나눔과 선행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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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에도 종류가 있다?
어떤 글을 보았는데 스트레스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합니다.
1. 유스트레스
즐겁고 좋은 일이지만 처음 접하는 일이어서 어찌할 바 모를 때
2. 디스트레스
감당하기 어렵거나 불행한 일을 겪었을 때
유스트레스는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스트레스지만 디스트레스는 우리를 불안감에 빠뜨리고 심한 경우 신체 질환까지 불러올 수 있다 합니다.
디스트레스 극복을 위한 정신과 의사의 조언은
-현실적 목표 설정하기
-부정적 사고가 들 때 이를 기록하여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는 연습하기
-신뢰가 있는 지인들의 지지를 구하기
-내가 한 작은 성공을 스스로 축하하기
스트레스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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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기.3,19 참조)
하느님이 내려주신 우리의 생명이 잉태되던 날, 이 세상의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으로 주어지는 우리의 삶은 사용기간이 아주 제한적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이 땅에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되돌아갑니다. 이 세상에 잠시 “소풍을 왔다가” 천상고향으로 우리 모두는 되돌아갑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은 떠나온 하늘의 고향을 끝없이 갈망하는 삶입니다. “당신 품에 쉬기까지 안달하는” 우리이기에 떠나온 당신을 더욱 갈망합니다. 이 땅에 묻혀 한 줌의 흙이 되기까지 우리는 당신을 갈망합니다. 이 땅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갈망합니다.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가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은 되돌아 갈 마음의 고향을 우리가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늘보다 이 땅에서 영원한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떠나야 할 이 땅이고 언젠가 되돌아가 가야 할 주님의 품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되돌아가야만 하는 하느님의 품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님을 잊을수록 살면서 더 많은 절망을 느끼지만, 되돌아갈 거처를 기억할수록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봅니다. 되돌아 갈 곳을 잊으면 우주의 미아처럼 방황하지만, 죽더라도 갈 곳을 생각하면 올바른 길을 걷게 됩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모두가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는 인간 삶의 본질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본질을 기억하는 이 땅의 삶은 하루를 살아도 천 년의 행복을 느끼지만, 흙이라는 본질을 잊고 살면 천년을 살아도 허무하기만 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되돌아가는 운명공동체인 우리는 살면서도 흙이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 땅에 뿌리 내린 모든 생명이 잘 자라게 하는 좋은 흙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서 흙이 되지 못하면 우리는 죽어서 억지로라도 흙이 되어야 할 운명입니다.
흙이 본질이기에 흙이 되어 돌아가는 우리의 본질을 기억하는 오늘입니다. 흙이라는 우리의 본질을 잊지 않을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되고, 주님의 뜻을 품고 살게 됩니다. (김종오신부,M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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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제1독서>에서는 ‘회개’를 <제2독서>에서는 ‘화해’를, <복음>에서는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라고 말하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말하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옴’ 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신앙의 빛>에서,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회개’가 첫째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결국, ‘지속적인 회개’는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으로 지속됩니다. 이를 수도승들은 ‘제2서원’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적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외적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의 요청이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삶을 불러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도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는 어둠이 아니지만 어둠과 놀면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희는 빛이 아니지만 빛 앞에 머무르면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와 같이 될 수 있고,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늘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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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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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순절동안 해야 할 일>
-“회개, 화해, 재계”-
“하느님, 자비하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시오니 내 죄를 없이하소서.”(시편51,3)
오늘 재의 수요일부터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삶을 재정비하여 심신을 새롭게 하는 특별한 영적수행의 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사순절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여 당신의 수도승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줍니다.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절대로 우울하고 어둔 분위기에서 사순절을 지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수행생활에 힘쓰고, 영적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리며 사순절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규칙서에 ‘기쁨(gaudio;joy)’이란 말마디도 오직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제49장에서 단 2회 나옴이 주목됩니다.
어제 참 기쁘게도 1989년 1월27일 부제품을 받고 이어 2월8일, 그러니까 36년 전 재의 수요일에 최초로 한 강론을 찾아냈습니다. 1989년 다해 재의 수요일은 오늘 3월5일보다 거의 한 달 앞섬이 참 신기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강론 중 서두 부분을, 그리고 끝에서는 마지막 부분을 인용합니다.
“어느 수도승이 평생동안 하느님을 찾았지만,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야 비로소 그는 줄곧 하느님이 그를 찾고 있었음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흔히 수도승을 일컬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하는데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잊을 때 위 수도승처럼 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찾다가 인생 마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의 하느님은 철저히 사람을 찾아 나서시는, 돌아오라 목메어 부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여기까지 첫부분입니다. 사순절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드러납니다.
첫째, “회개하라!”입니다.
요엘 예언자의 외침이 참 간절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그대로 사순절을 시작하며 재의 수요일 미사집회에 참석한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습니다. 사순절이야말로 회개의 시기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교야 말로 ‘회개의 종교’라해도 무방합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중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회개와 함께가는 겸손과 지혜의 삶입니다.
둘째, “화해하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화해하라는 권고가 교회 어른들의 말씀처럼 참 간절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사순절 하루하루 오늘 지금이 바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매우 은혜로운 때이자,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세계적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음과 화해하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회개와 더불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할 때 모두와 화해할 수 있는 사랑도 힘도 주어집니다.
셋째, “재계(齋戒)하라!”입니다.
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이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이 여기에 해당되겠지만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선과 기도, 단식을 권합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은 아침 단식이 있고 십자가의 길 기도도 있습니다. 셋 모두가 자발적 사랑과 자유, 비움과 소통의 표현입니다.
인위적 과시나 자기자랑이 없는, 하느님 중심의 모두에게 숨겨진,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겸손한 재계이자 수행인 자선, 기도, 단식입니다. 자선을 통해 이웃과의 소통과 나눔이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소통과 나눔, 그리고 단식을 통해 이기적 나를 비워 나와의 소통이요 나눔입니다. 모두가 회개의 열매이자 화해의 증거입니다.
이런 자발적 사랑과 자유의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봉헌이요 전통적 재계인 이들은 회개와 화해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주님은 매 수행의 재계마다 못을 박듯이 후렴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런 주님과 내적일치를 이루는 순수하고 한결같은 믿음이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이어 36년전 재의 수요일 미사시 첫 강론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강론후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사제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인생무상이 아닌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나약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 안에서 “나에게 돌아오라.”는 주님의 호소를 들어야 합니다.
사순절은 주님께 돌아와 화해하는 시기이자,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의 시기입니다.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축일에 우리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화해, 재계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사순절 동안 내내 마음에 담고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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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재만 남기고>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우리가 재와 먼지에 불과한 존재이고, 재와 먼지로 돌아가게 될 것을 기억하라고 권고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따가 재를 얹는 예식을 하며 오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대신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권고하겠습니다.
그런데 재란 무엇이고 재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재란 불에 타고 남은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권고를 받는 우리는 오늘 자신을 불태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자신을 불태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이겠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이겠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를 먼저 보면 욕망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욕망을 불사른다고 할 때의 뜻과는 다릅니다.
욕망을 불사른다는 것은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뜻이지만 불태운다는 것은 욕망이 사그라들어 재가 되게 하는 겁니다.
지금의 저는 욕망이 거의 다 타버린 재처럼 사그라들었지만 젊을 때는 끓는 피와 같았기에 어떻게든 사그라들게 해야 했는데 제일 좋은 방법이 무덤에 가는 것과 양로원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술 한 병 사 들고 묘지에 가 아무 무덤이나 돌아가신 분께 한잔 올린 다음 그 무덤을 베고 무덤의 그분과 함께 한잔하면 욕망이 사위어지고 양로원에 가 어르신들과 어울리다 보면 욕망이 정화되거나 순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이미 사그라든 지금은 진정한 사랑을 불태워야 할 때입니다. 욕망이 사그라들며 사랑도 같이 사그라들게 해서는 안 되고 앞에서 봤듯이 지금이 오히려 욕망이 정화되어 참사랑을 할 때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육신만 화장하지 않고 저의 사랑도 영혼도 화장하고 싶습니다. 남은 생애 제게 있는 사랑을 내 몸뚱이를 위해 아껴두거나 남겨두지 않고 아낌없이 남김없이 다 주고 재만 남기고 떠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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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6,1ㄱ)
<거룩한 사순시기!>
오늘 복음(마태6,1-6.16-18)은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믿는 이들이 살아야 할 기본적인 삶이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할 때에는, '위선자들처럼 드러내지 말고 감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선'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너를 통해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거룩한 나눔 행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이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행위입니다.
'단식'은 단순하게 육적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뛰어넘어, 내 마음의 악한 곳간 안에 있는 것들을 비워내고 끊어내는 행위입니다.
오늘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미사 때 참회의 상징으로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을 듣는데, 사제의 이 말이 사순시기가 '회개의 때'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순시기는 몸과 마음이 하느님께로 돌아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너와 화해하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가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매우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날이고, 부활로 나아가는 참으로 거룩한 시기입니다.
복된 사순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미사에 꼭 참례하고, 오늘 하루 한 끼 단식재와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시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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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18)
기승전결
먼지입니다.
먼지로
돌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한낱
먼지일 뿐인
우리는
우리 삶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참모습을
만나는
재의 수요일이며
은혜로운 사순의
첫 시작입니다.
사순시기는
사람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진실한 회개로
사람의 길을
우리에게
가리킵니다.
삶이라
불렀던 것이
더 이상
삶이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은
먼지로
돌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이며
간절한
용서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안고 가는
삶입입니다.
먼지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께
목마른
먼지의
삶입니다.
먼지에게
하느님의
기적이
하느님의
은총이
일어납니다.
새 생명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이 사순시기는
특별히
먼지로 돌아갈
우리가
잃어버린
하느님을
되찾는
은혜로운
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뜨겁게 만나는
은총의 빛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죄의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회개가
우리 가운데에서
선포됩니다.
구원을 체험하는
먼지의 뜻깊은
새날 되십시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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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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