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입니다. 3,6-10.16-18 6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하십시오.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16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17 이 인사말은 나 바오로가 직접 씁니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의 표지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씁니다.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
인자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작심하신 듯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 ‘무고한 예언자를 죽이는 후손’으로 몰아세우십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썩고 끔찍한 송장을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무덤을 회칠을 해서 아름답게 꾸미는 위선의 행동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예언자를 죽였지만 자신들은 그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자신들이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잘못에 가담하지 않았으리라는 합리화의 위선을 주님께서 또한 비판하시지요.
복음서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또한 부족함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반대로 오만과 위선으로 다져진 사람으로 설명됩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보다 회개하는 죄인’이라는 표현을 쓰시면서 바리사이들을 암시적으로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들을 이렇게 비판하실까요?
그들이 의인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처신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오만은 가장 고치기가 힘들다고 하지요?
주님께서 그들의 독선을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8)
이 비판의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독촉하시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의인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면서도 당신을 죽이실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를 죽인 것처럼 그 후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당신마저 죽일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서민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해서 노동을 했지만 그들 위에 군림하는 그들은 오히려 일을 시키기는 했지 그들과 함께 노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이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귀족적으로 구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2테살 3,10)
사도 바오로는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자신들도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과거 선비들과 비교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는 않겠지만 양반들은 노동을 천시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는 다는 선비와 양반들은 천민들을 무시하면서 그들의 노동 댓가는 톡톡히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폐습을 없앤 것이 천주교의 가르침이었고 순교자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공동체에서 일도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이나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강한 표현을 씁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이웃 안에서 자신을 낮추고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구태여 자신을 잘 보이려 할 필요가 없겠지요.
왜 ‘무덤에 회칠’하는 삶을 살까요? 사랑이 없고 자기 자신만 알기 때문입니다.
남이야 어떻든 자기 자신이 사는 것이요, 교만이 자기를 가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에는 꾸밈이 있을 수 없고 진실이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이지요.
남에 대한 배려를 하는 사람이 왜 꾸미며 위선으로 살겠어요?
오늘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다시 새겨야 하겠습니다.
작은 것으로부터 성실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랑의 삶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을 보여 줄 수 있는 겸손과 진심함이 삶의 행복이라는 것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겉꾸밈을 탓하시는 가르침에서 배워야 하겠지요.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야 이기적인 나에게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나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라는 이기적인 장막, 겉꾸밈에서 벗어나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먹구름 끼고 천둥치는 삶이 아니라 아름다운 햇볕을 받고 미풍 속에서 피는 들꽃의 낭만이 가득한 하루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