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하루는작은인생
나의 결혼생활과 비교한 지극히 개인적인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저)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 '여자'라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오빠들과 남동생으로부터 존중은 기본이요, 대접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니까.
물론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둥의 잔소리를 듣기도 했으나,
적어도 '기집애'라는 단어에는 기겁을 하며 역정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을 줄로 착각했다.
날 떠받들어주는 여러 번의 연애를 하고, 스물여섯에 괜찮은 남자를 만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결혼했다.
남편은 착해 보였으며, 성실해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교포였으며, 한국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한국말조차 어눌했다.
그가 나에게 '한국적인 여성상'을 강요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결혼은 당연한 것이라고, 그는 다를 것이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지난날을 조금은 후회한다.
"내가 많이 도와줄게. 기저귀도 갈고, 분유도 먹이고, 내복도 삶고 그럴게."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지금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p.144~145)"
결혼하고 시모는 누누이 내게 퇴사를 권했다. 마치 '잃음'이 아내의 기본 도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 희생을 숭고화 시켜가며 말이다.
그때마다 살가운 며느리 코스프레를 해가며 완곡하게 적당한 애교로 넘어갔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는 심해졌다.
처음에는 내게 남편을 섬겨야 한다고 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했다.
여자가 돈 욕심이 너무 많아도 안된다고 했다.
(내가 남편보다 더 잘 벌었다.)
'남의 밑'에서 일하려고 너희 부모가 널 교육했냐며 부모님까지 들먹였을 때도, 난 시모 눈에 날까 걱정해, 침묵했다.
소설에서 김지영 씨도 여러 차례 침묵을 선택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있고, 나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갖게 될까 괜히 두려웠다.
생각, 감정, 의견을 속으로 삭이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가장 후회하는 바다. (참고로, 퇴사하지 않았다.)
"정대현 씨와 김지영 씨는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싸웠다. 김지영 씨는 자신이 무슨 큰 신체적 결함이라도 있는 것처럼 취급받는 동안 남편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실망했고, 정대현 씨는 괜히 나섰다가 어른들 눈 밖에 나서 일을 더 키울까 봐 참은 거라고 했다." (p.142)
모든 남자가 그렇진 않지만, 든든한 방패막과 지원군이 되어 주는 남편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남편이 남의 편의 줄임말이란 이야기가 괜한 나온 소린 아닌 것 같다.
시모가 아프다는 얘길 듣고, 주 중에 장을 보고 주말에 삼계탕 죽을 끓여갔다.
시모는 회사 때문에 진작에 달려오지 않은 내가 미웠는지, 죽이 짜다는 둥, 닭고기가 질기다는 둥 온갖 트집을 다 잡더니, 결국 내가 보는 앞에서 체에 걸러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때 난 당황스러워 침묵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도 침묵했다.
정대현 씨와 김지영 씨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싸웠다.
남편은 아픈 사람에게 짠 음식을 준 내 잘못이라고 했고, 자기 엄마를 죽일 셈이었냐며 역으로 화를 냈다.
자기 엄마가 정말 '나쁜 시어머니'였다면 내 얼굴에 던졌지,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해가면서.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p.167)
남자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 여자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맛있는 요리로 남편을 기쁘게 해줘야 하고, 집안은 언제나 깔끔해야 하며,
남자가 '밖으로 나돌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여자는 성생활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켜줘야 된다고 시모는 내게 강조했다.
마치 무슨 팁을 주는 냥. (저 얘길 듣고 너무 충격받아서 아직도 머릿속에 맴돈다. 그것도 남편 앞에서 했다.)
참지 못한 내가 그 이야길 부정했더니, 졸지에 어른이 말하는데 말대답하는 버릇없고 못 배워먹은 사람이 되었다.
아주버님의 외도와 폭력에 형님이 경찰에 신고를 하고, 이혼을 요구했을 때도, 용서를 하지 않고 가정을 파탄 낸다며 여자 탓을 했다.
가정은 한 사람의 용서와 희생으로 지키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렇게 여자는 용서하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에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p.140)
결혼을 하고, '여자의 역할'을 다하는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부조리하고, 불평등한지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내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억압이라는 것이다.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선 여자의 어느 정도의 희생을 당연하다고 은연중에 믿어왔던 셈이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기 때문에 그 모든 부조리를 참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까지 하면서.
제목과 같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결혼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진 않을 것이고,
여자라면 적어도 소설 속 여성을 향한 폭력 중 하나는 경험해보았을 거다.
이 책을 읽기를 권유하는 이유는 한 번이라도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기 바라서이다.
아주 보편적이고 보통의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한 번쯤은 모든 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어찌 보면 89년생 김**의 결혼생활은 82년생 김지영 씨의 결혼생활보다 강도가 높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실패'로 치부되는 이혼으로 나의 결말은 소설과는 다르게 아직까지는 '해피엔딩'이다.
♥ 행복하라는 댓글 달아 준 여시들 너무 고마워요♥
처음엔 조금 힘들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말 잘한 일 같아요 ;)
지금은 귀여운 고양이와 알콩달콩 잘 살고 있어요.
훨씬 더 누리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말이에요.
모두 억압받지 말고, 스스로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기 바라요!
우리 포기하지 말아요!
여시 라이프스타일보고 이 글까지 읽게됐는데 여시는 항상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라 사는 거 같아서 멋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나도 여시처럼 나를 존중하는 시간들로 가득찼으면 좋겠어 고마워 여시😊
너무나 단단하고 멋진 여시 글 고마워요
연어왔다... 고마워 책 읽고 싶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