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배우수업일지_3회차_2023.2.13.
공간의 맛, 애플의 맛, 밀양의 맛.
오늘은 2회차 수업부터 합류한 시열과 일호와 1회차 수업에서 다루었던 이완 훈련을 하기 위해 30분 먼저 모였다. 선생님께서는 이완을 위한 자세를 잡도록 이끌어 주시더니 눈을 감은 채로 ‘공간’을 오감 훈련의 대상으로 지정하셨다. 질문을 던지며 우리의 오감을 깨우셨다.
* “극장에 들어오기 전에 오늘 보았던 것, 누구와 인사를 했나요?”
- 극장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동료의 표정, 옷차림, 실루엣이 스친다.
*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나요?”
- 온풍기의 소리. 이런 종류의 기계가 제조하는 소리는 반갑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르다. 이 공간을 따듯하게 해 줄 공기를 동반한 소음이라는 사실에. 그래 열심히 돌아가라, 빨리 따듯한 온기로 이 공간을 채워줘.
* “이 공간의 냄새는 어떻죠?”
- 찬 공기의 냄새랄까. 냄새를 맡아보려 공기를 코로 흡입하자 느껴지는 선뜻함.
* “무엇이 만져지나요? 어떤 촉감이 드나요?”
- 간헐적으로 피부를 건드리는 온풍. 차가운 손. 손이 시리다고 생각한다. 손은 아무 옷도 입고 있지 않고 있구나. 얼굴도 그런데, 왜 손만 시릴까?
* “이 공간의 맛은 어떤가요?”
- 엥?!?! 지금, 공간의 맛이라고 하셨나? 공간의 맛은 어떻게 알 수 있지? 뭐라도 핥아야 하나? 나는 혀끝을 내밀어본다. 딱히 느껴지는 맛은 없다. 아, 그런데, 내 입 안에 남아 있던 맛 하나. 사과 맛이다. 연습 시작 바로 전, 극장 카페 카운터 위에 있던 밀양얼음골 사과주스를 한 봉지 마셨지. <이 공간의 맛=사과 맛>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애플. 공교롭게도 여기는 애플씨어터. 애플씨어터에서 맛본 사과맛. 꽤 재밌다. 근데, 왜 애플시어터지? 극장 복도 사방의 빨강도 애플의 빨강인가? 체홉의 최애 과일이 혹시 사과였나? 누구의 애플? 이브의 애플, 뉴톤의 애플, 스티브잡스의 애플... 애플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신화로서의 인간, 우주의 작동원리, 지금 우리의 일상이다.
혀 표면에 남아 있는 사과 주스 한 겹이 순식간에 나를 아주 오래 전으로, 아주 멀리로 데려간다. 얼음골 애플의 밀양은 내 아버지의 고향. 어제 밤 전화 저편 아빠는, 또 술 마셨냐는 내 핀잔에, “안 들린다. 말 좀 크게 하라”고만 되풀이하시던데. 횡설수설 떨리는 목소리가 꽤 젖어 있던데. 밀양발 얼음골 사과주스 한 상자, 또 오고 있는 중이겠지.
질문에 답하며 떠오른 여러 가지 생각 속에 빠져들며 집중과 이완이 이루어진 걸까? 이어진 신체 이완 훈련이 진행되자 지난 번 수업 때보다 집중이 한결 수월하게 느껴졌다. 1회차 수업에서 놓쳤던 목, 어깨에게 물어보기, 관심 가져 주기에 성공! 선생님께서 그 부위를 강조해 주신다는 느낌까지 받으면서...
1. Emotional Memory (정서적 기억)
지난 수업 중 선생님께서는 7년 쯤 전 사건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보라고 하셨다. 용서하고 싶은 사람, 용서를 구하고 싶은 사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 그렇다고 7년이라는 시간적 제한에 구애받지는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셨다.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사람. 나는 이미 정서적 기억 훈련에서 그를 대상으로 선택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그와의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지만,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그런 나를 향해 날아온 선생님의 말씀.
“나는 배우를 하면서 삶이 윤택해졌어. 돈이 많아서 윤택해졌다는 게 아니다. 감정 훈련을 하려면, 어떤 사람에 대한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질문해보고, 그 상황에 대해, 그 사람에 대해 깊게, 천천히 다시 생각해 봐야 하거든. 그러면서 그 사람을, 조금 더 알고, 이해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 화해도 하고, 용서하고, 용서받게 되고...”
정서적 기억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술적 효용성 그 이상의 가치에 대한 선생님의 진심이 진심으로 느끼지는 순간이었다. 정서적 기억 훈련의 목적은, 배우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감정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불러들여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선생님께선 이러한 정서적 기억 훈련의 일차적 목적인 실용성 너머의 가치까지를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 같았다. 워크숍 첫 날, 선생님께서 강조하셨던 “인성”과 “겸손”과 닿아있는, 훌륭한 배우의 전제조건.
[정서적 기억 훈련]
벽을 보고 앉는다든지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든지 하여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공간을 조성한다. 암전. 암흑이다. 아무도 없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대상을 초대한다.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다. 나는 그를 초대하지 못한다. 그와의 대화 가능성에 대해 여전히 의심 중 혹은 원치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고요를 깨는 미세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하려고 하는 말이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을 뿐 발화되지는 못한다.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어렵다.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런 포기 또는 체념이 나를 누른다.
흐느낌이 들려온다. 흐느낌의 음량이 점점 커진다. 너무 애처롭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에게 다가가 안아주고 싶다. 나 자신을 안아주고 싶은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그냥 같이 울면 좋겠다. 정작 나는? 나의 울분과 억울함이 내 입에 재갈을 물렸나. 내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공간 전체가 어느새 서서히 소리로 채워지고 있는 중인데, 나는 짓눌린 채 침묵 속에 갇혀있다.
그렇게 한참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메고 있는 중 나의 침묵을 찢으며 날아드는 고성의 외침: “기억나지 않는다고, 기억나지 않는다니까!”
순간, 소름이 끼친다. 그가 나에게 했던 항변, 바로 그것이다. “몰라, 나도 몰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었지.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외침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때야 비로소 소리가 내 입 밖으로 튀어 나간다. “기억이 안 난다고? 어떻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어!” 암흑 저편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동일한 외침. 나의 동일한 반응: “어떻게 기억이 안 나! 어떻게 기억이 안 난다고 할 수가 있냐고!” 나는 울부짖는다.
한 인간이 생애 전체를 통해 흘리는 눈물에 총량이라는 것이 있다면, 4년 전, 난 그 총량을 다 채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눈물은, 나올 눈물이란 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나, 오늘 이게 대체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선생님께서 다가오셔서 “누구와 대화했어요?”라고 물으셨다. 기다려 주시다가 어김없이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를 덧붙이셨다. 겨우 대답했다. “못,하,겠어요.” 말 그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슬픔과 분노로 감정을 주최하기가 힘들었다. 정상적인 입모양을 만들어 발화하기 힘들 정도로 거센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을 하려하자 입 주변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 일그러졌고, 입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훈련 후에 한 참가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라며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선생님께서는 “보물창고”라고 부르셨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 깊숙이에 박혀 있거나 부유하는 중인 모든 기억, 그 기억이 동반하는 모든 감정. 그 보물창고 안 보물의 진가는, 필요한 때에 필요에 맞는 적절한 소환과 활용을 통해 발휘될 수 있다. 감정의 능숙한 소환과 활용 능력은 외롭고도 지난한 연습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저다마 인생을 건너는 우리가 대면했던 모든 후회와 상처, 모든 꿈과 환희. 모든 깨달음 혹은 치유의 순간을 하나하나 꺼내어 세심하게 살펴보고,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공유하는 일, 그렇게 함으로써 깊고 확장된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일, 나아가 연대하는 일, 이 “건너기”를 매번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고 받는 일, 이 (지극히 사소한 듯하면서도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일들이 바로 배우가 하는 일이 아닐까.
2. Questions for Character & Scene Analysis
이제 독백 훈련에 돌입한다. 작품을 대하는 일이다. 면밀한 인물 분석이 필요하다. 이 작업을 할 때 답해야 하는 질문을 하나하나 짚어 주셨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2.1. 리 스트라스버그의 아홉 가지 질문
1) Who am I?
- 나는 누구인가? 마치 나의 전기를 써내려가듯 이전 삶을 상상력으로 현재 성격형성까지의 과정을 짚어본다.
2) What is happening here?
_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
3) What is my relationship to my partner?
- 나의 대상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4) What if, the author hasn’t written these words, what would I say?
- 작가가 이런 대사를 쓰지 않았다라고 가정해보자. 나는 어떻게 말하겠는가?
5) Where am I?
-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단순히 개관화된 물리적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인물, 혹은 이 공간과의 관계성에서 인식하는 공간의 개념이다. 예) 언니와 추억이 깃든 공간, 첫사랑을 만난 공간 등.)
6) What happened prior to this scene?
- 이 장면 바로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전의 이전, 이전 이전의 이전, 이런 식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나(인물)의 탄생의 순간에까지도 이룰 수 있고, 또 다른 나(인물)를 발견할 수도 있다.)
7) What do I want? What am I doing here?
- 내가 원하는 바, 나의 욕구는 무엇인가? 나는 이 순간,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8) When is this?
- 지금 나는 어떤 순간에 처해 있는가? 이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 (나의 행동, 말투 등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 눈을 뜨자마자 슬리퍼를 끌고 시장을 한 바퀴 돌 때와 호텔 로비에서 걸어갈 때 나의 걸음걸이는 다를 것이다.)
9) Why am I doing what I am doing? Why am I saying this?
- 나는 왜 지금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런 말을 있는가? (김진근 마스터의 선생님께서 강조하셨던 말씀인즉, 절대로 “how” 즉, 주어진 대사를 “어떻게 말할까”에 대해 고민하지 마라. “어떻게 말해야 할까”가 아니라 “왜 이 말을 하는가”에 답해야 한다. 기술, 방법에 대한 질문이 아닌, 본질과 목적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다.)
2.2. 인물 분석을 위한 다섯 가지 질문
1) What is my need? (What is my goal? What do I want?)
-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내가 필요로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2) How important is my need?
- 내가 원하는 그것은 얼마큼이나 중요한 것인가?
3) How far am I willing to go to get that need?
-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들을 나는 얼만큼까지 감수하려 하는가?
-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할 댓가가 있다. 나는 과연 얼만큼의 댓가를 치르고자 하는가?
- 그 목표를 이루는 일에 나는 얼만큼 간절한가?
4) What is my obstacle?
- 내 앞에 놓인 장애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무엇인가? (바로 이 장애물 때문에 드라마가 생긴다.)
5) What is my relationship to my partner?
- 상대 인물과 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과제]
선택한 독백을 10번이고 20번이고 필사하라. 한 단어 한 단어 천천히 쓰면서 깊이 생각해보라. 생각하면서 써라.
첫댓글 저도 이완을 하면서 한 쪽이 불편하면 왜 불편하지->그 상황에서 무리하지 말걸…->오늘은 다른 부위하는 날인데-> 조만간 가족여행 갈 땐 운동을 어떻게 하지->가서는 어디를 갈까 등등 잡생각이 자연스럽게 파생되면서 오히려 훨씬 이완되었던 것 같아요. 저도 ‘이런 방식으로도 이완될 수 있나’라는 궁금증을 품고 있었는데 공감되는 말씀을 해주셔서 재밌게 읽고 갑니다!
7년전 가억과..보물창고! 가슴에 새길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