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입력: 2019. 12.21. 02:18/ 글쓴이: Sukwon Kim)
(몇년전 어디서 읽다가 보관해 오던 문서인데 다시 보니 엣날이 그립고 우리의 것이 사무쳐 옵니다, 석원)
식민지 시대에 발표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한국 근대 역사소설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내용 면에서뿐만 아니라 언어 표현 면에서도 '우리말의 보고(寶庫)이자 대해(大海)'로 불릴 만큼 빼어난 소설로 정평이 나 있다.
< 임꺽정>에는 여러 가지 '밥'들이 등장한다.
① ...논둑에서 기승밥도 먹고 절에서 잿밥도 먹고 <1권>
② 우리도 자기네와 같이 입쌀밥만 먹고 지내는 팔자인 줄 아는게야. <1권>
③ ...너를 맨밥 먹이기 답답해서 양식하고 반찬하고 얻어 왔다. <2권>
④ ...아홉 살에 아버지마저 여읜 뒤로 맏형수에게 눈칫밥 얻어먹게 되어 고생맛을 알기 시작하였다. <4권>
⑤ 유복이가 우티골 와서 어느 농가에서 사잇밥을 얻어먹고 <4권>
⑥ ...조팝으로 주린 배를 채우며 뜰 앞에 앉아서 해를 보냈었습니다. <4권>
⑦ "나두 첫국밥 같이 먹을라네." <4권>
⑧ "할아버지 턱찌끼 먹기 싫소. 그대로 주우." <4권>
⑨ ...병인이 개춘이 되며부터 조금조금 나아서 중둥밥까지 달게 먹게 되었다. <6권>
⑩ "이애가 저녁을 안 먹었다는데 먹일 밥이 있겠나?"
"숫밥은 없지만 상제님 얼마 안 잡수신 대궁이 그대로 있습니다." <10권>
인용문 ①의 '기승밥'은 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논둑에서 먹는 밥을, '잿밥'은 부처 앞에 놓는 밥을 이른다. ② '입쌀밥'은 흰쌀로, ⑥의 '조팝'은 맨 좁쌀로 지은 밥을 각각 뜻한다. 그리고 ③의 '맨밥'은 반찬을 갖추지 않은 밥을, ④ '눈칫밥'은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얻어먹는 밥을, ⑤ '사잇밥'은 끼니 밖에 참참이 먹는 음식 즉 샛밥을 말한다. ⑦ '첫국밥'은 해산 후 산모가 처음으로 먹는 미역국과 흰쌀밥을, ⑨ '중둥밥'은 식은 밥에 물을 조금 치고 다시 무르게 끓인 밥을, ⑧ '턱찌끼'는 먹다 남은 음식, '대궁'은 먹다 남은 밥을 이른다. 그럼 ⑩의 '숫밥'은 어떤 밥일까. '다른 것이 섞이거나 더럽혀지지 않고 본디 생긴 그대로'라는 뜻을 지닌 접두어 '숫'과 그 말이 덧붙은 '숫처녀·숫총각·숫보기' 등의 말과를 상호 연관 지어 생각해 볼 때 이 말은, '하나도 손대지 않고 솥에서 처음 그릇에 담은 그대로의 밥', 다시 말해서 남이 손대지 아니한 밥임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2002년 오늘도 우리는 주위에서 위에 열거한 밥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열 개의 밥 이름 중 우리가 실제 말하고 듣는 '밥'은 몇 개나 될까? 물론 시대가 변하여 여러 가지 음식의 이름이 그저 '밥'을 대신하는 이름으로 쓰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위에 열거한 10 개의 밥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살려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그렇게 쓰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밥'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재미있는 표현을 보자.
우리는 흔히 하루를 시간대로 나눌 때 아침·점심·저녁·밤 등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여름철의 오후 9시~10시를 저녁이라기에는 너무 늦고 그렇다고 한밤중이라 하기에는 좀 이르다. <임꺽정>에는 이 같은 '잠들기 전의 그다지 늦지 아니한 밤'을 뜻하는 '밤저녁'이란 말이 무려 20여 회 이상 나온다. 그러니 <임꺽정>을 읽은 사람은 바로 '잠들기 전의 그다지 늦지 아니한 밤'을 '밤저녁'이라 말할 수 있다. <임꺽정>이란 소설이 우리에게 잊혀진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내게두 절이나 한번 하게. 나두 나이 자네버덤 많아."하고 천왕동이는 나이를 자세하고 "나는 인제 어른이야."하고 오주는 어른을 내세우다가 나이와 어른을 비겨버리고 두 사람은 곧 서로 너나들이를 하였다. <4권>
흔히 나이를 들먹이며 '어디다 반말이야?'라거나, '맞먹지 마'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렇게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 나이가 좀 차이가 나도 서로 맞먹는 사이 즉,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부르며 터놓고 지내는 사이'를 뜻하는 말이 곧 '너나들이'이다.
* "콩알이 무어냐?"하고 물으니 유복이가 싱글벙글하며 "매부더러 물어 보오. 입살에..."하고 말하는 중에 금동이가 "이 자식이."하고 떠다밀어서 유복이가 쓰러지니 섭섭이가 이것을 보고 "아이고 잘코사니야."하고 방그레 웃었다. <2권>
평소 행동이 얄미운 사람이 불행이나 잘못되는 일을 당하게 되면 속으로 고소하게 여기며 '쌤통이다'라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비속어이고 바른말은 '잘코사니'다.
* 꺽정이가 그 사람의 손을 쥐고 돌아서서 한번 떠다밀었더니 그 사람은 고사하고 그 사람 뒤에 겹겹이 섰던 구경꾼이 장기튀김으로 자빠졌다. <2권>
팻말이 연이어 넘어지듯이 어떤 현상이 인접 지역으로 파급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도미노'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도미노'는 외래어이고 바른 우리말이 '장기튀김'이다. 즉 한군데에서 생긴 일의 영향이 다른 데에 잇달아서 미치게 되는 것을 '장기튀김'이라 한다. 이런 어휘들이 <임꺽정>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다.
< 임꺽정>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 중에 오늘날 되살려 씀직한 순우리말의 예를 몇 개만 들어 본다.
개잠: 아침에 깨었다가 다시 자는 잠
겉잠: 깊이 들지 못한 잠
겨끔내기: 서로 번갈아 하기
꾀꾀로: 가끔가끔 남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남나중: 남보다 나중
빌밋하다: 얼추 비슷하다
자욱길: 사람 다닌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 나무꾼이나 다니는 희미한 길
첫닭울이: 새벽 첫닭이 울 무렵
하루돌이: 만 하루가 되어 한번씩
휘뚜루: 무엇에나 닥치는 대로 쓰일 만하게
<임꺽정>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우리말 단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즐겨 쓸 수 있는 의태어 즉 중첩어들이, 소설을 읽는 맛을 살려 인물들의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은 물론이요 그 분위기까지 살리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 한어미의 자식도 오롱이조롱이다. 같은 선생의 제자가 어째서 저 모양이람. <3권>
* ...꺽정이가 왁달박달한 사람이지만 병든 아비에게 곰살궂게 한다고 아들을 칭찬하였다. <3권>
* 옴니암니 따질 것이 없이 피장파장해 버리세. <4권>
* 유산 나선 길을 조여갈 까닭도 없겠지만 수석이 좋다고 쉬고 단풍이 곱다고 쉬고 곰배곰배 쉬여서 일백삼십 리 길을 사흘에도 해동갑하여 왔다. <9권>
단지 위에 열거한 것만이 아니다. <임꺽정> 단 한 편의 소설 속에(물론 대하소설이지만) 대략 590여 종의 중첩어가 나온다. 그 중 특이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건둥반둥: 반둥건둥. 일을 겉날리며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고 중도에서 그만두는 모양
겸두겸두: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아울러 함을 이르는 말
고주리미주리: 고주알미주알. 즉 아주 잘고 소소한 데 이르기까지 죄다 드러내는 모양
꾀송꾀송: 달콤한 말로 남을 자꾸 꾀는 모양
납신납신: 입을 경솔하게 자꾸 놀리며 말하는 모양
너미룩내미룩: 서로 상대편으로 책임을 떠넘기어 미루는 모양
너푼너푼: 가볍게 자꾸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양
댕갈댕갈: 맑고 고운 소리가 구르듯이 가볍게 잇달아 나는 모양
되숭대숭: 여러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종작 없이 지껄이는 모양
두세두세: 약간 동안을 두고 서로 말을 띄엄띄엄 주고 받는 소리 또는 모양
마닐마닐: 음식이 씹어먹기 알맞게 무르고 보드라운 모양
맹꽁징꽁: 남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시끄럽게 지껄이는 소리를 비겨 이르는 말
솔랑솔랑: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양
시벌시벌: 시부렁시부렁. 쓸데 없는 말로 주책없이 함부로 자꾸 지껄이는 모양
씩둑꺽둑: 이런 말 저런 말로 수다스럽게 자주 지껄이는 모양
어뜩비뜩: 행동이 온당하지 못한 모양
저적저적: 발걸음을 천천히 내디디며 걷는 모양
진동한동: 매우 급하거나 바빠서 분주히 서두르는 모양
쭐레쭐레: 까불거리며 경망스레 행동하는 모양
초싹초싹: 가볍게 자꾸 움직이는 모양
회창회창: 기다란 물건이 탄력있게 휘어지며 한들거리는 모양
이렇듯이 <임꺽정>은 다양한 중첩어, 의태어를 시의 적절하게 요소요소에 배치함으로써, 명료한 의미전달은 물론 미묘한 어감을 잘 살려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어휘들이, 식민지 시대,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려고 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문학 작품에 표현되고 그것을 쉽게 읽고 썼을 어휘들이, 왜 요즈음의 우리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냐는 것이다. 분명 4·50년 전에 우리들이 또렷하게 썼던 어휘들이기에 그 안타까움은 클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말은 서구 외래어의 무분별한 유입과, 사이버 공간에서의 왜곡된 언어 사용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언어 정체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한 단서를 이 <임꺽정>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벽초는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흉계를 간파하고 <임꺽정>을 통해 우리의 말과 얼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였고, 그렇기에 그의 작품 <임꺽정>은 우리말의 보고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름다운 우리말에 얼마만큼 친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