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27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요한 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보이지 않는 손
오늘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어 함께 나누고자합니다.
이 자매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자매이고 세례 받은 지도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자매는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어서 말도 아주 천천히 하고 남들처럼 빨리 걷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믿음이 조금 생긴 것 같아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 전에 남편이 이혼하자고 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이혼하자고 한 이유는 남편이 경제적인 이유로 살림을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애가 있는 이 자매는 이혼하기가 싫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묵주기도 5단씩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말이 느리기 때문에 5단 바치는데 30분이 넘게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 좋은 일만 벌어지더랍니다.
접시를 닦다가 떨어뜨려서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 하였고, 수영장을 다니는데 잡고 있던 매트를 놓쳐서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났고,
또 한 번은 수영장 버스가 이 자매의 장애를 생각하지 않고 내리지도 않았는데 출발하여 길에 떨어져 크게 다칠 뻔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도 ‘기도를 드리는데 왜 이렇게 힘든 일만 겹치는가?’하며 의아해 하는데, 그 자매가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겪는 것을 보고는 남편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자매를 떠나면 이 자매 혼자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으니 자신이 옆에 있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열심히 함께 잘 살아보자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 이렇게 힘겨운 사건들을 통해 남편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셨구나!’ 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 사람들이고 아버지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께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간추리면,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믿음에 도달하는데, 그 이끄심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 그리스도께 오게 된 것입니다.
위 자매도 처음엔 그 어려움들이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었음을 몰랐지만 나중에는 그 손이 자신을 믿음에로 이끌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보이지 않는 손을 보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아퀼라와 브리스킬라의 이름을 지닌 부부가 나옵니다.
전승에 의하면 독수리라는 뜻의 이름인 아퀼라는 유다인이었고 브리스킬라는 로마 귀족 출신의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브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에게 중대한 인생의 시련이 닥칩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정치적 이유에서 유다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브리스킬라는 로마에서 시민권을 상실하고 남편과 함께 외국으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코린토로 건너갔습니다.
브리스킬라 부부의 직업은 장막 제조업이었습니다.
그들은 코린토로 이주한 후에도 여전히 장막 제조를 하면서 생활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퀼라 부부는 사도 바오로와 우연하게 첫 만남을 갖습니다.
“안녕하시오? 나는 바오로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는 사람입니다.
같이 일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와의 만남은 브리스킬라 부부에게 마침내 새로운 인생의 장이 펼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테네에서 전교 결과가 여의치 않아 풀이 죽어 코린토로 돌아온 사도 바오로에게
거처를 제공하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함께 살면서 일을 같이 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들 부부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를 바오로에게, 또 바오로를 그 부부에게 인도한 것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였습니다.
로마 황제의 추방령, 혹은 바오로가 천막 만드는 기술을 가진 것을 통해 그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하느님이 만나게 해 주셨다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고 항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 있는
필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혹은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이들 안에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혹은 내가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한 교회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고 크게 부서졌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은 두 손만이 떨어져 나간 채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이 조각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이전보다 더 큰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느 날 한 조각가가 그리스도상을 보고 손을 만들어 붙이자고 사목회에 건의했는데, 그날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바로 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도 하느님의 손길로 그리스도께 인도되었다면, 우리도 그 보답으로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보이지 않는 손이 되었다는 것이 곧 그분의 일부분, 즉 신성, 곧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7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요한 6,44-51
오늘 우리는 얼마나 큰 열정과 적극성으로 성경을 읽습니까?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은 아주 특별한 인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 뵙고 경배하기 위해 멀고 먼 아프리카 대륙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예루살렘에까지 순례를 온 칸다케 여왕의 내시입니다.
그 내시는 우리나라 사극에 나오는 내시와는 격을 달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여왕의 재정을 총 책임지던 고위관리였습니다.
비록 내시였지만 권력자였습니다.
시종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온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여왕으로부터 신임을 받던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참 진리를 찾기 위해 오늘날은 물론 당시로서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왕복 3,500Km 이상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한 신앙의 순례자요, 진리의 탐구자였습니다.
그는 철학, 문화, 에디오피아의 역사 등등 많은 것을 알았지만, 결국 예수님 안에서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의 열렬함이 오늘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는 뜨뜨미지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서면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돋보이는 것 또 한 가지, 초집중력이었습니다.
말씀 안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성경 말씀에 집중 또 집중했습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성경책을 펴들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사야서를 읽고 있던 그를 향해 성령의 손길에 이끌린 필립포스가 다가가 묻습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사도행전 8장 30절)
내시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내시는 필리포스를 향해 마차 위로 올라와 자기 곁에 앉아 말씀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초대합니다.
신앙의 진리, 말씀에 대한 내시의 열정과 적극성이 돋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큰 열정과 적극성으로 성경을 읽습니까?
오늘 우리의 진리를 향한 탐구열은 어느 정도입니까?
신앙의 진리를 찾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목숨 걸고 찾아온 내시에게는 못미치겠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에 대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요구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3주간 목요일>
(2023. 4. 27. 목)(요한 6,44-51)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7-51).”
여기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에게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만 보고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무조건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어떤 권한으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자비’이고 ‘은총’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겸손하게 주님께 간청할 뿐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력의 원천’이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너희 조상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받아먹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았다.” 라는 뜻입니다.
‘만나’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굶어죽지 않게 하려고 하신 일이지만, 사람들이 ‘만나’가 나타내는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았다면, 그리고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만 집중했다면, ‘만나’를 통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하루치 식사로만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는 말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들이 원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니고, 자기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은 하느님 쪽의 의무이고, ‘만나’를 받아먹는 것은 자기들 쪽의 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지극히 오만한 생각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생각입니다.
‘만나’가 내리기 전에 그들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2-3)”
이 말은, 이집트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먹을 것 없는 광야로 데리고 와서 굶어죽게 하느냐는 불평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먼저 하느님께 노예생활에서 구해 달라고 간청했던 사실을(탈출 2,23)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그들은 ‘만나’ 자체에 대해서도 불평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이 말은 날마다 ‘만나’만 먹으니까 지겹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셨는데도 감사드리지는 않고 그런 불평만 했으니,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고,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51절).” 라는 말씀은, 앞의 50절과 ‘뜻이 같은 말씀’인데, 같은 말씀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살아 있는’이라는 말은, 물질로서의 빵과는 다르게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주는 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도 영원히 살아 있는 힘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말씀은, “나 자신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의 살이다.”는, 뜻으로는 “나 자신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성체성사’를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 빵은 바로 나 자신이다.” 라고 표현하시지 않고 “나의 살이다.” 라고 표현하셨을까?
‘살’은 ‘몸’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 말이고, ‘몸’은 여기서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당신의 ‘생명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의 몸을(생명력을) 받아먹게 되고, 그 힘으로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성체는 받아먹기만 하면 누구나 무조건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마법의 음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체를 제대로 받아먹으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즉 하나가 되려고 노력해야 하고, 예수님 안에서, 또 예수님과 함께 살아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 없이 수동적으로 성체를 받아먹기만 한다면, ‘만나를 먹고도 죽은’ 구약시대 백성들처럼
되어버릴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