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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제도라는 선물
우리 세상에서 제도(institution)라는 말보다 더 인기 없는 단어는 많지 않다. 정신 질환이나 인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보호 시설에 보내져’(institutionalized)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삶 같지 않은 삶을 보내는 끔찍한 경우를 우리는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성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며서도 ‘제도화된 종교’와는 거리를 둔다. 소위 X세대라고 불리는 내가 속한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전 세대가 차지하고 있던 제도권 기관의 책임자 자리를 오래도록 회피하고 있고, 최근까지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유명한 그리스도인 강사인 랍 벨(Rob Bell)이 2010년 10월 어느 목사들 모임에서 “여러분은 혁명에 동참하려고 들어왔는데 결국 경영자가 되어 버렸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라고 수사적으로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우리 대부분의 생각을 대변해 주었다. 벨의 질문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제도권에 대한 깊은 의심으로, 이 의심은 급진적 혁명가에 대한 이상적 동경에도, 단순한 기능적 관료로 전락하는 데 대한 두려움에도 모두 존재한다. 그래서 1년 후 벨이 자신이 세운 교회를 떠나 ‘천사들의 도시’인 로스엔젤레스로 제도권의 제약을 덜 ㅂ다는 삶을 찾아간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러나 제도는 파워의 선물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제도는 번영에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제도란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조직화된 인간 행동 양식에 사회학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미식축구공’은 하나의 문화 인공물이고 ‘미식축구’는 문화적 제도다. 이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있는 행동, 신념, 양식, 가능성의 풍부하고 복합적인 체계다 그리고 이 제도라는 넓은 의미의 단어 안에서 우리의 가장 의미 있는 인간 경험들이 일어난다. 문화 형성의 중심에 제도가 있다. 이는 제도가 인간 번영의 중심에, 우리가 ‘샬롬’(shalom)이라고 부르는 창조세계의 포괄적 번영의 중심에 있다는 뜻이다. 사실, 제도가 없다면 인간은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허약하고 쓸모없어질 것이다.
제도는 파워 즉 세상을 만드는 능력을 창조하고 분배한다. 제도로서의 미식축구 경기는 하나님 형상을 담는 기회가 되는데 제도가 없는 세상에서는 이런 기회가 블가능하다. 쿼터백이 필드 저 아래 좋은 위치에 있는 와이드 리시버를 확인하고 완벽하게 목표를 향한 패스를 할 때 관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또는 말인 우리가 상대 팀을 응원하고 있다면 고개를 저으며 떨떠름한 칭찬을 보낸다). 이때 우리는 인간이 엄청난 긴장 아래서 놀라운 솜씨로 힘과 민첩성과 판단력과 예지를 발휘하는 번영의 구체적 장면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번영의 순간도 그 장면을 감싸고 있는 제도가 없이는 별 의미가 없다. 패스를 막고 연결하기 위해 경합하는 수비 진영과 공격 전영, 공정한 경기를 보장하는 심판들, 경기 구상과 완벽한 플레이를 돕는 코치들, 그리고 관전하고 응원하며 경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기억을 간직하는 팬들이 이러한 제도를 구성한다. 이 모든 다른 참여자들 없이는 아무리 볼 만한 패스도 별로 볼 만하지 못할 것이고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경기의 모든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기록하고 연습하고 재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경기에서 파워를 부여받는 사람은 쿼터백이나 리시버만이 아니다. 따라서 경기에서 파워를 부여받는 사람은 쿼터백이나 리시버만이 아니다. 다른 모든 ‘참여자들’이 경기장에서나 관중석에서 각자 이 세상을 만드는 데 참여한다. 그들이 저마다 고유한 문화 형성의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과거와 현재를 통해 또 드른 이들이 이 경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어느 한겨울의 일요일 오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미식축구라는 제도를 통해 다양하게 하나님 형상을 나타내는 역할을 맡는다. 만약에 이 제도가 없어져 버린다면 그와 관련된 물건들은 전부 남겨 놓는다 하더라도 이 제도가 가능하게 만드는 독특한 파워들이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고 미국의 일요일 오후는 훨씬 더 지루한 시간이 되고 말 것이다. 지루함이란 결국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데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가꿀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지루함을 느끼고 당연히 불만에 빠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도라는 말 자체가 지루하게 들리고 무슨 창조성이나 개발은 찾아볼 수 없는 곳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이 말에 담긴 최대한의 의미로 보면 제도는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각기 놀랍게 다양한 모습으로 번영하는 환경이다. 건강한 제도들은 궁극적으로 지루함에 대한 치료제이고 이들은 우리의 삶이 생기 있고 의미 있고 살아 있게 되는 배경이다.
이는 제도가 항상 유익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은 그 반대다. 제도들은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와 불의라는 왜곡도 가능하게 만들고 가장 심각하고 끈질긴 방법으로 이를 지속시킨다. 또한 이는 제도가 유익한 동시에 유해하기도 하다는 의미 역시 아니다. 미식축구는 힘과 공격으로 이루어지는 경기로서 일종의 규격화된 전쟁인데,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는 심판과 경기장과 응원 군중을 포함한 정교한 다른 제도들이 말 그대로 죽기까지 싸우는 전투에 동원된다. 미식축구는 분명 고대 검투사들의 싸움이 개선된 형태다. 그러나 일요일 오후에 그 많은 수백만 명을 열광시킴으로써 미식축구는 인류의 포괄적 번영에 훨씬 더 적합할 수 있는 다른 제도들을 밀어내 버리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을 투자할 제도에 대하여 창조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을 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삶의 의미와 힘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 제도들이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단지 우상숭배와 불의를 낳는다고 생각하는지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교회라는 제도를 떠나 할리우드라는 제도를 찾아갈 수도 있고 또는 정반대의 길을 갈 수도 있지만 만일 우리가 제도라는 것을 아예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번영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번영할 기회를 창조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의 포괄적 번영을 위해 우리가 파워를 쓰기 원한다면 우리는 제도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며, 어떤 경우 실패하는지, 또 어떻게 우리가 제도의 건전성을 지키고 갱신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미식축구, 경기장, 선수, 경기
제도에는 네 가지 필수 요소가 있다. 미식축구의 예를 들어 보자. 이 경기는 특정한 인공물(artifacts)에 의존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만 해도 미식축구공, 헬멧, 어깨보호 패드, 높이 솟은 골대 등이다. 거의 모든 완성된 제도에는 실로 그 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마치 상징처럼 쓰일 수 있는 인공물이 한두 가지 있다. 미식축구공이나 경기용 헬멧, 양쪽에 세워진 골대는 모두 미국 사람들에게 미식축구라고 불리는 복합적 제도 전체를 떠올리게 하는 데 필요하다. 이런 인공물은 청소년 리그나 길거리 축구부터 슈퍼볼에 이르기까지 미식축구 경기가 행해지는 다양한 상황에 맞게 대량으로 생산된다.
두 번째 문화적 사물도 미식축구라는 제도의 일부인데 비록 수는 적으나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바로 주요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이다. 더 작은 규모의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경기장 역시 인류의 문화 형성의 구체적 결과물이지만 그 압도적인 규모와 역할 면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경기장은 엄청난 강도와 의미를 지니는 경기가 진행되는 무대(arena)를 제공한다. 무대는 선수들뿐 아니라 코치들, 지원 요원들, 심판진, 방송 인력과 팬들을 포함한 모든 참여자가 완전히, 진심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하며 다른 관련 사물들이 가장 탁월한 기술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는 장소다.
제도로서의 미식축구에는 세 번째 문화적 사물이 필요한데 전적으로 무형물인 이것은 바로 경기의 규칙(rules)이다. 규칙들은 규정집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미식축구라는 제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전문 지식 안에 주로 존재하는데 반드시 선수나 코치, 심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관중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규칙은 허용되는 행위와 금지되는 행위 그리고 보상받는 행위와 벌받는 행위를 정해 준다.
마지막으로, 규칙은 각자의 역할(roles) 즉 제도 안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각 맡은 부분들을 기술한다. 각각의 역할은 그에 따르는 자유와 책임이 있으며, 각각 세상에 특유의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규칙은 번영하는 참가자가 된다는 것, 즉 주어진 역할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기술하거나 적어도 제안해 준다. 예를 들면 경기가 끝났을 때 한 선수를 최우수 선수로 선정하는, 불문율이지만 철석같이 지켜지는 규칙을 들 수 있다.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은 하나의 제도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구성 요소들이다. 미식축구 같은 경기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명확하게 규정된다. 사실 경기라는 것은 이 네 가지 요소가 매우 정확하게 명시될 수 있는 제도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는 이 선수가 이웃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경기에서 승패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알 수 있고, 대부분의 역할은(팬들도 포함해서) 서로 다른 복장이나 표시로 구별된다. 인간의 다른 제도들은 그렇게 분명히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요소는 미식축구에서만큼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모두 존재하고 있다. 제도를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이라는 네 요소의 지속적 집합체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런 것들이 사방에 있음을 보게 되고 거의 대부분의 인간 삶이 제도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정교한 ‘경기들’ 안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건강을 보살피는 것은 의료라는 제도다. 이를 위해 오늘날 서구 문화가 이용하는 인공물로는 체온계, 외과 수술 도구들, 혈압계, 흰 가운 등이 있다. 다른 문화권의 경우에는 침, 희귀하고 마술적인 부적 같은 것이 있다. 무대에 해당하는 것은 서구의 경우 의료 행위가 이루어지는 건물, 특히 의사의 진료실, 약국, 병원이 들어서 있는 장소다. 의료에는 수많은 규칙이 있다. 어떤 규칙은 투약 처방전처럼 글로 쓰인다. 어떤 규칙은 수련 과정을 통하여, 예컨대 흉부 통증을 진찰하는 방법처럼 명료하게 전수된다. 어떤 규칙은, 검진을 받으려면 환자가 옷을 벗을 것이라는 기대와 같이, 암묵적이지만 동일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의료에도 역할이 있다. 의사에게는 일정한 책임과 자유가 있고 간호사에게도, 약사에게도, 환자에게도 각기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 이러한 인공물과 무대들, 규칙들, 역할들이 모여 좋든 나쁘든 의료라는 제도가 이뤄지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요소들은 종종 서로 분리될 수 있으며 그때에도 제도는 어느 정도 기능한다. 미식축구에서 경기장을 빼더라도 뒤뜰에서 경기를 할 수 있는데 이것도 진정한 미식축구 경기다. 심지어 핵심 요소인 미식축구공이 빠질 수도 있다. 아무 표시도 없는 공터에서 서로 마주보는 대열을 갖춘 후에 중앙에서 한 선수가 낡은 헝겊으로 만든 공을 뒤에 선 사람에게 넘기고 그가 다시 같은 팀 사람에게 건네거나 패스하면 이 경기를 잘 아는 누구든지 이들이 미식축구를 하고 있다고 인식할 것이다. 규칙과 역할이 정해지면 경기를 구성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제도가 고유의 인공물들 및 무대들과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 행위만 하더라도 일정한 세트의 기구들, 즉 인공물이 있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의료의 규칙과 역할에 대해 교육받은 고도로 훈련된 의사라도 의약품이나 진찰과 치료를 위한 기구가 없으면 그들의 파워에 제약을 받는다. 의사들도 비행기에 탑승 중이거나 오지를 여행할 때 긴급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공물이 없으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공물이 있더라도 마땅한 무대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일상적인 진료라도 안전하게 시행되려면 병원의 외과적 소득 시설이나 잘 정돈된 진료실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전문 의료인에게 필요한 규칙과 역할에 대한 훈련 과정이 없이는 아무리 의료 장비를 잘 갖춘 병원이라도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무용지물이 된다.
인공물과 무대와 규칙과 역할이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존속 가능한 제도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의 특정한 조합만이 한 제도를 대규모로 공유되는 문화 속에서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뒤뜰이나 길거리에서 즉흥적으로 하는 축구 경기도 미식축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미식축구가 오늘날 미국인의 생활에서 구사하는 만큼의 힘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힘은 장비와 경기장, 훨씬 더 정교한 규칙과 더 세분화된 역할에서 나온다. 이와 같이 문화적 변화가 광범위한 적용성과 영향력을 갖추려면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의 창조를 통해 문화의 혁신이 사회에 적용될 수 있도록 제도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제도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진행될 수 있다. 현대 의학은 여러 세대에 걸쳐 창조되었는데 의술의 상징인 히포크라테스의 지방이[Hippocratic caduceus, 아마도 저자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rod of Aselepius)를 의도한 듯하다. ‘카두케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가리키는 말이고 본래 의술의 상징은 히포크라테스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인데 미국에서는 혼동되어 사용된다.]라는 고대 유물이 상기시켜 주듯이 그 뿌리는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대로 오늘날과 같ㅌ은 미디어 시대에는 제도화가 놀랄 만한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기도 한다. 하버드 대학교 학생들이 사진과 짧은 소식 그리고 그들에게 중요한 동기생들 간의 교우관계 상태를 공유하기 위해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 ‘더 페이스북’(The Facebook)의 제도화를 살펴보자. 2004년 페이스북은 하버드나 그밖에 접속이 가능했던 소수의 대학에서 열렬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하나의 문화 인공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6년에 이것이 이메일 주소를 가진 13세 이상의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자 순식간에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사회관계망’(social networking)이라는 무수히 많은 경기가 벌어지는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성문 또는 불문의 규칙들이 발전되었는데, 어떤 것들은 페이스북의 프로그래머들과 사용자들간의 격론을 통해 작성되었고 다른 것들은 수백만 사용자들이 그들과 새로이 연결된 ‘친구’들과 관계를 설정하는 가운데 생겨났다. 다른 미디어와 공공 기관이 이런 규칙들을 다음과 같은 골치 아픈 지엽적 사안들을 다루는 가운데 정리되었다. 고등학교 교사들이 그들의 학생들과 ‘친구’를 맺어도 되겠는가? 또 그 반대의 경우는? 14세의 사용자 또는 24세의 사용자가 부모나 미래의 고용주, 또는 일반 대중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사진들은 어떤 종류겠는가?
그런 다음 페이스북이 주식 시장에 상장되어 ‘기업 공개’를 하면서 페이스북의 제도화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자체의 인공물, 규칙, 역할을 가지고 무대(이 경우에는 시장)에 합류함으로써 세계 경제 내의 제도권 기관(institution)으로서 사업을 일으킨 것이다.
페이스북이 제도화하는 각 과정마다 파워가 창조되고 재분배되었다. ‘재분배’라고 한 것은 항상 존재했던 사회적 관계망을 페이스북이 가시화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어 냈기 때문이고 ‘창조’라고 한 것은 페이스북이 사용자들과 소유자들에게 새로운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을 가져다줌으로써 그 안에서 여러 형태의 우상숭배와 불의가 영속화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가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제도화는 단지 기존의 파워 형태를 재종정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부(wealth)라고 부르는 재정적 형태의 파워를 포함한 새로운 파워를 창조했다. 세상에는 우상숭배와 불의를 위한 더 많은 파워가 존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형상을 지니기 위한 더 많은 파워도 존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더 페이스북’이라는 하나의 문화 인공물이 ‘페이스북’이라는 제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제도는 문화가 세계 전역으로 퍼질 수 있게 해 준다. 또 하나의 축구 즉 미국인들이 사커(soccer)라고 부르기를 고집하는 경기는 세계에서 가장 가시적인 제도 중 하나인데 모든 대륙에서 대략 동일한 규칙과 역할을 가지고 있고 그 무대는 지구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영웅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을 지닌 존재에게 맡기신 위힘 명령 중 일부가 ‘열매 맺고 번성’하는 것이라면, 제도들은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자녀 열매 맺은 결과를 번성하게 해 주어 한 개인이나 한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그 결과가 미치게 한다.
그러나 제도는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을 해낸다. 제도는 문화가 시간을 넘어 인류 역사의 여러 세대에 걸쳐 전파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인공물과 무대와 규칙과 역할의 한 체계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있을 때 제도화의 과정이 진정으로 완성된다. 가장 강력한 제도는 수십 세대에 걸쳐 상대적으로 변함이 없이 존속하다가 차츰 배경으로 사라지면서 집단의 문화적 무의식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이런 제도들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언어는 가장 오래 지속되는 인류의 제도 가운데 하나로, 단어, 책, 속담, 관용구 같은 인공물과 학교나 그장 같은 무대들과 문법 같은 규칙들 그리고 많은 언어에서 나타나는 성에 따른 어미 변화나 가까운 친구와 먼 관계를 지칭하는 형태의 변화 같은 역할들의 집합체다. 어떤 사람도 언어를 발명할 수 없다. 언어는 단순히 우리가 물려받은 세상, 과거 위에 세워진 풍요롭고 무궁무진한 세상의 일부다.
하나의 문화적 양식을 제도로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나는 최소한 3세대가 걸린다고 제안하고 싶다. 어떤 문화적 양식을 세 번째로 계승한 세대는 그 제도의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전화 통신이라는 제도를 예로 들어보자. 내 조부모가 어렸을 때 사시던 시골 마을에는 전화가 없었고 부모님은 손잡이를 돌려 통화를 하는 공동 전화를 사용하던 옛날 불편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전화 없는 집에 살아 본 적이 없다. 전화는 그저 내가 사는 세상이 유지하는 모든 생활양식의 일부일 뿐이다. 그 가운데 나는 이동 전화가 출현한 시대를 지나왔고(내 자동차에서 ‘카폰’으로 전화를 걸었던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 아이들은 휴대전화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내 손자들은 수화기를 들면 귀에 들리던 다이얼 신호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할 것 같다. 이들은 이동전화의 세 번째 세대이자 다른 종류의 전화는 알지 못하고 휴대전화가 신기한 문화 인공물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제도가 된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이다.
이런 것이 히브리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고 거듭 일컫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왜 이스라엘 민족은 단 한 세대가 아니라 3세대의 이름으로 거듭 불렸을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 후손들의 기억과 상상에 깊숙이 자리 잡아 미래 세대에 전달되려면, 그래서 수많은 세대가 지난 오늘날까지 그 최초의 언약이 이어질 만큼 깊이 새겨지려면 최소한 3세대가 걸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수십 세대에 걸쳐 펼쳐졌다. 그러나 창세기 즉, ‘시작’의 책이 셋째 세대인 야곱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창세기 12-50장에 기록된 기간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보증하는 결정적 인공물을 얻게 되는 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할례의 관습이다. 할례는 각 세대의 남성들에게 표시를 남겨서 이 유별난 민족을 항상 그들을 둘러싼 이방 민족들과 구별시킨다. 이 상고의 시기에도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이야기,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그의 창조세계를 다루시는 태고의 서사는 정식화되어 전수되었다. 그들은 또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고유한 새 이름을 얻었으며 그 이름들은 하나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을 통해 탄생했다.
같은 시기에 아브라함의 가족은 고대 근동의 수많은 군소 유목민 부족 가운데 하나에서 한 ‘나라’로 발전했다. 이집트라는 이방 제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한 민족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획득하는 무대가 되었다(이것이 마지막은 아닌데, 바빌론 포로 생활은 새로운 단계의 이스라엘 정체성을 위한 가혹한 시련이 될 것이고 나사렛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로마제국의 관원들과 마주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요셉의 출세로(출 1:5에 따르면 70명에 이르는 야곱의 직계자손으로 구성된) 대가족이 기근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한 ‘나라’를 이루었고 여러 세대가 지난 후 요셉과 바로의 우호적 관계가 잊히고 그 후손이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후에도 그들은 이집트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와 예배 양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창세기의 3세대를 거치는 동안 규칙과 역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와 관련된 것들이다. 고대 근동에는 각 부족 신들을 경배하기 위한 규칙과 역할들이 넘쳐났지만 이미 창세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족을 둘러산 주변 민족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규칙들을 고치고 역할들을 뒤집어 놓으셨다. 첫 세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서로 간에 그리고 때로는 적대적인 주변 민족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규칙과 역할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중요한 순간에 강력한 보호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향을 보이고 야곱과 에서는 볼화하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여종 하갈을 학대하고 마침내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버럼받기까지, 아브라함 가족의 이 모든 역기능적 책략들은 점차 절정으로 나아간다. 이 모든 갈등은 이스라엘 민족을 규정할 규칙들과 역할들을 위한 다툼을 구체화하며, 결국 형제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요셉이 그 형제들을 대면하고 다시 포용하며 “당신들은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구원의 말로써 몇 세대에 걸친 가족 간의 불신과 기만을 암묵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용서를 베풂으로 시원한 결말에 이른다. 창세기의 마지막 몇 장은 가장 근본적 규칙을 세우는데 즉 그들 서로와,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고 배반당할지라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복 주시고 구원하시되 그들 자신으로부터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4요소와 3세대
제도를 구성하기 위한 요건은 4요소와 3세대다. 즉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이 처음 창시된 세대의 자녀 세대가지 전수되는 것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하는 것을 게을리하여 이 요건을 지키지 못하면 결국 의미 있는 문화적 유산을 남기지 못하고 기껐해야 몇 가지 신기한 인공물과 희미한 회상의 기억으로 남게 된다. 마찬가지로 네 가지 필수 요소 중 한 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지속적인 결과를 남기지 못한다.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이라는 네 요소가 결합될 때에만 시간을 넘어 강력한 문화적 혁신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제도들은 세상을 가치 있게 만들어 내는 고도로 명확하고 의미 있고 귀중한 인공물에 기초하며, 특유의 적합한 무대에 자리를 잡고, 그 제도의 이야기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일련의 분명한 ‘규칙들’을 전달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맡을 일정 범위의 역할들을 제공한다. 이 영역들 중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제도는 의미가 약해지고 종종 다른 영향력도 사라진다.
문화에서 가장 견고한 제도는 무엇보다도 세대를 만들어 내는 것, 즉 가족이다. 자식을 생산하는 생물학적 과정은 성적 결합으로 번식하는 다른 피조물들과 공유하는 자연적 과정이지만 가족은 대단한 깊이와 지속력을 갖는 문화적 제도다. 인류 역사를 가능한 한 멀리까지 되짚어 보면 인간은 부모 자식 간의 생물학적 현실을 의미 있게 하는 문화적 제도를 소중히 여겨 왔음을 알게 된다. 물론 다양한 인류 문화에서 가족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해 왔다. 그러나 가족은 모든 문화에서 중심적 제도였는데 이 제도가 없이는 어떤 문화도 오랫동안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문화에는 가족과 연결된 인공물 즉 이 제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고유한 문화적 사물들이 있다. 이런 사물은 집안에만 있지 않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무실 칸막이와 택시 운전석을 장식하는 가족사진은 노동자의 부모와 아이들과 친척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삶에 고객이나 고용주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는 누군가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어떤 곳에서는 부모나 조상의 사진을 화환으로 장식하거나 한쪽 벽에 모셔 놓고 향을 피우기도 한다. 어머니날, 아버지날, 생일 같은 가족 기념일에는 각각의 의례와 인공물이 있다.
가족에게는 고유한 무대 즉 집이 있다. 집은 가족의 독특한 친밀함과 의존, 협동, 갈등이 일어나는 환경이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 형제자매는 각기 엄밀하게 말해서 자연이 부여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은 한 집에서 같이 살든 살지 않든 간에 생물학적 부모를 갖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물학적인 것에서 풍부하게 문화적인 것으로 옮겨 가기 위해서는 이들 역할이 어떤 무대에서 거의 항상 행해져야 하는데 어떤 무대도 집만큼 구성원 간 상호작용이 긴밀할 수 없다. 집에서 인간은 매일매일 밤낮으로 함께 자고 먹고 하면서 수년에서 수십 년간, 일이나 학교, 취미, 친구 관계가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함께 삶을 이어 간다. 집에서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 따라야 하는 기본적 규칙을 배우는데 이 규칙들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어떻게 연장자를 대하고 어떻게 아이들과 놀아 주는지, 무엇이 업무상 성공으로 인정되고 여가에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일은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절대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런 규칙은 대부분 우리가 그것을 배우고 있음을 깨닫기 훨씬전부터 학습된다. 그래서 집은 우리가 깨닫기 전에 우리를 문화 속에 자리 잡게 하여 우리 생애의 가장 활발한 성장기에 우리를 형성해 주고 또 다른 사람 생애의 가장 활발한 성장기에 우리를 형성해 주고 또 다른 사람 생애의 가장 활발한 성장기이자 가장 의존적인 시기에 그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우리를 참여하게 해 준다.
가족은 사람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한다. 부모와 자녀로서, 맏이, 둘째, 셋째, 막내로서의 역할을 포함한 형제와 자매로서, 조부모로서, 처가와 시가와 사위, 며느리로서, 삼촌, 고모, 이모와 사촌으로서 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동시에 몇 가지 역할을 맡고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그중 대부분의 역할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각각의 역할에는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규칙과 기대가 따르고 특별한 인공물 즉 아버지와 어머니가 끼고 있는 결혼반지 같은 것도 더해진다.
물론 거의 모든 가정이 다양한 이유로 기본 형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많은 경우 규칙과 역할은 이혼이라든가 별거 또는 이른 죽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변화들에 의해, 또는 그보다 천천히 그러나 더 꾸준하게 일어나는 변화들 즉 아이들이 자라고 부모가 늙어 가는 과정에서 역할의 변화들에 의해 헝클어진다. 그렇다고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가 이런 사건들 때문에 반드시 재정립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경우에도 이 제도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동일한 이상적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집 없는’(homeless) 가족일지라도 언젠가는 집을 구해 들어갈 꿈을 꿀 수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망 또는 이혼, 심지어 부모의 유기로 홀로 남겨진 아이들도 부모 역할을 채워 줄 사람을 갈망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동거하는 커플들 때문에 가정의 규칙이 개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개 둘 중 적어도 한 사람은 그 관계가 결국 결혼과 가정로 발전할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서구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공동체나 직업에 속한 사람들이 결혼을 미루고 동거 혹은 독신 부모의 삶으로 대체하며 그들 자신이 이 제도에 관련된 모든 인공물을 갖출 때까지 기다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도 자체는 규칙이 준수되건 위반되건 간에 강화되었다. 서구 문화에서 가장 심대한 문화적 혁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동성애 인권 운동이 진정으로 광범위한 추진력을 얻은 것은 미국에서 동성 간 결혼 합법화 주장과 동일시되면서인데 이는 가정에 대한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진보적이면서도 또한 매우 보수적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사실 인류 문화에서 제도가 이토록 파워를 갖는 이유는 설령 우리가 수행하는 현실은 전통적 이상에서 크게 벗어날지라도 여전히 제도는 우리의 기대와 희망을 형성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뒤뜰 경기의 쿼터백은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의 경기에 나간다면 아마 2분 이상 버티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공을 패스할 때 머릿속에 슈퍼볼을 그리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중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흠 많고 위태로운 가정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갈망하도록 배웠던 가정의 모습 그러나 실제로는 갖지 못했던 가정의 모습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번영하는가를 규정하는 제도의 파워다.
성(sex)와 제도
제도는 인간의 번영에 필수적이다. 번영은 단순히 수적 증가의 문제가 아니다. 다양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들에 핀 백합화가 영광스러운 것은 획일성 때문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획일성 때문도 아니고 공통된 모양 속에서 영광스러운 다양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름철 팔레스타인 산록에 피는 백합들은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춰 자라지 않는다. 그 백합들은 우글댄다. 부모의 유전자가 예측할 수 없고 반복되지 않는 조합으로 결합하여 이루는 양성생식의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수적 증가뿐 아니라 우글거림(teeming)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어느 자식도 부모와 똑같지 않다. 우리가 유전자의 발현에 대한 환경의 영향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어째서 유전자 염기서열이 동일한 쌍둥이라 할지라도 성격이나 재능 그리고 사명에서 미묘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가를 더 잘 이해할 수있게 된다. 창조주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은 우글거리게 되어 있다. 창조주가 그의 형상을 지닌 존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하셨을 때 이는 이 땅을 복제인간이나 기계적 복제품으로 가득 채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기묘하리만큼 다양하게 반영하며 세상에 충만하라는 것이었다.
유성생식은 생물학적 우글거림을 보장하며, 그래서 번영을 보장한다. 제도는 문화적 우글거림을 가능하게 하며, 그래서 번영을 가능하게 한다. 제도는 풍성한 다양화를 위한 여건들을 창조하고 보존한다. 우리의 물리적이거나 자연적인 형태만이 아니라 문화가 만들어 온 세계 속에서 우리가 담당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그렇다. 어느 정도 복잡한 제도에서 여러 참여자들의 역할은 분화되어 있다. 바꿔 말하자면 다양한 역할을 맡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파워를 행사한다. 축구의 경우 콜기퍼만이 경기 중 손을 사용할 ‘파워’를 갖는다. 심판만이 반칙을 선언할 수 있다. 선수들과 심판들만이 경기 중에 경기장 안에 들어갈 수 있고, 감독만이 어떤 선수를 경기에 들여보내고 어떤 선수를 빼낼 것인지 결정할 수 있으며 관중만이 테크니컬 파울을 염려하지 않고 상대 팀에 모욕적인 구호를 외칠 수 있다.
다양화는 제도 자체의 존재와 번영에 필수적이다. 경기장에 들어온 2만 명 군중이 모두 다 축구장에 들어가 경기를 뛰겠다고 하거나 모두 다 경기를 시작하고 끝낼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축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다양화는 인류의 번영에도 필수적이다. 최선의 상태에서 제도는 인간 삶의 다양한 능력과 심과 단계에 적합한 수많은 역할들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제도는 다양한 역할에 대한 자리를 만듦으로써 우리 모두가 필수적인 역할이나 책임이 없는 이를테면 수중 생활을 하는 고립된 단세포동물이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풍부한 가능성을 탐색할 기회를 부여 해 준다. 단일한 역할도, 이를테면 나의 경우 아들이라는 역할도, 여러 다른 시기에 다른 능력을 개발할 것을 요구한다. 어릴 적에 나는 의존과 복종을 배우고 실천했고, 청소년기에는 친구와의 유대와 가족에 충실할 의무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취할 것인가를 배웠고, 성년이 된 초기에는 크게 고통스러울 때나 즐거울 때 그리고 어디서 살며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부모님과 함께 문제를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더 나이가 들면, 내 부모님이 조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것을 하나의 지침으로 삼아 보자면, 부모님에게 새로 나타나는 병약함과 제약을 감당하면서 그분들이 인생의 마지막 기간에 건강상의 문제들을 처리해 나가시는 것을 도와드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부모님과 작별하고 애도하며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잊히고 말, 하나님 형상을 지니셨던 두 분의 삶을 간직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아들이나 딸의 역할은 모든 사람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어떻게든 감당하게 된다. 이 역할의 각 단계를 충실히 그리고 담대하게 감당하려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능력이 필요하고 또 그런 능력을 갖춰 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 안에서 우리들을 확장하고 형성하는 다른 역할도 감당한다. 삼촌으로서 나는 조카들을 대할 때, 내 자녀를 대하거나 내 친한 친구의 자녀들을 대할 때와는 다른 자세를 취한다. 이렇게 풍성한 여러 역할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 담긴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길을 탐험할 기회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제도는 생물학적으로 다르고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이 다른 남자와 여자가 함께 멍에를 짊어짐으로써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경험의 여지를 제공하여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아내, 어머니, 딸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반려자의 삶을 지켜보며 지원하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고도로 다양화된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 자리함으로써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삶이 번영하기 위해 탐색하고 표현해야 하는 광범위한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물론 모든 제도가 산비탈에 우글거리듯 피어 있는 야생화의 이미지에 맞는 것은 아니다.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 개회식은 놀랍도록 정밀하게 계획되어 마치 획일성의 완벽한 예를 보여주는 듯했다. 출연자 수천 명이 개개인의 차이가 전혀 나타나지 않도록 훈련되어 중국의 지도자들이 열망하는 ‘조화로운 사회’의 비전을 연출하였다. 일부 관중에게는 이러한 획일성이 감격적이었지만 다른 이들, 특히 서구인들에게는 섬뜩한 것이었다. 우리 서구인들은 개인 간의 차이를 가차 없이 깍아 내고 국가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사회를 불편하게 느낀다.
그러나 중국의 공식 비전인 ‘조화’를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할 때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다. 첫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과 2012년 런던 올리픽 개회식에서 드러난 현격한 문화적 차이는 그 자체로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우글거림’의 일부다. 인간 번영의 어떤 형태는 고도의 협동과 일치를 요구하는데, 높은 수준의 획일성을 특별히 중요시하는 문화는 그렇지 않으면 상실될 수도 있는,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다양성의 한 측면을 생생하게 보존해 온 것이다.
어떤 형태의 번영은 실제로 훈련된 획일성을 요구한다. 바이올린 독주자는 그의 악기가 가진 고유한 성능과 연주곡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찾아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아주 친숙한 곡으로부터도 위가 놀랄 만한 새로움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나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는 엄격히 통일된 강약과 명확도 그리고 운궁법을 지켜서 관현악 음향의 정점에 이르러야 한다. 수도원 운동은 중세 유럽에서 문화적 번영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제도 가운데 하나였는데 수도사들은 같은 옷을 입었고 순종을 서약했다. 그러나 이 획일적 공동체로부터 토머스 카힐(Thomas Cahill)이 약간 과정을 섞어서 “문명을 구원했다”라고 말한 문화적 보존과 창조가 이뤄졌다. 서구인의 눈에는 중국 당국이 추앙하는 조화가 단조로움에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 개인주의의 혼돈 속에서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인류의 가능성들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번영에는 우글거림이 필요하지만 또한 창세기의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창조하시니”(창 1:21)라는 찬사에 나타나듯 어떤 일관성과 질서도 필요하다. 세상의 우글거림은 “그 종류대로” 주어진 형식 안에서 이뤄지고 이는 세상의 피조물들에게 구조와 리듬과 양식을 부여한다. 진정한 샬롬 즉 포괄적 번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반영하는데 여기에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함께 있다. 우글거림이냐 질서냐, 다양성이냐 통일성이냐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다. 진실로 풍성한 삶은 ‘하나’와 ‘여럿’이 ‘셋’ 안에서 만나는 곳에서 발견된다. 건전한 제도는 놀라움과 다양성이 번영할 수 있는 질서 잡힌 맥락을 제공하며, 또한 질서를 억압적이기보다는 건강하게 만드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환경을 제공한다.
불평등한 파워라는 서물
어느 제도에나 있는 다양한 역할과 규칙들은 세상을 만드는 능력인 파워를 분배하는데, 이때 파워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공평하게 분배되지는 않는다. 협주곡을 연주하는 독주자나 축구 경기장의 스트라이커에게 분배되는 독특한 파워는 그들의 타고난 재능과 맹렬한 개인 훈련(관중석에 있는 우리까지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신비하게 조합된 결과에 기초하여 그들의 능력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할 기회를 선사한다. 많은 클래식 협주곡에서 1악장이 끝날 무렵, 전체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추고 지휘자도 지휘봉을 내리고 독주자만이 고도의 기교를 발휘하며 ‘카덴차’를 연주할 자유를 부여받는데 이 카덴차는 그날 저녁 음악회에서 다른 어떤 악기 연주자가 연주하는 것과도 다르다.
제도는 특정 개인에게 불평등한 양의 파워를 부과할 수 있다. 스트라이커는 득점 가능한 위치에 있을 때 팀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패스를 받는다. 이것이 바로 스트라이커가 된다는 것의 의미다. 많은 교회에서 목사는, 종종 내가 권위의 무선 헤드셋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장비를 차고 아무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혼자 30분 이상 말하는데 그동안 회중석에 앉은 보통 사람들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중계문화에서 대규모 집회 속에서 파워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찾기는 어렵지 않다. 마이크를 가지고 있고 청중이 올려다보는 영상에 실물보다 크게 모습이 비춰지는 사람이다.
이러한 불평등을 바라보는 방식은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파워를 부여하는 것이 나머지 사람들은 제쳐 두고라도 그 파워를 받은 당사자를 위해 좋은 일인가. 모두의 번영에 기여하는 것인가를 의심하는 것은 정당하다. 제도에 대한 가장 좋은 시험, 특히 파워의 사용에 관한 역할과 규칙의 시험은 모든 구성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규칙에 따라 행동할 때 모든 사람이 번영하는가 아니면 참여자 가운데 단지 몇몇 사람만이 풍요와 성장을 누리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분명 많은 제도에서 불평등한 힘의 분배는 선물이 아니라 도적질이다. 즉 사람들에게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우글거리는 방식으로 하나님 형상을 감당하는 능력을 빼앗아 소수의 사람들만 자기 재능을 발휘하거나 단지 자신을 뽐내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미국 기독교에서 ‘찬양팀’에게 앰프를 사용할 파워를 허용한 것은 종교개혁 이래로 그 어느것보다도 회중 찬양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때 개신교인들은 활기 있고 기뿐이 넘치는 회중 찬양으로 알려졌지만, 오늘날 가장 크고 모델이 되는 대부분의 교회들의 경우에 수천 와트 출력의 음향 시설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은 경탈할 만하지만 그 예배당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들 대부분은 힘없이 따라 부르거나 아예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 파워가 단 몇 사람의 손이나 목소리에 집중되면 그 제도에서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것은 번영하기보다 오히려 감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불평등한 힘의 분배가 항상 번영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불평등한 분배가 오히려 번영에 필수적일 때도 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령한 은사”라는 표현에 담긴 핵심 통찰인데 적절히 사용될 때 “몸을 세우게” 되는 특별한 종류의 파워를 말한다. 앰프를 사용하는 예배 인도자가 자기 만족에 빠지고 회중에게서 활기를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크게 울리는 음악을 통해 전체 공동체의 조화로운 찬양을 이끌어 내는 진정한 은사를 가진 인도자나 찬양팀도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회중 속에 있는 우리 대부분에게 만일 마이크와 기타가 주어진다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동료 교우들이 번영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예배음악을 담당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나는 피아노 실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내 경험에 따르면 내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피아노 연주를 잘 해낼 때 회중의 음악도 번영하지만 만약 나에게 드럼을 맡긴다면 결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에서 불평등한 힘의 분배가 아무리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해도, 진실을 말하자면 제도가 가져다주는 선물에는 그것이 필수적이다. 어떤 종류의 번영은 개인들에게 특정한 파워를 크게 부여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파워가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방식으로 다루어지면 그렇지 못할 때에는 도달할 수 없는 포괄적인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 미국인들이 관전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데 실패한 결과일 수 있다. 아버지가 아이들과 뒤뜰에서 함께 간이 풋볼을 하는 대신 텔레비전 앞에 앉아 프레첼을 먹으면서 소리나 지르며 체중을 늘려 가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의 이야기이지, 전부 그렇지는 않다. 수천 명의 관중이 들어찬 스타디움에서 짧은 전성기를 구가하는 선수들이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때때로 승리를 얻어 내는 것을 함께 지켜볼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그런 번영도 있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희망과 놀라움을 안겨 주고 이상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삶에 더 많은 파워를 준다.
우리는 제도에 대하여 구제불능의 낭만주의자도, 구제불능의 냉소주의자도 되지 말아야 한다. 최선의 상태일 때 제도는 하나님의 심히 좋은 창조세계에서 완전히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에 가장 근접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가장 건전한 제도들은 우상숭배와 불의에 사로잡히지 않고도 엄청난 파워를 발휘할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은 제도가 그 파워를 지닌 사람을 인공물과 무대와 규칙 그리고 다른 역할을 맡은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들로 둘러싸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적 성공이 아닌 포괄적 번영을 위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책임 있게 감당한다.
인간의 제도에 있는 모든 역할에는 다른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고유한 파워가 부여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축구 경기의 관객은 경기장에서 직접 뛰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선수들은 경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한 그런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관중은 열중해서 경기를 관전하고 일어서서 응원을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이메일 체크를 하든지 아예 경기장을 떠나든지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있다. 나는 오히려 경기장 안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경기를 통해 번영을 누릴 수 있다. 권위의 무선 헤드셋을 자주 착용하는 나로서는 내가 번영하기 위해 들어야 하는 무언가를 누군가 여러 시간 또는 여러 해 동안 준비해서 전달해 줄 때 자리에 앉아 주의 깊게 경청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제도에서든지 가장 기본적인 파워는 파워 자체를 분배하는 파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힘은 항상 공유된다. 심판과 감독뿐 아니라 관중도 경기를 만들고 또 경기의 스타들을 만든다. 관중이 없으면 스타도 없다. 이 또한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것의 한 기능이다. 가장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형상을 지니려는 인간의 부단한 충동은 치명적인 폭력에 직면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1989년 찬안문 사태, 1960년대 미국 남부에서의 민권 행진,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모든 시기마다 그와 같은 예를 본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어떤 제도에서든 모든 구성원은 각각 그 제도의 번영을 위한 어느 정도의 파워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지도자들이나 가장 존경받는 유명 인사들뿐 아니라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폭군이나 독재자들도 그들의 제도에서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허용하는 동안에만 불평등한 파워를 가진다. 우리는 모두 제도의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이 구성원들에게 그리고 우리가 돌보고 지켜야 할 세상에 재난을 가져다줄지 복을 가져다줄지에 대해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몫과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후손의 복음
가족과 같은 핵심적인 제도도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장애를 겪으면 소멸될 수 있다. 우리 시대에서 가장 극적인 예는 중국일 것이다. 중국에서 국가가 주도한 한 자녀 정책은 비록 균일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근년에는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여러 세기에 걸쳐 내려온 규칙과 역할을 무너뜨렸고, 남아 선호적 낙태로 인해 남성이 여성보다 수 천만 명 더 많은 세대를 만들어 냈다. 제도는 문화가 그렇듯이, 놀라울 정도로 연약하다. 겨우 수십 년 동안, 부모 됨이나 자녀 됨에 대해 중국의 가족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뒤집어져 버려서 새로운 세대는 번영의 가능성을 유지할 새로운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허둥지둥하게 되었다. 중국처럼 극적인 강제성은 덜하지만 광범한 효과에서는 전혀 덜하지 않은 비슷한 변화가 일본과 서유럽의 선진 산업 경제에도 일어나면서 어린이에 비해 노인 인구가 훨씬 더 많아져 전례 없이 뒤집힌 인구 피라미드를 마주하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이런 식으로 무너지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새로운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을 만들어 바닥부터 다시 제도를 재구성하는 길을 찾아내거나, 또는 가족 같은 깊이 뿌리 내린 제도를 다시 만들어 내기는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고려해서 기존의 다른 제도가 다소 부적절하더라도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가족이 제공했던 쉴 곳과 방향 제시를 기업이나 국가 또는 군대가 인간의 번영을 위해 제공할 새로운 파워를 획득하거나, 또는 그 과제가 매스미디어가 주도하는 소비사회에 맡겨질 수도 있다. 이론의 ‘히키코모리’라는 충격적인 현상에서 보듯이,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자기 방에 틀어박혀 비디오 게임과 만화책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삶 전체를 가상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 번영에 대한 최대의 위험은 제도화가 아니고 제도의 상실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번영의 복음’이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믿음에 단순 비례하여 빠르게 부를 누리게 된다고 약속하는 이 어리석은 번영의 복음은 부에 대한 얄팍하고 비성경적인 이해를 바탕을 할 뿐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로 얄팍하고 비성경적이다. (성경에서 인간의 부는 정의의 열매이며 원천임은 말할 것도 없이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고 전체 공동체에 복을 나눌 기회다). 성경적 가치관에서 볼 때 지속되지 않는 번영은 결코 진정한 번영이 아니다. 유일하게 성경적인 번영의 복음은 후손의 복음이다. 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풍요를 적절하게 관리하여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되리라는 약속이다.
제도는 인간 창조성과 문화의 우글대는 풍성함이 미래 세대로 전해지는 길이다. 따라서 번영(prosperity)만이 아니라 후손(posterity)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다. 즉 수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고, 앞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나타날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번영만이 아니라 후손이 하나님이 다위에세 주신 약속이었다. 그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신다는 것이었다. 후손은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기도의 제목이기도 했다.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시 128:6)라는 축원은 샬롬과 풍요가 자신의 계보를 따라 죽음 후에도 계속되리라는 증거를 죽기 전에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이다. 샬롬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샬롬은 견고하게 지속된다.
미국 교회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의 많은 창의적인 지도자들이 단 한 세대에만 적용될 형태의 교회 생활을 창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한 개인이 아니라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쌓아 올렸다 하더라도 그것을 시작한 이들의 자녀 세대만 가도 낡고 ‘부적절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이 나와서 후손을 위한 구상을 가지고 여러 세대를 지나 열매 맺을 씨를 뿌리고 우리의 자식들의 자식들에게 복이 될 그런 형태의 문화를 가꾸게 될 것이다. 공간과 시간을 넘는 진정한 번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제도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