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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3)
웨슬리의 복음 이해와 영혼구원
김홍도 목사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이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밤, 교회에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 있는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이 모이는 작은 교회에 참석했다가 목사도 아닌 평신도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쓴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가 밤 8시 45분경이었습니다. 그래서 5월 24일을 웨슬리의 회심일로 지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조지아(Georgia)주에 선교사로 가서 활약도 했지만, 십자가의 공로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몰랐습니다. 선교사로 가면서도 “나는 인디언들의 영혼을 구원하러 가는데 내 영혼을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라고 회의에 찬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12월 말, 독일계 사람들이 모이는 페터레인(Fetter Lane)에 있는 철야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성령 충만을 받고 방언의 은사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올더스게이트에서 거듭났고 페터레인에서 성령충만 받고, 그전에 옥스퍼드(Oxford)에서 사명(calling)을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에 지구를 몇 바퀴 돌 정도로 말을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그는 감리교 후예들에게 유언하기를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로 쓰임 받도록 하시오. 당신이 얼마나 설교를 많이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최선을 다하여 영혼을 구원했느냐가 문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웨슬리와 같이 사역했던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주여,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의 영혼을 가져가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스펄전(Spurgeon) 목사님은 미국의 큰 도시에서 50번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 한번 강의 하는데 1,000불씩, 그러니까 50,000불의 사례비를 드린다고 했을 때, 그때 당시 5만 불이면 엄청난 돈이었지만 거절하면서 “나는 더욱 좋은 일을 하겠습니다. 런던(London)에 머물며 50명의 영혼을 구원하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프란시스 자비엘(Francis Xav-
ier)은 선교에 큰 업적을 세운 사람인데 그는 “영혼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매를 만대를 맞으라고 해도 그 매를 맞겠다”고 했습니다. 1904년 영국 왕 에드워드 7세(Albert Edward VII)가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
th) 대장을 버킹엄(Buckingham) 궁으로 초대하고 영국 왕은 “장군 참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소” 하며 칭찬할 때, 그는 굽은 허리로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올렸습니다. “각하,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예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에 있사오나 나의 야망은 영혼에 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영혼 하나 구원하기 위해서 거꾸로 서서 춤을 추라면 추겠다고 했습니다. 왜 영혼구원이 가장 중요할까요?
1.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막 8:36). 사람의 구조를 계란으로 설명한다면, 몸(body)은 계란의 껍질과 같고, 혼(soul)은 계란의 흰자위와 같고, 영(spirit)은 계란의 노른자위와 같으므로 영혼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닮아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생하는 존재요 부활하게 되므로 영원한 천국에서 살든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했고,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2. 영혼이 받을 위험 때문입니다.
조지아(Georgia)주 애틀랜타(Atlanta)에 있는 와인코프 호텔(Winecoff Hotel)에 화재가 발생해서 116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불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포장도로에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고, 어떤 사람은 창문에서 뛰어내려 머리가 깨져 죽고, 어떤 사람은 고압선에 감전되어 타 죽고, 어떤 사람은 나무에 걸려 몸이 찢어져 비명을 지르는데, 소방대원들은 최선을 다했는데도 116명이 비명을 지르며 죽었습니다. 이 화재 현장을 방송국에서 그 처참한 광경을 중계방송 했는데, 사람들은, 그 끔찍한 소리 불타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고 합니다. 왜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면서도 뛰어내렸을까요. 불길의 뜨거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없이 죽으면 영원히 불의 뜨거움 속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거기는 뛰어내릴 창문도 없고 피해나갈 비상구도 없습니다.
부스(william booth) 대장은 말하기를 사람들을 차에 태워서 지옥불에 5분만 집어넣었다가 꺼내면 전도 안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스 대장은 1912년 죽음 직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개 없는 용서, 중생 없는 구원, 지옥 없는 천국이 교회에 다가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상 때문에 구라파와 미주의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무디(D. L. Moody) 선생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영화로운 천국을 말씀하신 그리스도예수께서 그 무서운 지옥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경고하는 지옥의 묘사를 비난할 수가 없다. 천국에 대해 말씀해 주시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구세주께서 지옥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지옥의 저주로부터 피하는 길을 그렇게 많이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만일 지옥이 없다면 성경책은 다 불태워야 한다. 왜 성경을 연구하느라고 그 많은 시간을 소비하겠는가? 왜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소비하면서 예배당을 건축하겠는가? 우리의 교회들은 오락장소로 바꿔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내세가 없다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고,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제 자신도 예수를 안 믿을 것입니다.
더욱, 목사 노릇도 안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어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는 방법은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확실하게 설교할 때는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전도를 많이 했는데, 요사이는 안개와 같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사는 법만 가르치니까 교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3. 영혼구원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박사님은 집회 할 때마다 altar calling(올타 콜링) 즉 “구원으로의 초대” 시간을 가지고 사람들을 강단 앞으로 불러냅니다. 한 신자가 “왜 매시간 마다 번거롭게 altar calling(올타 콜링)을 합니까?”라고 했더니 “예, 나는 저 영혼들이 천당과 지옥, 생명과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마치 저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나,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의 절벽 난간에 서 있는 철부지 어린아이를 보듯이 아찔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매 시간 불러 낼 수밖에 없고 구원으로 초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이런 심정으로 전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릴리리(W. B. Riley) 목사님이 해밀턴(Hamilton)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는데 한 젊은이가 나와서 간증하는데 자기는 “타이타닉(Titanic)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할 때, 존 하퍼(John Harper) 목사님이 가라앉는 배의 레일을 붙잡고 저에게 ‘청년! 구원받았소?’라고 묻길래 ‘아니요’라고 했더니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잠시 후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존 하퍼 목사님의 마지막 전도를 받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얼마나 영혼구원이 시급하면 죽기 직전까지 전도했겠습니까? 존 웨슬리 목사님은 “언제 어디서나 영혼”이라고 외쳤습니다.
4. 영혼구원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
우리가 노래할 때 제일 큰 소원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가 있었는데 그중에 한 마리를 잃고 나서, 온 산과 들을 헤매다가 잃은 양 새끼를 찾아, 즐거워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동네 사람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이고 함께 기뻐했다고 하시면서 “… 이와 같이 죄인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 동전이 있었는데 하나를 잃어버려서, 등불을 켜들고 온 방 안을 쓸며 찾다가 발견하고 너무 기뻐서 벗과 이웃을 불러서 함께 기뻐했다고 하면서 “…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아들이 자기 몫에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래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주색잡기하여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남의 집 돼지우리에서 돼지들과 함께 자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다가 스스로 돌이켜 “…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하고 아버지에게로 가기를 결심하고 돌아오는데, 병들고 거지같은 행색으로 절뚝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보고, 밤낮 대문 밖에서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직 거리가 먼데, 뛰어가서 얼싸안고 입을 맞추며 데리고 돌아와서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고,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풍악을 울리며 즐거워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 지옥 갈 영혼 하나를 찾아 구원할 때 크게 기뻐하십니다.
아버지는 불평하는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32절에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타일렀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 지옥 갈 영혼을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구원해야 할 것입니다. 컬밋 롱(Kermit Long)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은 옛날 우리의 선조들보다 교육도 많이 받고 좋은 건물과 멋진 교회를 가지고도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수족관을 지키는데 지나지 않고 남의 수족관에서 서로 고기를 훔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나 배가 아니라, 구경만 하고 돌아다니는 유람선같은 교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구속도 안 믿고, 천국과 지옥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35절에 보면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보리가 시퍼렇게 자라고 있는데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오지만, 영의 눈을 떠서 영혼의 밭을 바라보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기 때문에 빨리 추수해 들이지 않으면, 멸망으로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빨리빨리 영혼을 추수해 들이라는 영혼구원의 시급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려고 수가성 우물가에서 기다리다가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가며 살고, 지금도 남의 남편을 빼앗아 살고 있는 여자인데, 그에게 전도하여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8절에 “…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사업을 완성하실 분인데, 친히 창녀 같은 여자를 전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Scotland) 출신인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 박사는 수십 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하시다가 늙어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회석상에서 인도에 선교사로 갈 사람이 없느냐고 했을 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충격을 받고 강단에서 쓰러졌을 때 의사의 응급치료를 받고 일어나서 “내가 아직 할 말이 있다.”고 하며 다시 강단에 서서 말하기를, “영국의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이 지원병을 모집한다고 할 때는 수백 명이 나섰는데 우리 주님이 선교사를 모집하는데 아무도 없다니 웬 말입니까? 나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도하다가 깐지스 강변에 내 해골을 묻겠습니다.”하고 울 때에 많은 젊은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선교사가 되겠다고 지원했다고 합니다.
저는 교회재정도, 가급적 영혼구원과 관계되는 일에만 지출하려고 합니다. 나눔도 좋고 섬김도 좋지만, 지옥 갈 영혼을 구원하는 일만큼 중요하지도 않고, 시급하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큰 예배당을 지었느냐 보다, 얼마나 교인 수가 많으냐 보다, 얼마나 나눔과 섬김을 많이 했느냐 보다,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원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렐루야!
눈을 들어 밭으로 보라
요 4:34-36 / 이규왕 목사
사람들이 왜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따분하다고, 죽고 싶다고, 답답하다고,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말은 비단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사람들만이 독점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치스러운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마음을 갖거나 그러한 말을 하게 되는 근본 원인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몸을 불살라 바쳐도 아깝지 않은 가치 있는 일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보람되고 가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일을 만나면 끼니를 걸러도 배고픈 줄을 모르고 잠을 적게 자도 피곤한 줄을 모르고 일하는 재미에 즐겁기만 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그 일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이 너무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세상에 그러한 일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도 그러한 일을 찾아 단 한번뿐인 우리의 일생을 몸이 부서 저라고 열심히 일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러한 일이 무슨 일인지를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보람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1. 알지 못하는 양식
예수님의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동네로 간 후 예수님은 홀로 우물가에 남아서 제자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복음을 들려주어 그를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는 참으로 보람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양식을 구하러 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시장하실 것만을 생각하고 부지런히 양식을 구해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권하였습니다.
(요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칭찬을 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대신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몹시 배가 고팠지만 자기들을 기다리시는 예수님 생각에 양식을 먹지도 않고 급히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오해가 가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몰래 비상 식량을 가지고 계시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러 간 사이에 누군가 예수님에게 양식을 가져다 드렸는데 제자들을 기다리시지 않고 혼자서 다 잡수셨거나 둘 중에 하나로 오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요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그러나 그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서 부지런히 양식을 구해 가지고 온 제자들에게는 섭섭함을 줄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오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위해서 양식을 구하러 갔는데 기다리시지도 않고 혼자서만 배불리 잡수실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신 것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알지 못하는 양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동네로 간 사이에 하신 일을 돌이켜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동네에 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오로지 육신을 위한 양식을 구하는 일에만 급급하다가 돌아왔으나 그 어간에 예수님은 시장하심에도 불구하고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원하시는 일에 전념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적으로는 아무것도 잡수신 것이 없고 오히려 뜨거운 햇살 아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영적 배부름의 양식이 되신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궁극적인 목적이며, 교회를 지상에 세우신 이유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항상 힘써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사람들이 왜 잘 먹고 잘 살수록 죄를 많이 짓게 되는 것일까요? 남부러울 것이 없도록 좋은 것을 먹고, 명품을 휘감고, 쾌락만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도박과 마약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원인과 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그 영혼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땅에서 나는 양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신령한 양식이 아울러 충족되어질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2. 양식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며 기도하실 때, 예수님에게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하는 마귀에게 예수께서 신 8:3 을 인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그 같은 말씀은 기독교가 물질을 악하게 보는 이원론이나 정반대로 물질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유물론과의 본질적으로 다른 차별성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질은 비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악하거나 선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물질을 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선할 수 도 있고 악할 수 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물질 때문에 죄를 범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물질이 있어야만 실제적으로 남을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는 죄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중소기업에서 중역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중도 퇴직을 한 육십대 노인이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들과 더불어 열심히 일을 하여 수재헌금도 보내고 용돈도 쓴다는 취재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일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해야만 건강하고, 일을 해야만 남을 도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회가 될 때만이 이 나라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위해 이마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일하라고 하셨으며, 일주일 중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일을 해야 할 것을 명하셨으며, 일하는 자만이 먹을 권리가 있음을 명하셨습니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열악한 환경이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빈 감방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일터로 가야하고, 할 일을 찾아야 하고, 주어진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참으로 견뎌내기 어려운 고통은 일하는 고통이 아니라 할 일이 없을 때에 마음으로 느끼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인 일만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며, 육체적인 일을 열심히 하여 많은 돈을 번다고 해서 만족하고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육신만을 위해 죄를 범하면서까지 살아온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부터는 더욱 열심히 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엡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이며, 육신의 양식으로 만족할 수 없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늘 기쁘고 감사하며 살게 하는 생명의 양식을 얻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믿지 않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며, 육신적으로 부족하고 불편한 사람을 돕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불러 모으신 까닭은 바로 그러한 신령한 일들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신령한 일에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쏟는 사람들마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 하신 말씀처럼 육신적으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할지라도 그 영혼은 신령한 음식에 배부르고 만족해하는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기독교는 선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선용해야할 할 책임과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영혼에 참된 기쁨과 만족을 주시기 위한 구실입니다.
(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3. 희어진 밭
예수님이 친히 찾아가셔서 복음을 증거한 사마리아 땅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돌과 가시떨기가 무성한 영적 황무지였습니다. 그 같은 생각은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뿌리깊은 인종적 편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육신을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까지 찾아가서 사람들을 만나 대화도 하고 먹을 구하기도 하였지만 그 사람들에게 어느 제자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며 단 한 사람도 구원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제자들과 다른 눈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을 때 외면하지 않고 유대인을 대할 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그 여인을 불쌍하게 생각하시고, 뜨거운 햇살 아래서 그 여인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고,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쓰레기 같은 삶을 살던 여인이 변화되어 수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수님께 나오게 만들어 사마리아가 마침내 복음화 되어지는 일에 터를 닦는 큰 일꾼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만일 예수님도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요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아무런 쓸모가 없는 여인이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설령 그 한 여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 같았으나 눈을 들어 보신 예수님이 보셨을 때 그 한 여인의 변화가 곧 사마리아 전체의 변화가 될 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은 마치 다 익은 곡식이 기다리는 희어진 밭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땅에 예수님보다 누가 먼저 복음의 씨를 뿌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희어진 밭이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씨를 뿌려 놓으셨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사마리아 사람들이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예수님께로 몰려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 우연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눈으로 희어진 밭을 보고 가서 베기만 하면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통해서 본보여 주시면서 너희도 이제 눈을 들어 희어진 밭을 보고 어서 가서 알곡을 거두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후 사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후일에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였을 때 놀라운 역사가 사마리아에서 일어 났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말은 교회에 대한 외부의 박해가 없었다는 의미와 함께 교회가 계속적으로 성장하며, 성령이 함께 하시는 교회로 변하였습니다. 그와같은 사마리아 교회의 변화는 오늘의 교회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 부흥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불신자들과 달리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오감으로 보고 느끼는 것만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감각인 영적 감각을 가지고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내가 찾아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교회를 나오지 않고 있으며, 또한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 하고, 주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거래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당신이 친히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신 것처럼 인간적인 어떤 편견을 버리고 그 영혼을 사랑하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누군가 나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복음을 씨 뿌렸으며, 땀흘려 공을 드렸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가문에 자라났거나, 과거에 나 못지 않게 열심히 교회를 다니다가 어떤 사연으로 쉬고 있으면서 누군가 자기를 교회로 인도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주객이 전도된다는 말처럼 나보다 더 열심히 충성하고, 전도하는 일꾼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요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설령 예상했던 대로 냉담히 거절하고,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날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 그 사람에게 아무도 씨를 뿌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뿌린 씨를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물을 주게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자리를 떨고 일어나 사마리아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마리아와 같은 세상으로 가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 남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내가 살고, 믿음이 건강해지고, 생명의 양식으로 배부름을 얻게되는 축복된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영적 황무지라면 실망하지 말고 씨 뿌리는 것으로 만족하면 될 것이고, 누군가 씨를 뿌려 놓았거든 열심히 물과 거름을 주면 될 것이고, 희어졌거든 추수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서 밭을 상급과 지상에서 받게 될 축복은 뿌리는 전도를 한 사람이나, 키우는 전도를 한 사람이나, 거두는 전도를 한 사람이 모두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나의 양식은
요 4:34-36 / 안양중 목사
광수 생각이란 만화에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어느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가 대화하는 겁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죠..?”
“퇴직 후에 머리도 아프고, 입맛도 없고, 눈도 침침하고, 허리도 아프고…”
“아! 비타민 V가 모자란 것 같군요. 이걸 드십시오.”
“비타민 V요? 비타민 B나 C는 들어봤지만 V는 처음인데요?”
“비타민 V는 Vision(비젼)의 V를 약자로 쓴 비타민입니다. 당신은 다른 것보다, 꿈을 잃어버린 병이기 때문에 비타민 V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인생에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꿈은 천국을 이 땅에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 말씀하실 때 천국을 겨자씨로 비유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성지순례를 다녀오시는 분들이 겨자씨가 들어있는 예쁜 책갈피를 많이 선물하는데 얼마나 적은지 궁금해서 코팅된 것을 잘라 겨자씨 한 알만 따로 놓으니까 마치 볼펜으로 점 하나 찍어놓은 것만 합니다. 잠깐만 눈을 돌렸다 다시 보면 어디 있는지 한참 찾아야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겨자씨가 그렇게 작아도 그 안엔 생명이 있기에 씨앗이 땅에 심겨지면 나중에는 엄청나게 큰 나무가 되고 이후에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꿈은 이 땅에 겨자씨같이 작은 천국 복음의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생명이 되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관심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있었습니다.
눅 15:4-7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본문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실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수가 성 여인의 만남'
이 여인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목마른 여인'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찾지 못했던 그래서 목말라 마실 물을 찾아나온 여인.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참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헤어지게 되었는지 그게 사별이든 이혼이든 어쨓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는 말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사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는 말은 이 여인에게도 어렴풋이 종교에 대한 기억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이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맞든지 이미 그런 관심은 그녀의 일상에선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당장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물이었습니다. 그 물을 마시기 위해 한 낮 더위를 무릅쓰고 달려나온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인생에 목마른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가 성의 여인처럼 인생에 실패한 여인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 이혼율이 세 쌍 중에 한 쌍입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혼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결혼에 실패한 것 아닙니까?
또 직장을 잃거나 아니면 취직을 하지 못해 인생의 실패를 맛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는 것을 보면 너무나 정상인데,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행복의 조건들을 갖춘 이들이 속으로 들어가보면 얼마나 썩어있는지 모릅니다. 외국에 나갔다 돌아온 그래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데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남편이 유명한 병원의 의사인데 그 부인은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무언가 인생의 목표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지만 여전히 목마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로 뛰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인이 마시기 위해 달려나온 그 물은 먹어도 얼마가지 않아 갈증이 찾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무엇으로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겠습니까? 밤새 술을 마셔봐도, 몸을 흔들며 춤을 쳐봐도 다음날에 머리가 어지러운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잠시 쾌락에 몸을 맡겨 인생의 모든 문제를 뒤로 하고 싶지만 육체만 병들 뿐 어느 것 하나 치료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목마른 사람 투성인데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실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해 잘못된 길을 찾아 헤매이고 있는 자들을 그냥 방관하실 것입니까?
커밋 롱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의 교회는 예전보다 더 나은 교육과 훨씬 더 아름다운 시설로도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낚는 어부가 아니라 수족관을 지키는데 지나지 않고 남의 수족관에서 고기를 훔치는데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인생에 목마른 자들을 향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 물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출 15:을 보면 이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나와 수르광야로 들어가 사흘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마실 물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마라란 곳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백성이 모세를 향해 원망합니다. 그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하나님께 관심도 없었지만 관심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자체보다 어디서 예배드려야 하는가에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냐? 예루살렘이냐?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어떻게 드리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인생의 목마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요즘 나온 책 중에 '달걀 껍질 속의 과학'이란 책이 있습니다.
과학이 무엇입니까? 과학은 정확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과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아주 작은 것들 속에 들어있는 신비조차도 제대로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쉽게 지나쳐버릴 것 같은 달걀 껍질 조차도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드셨는지 모릅니다.
저는 과일 중에 귤만 보면 하나님의 솜씨에 대해 감탄하게 됩니다. 껍질로 싸서 안에 있는 알맹이들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잘 보호해주고, 또 하나씩 갈라지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먹기에 얼마나 편하게 해 놓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이 과학적입니다. 우리가 흔히 자연법칙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과학적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는 얼마나 질서있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도 너무나 정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쉼을 얻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푸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을 이용해서 영적인 교훈을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지금 예수님은 영적인 눈으로 사마리아 성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밭은 사마리아 성을 말하는 것이고, 희어져 추수할 곡식은 그 성에 살고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 말은 육신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일반적인 추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밭에 심겨져 있는 곡식은 아직도 네 달은 지나야 추수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영혼을 거두어 들이는 지금 바로 추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추수 시기를 놓쳐버리면 수확이 줄게 됩니다. 혹시 서리를 맞기라도 하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추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추수해야 합니다.
영국 웨일스 지방의 하노버 교회에 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이런 성경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욥17:11)
이 기념비는 한국 개신교 최초 순교자인 토머스 목사님의 순교비입니다.
토머스 목사는 1840년 9월 7일 영국 하노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59년 런던대를 졸업하고 1863년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다음달 7월 21일 폴메이즈 호를 타고 부인과 함께 중국 선교 길에 오릅니다. 하지만 중국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인 캐롤라인이 세상을 떠납니다. 아내를 사별한 아픔으로 방황하는 중에 미지의 나라 조선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고 조선에 대한 선교열에 불타올랐습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조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성서공회의 파견원 자격으로 이 배를 타게 되고, 1866년 7월 25일자로 영국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 첫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로부터 받을 환영을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희망에 부풉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하기 위해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해 주시리라 믿으며 나는 갑니다.'
그러나 당시 평양 감사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 호의 대동강 입항을 금지하고 불을 질러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함선이 불탈 때 토머스 선교사는 성경을 대동강에 던지면서 물 속에 뛰어듭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대동강에 뛰어들었지만 포졸들에게 붙잡혀 대동강 양각도라는 섬에서 순교 당합니다. 그때 토머스 선교사의 목을 친 사람이 박춘권이라는 사람이었고, 어느날 목욕하러 갔던 최치량이라는 소년이 성경책 한 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다 자기 집 벽에 벽지 대신에 성경책으로 발랐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존 모펫 선교사가 평양에 복음을 전하러 왔을 때 어느 여관 벽에 중국어 성경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관이 바로 최치량의 집이었고 그는 예수님을 믿어 한국 교회 최초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또, 토머스 선교사의 목을 쳤던 박춘권이라는 사람은 수십 년이 지난 후 김익두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토머스 선교사는 씨만 심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순교한지 100년이 지난 후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1,200만을 헤아리게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50교회 중에서 30개가 한국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누군가 눈물로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고생을 했다면 이제는 추수하는 수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행 18: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라는 곳을 선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철학적으로 복음을 변증하다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제 고린도에 이르게 되었지만 자신감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십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말씀에 힘입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영적인 눈으로 밭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곳 방배동과 사당동, 남현동 일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밭입니다. 지금 추수할 곡식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추수할 곡식입니다. 겉모양은 훌륭하지만 그 속은 병들어있는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암 8:11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마지막 날에 임하는 기갈은 육신적인 기갈이 아니라 영적인 기갈입니다. 영혼이 목마르고, 영혼이 굶주리는 현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받을 곳이 없습니다. 찢긴 심령이 위로받을 곳이 없습니다.
물론 현대 교회들이 상담학을 들여와 너무나 친절하게 성도들을 상담해줄지 모르지만 그 속에 말씀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그 영혼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도 위로받지 못한 이들을 무엇으로 위로하겠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사고로 잃은 어미를 무엇으로 감쌀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돈을 다 벌어들이고도 채우지 못하는 목마름을 어떻게 시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어디에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상처는 수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상처는 세상 의학으로 수술할 수 없습니다. 말 4:2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때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장하셨고, 이 여인은 목말랐지만 그런 것들은 이미 잃어버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정말 그 여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고, 그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 방법을 알고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34절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마 6:31-33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의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인생의 목적을 다른 데 두시기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까?
"누가 저 죽어 가는 영혼들, 구원을 몰라 방황하고 있는 저 불쌍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누가 영혼의 추수꾼이 되려는가?"
그리스도의 3가지 명령
요한복음 4:35-38 / 박덕기 목사 / 송정교회
오늘은 우리 교회 설립 111년 만에 처음으로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리는 아주 뜻 깊은 주일입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협력선교 위주로 선교를 해왔지만, 이제 우리 교회도 드디어 다른 나라에 단독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는 감격을 맛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지 어언 127년이 되는데, 지금 기독교는 한국에서 1000만의 신자를 헤아리게 되었고, 6만을 넘는 교회당이 있어, 우리나라의 국교가 마치 기독교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양적으로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그 경이적인 부흥과 신앙의 열기로 인하여, 온 세계 교회의 기린아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독교 황금시대에 태어나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축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들어오고, 이와 같은 기독교 황금시대를 이룩하게 된 이면에는 얼마나 큰 희생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신교가 전래되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무서운 박해가 자행되어서, 1866년 병인 교난시대에는 8천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피를 흘리고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박해가 자행되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1866년 7월 영국의 토마스 목사님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복음을 전하려 왔다가, 대동강 변에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토마스 목사님의 나이 27살 때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님님은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24살에 자기 부인이 열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토마스 목사님은 계속 선교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온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는 채 죽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을 들은 토마스 목사님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한국 땅으로 가기로 결정한 후, 미국의 상선 셔먼호를 타고 한국 대동강에 들어옵니다. 당시 평양 감사였던 박규수는 셔먼호를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배에 불을 지릅니다. 그 바람에 거기에 탔던 많은 사람들이 대동강에서 익사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님도 가지고 갔던 한문 성경을 대동 강변에 던지면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복음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 땅을 적실 때마다, 복음의 땅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대동강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는 잡혀서 대동강 양각도 섬 위에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망나니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칼을 들고 그의 몸을 돌면서 춤을 출 때, 토마스 목사님은 성경을 들고 “형제여, 예수! 예수!” 하고 외쳤습니다. 그때 망나니가 칼로 팔을 내려쳤습니다. 그러자 다른 손으로 성경을 들고 “예수! 예수!” 할 때 또 다른 쪽 팔도 내려쳤습니다. 그래도 “오, 형제여 예수 믿으시오.” 할 때, 그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드디어 토마스 목사님은 대동강에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토마스 목사님이 대동 강변에 던졌던 성경을 주운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최치량이라는 아이였습니다. 그는 주운 성경책을 가져다가 그 집 벽에 발랐습니다. 그 집이 후일 여관이 되었습니다. 20년 후에 존 마팻이 선교사로 평양에 들어가서 어느 여관집에 들어갔는데, 한문 성경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최치량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최치량은 “내가 어렸을 때 대동강에 갔다가, 예수쟁이가 목이 잘릴 때 던진 그 성경을 주어다가 이 벽에 발랐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마침내 최치량은 존 마팻 선교사를 통하여 전도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장로가 됩니다. 그 후에 토마스 목사님의 목을 쳐 죽였던 박춘권이는,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자신의 과거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기 집을 하나님께 바치며 뜨겁게 헌신하여 후일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상황이 바뀌게 되어 1884년에는 의료 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다음해인 1885년 4월 5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하게 되는데, 문헌을 보면 그 동안 전남지방에 파송된 선교사만 해도 100여명에 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기할 일은 1889년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 선교사 데이비스 목사 남매가 내한하여 선교하다가, 6개월 만에 마마 병에 걸려 순교를 하고, 1893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의 목사 매켄지가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전도하다가, 2년 후에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1902년 6월11일,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바다에 빠진 이화 학당의 두 여학생을 구출하려다, 그만 마흔 넷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미국인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고 하면서 매우 애석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교와 정동 제일 교회를 통하여, 이 땅의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땅의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본국에서도 처자식을 거느리고 평안하게 살면서, 얼마든지 주님을 잘 섬기고 충성할 수가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천만리 이역 땅에 생명을 걸고 찾아와서, 피 흘리며 복음을 전하다 죽어 갔습니까? 아니 그들이 자기들만 잘 믿고서, 만일 이 땅에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들과 또한 우리나라는 어찌 될 뻔했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복음이 귀하고, 나의 구원받음이 가장 큰 축복인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음 전도자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선교사님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밑거름 되어, 한국 교회는 이제 성장할 만큼 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한국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며, 실제로 한국 교회는 도와줄 수 있는 저력도 갖게 되었습니다. 인적 자원 면에서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넉넉히 돕고 선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놀랍게 한국 교회를 부흥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사명이 분명히 있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전도 혹은 선교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생각하여 혼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교학에서는 인종과 문화와 언어가 전혀 다른 이민족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선교로 정의합니다. 말씀의 방향을 여기에 두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명령을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보라
오늘 본문 35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여러 가지로 특징지을 수가 있으나, 어떤 사람은 현 시대를 가리켜 ‘영의 시대’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미신 업자의 수가 세계적으로 지난 15년간에 3배로 불어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합리주의를 지나 신비주의가 휩쓸고, 초과학, 초자연, 초인간 등 심령 과학의 홍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는 무당 얘기가 영화의 기록을 깬 적이 있으며, 정신술, 강신술, 마술, 주술, 마인드 컨트롤 사상이 풍미하고, 전생에 대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은 성령의 지배를 받든지, 아니면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영의 시대라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눈을 들어 이 밭을 보아야 합니다. 미신과 악령이 횡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찾고, 참 진리를 찾고자 하나, 찾지 못한데서 오는 영적 기갈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온 세상에 꽉 차 있는 종말적 위기의식입니다. 벌써 오래 전의 추상화입니다만, 20개의 사과 상자가 쌓여져 있는 모습인데, 15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는 그림으로서, 20세기 인류 문명의 붕괴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오래 전에 인류의 운명을 12시 5분전의 시한폭탄에 비유한 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국 최후의 날” “구라파의 몰락” “인류와 지구 최후의 날” “지구는 폭발한다.”라는 책이나 영화가 기록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집이나 배에 불이 나기 전에 쥐들이 먼저 예감하고 밖으로 피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인류는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 파멸 후에도 살아남기 위해, 해저 촌을 만들거나, 우주 촌으로 이사 갈 계획 같은 것을, 벌써부터 구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인류 최후를 예감한, 시한폭탄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몸부림인 것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신 말씀은, 이러한 각도에서도 음미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추수에는 적기가 있고, 그래서 추수에는 시급성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들을 보면, 그 농작지가 얼마나 광활한지 모릅니다. 그 광활한 농작지에서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한꺼번에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때를 놓치면, 그 곡식은 영원히 썩어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추수에는 반드시 제 때에 거두어 들여야 하는 시급성이 있습니다. 인간 영혼의 추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세대에 살고 있는 사람을 우리들이 건지지 못하면, 그들은 영원히 잃어버린 영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에는 아직까지도 복음을 모르는 부족이 2000 종류가 넘는다고 합니다. 뉴우기니아에 626, 남태평양 군도에 521, 아프리카에 350, 남아메리카에 300, 오스트레일리아에 290, 인도에 100, 인도차이나 반도에 60, 필리핀에 60 종류가 넘는 부족들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다 수억의 회교도, 14억의 중공, 12억의 인도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상에는 아직도 2000여 부족이,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예수라는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재림을 기다리는데, 그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의 초림 사실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이 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기도하라
마 9:36-38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농촌 실정을 보면, 젊은 사람들은 다 도시로 떠나고, 대부분 노인들과 부녀자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백발이 다 된 노인들이, 넓은 논밭에서 혼자 추수하고 있다면, 얼마나 딱한 노릇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선교의 시급성과, 경작해야 할 밭의 광대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교인마다, 교회마다, 선교비를 보내고, 그래서 많은 선교헌금을 모으면 될 것이다. 문제는 돈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문제는 사람이다. 선교지에 갈 수 있는 충분한 사람만 확보되면, 이 세계를 복음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사람의 방법이지,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선교에 돈이나 사람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많다고 해서, 선교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추수할 주인에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광활한 밭의 추수를 하려면, 많은 일군이 필요한데, 인위적인 방법으로 내보내는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올바른 사람을 통하여, 선교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선교지에 나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우리는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어 놓고, 기도하지 않을 부모가 있겠습니까? 피선교지의 선교 현장은, 전쟁터의 최전선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사탄이 자신의 영토라고 생각해 온 지역에, 선교사가 복음을 들고 도전할 때, 사탄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총력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선교지에서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님들과 정운삼. 김방자 선교사님을 위해 꼭 잊지 말고 기도해주시기기 바랍니다.
3. 가라
마 28:18-20의 말씀을 대사명의 말씀이라고 하며, 주님의 지상 명령이라고도 합니다.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고, 막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 두고 떠나실 때, 그들에게 맡기신 오직 한 가지 일, 오직 한 가지 유언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당을 짓고, 학교를 세우고, 총회를 조직하는 일보다, 우선해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눅4:42-43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한 분밖에 없는 독생자를 선교사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하늘나라 시민들에게 분부하십니다. “너희는 가라!”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안타까울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가라!” 이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고,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Go Missionary 2)Send Missionary가 있습니다. 우리 청년 대학생들 중에서, 직접 복음을 들고 가는 선교사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대부분 복음을 들고 직접 갈 수 없는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이러한 성도들은 Send Missionary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현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을 물질로 돕고 협력하므로, 선교에 동참하고, 보내는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상급은 어떻게 다를까요?
1)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경우-맨 밑에 가서 건진 사람만 받겠는가?
2)시골에서 화재가 났을 때-양동이 부대-맨 앞에 불을 끈 사람만 받겠는가?
3)죤 차이나맨에게 어떤 무신론자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천국에 가면 맨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첫째,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를 하겠다. 둘째, 내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다. 셋째, 선교사님들을 물질로 도와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우리들이 천국에 당도했을 때, 우리들의 선교헌금으로 파송한 선교사를 통해 구원을 받아서 이 복된 곳에 오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명령 “보라! 기도하라! 가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너희는 가라!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Go Missionary가 되든지, Send Missionary가 되든지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독생자를 주심 받았고,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은혜를 받았고, 성령을 받았고, 천국을 받게 되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인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언제까지 주시라는 기도만 할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직 우리나라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선교가 웬 말인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크리스마스 때 떡국을 끓여 먹으면서, 앞줄은 두 그릇 세 그릇째 먹고, 뒷줄은 한 차례도 나눠주지 않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얼마나 불공평한 처사이겠습니까? 오늘 한국은 예배당이 없는 지역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라디오의 사이클만 맞추면, 언제든지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도, 성경도 없고, 단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않은 불쌍한 영혼들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주님의 초림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면, 이 얼마나 공평치 못한 처사입니까?
이 시간 우리는 정운삼. 김방자 선교사님 파송 예배로 드리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삼중 명령 ‘보라!’ ‘기도하라!’ ‘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송정중앙교회 성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주님의 삼중 명령에 꼭 순종하셔서 선교 헌금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후손들이 이 땅위에서도 복을 받고, 장차 하늘나라에서 선교사님들과 함께 큰 상급을 다 받게 되시기를,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선교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함께 즐거워하는 교회
오정호 목사
교회의 규모나 지역을 초월해서, 그리고 세대를 초월해서 서로 격려하고 협력하며 진리 안에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 ‘우리 교파’라는 좁은 안목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주 예수를 믿는 모든 형제들과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영광의 주님을 섬긴다면 그 공동체는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독점하라! 요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누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사람들은 소유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분배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함께 소유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소유한 것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빈곤의 아픔을 겪는 이웃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서로 나누게 하옵소서”라는 성숙한 기도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섬김과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함께 즐거워하는 교회’를 이루기 위한 원리를 세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삶의 추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35절).
이 추수는 주님 앞으로 영혼이 돌아오는 영적 추수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개인적인 추수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인생경영이 있습니다. 하나는 흑자인생이며 또 하나는 적자인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열심히 주의 뜻을 행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서 그 모든 행위가 드러나며 그 행함을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고전5:10). 이것이 개인적인 추수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들이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가진 것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는 흑자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렇게나 씨를 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와 믿음과 순종의 씨를 뿌려 확실한 상을 거두어야 합니다(잠11:18). 그러나 의외로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한 것과 악을 뿌리고 재앙을 거둡니다(잠22:8).
추수를 앞둔 농부는 좀더 알찬 씨로 파종하기 위해 지혜와 정성을 기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추수를 기대하는 사람은 하나님 뜻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파종합니다.
콜게이트사의 창립자 콜게이트는 어려서 중학교도 진학 못할 정도의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라는 말씀을 들은 콜게이트는 고민하는 중에 한 믿음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거둘 것이 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환경을 보지 말고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가지를 실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기억하며 주일을 거룩히 지켜라. 둘째, 물질적인 축복을 주셨을 때 열의 하나를 구별하여 십일조 생활을 해라. 셋째, 사회적 지위가 주어졌을 때 겸손히 교회와 지역사회를 충성스럽게 섬겨라. 어린 콜게이트는 이 말을 마음에 담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가 처음 일한 곳은 양초공장이었습니다. 주인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은 콜게이트는 주인으로부터 양초공장을 물려받았고 사업은 계속 확장되어 지금의 콜게이트라는 세계적인 기업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뿌리면서 거두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나의 모습은 어제의 씨뿌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난 한주간에 뿌린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승전가를 부르기도 하지만 패배하여 사죄의 은총을 구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한주간 무엇을 뿌렸습니까? 그리고 이번 한주간 무엇을 뿌리며 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고 씨를 뿌려나간다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은 오늘과 또 다른 모습으로 주님 앞에 기쁘게 서게 될 줄 믿습니다.
2. ‘넉달’을 기다려야 합니다(35a절).
‘넉달’은 열매 맺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절대시간입니다. 아침에 뿌리고 저녁에 거둘수는 없습니다. 삶은 기다림과 인내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기다림의 법칙’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여기까지 올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사랑과 인내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버섯은 6주만에 성장합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쓸만한 재목이 되기까지 60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옛날 부모님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는다고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그 오동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립니다. 마침내 딸이 시집을 갈 때 그 오동나무를 베어서 예쁜 장롱을 만들어 함께 보내 주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 형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듬고 자신을 연단하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조금만 더 참으면 열매를 거둘텐데 참지 못하고 주저 앉아 버린 분이 있다면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참지 못할 고통이 있습니까?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를 지났습니다. 더위와 목마름에 지친 그들은 ‘마라’라고 하는 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쓴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토해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마라에서 11km만 더 전진하면 12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오아시스 ‘엘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11km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오아시스가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쓴 물 마라에서 주님과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인내하고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오아시스가 눈앞에 전개될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은총을 앞세워야 합니다(38절).
오늘 우리가 복된 신앙의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씨를 뿌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 한국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실하게 땀흘리고 순교의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오늘의 새로남 교회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지금의 경제적인 열매를 누리기까지 가족과 헤어져 월남전에서, 열사의 건설현장에서 싸우며 땀흘린 뿌림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세대가 눈물과 땀을 흘린 것이 있었기에 우리 자녀세대가 그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소망의 인내 가운데 열심히 씨를 뿌리십시오. 믿음으로, 충성으로 파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수고와 열심 위에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해야 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지만 그 위에 하나님 주권과 다스리심의 은총이 앞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전9:11,12).
우리 새로남 교회가 성전건축의 원년으로 많은 계획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이 우리 교회 앞에 있을 때 우리는 기쁨의 열매를 거둘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합시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합시다. 열심히 땀을 흘립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앞세우며 땀을 흘립시다.
우리 새로남 교회 온 교우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교회’를 이루기 위한 세가지 원리를 삶에 적용할 때 우리 새로남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믿음의 안목을 열어주셔서 영적 추수의 감동을 보게 하옵소서! 소망의 인내를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게 하옵소서!
오, 주님! 아름다운 추수를 위한 땀과 눈물을 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총의 손길을 마음을 열어 사모하게 하옵소서! 저희 모두와 새로남 공동체가 함께 즐거워하는 은혜 속에 깊이 잠기게 하소서! 한 성도, 한 가족이라도 주님의 따뜻한 손길과 교회의 돌봄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도우소서!
사마리아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요 4:39-42 / 이훈구 목사
서 론
사람들은 서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저주하고 정죄를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시므로 차별대신 평등하게 대하십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사람들이 차별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내용을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마리아의 상황
사마리아는 히브리어로 ‘쇼므론’ 헬라어로 ‘사마레이아’이며 이스라엘 북 왕궁의 수도이었습니다.
왕상16:24에 보면, 사마리아 성의 기원은 아합 왕의 선친 오므리 왕이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세멜에게서 산을 사고 그 산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산 주인의 이름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을 하고 상대를 하여주지 않았습니다. 남쪽 유대인들은 북쪽에 갈 경우에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돌아서 갈 정도이었고 그 땅을 저주받은 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실 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당신은 유대인인데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라고 반문을 한 것입니다.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순수한 아브라함의 혈통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을 하지 않은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족이므로 이방인이나 마천가지이기 때문에 상종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이 혼혈족이 된 이유는 앗수르 왕이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그곳을 침공하고 그곳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다른 나라에 가서 살도록 하였고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을 잡아다가 그곳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혼혈족이 되게 된 것입니다.
왕하 17:6에 보면, BC 722년경에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의 북 왕국 수도이었던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습니다.
왕하17: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또 역사적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간의 골이 깊은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느4장에 보면,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잡혀간 지 70년 만에 귀환을 하고 에스라와 느혜미야에 의하여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합류하기를 원하였지만 거절을 당하자 바벨론 왕에게 거짓 고발하여 여러 해 동안 성전 건축이 중단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순수한 혈통과 신앙을 지키지 못하였고 또 과거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훼방을 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무시하고 이방인 취급을 하였고 그 땅을 저주받은 땅으로 인정하고 그 지역과 사람들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지역을 사랑하셨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자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먼저 믿은 자들이 예수님처럼 누구든지 어떤 지역이든지 편애를 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도를 하여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한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요4:3-26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로 가시면서 유대인들처럼 돌아서 가시지 않고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시는 중 피곤하여 정오시간에 수가마을 야곱의 우물에 가셔서 쉬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마을을 저주스럽게 생각하였고, 피하여 다녔지만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함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전지하신 예수님께서 버림받은 여인이 남들이 더워서 쉬는 시간이지만 물을 길으러 올 것을 아시고 그 여인을 만나주시고 가셔서 기다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과거에 5명이나 있었고 현재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 다른 여자의 남편이었으므로 유대인은 말할 것 없겠지만 그 지역 사람들마저 외면하는 여자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친히 만나주시고 하늘의 진리인 영생을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길러 온 이 낯선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건네면서 생수에 대하여, 영생에 대하여, 참 예배에 대하여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평범한 유대인으로 생각하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는 선지자라고 고백을 하다가 최종에는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세계 3대 성인 중에 한 분으로 알던 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과 생각이 바뀌어 메시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오 메시야 (구원자)이신 것을 알려야 합니다. 특별히 소외당한 지역이나 인종이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은 형편없는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복음화 시키셨습니다.
요4:28-30에 보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게 된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던 물동이를 우물가에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외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지역인 사마리아 수가에 가셔서 한 여인을 믿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한 부락을 복음화 시키셨습니다.
요4: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요4: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4: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마을에 초대하여 2일간이나 유하게 하시고 하늘의 진리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되었습니다.
요4:40-42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사도들이나 전도 특공대를 통하여 복음화 시키시지 않고 형편없는 여자요 왕따 당하고 버림받은 여자를 통하여 복음화 시키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대단한 타이틀을 가진 자를 통해서만 아니라 미천해 보일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자를 통하여 이 세상을 복음화 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예수님을 만난 자라면 전도자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으며 또 전도하는 사명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4.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도 사마리아를 복음화하라고 제자들에게 유언하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전도를 명령하실 때에도 사마리아를 빼놓지 않으시고 꼼꼼히 챙기시고 그곳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전도를 자기들의 동족인 예루살렘 유다에만 하였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를 외면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제자들 11명으로 시작된 교회가 계속 부흥하여 120명으로, 3000명으로, 장정만 5000명으로, 수만 명으로 부흥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가 부흥되니 그것만 기뻐하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전하는 것을 외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이 흩어져서 사마리아에도 땅 끝에도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도록 유대교에 기독교를 핍박하도록 허락을 하셨습니다.
유대교의 열심당원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인 사울을 통하여 심한 기독교의 박해가 시작되어 곳곳에 세워진 교회가 폐쇄되고 신자들이 투옥되고 또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행7:58-60)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이렇게 큰 박해가 있자 사도를 제외한 자들이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시리아와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흩어진 자들이 처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핍박을 통하여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외면한 지역에 평신도들에 의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교회가 세워지는 유언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5. 빌립집사를 통하여 사마리아를 복음화 시키셨습니다.
행8:4-13에 보면,
초대교회에 첫 번째 안수 집사가 된 빌립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 가서 그곳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더러운 귀신도 쫓아내고 각색 병든 자들을 치료하여 주고 표적을 행하자 그 성에 살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내려 보냈고 그들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받기를 위해 안수 기도를 할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소외당하던 지역인 사마리아는 예수님 생존 시에는 천박한 무명의 여인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졌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사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신도인 빌립 집사를 통하여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목사와 선교사만을 통하여 민족과 열방을 선교하시지 않고 다양한 신자들을 통하여 선교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신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다 선교사요 전도자입니다. 가장 가까운 서울과 대한민국과 북한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하신 유언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도 어떤 지역도 어떤 민족도 버려지기를 원치 않으시고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키시지만 먼저 구원받은 자들을 선교사와 전도사로 참여시켜 공동사역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결 론
현대의 사마리아는 알려지고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이 은근히 무시를 하고 적대감을 갖고 있는 지역과 나라입니다.
또 사마리아는 이 땅에서 버림받고 소외를 당한 자들입니다. 지식이 부족하여, 갖은 것이 없어, 지위가 낮아서, 연세가 많아서, 건강하지 못해서 무시당하고 소외를 당하는 우리들의 이웃이 사마리아입니다.
우리는 무관심하지만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믿은 우리들에게 저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신실한 신자요 예수님의 제자인줄 믿습니다.
사마리아인의 회개
요 4:39-42 / 임덕순 목사
구약성경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니느웨 성 사람들이 집단으로 회개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도망쳤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풍랑으로 그를 막으시고 다시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요나는 할 수 없이 니느웨에 가서, 이 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십일 후에는 무너질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왕에서부터 평민까지 모두 상복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용서를 비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집단적인 반응이 나타났을까요? 그들 마음속에는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벌을 받아서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이미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에 요나의 설교가 불을 질렀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도망치다가 죽음에서 겨우 살아난 경험에서 나온 요나의 설교는, 하나님은 능히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회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을 이 사마리아 성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의 회개는 단순히 한 여인의 회개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한 동네 전체의 집단적인 회개로 이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공통적인 죄의식과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 여인의 증거가 거기에 불을 댕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난 주일에 읽은 앞의 말씀에서 지금은 추수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하나님께 돌아올 시기라는 말씀인데, 우리는 그런 현상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단적인 회개가 가능한 시대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공통적으로 죄의식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시대가 참 발달되고 편리한 시대라고 하면서도, 지금은 말세이고, 우리가 처한 상황은 막장이며, 이러다가 우리가 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깔려 있습니다.
요즘은 막장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갈 데까지 갔다. 끝이 막혀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용어입니다. 포털사이트에는 욕 방이 있다고 하는데, 초등학생들도 모여 가장 상스런 욕으로 엄마를 욕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있더랍니다. 정말 갈 데까지 간 모습입니다. 드라마도 막장드라마가 최고 인기인데,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막장드라마를 욕하면서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섬짓 자신도 그런 생각에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이러다가 우리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무의식속에 스며듭니다. 우리 시대도 니느웨나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집단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은 어디서 무슨 뉴스가 하나 터지면 몇 분도 안 되어 인터넷과 핸드폰을 통해 전국과 전 세계에 퍼지고 맙니다. 어떤 이야기도 그것이 특이하다 싶으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곤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사람들의 죄의식과 두려움에 불을 지르는 말씀을 선포 했고, 누가 그 말씀의 도전을 받아 회개하고는 자기가 이런 사람이었고 이런 고민과 이런 절망을 안고 살고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형언할 수 없는 용서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사마리아 여인처럼 증거 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깔려있던 두려움과 갈증이 한꺼번에 노출되면서 집단적으로 주께 돌아오는 회개가 가능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엘리야가 보았던 손바닥 만 한 구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이 이미 희어져 추수할 때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막장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바르게 말씀대로 살면서 담대하게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깔려 있던 죄의식과 불안과 상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주 오래된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수백 년 전에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에 속해 있다가 앗수르에 망했습니다. 그때 앗수르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잡아가고 대신 앗수르 사람들이 거기 와서 살게 했습니다. 결국 남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이 함께 혼인을 하는 바람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 혼혈족이 되어버렸습니다.
한편 남쪽 유대인들도 바벨론에 포로되어 갔다가 70년만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하자고 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화가 난 그들은 바사 왕에게 고자질해서 성전 건축을 방해했고, 결국 남쪽 유대인들과는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만도 못하다고 생각했고, 이방인보다도 멸시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그 예배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죄 용서가 없었고 하나님과 만나는 감동도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와 같았습니다. 조상 제사에 무슨 생명이 있습니까? 거기에 생명력이 있고 조상과의 만남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까? 그야말로 죽은 의식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죄를 용서받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갈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엉터리 같은 예배로 만족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고 싶은 갈망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뼛속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사마리아를 찾아오셨고, 새로운 제사법을 가르쳐 주셨다는 소식을 죄인이었던 한 여자에게서 들었습니다. 새로운 예배란, 예루살렘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산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라, 오직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들은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숙제였고, 마음속에 깔려 있는 응어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기들을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반가워서 하던 일들을 멈추고 모두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통된 응어리는 무엇입니까? 한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난과 질병이었습니다. 우리는 수 천년동안 가난과 질병을 벗어나지 못한 민족이었습니다. 60년대까지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예수를 믿으면 가난을 벗어나고 병을 고쳐주신다고 설교했습니다. 이분의 설교는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슨 병이든지 낫고, 예수를 믿으면 하는 일이 잘 되어 부자가 된다는 설교는 모든 한국 사람들이 듣고 싶어 했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입니까?
우리민족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체험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죄에서의 해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채 병원에 떠밀려온 사람처럼 그렇게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라는 것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유교 불교의 가르침대로 부모에게 자식 된 도리를 하지 않으면 그게 죄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죄라고 여겨왔을 뿐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가련한 신세이면서도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마리아 인들만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민족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응어리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왕족이 잘못을 저질러서 왕궁에서 쫓겨나 왕을 배알할 수가 없다고 합시다. 그것보다 더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가장 답답하고 가슴에 응어리진 문제는 우리의 창조자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단절된 것이고, 그것 때문에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입어도 따듯하지 않고 높이 올라가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엉뚱한 곳만 긁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수 천년동안 헛된 미신을 믿으며 살아왔지만 그것을 죄로 여기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백 년 동안 교회가 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만 정확히 가르쳤어도 지금쯤은 엄청난 영혼의 추수를 할 수 있을 텐데, 죄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품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방인입니다.
여자가 불륜으로 가득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자기 입으로 밝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날마다 얼굴 맞대고 살아야하는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 말해버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네 말을 어떻게 믿고, 그분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믿겠느냐’ 라는 사람들의 반응에, 이 여자는 ‘내가 이런 사람이었고,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그분은 내 과거를 전부다 알고 계시더라.’고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다 말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의 치부를 다 공개하고도 과거처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자랑스러운 사실이 부끄러운 자기 과거가 들통 나는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마리아에 오셨다는 사실을 나 혼자만 알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의 과거가 들통날까봐서 이 일을 숨기고 말을 안 하면 우리 동네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장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가서 외치기를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가 우리 동네에 오셨다고 외친 것입니다.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대충 아는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자 자기의 과거를 드러내면서 ‘나 같은 죄인도 그분이 상대해 주셨다’고 솔직히 고백하자 그 솔직한 고백이 사람들의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이 여자를 따라서 우물가로 한 유대인을 만나러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부끄러운 여자를 통해서 사마리아의 영혼들을 추수하셨습니다. 왜 천사들을 동원하지 않고 우리처럼 허물 많은 사람을 전도자로 삼으실까요? 천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한다면 어떨까요? 그저 아름다운 소리에 그칠 뿐이지, 사람들 가운데 공감대는 형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사들에게는 우리처럼 고난과 유혹과 시험 많은 세상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고,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본적도 없고, 이웃에게 욕을 먹거나 사업에 실패를 해본적도 없습니다. 죄 때문에 고민해본적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복음을 전하면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다 아는 죄인인 여자가 자기 이야기를 해 가면서 예수님을 증거 하니까, 그 증거는 살아있는 증거였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따라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 나서,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있지도 않고 복음전도에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이웃의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는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고난에서 만난 그리스도를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율법사나 제사장이 가서 전했더라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솔직하고 대담하게 증거하자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웠고 그들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갈망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나보다도 더 죄인인 여자의 마음에도 저렇게 평화와 담대함을 주신 주님을 나도 가서 만나서 그런 용서와 구원과 평안을 얻어야 겠다’고 동네 사람 모두가 몰려나온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전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완전한 사람이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문제가 많고 두려움과 절망에 짓눌렸던 내가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났다고 할 때 이웃은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40절)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님이 자기들을 찾아오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쁘니까 다음에 시간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나야겠다고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달려갔고, 자기들의 집으로 가셔서 함께 머무시면서 말씀해 달라고 간청했으며,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은 후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셔다가 말씀을 들은 후에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 하였더라.”(42)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이 여자의 간증이 너무나 은혜스러웠고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여자의 간증은 단지 ‘솔직하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으니 가보자’라는 정도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여자의 간증이 없었다면 그들이 주님을 만나러 갈 리가 없습니다. 간증이 구원을 주지는 못하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간증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간증의 역할은 주님께로 가게 하는 역할입니다. ‘저 사람도 주님을 만나 저렇게 달라졌으니 나도 은혜를 받을 수 있겠구나. 나도 거절당하지 않겠구나.’ 하게 하는 것이 간증의 역할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자기들 집에 모시고 가서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듣고 깨닫고 확인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들리지만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처음 깨달은 이야기입니다. 혹시 메시야가 오신다고 할지라도 유대인의 메시야로 오실 뿐이지, 이방인의 메시야나 세상의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분은 유대인의 메시야가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이분에게는 다른 유대인들 같은 교만함이 없었고, 그분의 눈에는 자기들을 경멸하는 빛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곳에 오신 목적 자체가 자기들을 사랑해서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과연 자기들의 주님이셨고 온 세상의 구주이셨습니다.
이들이 만약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었다면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영혼의 갈증을 풀었을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갑자기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틀 동안이나 자기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온전히 주님 말씀 듣는데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진리를 아는데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열심을 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선입견과 오해가 있어서, 진리를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걸러 냅니다. 똑같은 설교를 듣고서도 같이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에 겨우 한 두 조각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진리를 듣는데 소홀히 한다면 영영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맨 후순위에 놓습니다. 교회에 오는 것도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이 있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따라 왔다가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다가도 핸드폰이 울리면 전화에서 들려올 소식이 더 궁금해지고 지금 듣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입니다. 말씀이 좋다고 말은 하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들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구원에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억지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주셨는데도 다른 것을 핑계대면서 적극적으로 매달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시고 맙니다. 당신이 주신 복음을 최고로 중요하고, 최고로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교만하게 주신 말씀을 거부하거나 다음으로 미루어버리면 그 말씀은 나의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물가에서 대충 듣고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자기 마을로 모시고 들어가서 이틀 동안 모든 일을 올스톱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진심으로 우리의 주님이고, 이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남들이 믿으니까 나도 믿는 믿음은 뿌리가 없는 믿음이고 가짜입니다. 직접 듣고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내게 무슨 뜻인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님께 기도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은혜를 모두 놓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 모두를 구원해야 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할 자는 구원하시고 버릴 자는 버리십니다.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내버려두었다가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하시는 것은 아니고 아주 분명하고 공평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에게는 은혜를 거두어 가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교만한 자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감사하지 않고 투덜대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지금 교회에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것 같습니까? 나중에 보십시오.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입니다.
여러분 교만하십니까? 말로는 교만하지 않다고 하면서 자기 잘난 맛으로 살고 하나님 말씀이 믿기지 않는다면, 그게 진짜 교만한 사람이고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참된 겸손은 사람들 앞에서 허리를 많이 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이나 경험이나 계산보다 반배 이상 옳다고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봉사를 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여도, 말씀을 듣는 것을 제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지금 자기의 종교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뿐이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겸손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원칙입니다. 겸손히 말씀 듣는데 투자하는 성도가 됩시다. 세상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섬기며 인도받으며 살아갑시다.
시대가 악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전도합시다. 사마리아 여인 같은 한 사람의 증거자가 이 시대를 주님께 돌아서게 만들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전한 예수
요 4:39-42 / 박종순 목사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는 세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북쪽은 갈릴리 지방으로 어부들과 서민 대중이 주로 모여 살았고, 중부지방인 사마리아는 이방 민족과 결혼한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살았고, 남쪽지방인 유다는 예루살렘이 있었기 때문에 주로 종교, 정치, 경제 지도자들과 정통성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문제는 사마리아를 대하는 유대인들의 시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으로 취급했고,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마치 더러운 짐승을 대하듯 했고 상종하기를 꺼렸습니다. 유다 지방에서 북쪽 갈릴리 지방을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동네를 피해 외곽도로로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그들의 독선과 편견이 낳은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러한 유대인들의 통념과 관행을 뒤엎고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 어떤 여인을 만나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3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갈릴리로 가실새"라고 했고, 4:4을 보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제자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처럼 외곽도로나 순환도로를 선택하지 않고 사마리아 복판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중심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 우물가에서 물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4:7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그냥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 사회관습이 여자는 숫자에 들지도 못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녀의 경우 정말로 이름 없는 여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여자, 가명을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4:16을 보면 그녀와의 대화중 예수님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했고, 17절 이하를 보면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그녀는 다섯 남자와 헤어졌고, 여섯 번째 만난 남자도 정식으로 결혼한 남자가 아니라 동거하는 정도의 남자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여자를 팔자가 세다고 말하고, 사회도덕은 부정하다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만나 대화를 나누셨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녀의 과거는 어둡고 불행했습니다. 상처의 골이 깊은 여자였습니다. 과거도 불행했고, 현재도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시제상 시간을 삼시제로 나눕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는 계속 과거가 되어가고 있고, 미래는 현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과거가 있습니다. 화려한 과거도 있고,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행한 과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과거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했고, 현재도 변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여자라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었고, 허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했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21절을 보면 "내 말을 믿으라"고 했고, 26절을 보면 "내가 그로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우물가에 물길러 나왔다가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난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녀가 취한 행동입니다.
1.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4:6을 보면 그녀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한낮 제6시를 골라 물 길러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처지와 신분이 자랑스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가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4:28)동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가 동네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녀가 그토록 피해 다녔던 사람들을 찾아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자존심을 바꾸었고, 비굴을 치료했고, 성격과 행동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 만난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한주간 남성들만 모이는 새벽부흥회가 있었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모여 뜨겁고 강하게 기도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과 용기를 공부하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토요일 새벽은 남성들 전체가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헌금을 드렸습니다. 이름을 밝히진 않은 헌금봉투 속에 이런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박종순 목사님께 간증 한 마디 올립니다. 지난주일 저녁예배 때 하나님의 기적으로 불치병이 치유된 김정인 선교사의 간증에 눈물로 감격했습니다. 저 또한 남성새벽부흥회 기간중인 금요일 불가능 했던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염려, 근심, 걱정, 억울함과 안타까움 모든 것 하나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지난 가을부터 일천번제로 날마다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시간 다함없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주님께 서원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신 은혜에 눈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일만번제를 드리며 새벽제단을 쌓고 싶습니다. 이 나이에 너무 큰 욕심일까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평생토록…. 새벽기도 가려면 빨리 자야죠. 그래서 이만 두서없이 줄입니다.”라는 쪽지였습니다. 그리고 봉투속에 큰 헌금이 들어있었습니다.
은혜받은 경험, 예수님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감격이 차고 넘칩니다. 그 기쁨과 감격을 주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녀 역시 그 감격 때문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것입니다.
왜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까? 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기쁨이 없습니까? 그것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예수님 만나면 물동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은 증거는 평안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80년대 미국에서 거액복권에 당첨되자 그 충격으로 심장이 멎어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경우 당첨의 기쁨은 잠깐이고 그 이후엔 걱정이 더 큰 것입니다. 어떻게 관리하나 등.
그러나 예수믿고 받은 평안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 할 수 없고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흔들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직접주시는 기쁨이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아멘.
2. 예수를 전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나의 행한 모든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소리쳐 전했습니다.
숨어살던 여자가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소극적인 여자가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던 여자가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체면과 자존심과 죄책감으로 고뇌하며 살던 여자가 떳떳하게 머리 들고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이 변한 것입니다. 남자는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거만해 지고, 여자는 이쁘다는 소리를 열 번 이상 듣고 나면 거만해 진다고 합니다. 남자는 오른쪽 귀로들은 말은 왼쪽귀로 흘려보내고, 여자는 양쪽 귀로 들은 말을 입으로 쏟아 낸다고 합니다.
예수만난 사람들은 떳떳해 집니다. 당당해 집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삶이 신바람이 납니다. 할말이 많아지고 예수가 자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믿고 예수만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부끄러워 마십시오. 예수님을 자랑하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십시오.
3.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본래 사마리아는 예수 믿기가 어려운 동네였습니다. 그곳에는 황금송아지 우상이 있었고, 그리심 산에서 따로 제사를 드리며 자기네 신을 섬겼기 때문에 예수믿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러한 그 동네에 여자 한사람이 예수를 믿고 동네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예수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30절을 보면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고 했고, 39절을 보면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자라"고 했습니다.
어떤날 아들이 희끗희끗한 아빠의 흰 머리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아빠 흰머리는 왜 나는거야?" "임마, 네가 아빠 속을 썩히니깐 나는거야." 한참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하던 아들이 "아빠, 그럼 할아버지 흰머리는 왜 나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오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2:11을 보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여인 때문에, 나사로 때문에 예수믿는 사람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 때문에 예수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옵니까? 아니면 떠납니까?
4. 결론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41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고 했고, 42절을 보면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결론은 예수님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형제나 친구를 설득하고 감화를 주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기도하고 예수를 그에게 전하면 됩니다. 그 이후의 결과는 주님이 친히 맡으시고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결과를 걱정하지 맙시다.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겁내지 맙시다. 내가 할 일은 믿고, 정하고, 기도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대구 지하철참사의 방화범은 뇌졸중과 우울증을 앓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지난해 8월에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고, 자신을 죽여 달라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영적 우울증 환자가 많습니다. 언제 어떤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만일 방화범을 치료하고 그를 예수믿게 했다면 끔찍한 사건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서 빨리 영적 우울증을 앓고있는 이 시대를 향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것처럼 자존심, 체면 지위라는 물동이를 버립시다.
"놀러가자, 못된짓 하자"는 말 보다 예수 믿고 구원받지는 얘기는 떳떳하고 당당한 얘기입니다. 부끄러워 할 이유도 없고 주저할 이유도 없습니다. 작정하고, 써내고, 기도하고, 전합시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고 전파합시다. 아멘.
꽃보다 아름다운 예수 그 이름
요 4:39-42 / 윤삼중 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사건은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 한 영혼이 사단의 손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의 생명을 얻는 것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기적입니다. 천국에서 축제가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은 바로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생명은 꽃보다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운 꽃보다 예수님은 더 아름답고 큰 감동을 줍니다. 예수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예수 그 이름속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엄청난 능력과 샘솟는 기쁨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귀한 복음을 누구에게 이 사역을 맡겼습니까? 행1: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 바로 올바른 전도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증인”이라는 것은 내가 실제로 보고 느끼고 체험한 것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증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증인이 되라는 것은 우리가 만난 예수님, 구원의 은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사실을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보여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환란과 핍박 시대에 증인(마르튀스)이 되라는 것은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바를 확언하고 증언할 수 있는 자 혹은 '순교자' 가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 대해 입으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온 생명까지 다해서 증거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증인이 되려고 하면 먼저 무엇을 받아야 해야 합니까?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원하시는 증인이 되려고 하면 먼저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아니하면 온전한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증인이 되기 위하여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권능'(뒤나미스)이란 예수님의 사역을 시작하게 한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인 성령의 힘으로 악한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하며 원수를 대적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후에 너희는 가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땅 끝에서도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때에 성령의 권능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라고 증거하는 능력이 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성령을 통하여 임한 권능은 그들로 하여금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고, 병자를 치유케 하는 능력이었습니다.(행3:6) 우리가 아무리 유창하게 말을 잘하고, 아무리 복음을 듣는 사람들과 친밀해진다고 해도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을 힘입지 못한다면 결코 진정한 복음의 증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증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을 힘입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볼때에 황무지와 같은 사마리아의 성읍에서 어떻게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됩니까? 예수님은 누구를 통하여 온 동네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역사를 일으키십니까?
1.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한 여인이 자신의 증언을 통하여 새 생명의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꽃보다 귀한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생수를 주시는 주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가 되었고, 자신을 만나신 예수님이 바로 그 구원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런 확신을 하게 된 까닭은 자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예수님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선지자요, 메시아이심을 확증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 곧 남자를 의지하며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외톨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비밀을 아시고 자신에게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와, 새생명을 얻는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구주로 영접하고 나니 평생토록 갈망하던 목마름이 일시에 해결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가장 외롭고 가장 낮고 이제 끝이라는 생각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자가 찾아오셨다는 사실은 그녀를 엄청나게 감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쁜소식을 자신의 마음속에만 담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고, 성령의 생수가 흘러 넘쳐서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샘솟는 기쁨, 영원한 생수를 맛본 이 여인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이 여인은 이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증인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자원하여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동네 사람들에게도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열정적으로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사마리아 여인은 증인으로 쓰임받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왕따는 당하는 사람이었고, 비난과 조롱을 받는 자였습니다. 그 당시에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웠으니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더 이상 구제불능인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 여인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싫어서 사람들과 말하는 것을 싫어했던 여인이 먼저 동네 사람들에게 찾아와서 말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논리적으로 자신의 변화시킨 놀라운 사건들을 열정적으로 간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여자를 변하게 하신 분이라면 나도 한번 믿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살아 있는 간증은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데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특히 간증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하는 아주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너무 힘들고 불행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완전히 변했다는 간증을 들을 때 나도 예수란 분을 만나서 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사마리아 땅에 영적 새 봄이 오는 생명의 축제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흠이 많고 연약한 한 여인을 통하여 생명의 축제가 일어납니다. 39절에 보면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여기서 ‘증언하므로’는 영어로 ‘who testified’로 번역되었으나 완벽한 번역이 아니라며 모리스(Morris) 라는 신학자는 차라리 ‘그 여자가 증거하자’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리스는 또 “누가 증거 했느냐는 것보다 그 여자의 줄기찬 증거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진의(眞意)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제는 누군가가 뿌리는 복음의 씨앗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수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의 감격 속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씨를 동네 사람들에게 뿌렸습니다. 그 결과로서 놀라운 반응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그 동안 동네에서 영향력이 있었다면 그저 악한 영향력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예수님으로 변화된 이 여인의 증언으로 한 동네 사람 전체가 구원을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라이트풋(Lightfoot)은 말하기를 “사마리아 여자가 증거한 그 한 마디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었지만 당장의 목적을 성취하기에는 충분한 것이 되어 다수의 동네사람들을 불러냈고, 예수를 믿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한 여인은 그간 수치스런 삶으로 위축되었던 태도에서 완전 벗어나서 증인의 역할을 했고,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쓰시는 이들의 보편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고전1:27) 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의 사역자로 쓰신 것들을 보십시오. 유랑자 아브라함, 노예 민족의 히브리인들, 살인자 모세, 목동소년 다윗, 바벨론 포로 소년 다니엘, 어부출신 베드로, 세리출신 마태, 우레의 아들 요한 등 그 시대와 역사에서 가장 연약하고 부족하였던 사람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실 때에도 왕녀의 몸을 빌린 것이 아니라 시골 무명 처녀 마리아를 택하셨고, 사마리아의 첫 선교사도 그 동네에서 가장 불행하고 연약한 여인을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증인이 될 그의 제자들 가운데 왕족이나 귀족이 하나도 없고,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인물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자신의 힘으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나의 약한 것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12:9-10, 빌4:11-13)
사마리아의 여인은 자신의 무엇을 간증하였습니까? 39절에 보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고 했습니다. 즉 자신의 불행하고 부끄러웠던 과거사와 한을 주님께서 다 아시는 분으로 것을 간증했습니다.(요4:16-18) 하나님은 연약한 자, 부족한 자를 사용하여 당신의 복을 전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원래 멸시받는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도 천대받던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우물가에 한적한 시간을 틈타 남몰래 물을 길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의 신적 능력을 간증키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사까지도 온 동네 사람들에게 밝혀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난점을 가진 전도자가 또 있었는데, 바로 바울 사도였습니다. 그는 회심 전에 무수한 그리스도인의 피를 흘리게 했던 과거를 함께 전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려고 하면 나의 약점과 수치스러운 것을 불신 이웃에게 밝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곤혹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약점, 나의 부족한 점을 사용하여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계 선교에서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이 있다면 허드슨 테일러라는 영국 사람입니다. 작고 얌전하고 내성적이어서 큰일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 분은 차이나 일렌 미션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어 중국에서 큰 역사를 많이 일으키셨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강함의 비결을 알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선교사역 업적에 대해 친구로부터 칭찬을 받자 허드슨이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며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약한 자를 찾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저를 발견하셨을 때 ‘저 정도 약하면 내가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실력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 키 크고 체격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일 크게 쓰시려면 제일 약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쓰임받은 자들은 항상 약한 자, 부족한 자, 실력이 없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2.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사마리아 성읍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3장에 보면 유명한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니고데모는 그 분의 영생을 주시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율법적인 지식을 앞세워서 그 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4장에 보면 불쌍하고 연약한 사마리아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갈증과 고민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함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온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간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거의 다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41절에 보면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예수님은 자신에게로 몰려 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이틀을 유하시면서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도 그렇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말씀이란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요한복음 1:1절을 보면 예수님이 바로 말씀자체라고 설명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가 표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해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데려온 이웃들을 말씀으로 먹이셔서 믿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인의 변화가 큰 표적이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믿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며 그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10:17)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일차적으로 인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 사건 외에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기적도 일으키시고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말씀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기에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도 바로 말씀이 깨달아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간증이 예수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는 것이라면 설교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간증이 예수님에 관해서 듣는 것이라면 설교는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를 못하면 힘이 빠지고 의욕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명의 말씀을 먹지 못할 때 영적인 힘이 사라지고 영적인 욕구가 사라져 버립니다.
3. 새 생명의 축제는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들이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읍에서 일어나는 새 생명의 축제의 극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을 아는 것입니다. 42절에 보면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을 알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 생명의 축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바로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며 감탄은 했지만 예수님만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이심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합니다. 교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구제도 하고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노력도 합니다. 다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깨닫는 것은 오직 그 분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임할 때에, 사람들의 심령속에서 살아서 역사할 때에 진정한 생명의 축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에 이들은 누구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까? 처음에 사마리아인들은 여인이 자신의 몸으로, 그리고 경험으로 증거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이 39절에서 그 동네 사람들도 믿었다고 말하고 있고 42절에서 새롭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도 믿었다고 말하지만 첫번째 믿음과 두번째 믿음은 질적인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42절에 보면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 줄 앎이라” 이 구절이 그 증거입니다. 처음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저 간접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즉 그 전에는 엉망으로 살았던 여인이 너무도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 이야기하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었고, 그 분을 신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믿음은 단순히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구원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틀 동안 사마리아에 계시면서, 하나님나라에 관한 말씀을 자세히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전도한 여자에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42절)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듣고 그들은 예수님이 구주신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구원얻는 믿음이 되려면 우리는 다른 것보다 우선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분의 교훈과 말씀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그저 기록되어 있는 말씀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때만큼 말씀으로만 믿음이 자라나기는 힘든 거 아니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그 말씀이 기록되어질 때 성령님의 감동 속에서 그렇게 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고 정직하게 그 기록된 말씀들을 직접 읽고 들을 때처럼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더 이상 남의 간접적인 이야기나 경험담을 듣는데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그 믿음에는 충분할지 몰라도 그 후에 많은 시간을 지내온 우리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수준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의 수준도 사마리아 사람들의 고백처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 줄 앎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들을 때면 우리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될 수 있어야 하며, 또 가장 큰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그 분의 진리를 들려주시고, 우리는 그 진리를 기뻐하므로 그 진리 위에 든든히 세워지는 우리의 삶과 신앙의 수준으로 자라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