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섭 노 작가의 잉여생애
<글, 구성: 김정현(화백문학 편집부장)
애국자, 누가 누구에게 애국자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 태어나 아무리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나라를 등지지 않고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애국자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한다기보다 맡은바 임무를 다해 사는 것만으로도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중에도 삶이 곧 애국이고 애국이 곧 삶인 작가를 만났다.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3.1운동 기념관에서 살아있는 역사를 증명하며 우리의 조상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지켰는지 안내를 해 주시는 분이다. 많은 곳에서 강의와 해설과 번역과 글쓰기, 젊은 사람 못지않게 활동이 왕성하셔서 가까스로 시간약속을 했다. 하얀 겨울, 하얀 눈이 채 녹지 않은 눈길을 달려서 도착한 우리를 반기셨다. 선생님께서는 3.1운동 그 시절 안성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를 명확하게 알려 주기 위해 기념관으로 우리를 안내 했다. 기념관입구 양 옆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는 듯 펄럭였다. 기념관 건물로 들어서서 따뜻한 차로 얼었던 몸을 녹였다. 언 몸이 녹자 전시 된 순서대로 우리를 안내하면서 열띤 해설을 해 주셨다. 설렁설렁 알았던 이야기들이 다시 가슴을 파고들었다. 만세고개에서 있었던 4.1만세운동 그 외침이 황진섭 작가의 음성으로 아직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김-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이곳에서 해설을 하셨는지요?
황- 저는 60대 중반을 넘어서서 5년 동안에 6번의 대 수술을 하였습니다. 심장 판막 수술 2번과 장 수술 2번에 부대수술 2번이었습니다. 6번째로 심장수술을 할때는 제 자신이 스스로를 포기하였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가족들도 저의 장례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고 하드군요. 한밤중 중환자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생명의 신비감과 가슴에 가득히 존재감의 기쁨을 만끽하였지요. 퇴원할 때까지 약 3주간 많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역동적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생애에 비추어 여생은 무엇에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갈까? 어떤 일을 할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저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보상을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에서 꼭 해야 할 작은 일을 찾아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그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퇴원 후 약 1년간의 회복기를 거쳐, 전혀 기약되지 않은 기회에 인연이 되어 천주교의 미리내 성지와 이곳 안성3.1운동 기념관에서 해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바로 저의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그것이 2008년 여름이었으니까 어느덧 햇수로 5년이 되는군요.
김- 아, 몸이 그렇게 안 좋으셨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 보이십니다. 언제까지 해설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황- 저는 우리 시대가 지향하는 백세를 살 것입니다. 85세가 될 때 까지 이 봉사활동을 하고 그 후 10여 년간은 느긋하게 쉬면서 아름다운 생명의 존재감을 즐기고 싶군요. 그리고 구시대와 신시대를 연결하는 배턴터치의 글을 썼으면 합니다. 다만 저의 해설이나 창작활동은 관행적이거나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 되도록 꾸준히 공부하고 창의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결코 과욕이 아니라 고령시대의 표상이 되어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김- 네에,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젠 문학이야기로 넘어가서 선생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간 화백문학에 일본 문학을 번역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문학을 번역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요?
황- 저는 세기 말과 세기 초에 수술을 받지 않고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찾아 전지 요양을 하였습니다. 강원도 첩첩산골 깊은 산촌에서 한 겨울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겨울 동안 거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발목까지 덮이는 눈을 해치면서 산책하는 일, 그리고 묵상(종교적으로 말 하면 기도가 되겠지요)과 독서였습니다. 저는 그 세월이 비생산적인 無爲라고 생각했지요. 생산적인 有爲의 시간으로 바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일본어번역 공부를 시작하였지요. 낮이건 밤이건 6개월을 하였습니다. 일본어의 흐름과 일본사람의 생각이 희미하게 머리에 떠오르더군요.
요양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나와 번역가 시험에 도전했지요. 아들 손자와 같은 연령대와 같이 앉아 시험을 쳤지요.첫번째 낙방하고 두 번 만에 합격하였는데, 최고령이었을 뿐 아니라 합격성적이 좋았습니다. 소문이 나서 번역 일감이 답지하드군요. 그것이 번역을 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60대 중반기 지각 등판이었습니다.
김- 네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접할 수 있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앞서 말한 바 있지만 창조적인 번역과 창작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특히 일본어 번역에 있어,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묘한 감정이 정서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므로 갈등을 느낄 때도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3.1운동 기념관 해설사로서.
그러나 한 가지 일본인들의 사고가 공공성, 공익성, 공정성에 있어서 유념해 볼 바 있다는 것을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공, 공익, 공정의 사고는 바로 민주주의의 요체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한일문학교류에 적극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리의 폭발적인 뚝심과 민족적인 역동성을 저쪽에 알릴 필요 또한 끽긴하다고 믿습니다. 작년1년 동안 간단없는 시도의 결과, 물꼬를 트고 한일 양국이 문학작품을 상호 교차게재 하기로 하여 목하 진행 중이고, 장차 작가들의 상호 초청으로 홈스테이와 관광을 통해 인식과 정서의 공감영역을 넓혀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일본 쪽에서도 저의 제안을 크게 기뻐하면서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문학외교의 쾌거라고 할 것입니다.
김- 계간 화백문학에 바람이 있으시다면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황-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창작의욕을 고무 격려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작가들이 무엇을 바랍니까? 옛날부터 가난한 서생이라는 말이 있고, 오늘의 한국문단이 영세, 빈약하다는 것을 다 아는데 정신적인 가치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고뇌와 고난을 같이 나누는 자세 또한 소중합니다. 정치에 따를 것이 아니라, 정치에 앞장서 문단소통과 문단총화가 중요합니다.
김- 현 시대는 독자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그런 시대라는 것이지요. 잠들어있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어떠한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황- 전자미디어와 전파미디어의 위력이야 말로 막강합니다.
그러나 한편 찰나적이고 무차별 폭력적인 측면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독서야 말로 축적의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연구와 실험을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교양축적의 측면에서 라디오, TV보다 신문이 훨씬 낫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의 독서열을 권고합니다. 한밤중, 게슴츠레한 눈으로 퇴폐적인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냐? 초롱한 안광으로 시집1권을 읽으면서 가슴에 가득히 정서를 순화시킬 것이냐?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김- 선생님께서 번역을 하신 글 중에서 가장 애착이가는 좋은 작품이 있다면 어떤 작품인지 소개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황- 화백문학 2010년 겨울호에 번역 발표한 『참회의 육면경』(大江武夫(오에 타케오/수필가)을 서슴없이 들겠습니다. 작가가 仙臺市 國本町 모임의 기회에 화장실에 들어가 4면에 걸린 거울을 보고 사실적(事實的)으로 느낀 바를 쓴 수필이었습니다.
저는 이 번역수필의 말미, 번역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자기 얼굴에 묻은 티를 보면 부끄러움을 알고, 자기 표정을 보면 고칠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육면경이 아니라 단면경이라도 날마다 봐야 되겠다는 느낌이 든다. 부끄러움과 반성이 없는 현대인이 오늘의 비인간화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번역자)」
김-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에 취재자 스스로 감동했습니다. 앞으로도 열정적인 해설과 좋은 글을 통해 후진들을 깨우쳐 주시고, 시대정신을 전파해 주시기를 빌겠습니다.
미쳐 인터뷰가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기념관 관람인이 들이닥쳤다. 황진섭 작가는 서슴없이 그들을 맞아, 안내하여전시장으로 향했다.
작별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떠나오면서, 잉여생애를 역동적으로 살아나가는 노 작가의 애국적인 열정에 경의를 금할 수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