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진목승
주연 : 유덕화, 오천련, 황광량, 오맹달
천장지구 (天長地久)
지난 어느 청춘의 연대기에 나는 영화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 보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언제나 슬픈 영화가 좋다. <천장지구>는 버림받은 내 청춘의 송가 같은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사랑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그리고 죽음은 아직 비장해도 괜찮은 것인가? 라고 물었던 때가 있었다. 세상 모든 인간들의 성장사에 담겨진 추억엔 나름의 유효기간이란 것이 있다.
철이 들면 그보다 어렸을 때의 이야기들은 한낱 부질없는 것이 되고, 다시 좀더 나이가 들면 그보다 젊었을 때의 사랑과 가슴 설렘은 어느새인가 잊혀지거나 아내 몰래 숨겨 둔 사진 한 장, 편지 한 통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랑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가 그대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일 것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기를 함께 했던 사랑들은 이상하게 떠나가고 만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랑이 떠난 뒤에 찾아오는 사랑은 이미 격정은 아니다.
청춘의 사랑은 오로지 한 번, 그 가슴설렘도 오로지 한 번. 자식을 낳은 뒤의 인생을 여생(餘生)이라 하듯 이후의 사랑은 다만 남겨진 사랑일 뿐이고, 선택이 된다. 첫 사랑은 그래서 늘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 된다. 그래서 청춘을 다루는 모든 영화들은 오로지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청춘의 사랑에 선택은 없다, 단지 운명이 있을 뿐…. <천장지구>에서 내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은 오직 나의 것이며 또한 그대의 것이기도 하다.
나의 청춘은 생(生)을 사유(思惟)하지 않는다
어떤 영화를 보면서 저건 정말 내 얘기야, 라고 생각하며 보게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그건 극중 주인공이 처해있는 처지가 정말 자기와 유사해서 자기 동일시의 과정에 빠져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영화의 전체적인 정조(情調)가 보는 이의 아니마를 움직일 때라 생각된다. 전자의 경우이든, 후자의 경우이든 때로 이런 영화들이 값싼 감정의 배설물 이상이 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영화 <천장지구>의 내용은 당시 80년대 말 유행하던 홍콩느와르에 멜로드라마를 가미한 어찌보면 다소 진부하기까지 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파에 비장미를 더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논리적으로 맞다고 하더라도 그 영화가 영화적으로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에 깊이 각인된다면 그것이 또한 컬트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이 영화는 홍콩 평단의 비교적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1989년 우리나라 개봉관에서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던 영화였고, 비평가들은 물론 관객들에게도 차가운 냉대를 받았다. 그러나 개봉관에서 간판을 내리고 변두리 재개봉관과 비디오로 출시된 뒤에 상황은 역전되어 이 영화를 수 차례 혹은 수십 차례나 다시 보려는 관객들이 있었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야말로 변두리 극장에서 변두리 관객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재발견된 영화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이 이 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어째서 이 영화는 개봉관에서는 실패했지만 변두리 재개봉관과 비디오로 출시되었을 때는 그토록 전폭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것일까? 그것은 이 영화가 버려진 사람들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 줄거리 (Synopsis)
<천장지구>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은 홍콩판 <맨발의 청춘>이라는 별칭답게 전형적이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잃은 아화(유덕화)는 홍콩의 뒷골목 사창가에서 자라난다. 그를 돌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매음굴에 있던 이모들이다.(영화 자막에도 '이모'라고 나오기는 하지만 설마 이들을 진짜 이모로 생각하는 관객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뒷골목 남자들의 성장사는 실제이든 아니든 대개 모계 혈족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아화는 오토바이 폭주를 즐기며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리의 자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화는 라바 패거리와 함께 보석상을 터는 일에 참여한다. 라바는 아화의 의형이 이끄는 폭력단체의 소두목으로 조직의 보스인 아화의 의형을 제치고 자신이 조직을 장악하고자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였다.
우여곡절 끝에 보석상을 터는 일에 성공한 아화와 라바 패거리는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길을 가던 한 여대생을 납치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조조(오천련)였다. 이쯤에서 한 번 주목해볼 만한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는 이때 만나게 되는 히로인(heroine)의 사회적 계급이다.
내게 이렇게 찾아와도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린 라바는 아화로 하여금 인질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조조가 자신들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그를 죽이라고 재촉하지만 아화는 차마 조조를 죽이지 못하고 그녀를 도망치도록 한다. 경찰은 조조가 그들에게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났으므로 그들의 얼굴을 알 것이라 판단하여 조조로 하여금 용의자들을 대질토록 한다. 용의자 중에 포함되어 있는 라바와 아화. 그러나 조조는 이들을 모른다고 한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조조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한 라바는 조조를 죽이지 않은 아화를 다그치고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조조를 납치해 죽이도록 명령한다. 아화는 라바의 부하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조조를 구출하고 그 와중에 라바의 부하를 칼로 찌르고, 자신도 다친다. 마카오의 외할아버지 곁으로 피신한 아화. 조조는 아화의 친구를 찾아가 아화가 마카오에 있음을 알게 되고 그를 찾아 마카오까지 찾아가는데..
아화는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마카오까지 찾아온 조조에게 "내게 이렇게 찾아와도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조조에게 돌아가라고 한다. 그러나 조조는 그래도 상관없다며 팔을 다친 아화에게 밥을 먹여 준다. 아화의 삶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를 낳아준 어머니도 없고,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화. 그는 그저 뒷골목에서 자신이 칼로 찌른 라바의 부하처럼 언제 칼에 찔려 죽을지, 아니면 보석상을 털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을지, 조직간의 패권 다툼에 죽을지 알지 못하는 인생이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단지 오늘이 있을 뿐이다. 우리들이 과연 홍콩 뒷골목의 이 청년, 아화의 삶을 진정으로 부러워하고 있는 것일까? 멋진 배우 유덕화가 몰고 다니는 멋진 외제 오토바이에 반해서 그의 삶을 부러워한 나머지 극중의 아화와 자기 동일시를 이루며 변두리 재개봉관의 어둠 속에 몸을 쭈그리고 그토록 공감했던 것인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말을 빌자면 사랑이란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타인과의 융합'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일'이며,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태도이자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받기만 하는 것도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 자신과 타인, 가족,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이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것이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화는 조조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프롬이 같은 책 『사랑의 기술』에서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오직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만이 뭔가를 주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의 뜻 그대로라고 했을 때 아화의 마음은 너무나 가난하고 그는 뭔가를 주는 행위를 즐길 수 없는 처지였다. 아화는 자신이 조조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에로스(eros)적 사랑이 아니라 타나토스(thanatos)적 사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천약유정 (天若有情) - 만약 하늘에도 정이란 것이 있다면
마카오에서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두 사람은 초경량 항공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이들이 비행할 때 흘러나오는 노래의 제목이 <不需要太董>인데 우리말로 직역해보면 "바로 잡으려 할 필요 없어(날 그냥 내 버려 둬)" 정도가 될까?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아화에게 기다리는 것은 라바의 도전으로 인해 둘로 갈라진 조직과 위기에 처한 의형이었고, 조조는 부모가 아화와 헤어지게 만들기 위해 강제로 캐나다 유학을 떠나도록 준비해 둔 상태였다. 아화의 의형은 라바 패거리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죽게 되고, 아화 역시 라바 패의 공격으로 머리를 다쳐 큰 부상을 입었다.
한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홍콩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그것이 아화의 죽음이든, 조조의 출국이든 두 사람의 상이한 계급 격차만큼이나 명백한 이별의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전의 세계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사이를 가로 막은 것은 가문간의 뿌리 깊은 알력과 같은 봉건적인 요소였지만, 현대의 세계에서 아화와 조조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결국 이 두 사람이 같은 계급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문제가 되는 대목 한 가지는 조조는 아화를 위해 유학을 포기하고 아화에게 달려가지만, 아화는 조조와 둘만의 결혼식을 치르는 척 하다가 결국 조직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라바가 자신의 부하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술집으로 향한다. 어째서 조조는 자신의 모든 편의와 안락을 버리고 아화에게 달려갈 수 있었는데, 아화는 조직의 의리를 버리고 조조와 함께 살기 위해 몸을 피하지 않았을까?
정답은 물론 '그러면 재미없으니까' 일 것이다. 거기에 적당한 마초이즘이 버무려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목을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 참 매력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러면 재미없다'고 말하는 축이 훨씬 더 인간적인 부류에 속한다. 여기에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해봤음직한 성장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실연'이다.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실연 당해 본 사람은 안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연애가 이들보다 더한 장애를 만나서 깨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없어 그를 떠나보냈거나 떠나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알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을 때 발생한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사랑의 선택이 실제로는 얼마나 현실적인 계산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 현상인가? 그래서 어른들은 어느 한쪽이 너무 처지면 불행하다고 말한다.
청춘은 당신의 긴머리를 휘날려
꿈을 불러일으키고
정말로 떠나려 할 때는
이미 알게 모르게
당신의 웃는 모습 남아 있구려
뜨거운 마음속 푸른 하늘은
생명의 시작이니
봄비 속 당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구려
청춘의 예쁜 꽃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생성시키고
흩날리는 온세상의 버들가지는
당신의 웃는 얼굴을 현혹시키네
흘러가는 홍진 중
누가 숙명을 정하였을까
말없는 차가운 밤에
당신은 빛을 숨기기 어렵다네
나를 한 번 봐요
화난 얼굴로 홍진속을 헤매이지 않게
청춘은 후회 없고
영원한 안식과는 다르지요.
자본주의의 그늘에 꽃 핀 불모의 사랑
아화는 라바를 죽이러 가면 자신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라바를 죽이러 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 역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조와 함께 도망쳐 라바의 패거리를 피하고, 조조의 부모를 피한다고 할지라도 좁은 홍콩 안에서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아화는 선택한 것이다. 조조를 그가 속해있는 세계로 되돌려 보내기로.. 그것이 아화가 조조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라, 청춘은 인생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그토록 뜨거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아화가 자신의 계급적 상승을 위해 조조를 이용하려 들었다면 우리는 T.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영화 제작명은 '젊은이의 양지')을 볼 뻔했다. 그러나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꿈일 뿐이다. 이 영화 <천장지구>에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존재는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화(유덕화)가 아니라 조조(오천련)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운명적인' 상대를 발견하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은 사실 서구 근대사회라는 특수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하지만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은 시대상황에 잘 부합하고, 그 자체가 매우 매력적인 요소를 지닌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만적 사랑'을 사랑의 본질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 프롬은 이에 대해 근대 자본주의가 지닌 특징을 언급하면서 '낭만적 사랑'이 이 사회의 특징과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한 '불완전한' 관념임을 폭로한다.
즉, 근대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환가치'를 증대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고, 이에 지친 사람들은 이런 억압에 대한 하나의 탈출구로서 별다른 기술과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편안한-그래서 이기적인- 사랑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사랑은 결국 '불모의 사랑'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지속불가능하며, 사랑의 대상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기애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것이다. 사랑도 계급을 초월하지 못한다.
아화가 라바를 죽인 뒤 길거리에 자빠져 마지막 숨을 부르르 떨며 내쉬는 모습을 우리가 공감하며 바라보는 이유는 거기에 사랑하지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랑과 출구가 막혀 버린 청춘의 비상구를 두드리는 막막한 심정에서는 아니었을까? 가끔 개그맨들이 나와 오토바이 폭주족을 흉내내면서 "오빠, 달려."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청춘은 원래 폭주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탈출구, 비상구가 없는 체제에서 청춘은 결국 못다핀 꽃 한송이로 시들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변두리 소극장에서 <천장지구>를 보며 감동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던 진짜 이유는 바로 그 청춘의 막막함 때문은 아니었을 런지....
천장지구 O.S.T 원봉영 - 천약유정 (天若有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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