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 왕은 고구려 후계
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리노라. 공(公)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덕
을 북산(北山)에 쌓고 공을 남해(南海)에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에 떨
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를 덮었다. 자손이 서로 잇고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며 땅은 천리를 개척하였고 햇수는 장차 800년이나 되려 하였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형제간
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 사직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
험과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 나라에 의탁하였다. 떠돌아다
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 무릇 백성에게는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하늘은 반드시 사람을 돌보아 주심이 있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
한 후계자로는 오직 공이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함에 공이 아니면 누
가 하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펼치고 공
을 고구려 왕으로 삼을지니,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으고 옛
왕업을 잇고 일으켜 영원히 이웃 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삼가하고 삼가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 갖춘 말
한 필, 무늬비단[綾] 다섯 필과 명주[絹]와 가는 실로 곱게 짠 베[細
布] 각 10필, 목화솜[綿]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여기서 중모왕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추모왕 고주몽을 말하는 것이고 덕을 북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워 이 뜻이 무엇인가요?
북산에 쌓다 남해에 공을 세우다가 어떤 의미인가요? 고구려 역대왕의
영토업적들인것 같기도 합니다
혹시 북산은 멀리 태흥안령 산맥중에 어떤 산을 말하는 것이고 남해(광개토대왕때의 가야정벌)는 말 그대로 남해를 말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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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문무왕이 안승에게 보덕왕에 책봉하는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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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을 북산(北山)에 쌓고 공을 남해(南海)에 세워" 이 말은 고구려가 처음 나라를 "북쪽"에 쌓고 훗날엔 "남쪽"의 신라에 복속된다라는 뜻의 은유적 표현은 아닐지.
<위엄을 사해에 떨쳤다..>이런 식의 상투적 문어체적인 표현인게지요..더군다나 책봉하는 글이니 얼마나 군더더기의 미사여구와 형식적인 장식어구가 많이 들어가겠습니까. 내용은단지 너 보덕왕해라, 이마큼 선물줄게..이런 내용뿐인데.
본문 내용중에 안승에게 목화솜을 내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다른 물품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목화의 원산지는 인도이고 14세기 원 시대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고려 말이었으니까요. 7세기 신라에 과연 목화솜이 있었을까요?
목화솜이 꼭 고려시대에 들여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네 그것도 의문이네여
우리 고대사는 잘 모르는게 더 많습니다. 확실히 기록으로 보이는게 고려일지는 모르지만 고구려의 염색 기술이 뛰어났음을 볼때 우리 삼국에 있었을 가능성이야 왜 없을까요...
목화에서 추출한 솜은 옷의 재료, 즉 옷감입니다. 염색기술이 뛰어났다고 목화가 있었다는 건 논리적 비약이 심하지요. 삼베나 모시에도 염색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정통 사료에 근거한 것과 개인적 추측,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가요? 우리 역사라고 해서 무조건 미화시키는 게 바람직한건지...
제 추측이지만 혹시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솜이 우수종자 목화솜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기억은 안나지만 문익점 목화솜이 들어오기 이전에 솜옷을 입었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문익점 이전에 한반도에 '목화'가 있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나 몇몇 사료들을 보면 삼국 시대의 한반도에 '면'(綿)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더군요. 문익점 이전에 목화가 없었다면 이 '면'은 목면이 아닌 뭔가 다른 직물이라는 의미인데.....
저도 그런 기록들에 근거해서 목화가 고려 이젼에 들어온거라고확신 한답니다...^^;; 아직 섣부른 단정은 무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