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노 조프가 "골프란 아주 작은 공을 더 작은 구멍에 넣는 게임" 이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골프장에서 자주 인용하던 골퍼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실제로 골대를 작아보이게 한 그의 경기는 그 말을 그대로 증명해 주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이탈리아의 전 국가대표 골키퍼와 전시 영국의 수상 사이의 공통점은 언변이 아니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지도자들이었다. 실제로 조프에게 최고의 시기는 자기 나라 대표팀을 1982년 스페인 FIFA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었을 때였다. 조프는 오늘날의 축구 영웅들과는 달리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실제 경기 내용으로 전설이 된 사람이다. 세 번의 월드컵 동안 112경기나 뛰었고 국제경기에서1142분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포함해 선수로서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울리의 아들은, 이 기록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루어낸 것은 모두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축구 때문에 이 시골 소년은 이탈리아의 북동부 농업지역을 떠났지만, 긍지와 실리로 가득찬 고장은 늘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옛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귀퉁이였던 이 지방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많이 있었다. 식단도 그 한 가지 였는데, 조프가 열네살때 "키가 너무 작다"는 나이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이유로 인터밀란과 유벤투스에서 입단거부를 당하자, 조프의 할머니인 아델레이드는 그때부터 그에게 달걀만 먹였다. 5년 후, 조프는 자기가 사는 지방 축구팀인 마리아네세에서 활동하다가 인근 지역에 있는 우디네세의 스카우터의 눈에 띄었다. 키는 33㎝나 커서182㎝가 되어 있었다. 키가 자란 덕에 세리에 A 클럽인 우디네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조프는 곧 자동차 수리공 일을 그만두고 프로축구 선수 계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조프의 데뷔전은 평탄하지 않았다. 1961년 9월 24일 피오렌티나에서 열린 세리에 A 데뷔전에서 다섯 골을 허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단번에 다른 클럽으로 강등되었다.
조프는 프리울리 스타디움에서 겨우 네 경기밖에 뛰지 않았으나, 곧 다음 시즌에서는 만토바의 주전으로 발탁되었다. 이때가 진정한 조프의 축구 인생의 시작이었다. 1966년 조프는 알베르토시, 안졸린, 핏사발라 등과 함께 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대표팀 선수로 거론되었다. 결국 아추리 군단의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은 조프를 제외한 다른 세명만 대표로 선발했다. 그 이유는, 조프에 의하면 “감독은 자신이 만토바 출신이기 때문에 정실에 치우쳤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프는 후에 아내가 되는 아름다운 안나 마리아를 만나면서 위안을 찾게 되었다. 이어서 아들 마르코가 태어나면서 조프는 1967년에 두 가지의 새로운 변화를 맞은 셈이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해에 나폴리 클럽에서 골키퍼 반도니에 1억 3천만 리라를 얹어서 조프를 이탈리아 남부로 데려간 것이다. AC 밀란은 만토바가 제시한 비싼 가격 앞에서 주저했던 반면 나폴리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조프는 “그때는 참 행복한 시기였다. 나폴리는 생기가 넘치는 도시였다”라고 했다.
그 시기는 또한 기념할만한 시기이기도 했다. 조프는 1968년 4월 불가리아를 2대0으로 격파하면서 첫 A 매치 출전을 했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 8강전이었는데,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결승까지 진출하여 재시합 끝에 유고슬라비아를 꺾는다. 30년 후에 파울로 말디니가 기록을 깨기 이전까지 조프가 보유하고 있었던 112회 국가 대표 출전이라는 대기록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잘생긴 말디니도 뉴스위크 지의 표지 모델이 되는 영광만은 누리지 못했다. 1982년은 조프에게 무엇보다도 영광스러운 해였다. 조프는 화려한 승자의 모습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은퇴할 때에도 우승 메달을 걸고 물러설 수 있었던 것이다.
마흔 살의 나이에 FIFA 월드컵대회에 참가한 그의 헌신에 걸맞은 보상이었다. 조프는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패배보다는 승리를 더 많이 거두며 여러 시즌을 보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알베르토시에게 자신이 지키던 골키퍼 자리를 내주었던 것이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대회에서 "최상의 경기를 보여 주지 못했던 것"과 같은 좌절은 유벤투스 소속으로 6 번 이탈리아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프가 나폴리에서 유벤투스 투린으로 이적한 것은 이미 반생을 보내고 난 시기였다. 항상 골을 막는 것만큼이나 목표를 이루는 것에도 열심이던 조프에게는, 팀을 옮기는 것 역시 새로운 도전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조프가 선수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조프에게 과거는 정말로 역사와 같은 것이었다. 또 조프는 경기를 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좋은 경기를 보여 줌으로써 세리에 A 570 경기 출전과 유벤투스에서 330 경기 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스타디오 코무날레에서 보낸 11 시즌은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확실히 유벤투스팀은 3억 3천만 리라 계약에 서명한 대가를 톡톡히 챙긴 것이었다. 디노 조프는 여섯 번의 우승컵을 가져 온 것은 물론, UEFA 컵과 두 차례 이탈리아컵 우승을 가져온 것이다. 이 끝없는 승승장구의 유일한 공백기는 유러피언컵에서 1973년 아약스, 1983년 함부르크를 상대로 두번 패했던 때였다.
함부르크와 벌였던 결승전 경기는 조프가 최고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자리였다. 조프는 그 경기를 끝으로 은퇴해서 유벤투스의 플레잉 코치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적어도 내 경우에 그것은 더 이상 발전 가망성이 없는 직업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 올림픽에 앞서 이탈리아 올림픽 팀의 감독을 맡았고, 덕분에 1988년에 다시 유벤투스 단장을 맡을 것을 제의받았다. 비록 1년 간이었지만, 그는 단장으로 몸담은 기간에 이탈리아컵과 UEFA컵 우승과 유러피언 리그 3위를 함으로써 가져옴으로써 유벤투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다음으로 몸담은 곳은 라치오였다. 조프는 라치오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네 번의 원정 경기를 치른 후에 구단주가 되었다. 1997년에는 임시 코치를 맡기도 했다.
다음으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저조한 성적을 올리자 세자르 말디니를 대신하여 트레이너를 맡으면서 조프의 경력도 정점에 달한다. EURO 2000 결승전에서 터진 다비드 트레제게의 골든골만 아니었더도 조프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이탈리아 감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탈리아 언론은 준우승 팀을 패배자로 몰아갔다. 조프는 여론의 비판에 시달리다 결국 대표팀 감독을 사임하고 라치오로 돌아갔다. 그는 라치오를 세리에 A 3위에 끌어올리고 챔피언스리그에까지 진출시켰지만, 1년 전 이탈리아컵과 리그 둘 다에서 우승했던 기쁨을 누렸던 팬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2001/2002 시즌 초반에 국내와 유럽에서 팀이 잇따라 패배하자, 조프의 퇴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프의 누구보다도 화려한 경기 전적도 이때는 소용이 없었다.
선수 경력
소속:
1961-1963 우디네세
1963-1967 만토바
1967-1972 나폴리
1972-1983 유벤투스
세리에 A 570경기 출전
소속팀 우승 경력:
1973 이탈리아 챔피언십
1975 이탈리아 챔피언십
1977 이탈리아 챔피언십
1977 UEFA컵
1978 이탈리아 챔피언십
1979 이탈리아컵
1981 이탈리아 챔피언십
1982 이탈리아 챔피언십
1983 이탈리아컵
국제경기 출전 경력
1968-1982 이탈리아(112 경기 출전, 주장 59회)
FIFA 월드컵™경기 결승 3회
국제경기 수상 경력:
196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
1974년 FIFA 월드컵™출전
1978년 FIFA 월드컵™2차 리그
1982년 FIFA 월드컵™우승
감독 경력
소속팀:
1988-90 유벤투스
1990-94 라치오
1997 라치오
1998-00 이탈리아
2001 라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