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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란유골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말로, 일이 공교롭게 특어짐을 뜻합니다.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의하면,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황희(黃喜, 號 : 尨村)는 마음이 착하고 생활이 검소하였다.
황정승의 생활이 매우 빈한한 것을 상감(上監)께서 궁휼히 여기시고 어떻게 잘 살게 할 방도를 생각하시었다.
한 묘안을 얻어 명령하시되 내일은 아침 일찍 남대문을 열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이 문을 들어오는 물건을 다 황정승에게 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폭풍우가 몰아쳐 종일토록 멎지 아니하므로 문을 드나드는 장사치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다 어두워 집에 들어갈려고 할 때 무슨 까닭인지 시골 영감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어 이것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와 곧 삶아 먹으려고 하니 알마다 곯아서 한 알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한다.
'곯다'의 어간이 한자의 骨과 음이 같은 데서‘뼈가 있다’로 된 듯함.
2.순망치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 5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말엽(B.C. 655), 진(晉)나라 헌공은 괵나라를 공격할 야심을 품고 통과국인 우나라 우공에게 그곳을 지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우나라의 현인 궁지기(宮之寄)는 헌공의 속셈을 알고 우왕에게 간언했다.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오라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괵나라와 우나라의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뇌물에 눈이 어두워진 우왕은 “진과 우리는 동종(同宗)의 나라인데 어찌 우리를 해칠 리가 있겠소?”라며 듣지 않았다. 궁지기는 후환이 두려워 “우리나라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함께 우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는 궁지기의 예견대로 12월에 괵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왕을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결코 끊어서는 안 되는 관계를 가리킨다. 동의어로 순치지국(脣齒之國)·순치보거(脣齒輔車)가 있으며, 유사어로 조지양익(鳥之兩翼)·거지양륜(車之兩輪)이 있다.
3.결자해지
조고(趙高)가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이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2세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말입니다.” 2세 황제가 웃으며,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오?” 하였다[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는 거짓 조서를 꾸며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로 2세 황제를 삼았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조고는 이 호해를 이용하여 경쟁 관계에 있던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승상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가 자기를 반대하는 중신들을 가려내기 위해 이와 같은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호해가 말을 마치고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자,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아니다.”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였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4.호가호위
기원전 4세기 초, 초(楚)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선왕이 신하들에게 "듣자하니, 위나라를 비롯하여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하고 물었다. 이때, 위나라 출신인 강을(江乙)이란 변사가 초나라 선왕 밑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왕족이자 명재상으로 명망 높은 소해휼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강을은 이야말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얼른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어찌 한 나라의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교활한 여우가 호랑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자(使者)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나를 백수의 왕으로 정하신 천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니 천벌을 받게 될 거다. 만약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뒤를 따라와 봐라.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하나도 없을 테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따라오고 있던 호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호랑이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초나라의 병력, 곧 임금님의 강한 군사력입니다."
이 고사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이 나왔으며, '가호위(假虎威)' '가호위호(假虎威狐)'라고도 한다. 오늘날 이 말은 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권위를 빌려 남을 등쳐먹는 행위를 일삼는 것을 비유하여 사용된다.
5.노익장
나이가 들었어도 결코 젊은이다운 패기가 변하지 않고 오히려 굳건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마원전(馬援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장 마원(馬援)은 어려서부터 큰뜻을 품고 글을 배우고 예절을 익혔으며 무예에도 정통하여, 그의 맏형 마황(馬況)은 그를 대기만성(大器晩成)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형이 젊은 나이로 죽자 마원은 상례(喪禮)를 정중히 모셔 치른 후 예를 다하여 형수를 받들었다.
그뒤 마원이 부풍군(扶風郡) 독우관(督郵官:감찰관)이란 벼슬에 있을 때 명을 받들어 많은 죄수들을 압송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죄수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애통하게 부르짖는 것을 보고는 동정심이 우러난 나머지 모두 풀어주어 제각기 제 살길을 찾아가도록 하고 자신도 북방으로 달아났다.
마원은 북방으로 가서 소·말·양 따위를 놓아 먹이면서 지냈다. 부지런하고 수완이 좋은 그는 수년간 정성껏 가축을 길러 그 규모가 수천 두까지 이르렀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많은 돈을 벌게 되자 가까운 친구나 이웃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고, 자기는 오히려 떨어진 양가죽 옷을 걸치고 소박한 식사를 하는 등 근검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항시 친구에게 말하였다. “대장부라는 자는 뜻을 품었으면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며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대장부위자 궁당익견 노당익장)].” 그리고 또 “가멸지더라도 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면 수전노(守錢奴)일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세상이 혼란스럽게 되자, 마원은 평범한 삶을 버리고 농서(隴西)의 외효(隗囂) 밑으로 들어가 대장이 되었다. 외효는 공손술(公孫述)과 손을 잡기 위해 마원을 그곳으로 파견하였다. 마원은 공손술의 오만(傲慢)한 행동에 크게 실망하고 의례적인 인사만을 하고는 곧장 돌아왔다.
그뒤 마원은 광무제를 만나게 된다. 광무제는 마원을 만나자 예절을 다해 대접하였으며, 각 부서를 데리고 다니며 조언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마원은 이러한 후한 대접에 감동되어 외효에게 돌아가지 않고 광무제의 휘하(麾下)에 있기로 결심하였다. 광무제는 마원을 복파장군(僕波將軍)에 임명하여 남방의 교지(交趾:越南 북부)를 평정하게 하여 성공한다.
얼마 뒤, 동정호(洞庭湖) 일대의 만족(蠻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광무제가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전멸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마원이 자신에게 군대를 달라고 청하며 나섰다. 광무제는 그가 너무 늙었으므로 주저하자 마원이 말하기로 “소신(小臣)의 나이 비록 예순두 살이나 갑옷을 입고 말도 탈 수 있으니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하고는 말에 안장을 채우고 훌쩍 뛰어올랐다. 광무제는 미소를 지으며, “확삭하도다, 옹은(확삭재시옹야).”이라며 출정(出征)을 허락하였다. 결국 마원은 군대를 이끌고 정벌길에 올랐다. 그뒤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하고 흉노(匈奴) 토벌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그의 형이 말한 대로 대기만성을 이루었다.
6.파죽지세
다음은 《진서(晉書)》〈두예전(杜預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晉)나라의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가 진무제(晉武帝)로부터 출병 명령을 받아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오(吳)나라를 쳐서 삼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천하통일을 이룰 때의 일이다. 출병한 이듬해 음력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때 한 장수가 '곧 강물이 범람할 시기가 다가오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니 일단 후퇴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두예는 단호히 명령조로 대답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다. 그것은 마치 '대나무를 쪼갤 때의 맹렬한 기세[破竹之勢]'와 같다. 대나무란 일단 쪼개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인가." 두예는 곧바로 군사를 재정비하여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建業)으로 진격하여 그야말로 파죽지세처럼 몰아쳐 단숨에 건업을 함락시켰다. 오왕 손호(孫晧)는 손을 뒤로 묶고 수레에 관을 싣고 사죄의 뜻을 보이며 항복해왔다.
이리하여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두예는 오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으나, 만년에는 학자로서 학문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춘추석례(春秋釋例)》《좌전집해(左傳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오늘날 이 말은 거침없이 일이 잘 풀리거나 처리됨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세여파죽(勢如破竹)', '영도이해(迎刀而解)'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7. 금의환향
'금의(錦衣)'는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옷'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왕이나 고관들이 입던 옷으로 출세의 상징이었다. 반면 평민들은 흰색의 베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포의(布衣)'라 하였다. 즉,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을 찾는 것을 뜻한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의 전쟁이 한창일 때의 이야기이다. 유방(劉邦)이 먼저 진(秦)나라의 도읍인 함양(咸陽)을 차지하자, 화가 난 항우(項羽)가 대군을 몰고 홍문(鴻門)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유방은 장량(張良)과 범증(范增)의 건의로 순순히 항우에게 함양을 양보하였다.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유방과는 대조적으로 아방궁을 불태우는가 하면 궁중의 금은보화를 마구 약탈하고 궁녀들을 겁탈했으며, 시황제(始皇帝)의 묘까지 파헤쳤다. 항우는 스스로 망쳐놓은 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인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하려 하였다.
신하들은 항우가 예로부터 패왕(覇王)의 땅이었던 함양을 버리고 보잘것없는 팽성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하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때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韓生)이 간언했지만 항우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길거리에서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다고 하더군. 이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그러니 어서 길일(吉日)을 택하여 천도하도록 하라."
그래도 한생이 간언을 그치지 않자, 항우는 그를 기름이 끓는 가마 속에 넣어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 노래는 항우가 천하의 요새인 함양에 있는 한 유방이 승리할 수 없으므로 항우를 함양에서 내쫓기 위해 장량이 퍼뜨린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함양을 싫어했던 항우는 그 노래가 하늘의 뜻이라고 판단하여 마침내 팽성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결국 항우는 함양을 차지한 유방에게 해하(垓下)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천하를 넘겨주고 만다. '금의환향'으로 자신의 공덕을 고향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는 하였지만 천하를 잃고 만 셈이다. 출전은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記)>이다.
8.우공이산
원래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태형(太形) ·왕옥(王屋) 두 산은 둘레가 700리나 되는데 원래 기주(冀州) 남쪽과 하양(河陽) 북쪽에 있었다. 북산(北山)의 우공(愚公)이란 사람은 나이가 이미 90에 가까운데 이 두 산이 가로막혀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자식들과 의논하여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흙을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는 데 한 번 왕복에 1년이 걸렸다. 이것을 본 친구 지수(智搜)가 웃으며 만류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하고 대답하였다.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산신령이 산을 허무는 인간의 노력이 끝없이 계속될까 겁이 나서 옥황상제에게 이 일을 말려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는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가장 힘이 센 과아씨의 아들을 시켜 두 산을 들어 옮겨, 하나는 삭동(朔東)에 두고 하나는 옹남(雍南)에 두게 하였다고 한다
★각주구검 <刻 새길 각. 舟 배 주. 求 구할 구. 劍 칼 검. >
☆겉뜻: 배에 새겨 칼을 찾다
☆속뜻: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다는 뜻.
☆유래: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군계일학 <君 무리 군, 鷄 닭 계, 一 한 일, 鶴 학 학>
☆겉뜻 :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
☆속뜻 : 여러 평범 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의 비유.
☆유래:
위진(魏晉)시대,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瑞康), 산도(山濤), 왕융(王戎) , 유령(劉伶), 상수(尙秀) 곧 죽림 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老莊)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淸談)을 즐겨 담론했다.
그런데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위(魏)의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瑞康) 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되는 아들 혜소(瑞紹:? ∼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吏部)에서 벼슬하던 산도(山濤)가 무제(武帝: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 司馬炎)에게 상주(常住)하였다.
"폐하, 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혜강은 도륙 당했음).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춘추시대 진(晉) 나라의 대부 극결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비書郞)으로 기용 하시오소서."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丞)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秘書丞)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가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 (王戎)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계란유골 <鷄 닭 계, 卵 알 란, 有 있을 유, 骨 뼈 골>
☆ 겉뜻 : 계란에도 뼈가 있다.
☆ 속뜻 :운수가 나쁜 사람의 일은 모처럼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무엇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유래: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의하면,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황희(黃喜, 號 : 尨村)는 마음이 착하고 생활이 검소하였다.
황정승의 생활이 매우 빈한한 것을 상감(上監)께서 궁휼히 여기시고 어떻게 잘 살게 할 방도를 생각하시었다. 한 묘안을 얻어 명령하시되 내일은 아침 일찍 남대문을 열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이 문을 들어오는 물건을 다 황정승에게 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폭풍우가 몰아쳐 종일토록 멎지 아니하므로 문을 드나드는 장사치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다 어두워 집에 들어갈려고 할 때 무슨 까닭인지 시골 영감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어 이것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와 곧 삶아 먹으려고 하니 알마다 곯아서 한 알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한다.
★갈택이어<竭다할 갈,澤못 택,而말이을 이,漁고기잡을 어>
☆겉뜻 ;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 고기를 잡는다는 뜻
☆속뜻 ;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먼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함.
☆유래 ;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춘추시대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성복(城)이라는 곳에서 초(楚)나라와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 군사의 수가 진나라 군사보다 훨씬 많을 뿐만 아니라, 병력 또한 막강하였으므로 승리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 호언(狐偃)에게 물었다. "초나라의 병력은 많고 우리 병력은 적으니 이 싸움에서 승리할 방법이 없겠소"라고 하자 호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예절을 중시하는 자는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능한 자는 속임수를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속임수를 써 보십시오." 문공은 다시 이옹(李雍)의 생각을 물었다. 이옹은 호언의 속임수 작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다만 이렇게 말했다. "못의 물을 모두 퍼내어 물고기를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그 훗날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게 될 것이고, 산의 나무를 모두 불태워서 짐승들을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뒷날에는 잡을 짐승이 없을 것입니다(竭澤而漁 豈不獲得 而明年無魚 焚藪而田 豈不獲得 而明年無獸). 지금 속임수를 써서 위기를 모면한다 해도 영원한 해결책이 아닌 이상 임시 방편의 방법일 뿐입니다." 이옹의 비유는 눈앞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은 화를 초래한다고 본 것이다.
★남가일몽 <南 남녘 남. 柯 가지 가. 一 한 일. 夢 꿈 몽. >
☆겉뜻 :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속뜻 : ① 덧없는 한때의 꿈.
②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③ 꿈과 같이 헛된 한 때의 부귀 영화.
☆유래 :
당(唐)나라 9대 황제인 덕종(德宗 : 780-804) 때 광릉(廣陵) 땅에 순우분 (淳于분)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자 어디서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槐安國王)의 명을 받고 대인(大人)을 모시러 온 사신 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 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부마(駙馬)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南柯) 태수를 제수(除授) 받고 부임했다.
남가군을 다스린 지 20년, 그는 그 간의 치적을 인정받아 재상(宰相)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단라국군(檀羅國軍)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雪上加霜)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천도(遷都)해야 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 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 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 [南柯]'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 구멍을 원상태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구멍 을 살펴보았으나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遷都)해야 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대기만성<大큰 대,器그릇 기,晩늦을 만,成이룰 성>
☆겉뜻 ; 큰 그릇은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
☆속뜻 ;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
☆유래 ;
《노자(老子)》 41장에서 나온 말이다.
노자는 이 장에서 옛글을 인용하여 도(道)를 설명하였는데 "매우 밝은 도는 어둡게 보이고,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다. 가장 평탄한 도는 굽은 것 같고, 가장 높은 덕은 낮은 것 같다. 몹시 흰 빛은 검은 것 같고, 매우 넓은 덕은 한쪽이 이지러진 것 같다. 아주 건실한 도는 빈약한 것 같고, 매우 질박한 도는 어리석은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또 "그러므로 아주 큰 사각형은 귀가 없고(大方無隅),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大器晩成). 아주 큰 소리는 들을 수 없고(大音希聲), 아주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大象無形). 왜냐하면 도는 항상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이므로 무엇이라고 긍정할 수도, 또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보듯 만성(晩成)이란 본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로,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 강하다. 그런데 후일 이 말이 늦게 이룬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비롯된 듯하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이름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는 최림(崔林)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는데, 외모도 빈약하고 출세가 늦어 친척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였다. 하지만 최염만은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큰 종이나 큰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형이다.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틀림없이 네가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최림은 후일 천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나이 들어 성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도원결의 <桃복숭아 도,園동산 원,結맺을 결,義옳을 의>
☆겉뜻 : 복숭아 밭에서 결의를 맺는다는 말
☆속뜻 :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한 목적을 위해 행동을 같이 할 것을 약속한다는 뜻.
☆유래 :
원(元)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後漢) 말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어지럽자 생할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새로운 살길을 찾게 되었다. 신흥 종교인 태평도(太平道)의 교주 장각(張角)은 이러한 틈을 이용해 세력을 넓히고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후한을 멸망시킨 황건적의 난이다. 조정에서는 하진을 대장군으로 삼아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하자 각 지방에 병사를 모집하는 방을 붙이게 되었다. 유주(幽州) 탁현(縣)에 살던 유비(劉備)는 이 방문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그는 평소에 큰 일을 하고 싶어했으며, 일찍이 뤄양에 차를 사러 갔다가 황건적 무리의 횡포를 직접 체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욕만 앞설 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거한이 유비 곁으로 다가와 한숨만 쉬는 것을 꾸짖었다. 장비(張飛)였다. 둘은 뜻이 같음을 알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가까운 주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또 범상치 않은 얼굴의 거한이 있어 서로 마음이 통하였다. 그가 관우(關羽)였다.
서로 의기가 투합하자, 장비의 제안으로 다음날 장비의 집 후원 복숭아 밭에서 의형제 결의를 맺고 피를 나누었다.
★백전백승<百 일백 백. 戰 싸울 전. 百 일백 백 勝 이길 승.>
☆겉뜻 :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뜻
☆속뜻 :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긴다는 말.
☆유래 :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서 오왕(吳王) 합려(闔閭:B.C. 514∼ 496)를 섬긴 병법가 손자(孫子:孫武)가 쓴 "손자"〈모공편(謀攻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승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서 얻는 승리와 적을 공격한 끝에 얻는 승리인데 전자는 최상책(最上策)이고 후자는 차선책(次善策)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다[百戰百勝]'해도 그것은 최상의 승리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승리인 것이다. 곧, 최상책은 적이 꾀하는 바를 간파하고 이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 다음 상책은 적의 동맹 관계를 끊고 적을 고립시키는 것이고, 세 번째로 적과 싸우는 것이며, 최하책은 모든 수단을 다 쓴 끝에 강행하는 공성(攻城)이다.
★부화뇌동<附 붙을 부, 和 화할 화, 雷 천둥 뇌, 同 같을 동 >
☆겉뜻 : 우뢰 소리에 맞춰 함께 한다는 뜻
☆속뜻 : 자신의 뚜렷한 소신 없이 남이 하는 데로 따라감.
☆유래 :
타협과 절충보다 아집과 독선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뚜렷한 자기 주관 없이 맹목과 방종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부화뇌동(附和雷同) 이다. 부화(附和)란 무조건 남의 주장에 따르고 아부하는 것을 말하며, 뇌동(雷同) 역시 같은 뜻이다. 굳이 '천둥'을 뜻하는 '뇌(雷)'자를 덧붙여 뇌동(雷同) 이라 한데는 까닭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현상이 그것을 주재하는 어떤 거대한 존재에 의해 이루어 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비나, 바람, 이슬, 눈은 물론이고 지진이나 일식, 태풍까지 신(神)의 조화로 돌렸다. 재미있는 것은 천둥과 번개에 대한 인식이다. 지금이야 그것의 발생 원리를 초등학생도 다 알지만 옛날에는 모두 신(神)의 조화로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거대한 천둥소리가 지상(地上)에 부딪쳐 메아리 치는 것을 두고 만물(萬物)이 그 소리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천둥 소리가 크게 울리면 반응도 크고 작으면 작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만물은 천둥소리에 따라 한치의 착오도 없이 무조건 반응하게 된다. 이처럼 천둥소리에 함께 따르는 것을 뇌동(雷同)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뇌동(雷同)에는 옛 조상들의 과학지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부화(附和)든, 뇌동(雷同)이든 상대방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므로 좋은 뜻은 아니다. 그것 보다는 자신(自身)의 주관(主觀)에 따라 당당(堂堂) 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집과 독선은 곤란하겠지만….
★삼인성호 <三 석 삼. 人 사람 인. 成 이룰 성. 虎 범 호.>
☆겉뜻 :세 사람이 짜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도 할 수 있다는 뜻
☆속뜻 :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듣는다는 말.
☆유래
전국 시대, 위(魏:梁)나라 혜왕(惠王) 때의 일이다. 태자와 중신 방총이 볼모[人質]로서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방총이 심각한 얼굴로 혜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믿으시겠나이까?" "누가 그런 말을 믿겠소."
"하오면, 두 사람이 똑같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어찌하시겠나이까?" "역시 믿지 않을 것이오."
"만약,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그땐 믿으시겠나이까? "
"그땐 믿을 것이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되옵니다. 신은 이제 한단으로 가게 되었사온데, 한단은 위나라에서 저잣거리보다 억만 배나 멀리 떨어져 있사옵니다. 게다가 신이 떠난 뒤 신에 대해서 참언(讒言)을 하는 자가 세 사람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전하, 바라옵건대 그들의 헛된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시오소서."
"염려 마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과인은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방총이 한단으로 떠나자마자 혜왕에게 참언을 하는 자가 있었다. 수년 후 볼모에서 풀려난 태자는 귀국했으나 혜왕에게 의심을 받은 방총은 끝내 귀국할 수 없었다고 한다.
★ 새옹지마<塞변방 새. 翁늙은이 옹. 之어조사 지. 馬말 마. >
☆겉뜻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
☆속뜻 : 인생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음을 이르는 말.
☆유래 :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노옹의 말[馬]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福)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致賀)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禍)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戰死)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서 복(福)이 화(禍)가 되고 화(禍)가 복(福)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너무 깊어 측량 할 수가 없다.
★수어지교< 水물 수,魚물고기 어,之어조사 지,交사귈 교>
☆겉뜻:물과 물고기의 사귐.
☆속뜻:임금과 신하 사이의 두터운 교분. 부부의 친밀함.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유래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스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이 때 공명의 나이는 28세)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양상군자<梁대들보 양,上위 상,君임금 군,子아들 자>
☆겉뜻 ;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
☆속뜻 ; 도둑을 가리키는 말.
☆유래 ;
《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에 나오는 말이다. 진식은 학식이 뛰어나고 성질이 온화하며 청렴결백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태구현(太丘縣)의 현감으로 있을 때 어느날 밤 도둑이 그의 방으로 들어와 천장 들보 위에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진식은 곧 의관을 정제하고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들여 훈계를 시작하였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착하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도 반드시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아니다. 평소의 잘못된 버릇이 성격으로 변하여 나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저 들보 위의 군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도둑은 이 말에 깜짝 놀라 얼른 들보 위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조아리며 죽여 주십사하고 사죄하였다. 진식은 그를 조용히 타이르고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고을 안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한다.
★조령모개 <朝아침 조令법 령暮저녁 모改고칠 개>
☆겉뜻 : 아침에 내린 명령을 저녁에 고친다는 뜻
☆속뜻 : 일관성이 없이 갈팡질팡함을 이르는 말.
☆유래 :
《사기(史記)》〈평준서(平準書)〉 재정경제사장(財政經濟史章)에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흉노(匈奴)가 자주 변방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니, 경작하면서 수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연히 변방에서 수확하는 곡식만으로 충당하기에 식량이 부족하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헌납받는 사람들과, 그 곡식을 변방까지 수송할 사람들을 모집하여 벼슬을 주기로 하였다. 그 벼슬의 지위는 대서장(大庶長)까지였다. 이 조치는, 문제와 경제(景帝) 때의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조(晁錯)의 헌책(獻策)을 취한 것이었음을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서 밝히고 있다.
조조가 상소한 이 헌책은 후세에 〈논귀속소(論貴粟疏)〉라 불리게 되는데, 여기에 조령모개라는 말이 있다. 조조는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 다섯 가족의 농가에서는 부역이 과중하여, 노역(勞役)에 복종하는 사람이 두 사람을 내려가지 않는다. 따라서 경작하여 수확하는 것은 백 묘(畝)가 고작인데, 이 백 묘는 많아야 백 석에 지나지 않는다. 봄에 경작하고 여름철에 풀 뽑고, 가을에 수확하여 겨울에 저장하는 외에, 관청을 수리하고 부역에 불려나가는 등 춘하추동 쉴 날이 없다.
또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하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고아들을 받고, 어린이를 기른다. 또한 홍수와 한발의 재해를 당하는 위에 갑자기 세금이나 부역을 당한다
이것은 일정한 때도 정해져 있지 않아, 아침에 영을 내리고 저녁에 고친다(朝令而暮改). 전답이 있는 사람은 반값으로 팔고, 없는 사람은 빚을 내어 10할의 이자를 낸다. 이리하여 농지나 집을 방매(放買)하고, 아들과 손자를 팔아 부채를 갚는 자가 나오게 된다.
여기서 '조령모개'는 '법령에 일관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청(淸)나라 때의 학자 왕염손(王念孫)은 후한(後漢) 때의 순열(荀悅)이 《한기(漢紀)》에 기록한 대로, '조령이모득(朝令而暮得)’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하였다. '조령모득'은 '아침에 법령을 내리고 저녁에 거둔다'는 뜻이다.
첫댓글 잘 조사해 주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