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1~2. 이완용李完用 호적 : 이완용을 양자로 입적한 양아버지 이호준李鎬俊, 양부養父라 명백히 밝힘
 그림 3. 자살한 큰 아들 이승구의 이름은 파버리고 자신의 정실 조씨趙氏와 큰며느리 임건구任乾九만 남아있는 호적기록 둘째아들 이항구李恒九와 항구의 큰아들 이병길李丙吉-이완용의 장손,친일파-의 이름이 보입니다.
사진출처 : http://cafe328.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JsV4&mgrpid=null&fldid=9V3u&contentval=0008f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537&fenc=p2.SigJpeqI0
< 한국의 매국노 1. 을사오적 수괴 '이완용李完用' >
을사오적의 우두머리인 국체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수괴 '이완용李完用'의 호적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하여 이제야 보고서 올립니다.
공개해주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식민사관론자들은 이완용이 양자養子인 것은 감추면서 이완용과 이병도가 전혀 계보가 다르다고 강변해왔습니다. 위 자료는 이완용이 다른 집안에서 온 양자養子임을 명백히 밝히는 사료입니다. 실증을 외치던 이병도는 왜 역사의 유물이자 친일증거이자 사료인 이완용의 업적?이 명문으로 새겨진 관뚜껑을 없애버렸나? 증거말살도 실증주의인가?
큰아들 며느리 미모에 욕심을 참지못하고 범죄를 저질러 간통을 하였고 그로 인하여 큰아들은 자살했다는 일화가 전해오는데 호적에는 진짜로 큰아들 이승구의 이름이 빠져있네요. 설마, 이 인간이 자기 큰아들을 호적에서 파버리기까지 했을 줄이야~
본처인 조씨趙氏옆에 큰며느리 임씨-임건구任乾九- 가 장남 부구付九의 처妻라고 하였군요. 나라를 팔아먹더니 정말 며느리에 자식까지 잡아먹고 자신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살한 아들을 호적에서 파버린 것인지... 정말 패륜아, 인간말종이 되었나 봅니다.
그러나, 후대에 자신의 증손인 이석형-세째 손주 이병주의 아들-이 자기 무덤을 파헤쳐 버리고 폐묘까지 할 줄이야 당시 친일파로 권세를 누리며 영화를 누리던 이완용이 생전에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래 사진 좌측아래의 모자 쓴 아이가 세째 손주 이병주)
아비가 자기 아내를 그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구나" 라고 하며 자살했다던 큰 아들 이승구의 일화가 단지 당시의 분노한 민중들에게서만 회자된 풍문만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림 4. 친일 매국노 이완용 패밀리의 가족사진 [이완용, 차남 이항구, 손주 병길, 병희, 병주,병철]
<브리태니커사전>
이완용 (한말 민족반역자) [李完用]
1856 경기 광주~1926.
한말의 문신·친일민족반역자(→ 을사오적)
처음에는 친러파로 아관파천을 주도했으나 이후 일본이 세력을 확장하자 을사조약·한일합병의 주역으로 민족을 배반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중추원의원·고문을 역임하면서 각종 단체에 참가하여 친일행적으로 일관했다.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아버지는 석준(奭俊)이며, 10세 때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에게 입양되었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주서가 되었다. 이어 대교가 되고 그후 수찬·검상·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거쳐 1886년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 병으로 소환되어 동부승지·이조참의·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미국에 갔다가 12월에 대리공사(代理公使)로 승진하여 약 2년간 있다가 돌아왔다. 대사성·형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육영공원판리·교환서총판 등을 역임했다. 1895년 학부대신이 되고 중추원의관이 되었으나,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형인 이윤용(李允用)과 함께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있던 앨런의 알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澈)·이재순(李載純) 등과 더불어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다시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동하고 친러내각의 외부대신·학부대신·농상공부대신서리를 겸직했다. 이 시기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위원장·회장을 지냈다. 1897년 고종이 환궁하자 세력을 잃고 평안남도관찰사·전라북도관찰사 등 지방관으로 전전하다가 1901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1905년 학부대신이 되어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서 의정대신임시서리 및 외부대신서리까지 겸했다. 1907년 의정부참정대신으로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를 겸했고,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의 책임을 추궁하며 고종의 양위를 주장하여, 궁내부대신을 겸하면서 고종의 퇴위를 성사시켰으며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다. 8월 매국친일의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회생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寺內正毅]의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한일합병의 주역으로 훈1등 백작과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 15만 원을 받았다. 같은 해 중추원고문이 되고 1912년에는 중추원부의장이 되었으며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주장했다. 1919년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를 3차례에 걸쳐 〈매일신보〉·〈경성일보〉에 발표했으며 1920년 12월 후작으로 승급했다. 1921년 중추원이 개편된 후에도 계속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그외에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원,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의 많은 명예직을 겸하며 친일행적으로 일관했다.
출전 : 다음백과서전,브리태니커 등재 이완용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a0101a "
* 이완용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이완용과 그의 아들과 손자가 개처럼 충성하였던 일왕이 파견한 조선총독부 파견 총독들
일제강점기의 역대 조선총독의 이름과 재임기간
1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910~1915 2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15~1919 3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19~1927 4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1927~1929 5 사이토 마코토 1929~1930 6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31~1936 7 미나미 지로[南次郞] 1936~1941 8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1942~1944 9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944~1945 이완용은 또한 3대 조선총독으로 온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일명 문화통치-조선의 역사를 조작하고 민족의 정신과 혼을 말살하려는 새로운 식민통치방식-에 적극 부응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추진한 가장 큰 사업인 조선역사 왜곡 프로젝트인 조선사편찬사업에 친일매국노 박영효,권중현과 함께 참여해 조선사편찬위원회 (1922~1925) 1기의 고문으로 활약합니다. 국체를 팔아먹는데 이어 나라의 혼인 역사를 팔아먹기에 이르르니 천하의 다시없을 매국노라 하겠지요.
 그림 5. 한민족의 역사를 말살해 정신과 혼을 붕괴시켜 영원한 노예로 만들고자 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초상 1919년 9월 2일 강우규의사께서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오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서울역에서 저격한 의거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한민족말살 프로젝트인 '조선사 편찬사업'에 일본의 모든 황국사관을 지지하는 관변학자들과 조선의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친일파귀족을 비롯한 제새력을 총동원하여 이 사업을 자신의 임기에 완수하고자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였다. 여기에, 친일파귀족 이완용,박영효,권중현이 고문으로 이능화,어윤적,정만조,이윤용,최남선등이 위원과 촉탁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신진 친일지식인인 이병도,신석호등의 매국노들이 사이토이후 2기 조선사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Public Domain, No license, No Copyright,저작권 없음)
○ 사이토 마고토[齋藤實] 이력 : 조선총독부 총독과 일본 30대 총리를 역임, 쿠데타로 피살
1858. 11. 13 일본 미즈사와[水澤]~1936. 2. 26 도쿄[東京]. 일본의 해군대장·정치가.
이와테 현에서 태어나 해군병학교를 졸업, 이후 1884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1888년까지 그곳의 일본 최초의 주재무관으로 머물렀다. 이때 국제적인 안목을 기르고 유창한 영어를 습득했다. 후에 일본으로 돌아와 야전과 참모, 궁정직을 돌아가면서 섭렵했고 1897년에는 한 달만에 2계급을 뛰어넘는 고속승진을 하여 대좌에 올랐다. 이후 7년간 해군차관으로 복무하며 중장까지 승진, 대해군 건설에 힘쏟아 러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06년 사이온지 내각에서 해군대신이 되었고, 이후의 내각에서도 다섯 차례 연속으로 해군대신을 지냈다. 1912년에는 대장에 올랐으나, 1914년 야마모토 내각이 해군이 관련된 군수조달 비리사건(지멘스 스캔들)으로 붕괴하자 사임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조선총독이 되어 강압적 식민통치를 완화??하여 조선인의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였다.
1927년 제네바 군축협상에 전권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조선총독직에서 물러났다. 1929년에 조선총독에 재임명되었고, 1931년 조선총독직을 다시 사임, 이듬해 총리가 되었다.
1934년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천황의 보좌관격인 내대신(內大臣)이 되었다. 그는 만주 사변 이후 국가의 총체적 군국화를 주장하며 발호하는 혁신우익(황도파)에 맞서 현상유지를 노력했기 때문에 황도파의 젊은 장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반란을 일으킨 황도파 장교들에게 78세의 나이로 암살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2%AC%EC%9D%B4%ED%86%A0_%EB%A7%88%EC%BD%94%ED%86%A0
 그림 6. 친일 민족반역자 매국노 이완용 가계도 이완용의 친부가 이석준李奭俊이라는 것은 여러 자료와 경로를 통해서 이미 확인했는데 브리태니커사전에도 공식적으로 생부가 이석준李奭俊이라고 명시하였군요. 더이상 이견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아래 1970년대까지 있던 이완용의 묘를 1979년 이장할때 나온 관뚜껑을 원광대박물관으로 옮겨왔는데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자가 가졌갔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던 박순호씨가 증언하기를 자신이 이병도의 친척이라며 이병도씨가 와서 원광대 총장의 양해를 얻은뒤 당시 돈 5만원을 주고 가져갔다고 하였다. 79년이면 500원짜리 지폐가 있었고 1,000원이면 초등학생 소풍갈 돈으로 충분하였다. 현재 돈가치로로 보면 아무리 낮추어 보아도 100~150만원 정도는 될 것이다.
자신이 이완용친척도 아니라면 쓸모도 없는 이완용 관뚜껑은 왜 가져갔을까요?
이완용 관뚜껑에는 백작 이완용이라는 명문과 함께 다른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마 이완용가계에 대한 설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가계의 비밀을 영원히 은폐하고자 이병도는 그 쓸모없는 관뚜껑이 꼭 필요하였던 것이 아닐까?
원래, 이완용은 자신의 아비와 피 한방울 안섞인 양자로 외부에서 이호준이 입양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병도를 변론하는 자들은 이호준가계와 이병도가계는 다르다면서 그것으로 변론했다며 말을 끝낸다.
누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생부인 이석준과 이병도가계와의 관련성을 묻는 것이지~
하여튼, 얼럴뚱딴 괴변만 늘어놓고 대충대충 민감한 부분은 구렁이 담넘듯 넘어가면서 말로만 실증타령하는 엉터리 식민사학자들의 수준을 알만합니다.
해당 보도기사 일부 발췌
<이완용, 첩첩산중 땅 왜 약탈했나>
"........주민들에 따르면 이완용의 묘는 지난 79년 후손들에 의해 파묘(破墓.개장하기 위해 원래 무덤을 파냄) 처리됐다. 파묘를 지켜본 주민들은 "당시 이완용의 시신은 이미 썩어 흙이 돼 있었으며 검 정 옻칠을 한 은행나무 관에서 밀봉된 석재 항아리 1개와 시신을 쌌던 색동 옷감, 금니 2개가 나왔다"고 회고했다. 이완용 후손들은 항아리만 챙겨 자리를 떠났고, 금니는 인부들이 금은방에 팔아 품삯으로 나눠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두께가 10㎝ 가량 되는 은행나무 관 뚜껑은 주민이 바둑판을 만들려고 갖고 있던 것을 원광대 박물관으로 옮겨왔지만 1년 정도 보관(79-80년)하던 중 이완용의 후손이 되찾아갔다.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던 박순호(사범대) 교수는 "당시 5만원을 주고 사온 관 뚜껑에는 붉은색의 큰 글씨로 `우봉 이씨 이완용 백작"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말했 다. 박 교수는 또 "관뚜껑은 이완용의 친척으로 알려진 역사학자 이병도씨가 원광대 총장의 양해를 구한 뒤 가져갔다"면서 "관 뚜껑의 길이가 165㎝정도에 폭이 꽤 넓었 던 기억으로 미뤄 이완용은 키가 작고 뚱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원문 "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view.html?cateid=1026&newsid=20040813100452897&p=yonhap "

그림 7. 이완용과 친척관계인 이완용의 조카손자(질손)로 알려진 이병도와 그 후손들의 관계
이완용 조부입장-생부측-에서는 이완용가계는 망했어도 친일재산을 팔아서 해외로 도망해 자손들이 잘 살고 있고 다른 자손인 이병도쪽은 자손들이 한국의 학계와 문화계의 파워엘리트가 되었으니 무덤속에서 웃고 있을려나? 아니면 후손들의 친일매국행위와 그 후손들의 자손들이 조상의 잘못을 견강부회하며 아직도 회개하지 못하는 모습에 고개숙이고 죄책감으로 탄식하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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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까지도 나라의 이권을 팔아먹고 있는 자들은 어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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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시는 애국님들께 존경과 감사를 올립니다.
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그 후손들이 국립 박물관 관장에 대학 총장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