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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역사: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경제 대국에서 변방 도시로: 베네치아의 추락
(이탈리아의 지역별 1인당 GDP(GRDP). 이 지도만 봐도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의 경계가 대략 어디쯤인지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494년 이탈리아의 판도. 이 시기의 판도는 이후 300년간 대격변 없이 유지되었다.)
17세기 말부터 유럽에서는 여행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대부분 태어나고 자란 지역을 평생 벗어나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유럽인들이 이제는 먼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 것이다. 특히 영국과 독일의 귀족 출신 젊은이들이 유럽은 물론 근동 지역까지 유행처럼 여행을 떠났는데, 이를 나타내는 단어가 '그랜드 투어'이다.
'그랜드 투어'에서 가장 선호된 여행지는, 두말할 것 없이 유럽인들에게 르네상스의 발원지이자 가톨릭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였다. 거장의 걸작을 직접 느껴 보고자 했던 예술가들, 연구 자료를 찾고자 했던 인문주의자들,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는 독실한 가톨릭 순례자들은 모두 간절히 이탈리아 여행을 꿈꿨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여행자들은 손에 가이드북을 들고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기행문을 읽었다. 또는 '치체로네(cicerone)'라 불리는 현지 가이드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돈 많은 귀족들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서 마차, 하인, 가이드, 숙소 일체를 제공하는 현대적 의미의 '패키지 여행'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18세기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던 유럽의 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는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였다. 18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간 여행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여행자들은 로마 여행을 마친 뒤 이탈리아 남단까지 내려가기 시작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무엇보다 기원후 1세기 나폴리 인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매몰된 고대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이 1748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 이 시대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울러 이들은 나폴리에 도착하자마자 도시 탐방은 뒷전이고 여전히 불길을 내뿜고 있던 베수비오 화산부터 몇 차례씩 오르곤 했다.
(나폴리에서 바라본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
남부 이탈리아에 발을 딛은 관광객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프랑스 천문학자인 랄랑드는 "어느 쪽에서 바라보든, 나폴리보다 더 아름답고, 더 대단하고, 더 화려하고, 더 특이한 곳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훗날 루브르 박물관의 책임자가 된 비방 드농은 "바다, 평원, 산으로 이어지는 풍광은 기가 막힌 다양한 모습을 선사하고, 풍요롭고, 아름답고 또 엄청난 정경들이 항상 푸른 하늘과 온화한 기후와 어울리니, 나폴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시 중 하나"라며 극찬했다.
여행객들이 나폴리 왕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취해 도시에 들어섰을 때, 그들이 느꼈던 쾌적함은 이내 불쾌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토록 훌륭한 자연에서 살아가는 나폴리 국민들은 하나같이 사기꾼에다, 우둔하고 무지하며, 걸핏하면 싸우기를 일삼는 것처럼 보였다. 여행객들은 이렇게 비옥한 나라에 사는 수많은 하층민들이 아무 일도 안하고 빈둥거리고 있다는 데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18세기의 많은 여행자들은 나폴리 사람들을 경멸하고, 심지어 증오하기에까지 이른다.
(「나폴리의 시장 거리」, 바이에른 국립 미술관 소장)
프랑스 극작가인 메르빌은 나폴리를 한마디로 "악마들이 사는 천국"이라고 못박았으며, 다른 작가인 사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에 가장 멍청한 인류가 사는 곳"이라고 폄하했다. 다른 관광객들이 내린 평가도 비슷한 것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나폴리인들의 빈곤과 천박함의 원인을 문화적, 심지어는 인종적 결함에서 찾고자 했다.
비운의 역사: 남부 이탈리아는 왜 가난할까?
이탈리아에는 Campania Felix(축복받은 캄파니아)라는 관용어가 있다. 풍요롭고 온화한 캄파니아 지방의 자연을 찬양하는 관용어이지만, 엄연히 캄파니아 지방만이 이런 기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더 남쪽의 시칠리아, 풀리아는 고대부터 곡창 지대로 명성을 떨쳤으며 칼라브리아의 와인은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꼽힌다. 즉, 남부 이탈리아 내 다른 지방의 기후 또한 충분히 '축복받은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이 보고 감탄한 남이탈리아의 자연은 독특한 것으로, 이 지방에는 그 유명한 베수비오산을 비롯한 화산들이 곳곳에 솟아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된 화산들의 활동으로 인해, 화산재 성분을 가진 검은 속돌들이 대지에 깔려 토양은 비옥했고, 기후 또한 작물 재배에 이상적이었다. 모든 작물이 잘 자라는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고대에도 이모작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로 이 지방에 발을 디딘 '외세'는 그리스인들이었다.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인구 과밀로 인해 여러 문제가 만연한 그리스 본토를 떠나 남이탈리아의 해안가에 정착했는데, 로마인들은 이렇게 그리스화된 남이탈리아의 해안 지방을 대(大) 그리스라는 의미의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라고 불렀다.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마그나 그라이키아 지역에 정착한 그리스 도시들이 본토의 도시들을 능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시라쿠사, 네아폴리스, 쿠마이 등 기라성 같은 폴리스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이들의 명성은 이미 그리스 본토에도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에페이로스의 왕인 피로스는 반도 남단의 최대 도시인 타란타스(타렌툼)를 존경해서 로마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원의 역설?
그러나 (흡사 16세기의 이탈리아처럼) 풍요롭지만 정치적으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 마그나 그라이키아는 주변 세력의 각축장이 되기 좋은 무대였다. 반도 남단의 지배권을 두고 그리스 본토 세력과 싸워 승리한 로마는 이내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탐했고, 결국 전통적으로 이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카르타고까지 물리쳐 남이탈리아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로마가 멸망하자 게르만족들이 들어와 발을 붙였고, 이에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고토를 수복한다는 명목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이 지방을 장악했다.
이탈리아 남부는 이처럼 만성적으로 다양한 색깔을 가진 외부 세력들의 지배하에 놓였는데, 이들 외세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노린 이유는 남이탈리아가 보유하고 있는 풍요로운 자원 때문이었다. 만약 이 지역이 불모지였다면 이렇게 많은 정복자들을 유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북이탈리아처럼 될 가능성은 없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이다. 중세 중간기 지중해에서 가장 유력한 해상 세력이 북부가 아닌 남부 이탈리아에 존재했기 때문인데, 아말피(Amalfi)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말피(Amalfi)는 중세 중간기 서구권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 세력이었다. 단순한 관광지 중 하나로 전락한 현대 아말피의 인구는 천 년 전 전성기 아말피 인구 규모의 1/10에도 못 미치고 있다.)
아말피는 유럽의 소위 '상업 혁명' 이전 시대에 가장 저명한 해상 세력이었다. 중세 중기 지중해의 모든 항구에는 으레 아말피 상인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었으며, 이 도시의 해상법은 중세 지중해 세계의 표준 해양 법률로 통했다. 이들 상인의 본거지인 아말피(Amalfi)는 전성기에 7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던 대도시였는데, 당시 유럽에서 브뤼헤 정도를 제외하면 아말피에 견줄 만한 규모의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유한 아말피는 노르만인들의 정복으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노르만인들은 철저한 봉건주의자들로, 그들은 상인을 경멸했고 상인들의 재산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아말피인들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노르만 왕조에 대항하여 수차례에 걸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도시가 파괴됨에 따라 지중해에서 아말피가 갖는 입지는 축소되었다. 결정적으로, 1135년 노르만인들의 동맹 세력인 피사군에 의해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평범한 항구로 전락했고, 북이탈리아의 제노바, 피사 등의 신흥 상업 세력이 아말피의 빈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북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수세기간 이어진 친황제파(기벨리니; Ghibellini)와 친교황파(구엘피; Guelfi)의 치열한 대립으로 인해 지역의 봉건 권력이 약화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권력의 공백 지대에 사실상 독립 국가인 자치 세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이들은 곧 상업 세력화되었다.
반대로 남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외부 세력들이 정복 왕조 특유의 강력한 지배력을 유지한 탓에 신흥 상업 세력의 창출은 커녕, 기존에 존재했던 상업 세력마저도 봉건 세력에 의해 싹이 잘려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봉건 세력들은 귀족이 상업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초창기 북이탈리아 자치체들에서 귀족이 상업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점, 근대 영국이 귀족계와 상업계의 융합을 바탕으로 (귀족의 상업 활동이 금지되거나 금기시된) 유럽 대륙에 비해 상업적으로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남이탈리아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이탈리아와 다른 길을 걸었다고 해서 남이탈리아가 필연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단정짓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남이탈리아는 북이탈리아와 다른 길을 걸었지만, 어느 정도 자신들이 가진 가능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모델?
흔히 '외세의 통치'라고 하면 악정이나 폭정을 연상하기 쉽지만, 반드시 외세의 통치가 부(負)의 유산을 남기는 것은 아니며, 역으로 풍족한 전통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남이탈리아 또한 여러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지만, 이 침략자들은 남부 사회의 성장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랍인들은 시칠리아에서 관개 수로를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메밀, 면화, 사탕수수, 쟈스민, 사프란 등의 신작물을 도입하여 시칠리아의 농업을 양적, 질적으로 발전시켰다. 농업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상업과 공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는데, 시칠리아에서의 상업 발달은 당시 아랍인들의 상업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랍인의 뒤를 이어 이 지역을 통치한 유럽 제일의 행정가들인 노르만인들은 (비록 상업을 말살하긴 했지만) 그들의 선진적인 행정 기법을 남이탈리아에 그대로 이식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사회를 보다 더 효율적인 형태로 재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노르만 왕조의 뒤를 이은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기에 시칠리아 왕국은 오랫동안 축적한 실력을 자양분으로 화려한 황금기의 꽃을 피우는데, 이 시기 시칠리아의 찬란한 문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왕국의 수도인 팔레르모는 유럽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이자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 도시에서는 이탈리아어나 왕의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프랑스어, 이베리아어, 아랍어, 그리스어 등 지중해 세계의 모든 언어가 통용되었으며, 그만큼 다양한 지역에서 유래한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방문하여 영감을 주고받았다. 심지어는 이슬람 학자들도 이 도시에서 상주하며 제약 없이 학술 활동을 했는데, 이는 왕인 페데리코 2세(프리드리히 2세)가 가톨릭 학문 논쟁만큼이나 이슬람 학문 논쟁을 중요시하며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으로도 팔레르모는 유럽의 주요 무역항이자 시장이었다. 일반적으로 팔레르모의 인구는 13세기 초반에 10만 명을 넘은 것으로 보고 있다.(30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는 팔레르모의 배후지인 시칠리아가 윤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팔레르모뿐 아니라 본토의 주요 도시인 나폴리 또한 학술의 중심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
외국인의 경제 지배
"se mala signoria, che sempre accora li popoli suggetti, non avesse mosso Palermo a gridar: Mora, Mora!"
"만약 신민을 비탄케 하는 악정이 팔레르모를 "죽여라, 죽여라!"라는 아우성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말이오." - 단테 알리기에리(피렌체의 문호/정치인), 「신곡」 中
이탈리아 내에 시칠리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번창을 그 누구보다 아니꼽게 여기는 자가 있었다. 다름 아닌 교황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여전히 각각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황제를 받드는 친교황파와 친황제파 도시 및 정치 파벌들이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국에 교황령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칠리아 왕국을, 신성 로마 황제를 배출한 바 있는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황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교황은 이탈리아 장홧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전통적으로 그래 왔듯, 이번에도 게르만족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하기 위해 프랑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프랑스 성왕 루이 9세는 처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남부 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강역에서 삭제되었다.
(시칠리아 앙주 왕가의 창시자 - 카를로 1세(샤를 1세)의 석상, 나폴리 왕궁)
시칠리아 앙주 왕조의 초대 왕이 된 카를로 1세(샤를 1세)는 매우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베네벤토 전쟁에서 전사한 시칠리아 국왕 만프레디의 시신을 돌무더기에 던져 버렸으며,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마지막 계승자인 콘라딘을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리 광장으로 끌고 가 참수해 버렸다. 이는 당대 사람들 기준으로도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카를로 1세는 프랑스 루이 9세의 동생이자 앙주와 맨, 프로방스 백작령의 백작이었는데, 그가 가진 영지의 면적 총합은 시칠리아 왕국의 그것의 1/5도 안 되는 규모였다. 이러한 그가 만프레디를 꺾고 시칠리아 왕국에서 새 왕조를 수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황이 그에게 정통성을 부여했고, 무엇보다 '한 개의 왕국보다 더 비싼 금고'를 가진 피렌체(친교황파 도시)의 대은행가들이 실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가신들에게 있어서는 시칠리아 왕국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 굴러온 엄청난 행운이었으나 카를로 1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당시 동부의 비잔티움 제국은 4차 십자군의 여파로 인해 나약해져 있었다. 이에 카를로 1세는 비잔티움 제국령들을 노리고 동지중해에서 과감한 군사 작전을 전개했는데, 그의 군사적 야망을 실현할 원동력이 시칠리아 왕국으로부터 각출해 낸 자산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카를로 1세는 그의 치세하에서 시칠리아 왕국에서 연간 100만 플로린이 넘는 조세를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당시 시칠리아와 비슷한 노르만식 행정 체계를 도입했던 잉글랜드의 연 조세 수입은 20~25만 플로린이었으며, 루이 9세가 거둔 조세 수입은 50만 플로린 수준이었다.(형을 뛰어넘었다!)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사실은 13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시칠리아 왕국이 '낙후한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바로 카를로 1세가 자신의 왕국을 무지막지하게 수탈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놈들을 죽여라!!")
1282년의 시칠리아 만종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프랑스인 병사의 점령군 행세에 군중들이 분개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앙주 제국'의 과잉 확장을 경계한 경쟁국의 간첩들이 선동한 측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앙주 왕가의 폭정으로 인해 쌓인 신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시칠리아에서 프랑스인 임신부는 산 채로 배가 갈렸고, 어린이들은 돌무더기에 내팽개쳐졌다. 이례적일 정도로 확산된 유혈극의 장에서 앙주 왕가와 가신단은 몸만 간신히 건져 이탈리아 본토로 도주했고, 시칠리아인들은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왕국은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 재위 15년간의 짧은 통합기를 제외하고, 실질적으로는 약 500년간, 공식적으로는 앙주 왕가가 시칠리아의 분할을 인정한 400년간 팔레르모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으로 분할되었고, 19세기에 두 개의 시칠리아를 통합했다는 의미의 '양 시칠리아(Two Sicilies)' 왕국으로 재통일되게 된다. 단, 나폴리의 시칠리아 왕국은 당대인과 현대인들이 편의상 '나폴리 왕국'으로 부른다(공식 명칭은 시칠리아 왕국이다).
그러나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인들의 수탈은 되려 강화되었다. 앙주 왕가와 앙주 제국을 발판 삼아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품었던 교황은 자신들의 전략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한 아라곤의 시칠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앙주 왕가는 피렌체의 금융 자본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카를로 1세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시칠리아 왕국 정복전 당시 거금의 돈을 대부해 준 대가로 피렌체 상인들에게 시칠리아 왕국에서의 상업상 특권을 부여했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남이탈리아의 상업 발전에 악영향을 미쳤다.
다만 카를로 1세 치하 때만 해도 피렌체 상인들이 왕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이는 아직은 피렌체인들이 관세를 완전히 면제받지는 못했으며, 프로방스 백작이기도 한 카를로 1세가 프로방스 상인들에게도 피렌체 상인들에 준하는 상업적 접근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곤 왕국이 장악한 시칠리아의 수복을 위해 앙주 왕가는 피렌체 은행들의 자금줄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대부의 대가로 피렌체 상인들에게 무관세의 특혜를 제공했다. 13세기 말~14세기에 반도 남부에서 피렌체 상인들은 왕국의 공인하에 풀리아 지방의 항구에서 매년 수만 톤의 곡물들을 무관세로 수입했으며, 풀리아 지방에서 기근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상황에서조차 이 지역에서 수만 톤 규모의 곡물이 계속 유출되고 있었다.
카를로 2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를 34년간 통치한 로베르토 국왕은 시칠리아 만종 사건 때 아라곤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고, 인질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복수의 카탈루냐인들과 친분을 맺었고, 왕이 되자 카탈루냐인들을 대거 나폴리의 궁정 요직에 앉혔다. 전통적으로 앙주 왕가의 왕들은 피렌체인이나 카탈루냐인들을 중용했는데, 그 이유는 국왕이 그들과 사적인 친분 관계를 가져서이기도 하지만, 남부 이탈리아의 현지 귀족들을 견제하려는 복안이 깔린 인선이기도 했다.(시칠리아 정복전 당시, 얼마나 많은 현지 귀족들이 만프레디를 배반했던가!) 그러나 이들 피렌체인들과 카탈루냐인들은 철저한 한탕주의자들이었고,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폭정으로 악명을 떨쳤다.
남부 이탈리아의 스페인화
"가톨릭 국왕에게 있어, 밀라노의 공산품으로부터 나오는 관세는 사카테카스나 할리스코의 귀금속 광산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는 금광과 은광이 없지만, 이들 지역은 제조업 덕분에 돈이 넘쳐난다."
- 안토니오 세라(나폴리의 경제학자/철학자), 「국가의 부와 빈곤에 대한 짧은 논고」 中
나폴리 왕국은 쇠퇴한 앙주 가문을 축출하고 왕관을 차지한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의 통치하에 재기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전 학문에 후원을 하면서 '관대한 자'라는 의미의 '일 마냐니모(il Magnanimo)'라는 별명을 얻은 알폰소 5세는 왕국을 근대 르네상스 국가로 탈바꿈시켰으며, 나폴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 다시금 이탈리아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베리아의 결혼'으로 아라곤의 통치권이 스페인(카스티야) 군주에게 넘어감에 따라 나폴리의 지배권에도 덩달아 변화가 생긴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16~17세기 스페인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이를 유지 및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16세기에 별안간 등장한 '스페인 제국' 체제에 편입된 나폴리 왕국이 맡은 역할은 이른바 후방 병참 기지였다. 비록 직접적인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나폴리는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스페인이 참여하는 각종 전쟁에서 막대한 전비를 제공해야 했다.
스페인 제국의 다른 주요 영지인 아라곤과 저지대(네덜란드+벨기에)의 의회는 스페인 국왕이 참여하는 전쟁에 대한 전비를 지급하는 일에 자주 거부감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밀라노는 유럽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국왕의 전초 기지였기 때문에 스페인 국왕은 이 지역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밀라노에 고율의 과세를 부과하는 것을 꺼리는 편이었다. 결국 스페인의 국제 전략을 위한 자금의 대부분은 카스티야, 그리고 나폴리에서 충당되었고, 이로 인해 이들 지역이 빚에 억눌리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일례로 나폴리 왕국은 17세기의 '30년 전쟁' 기간 동안 연평균 80만 두카트에 상당하는 채권을 신규로 발행했는데, 이는 당시 나폴리 왕국 연간 세수의 15~20% 수준에 육박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종교 재판 -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재판 법정」)
스페인 신권 통치
스페인 본토에서 발효된 법률은 대부분 남이탈리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1492년 스페인 본토에서 발효된 알람브라 칙령은 시칠리아(1492년), 그리고 나폴리(1493년)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악명 높은 스페인의 종교 재판관들이 남이탈리아에 상륙했고, 남이탈리아가 이들의 주 활동 무대 중 하나가 되었다. 사실 스페인 종교 재판관은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마냥 부패하지는 않았고 나름 공정한 판결을 기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문화와 경제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 결국 나폴리는 르네상스 문명에서 이탈했으며, 수천 명의 신민들이 종교 재판관들에 의해 고문을 당했고 일부는 처형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의 반종교 개혁의 영향하에 남부 이탈리아는 종교계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되었다.
거지들의 메트로폴리스, 나폴리
14세기 초만 해도 나폴리 시의 인구는 대략 5만 명 수준이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충분히 대도시에 속할 만한 규모였으나, 당시 인구 10만 명을 헤아린 북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들(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제노바)에 비하면 확실히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나폴리의 인구는 30만 명이라는 신기원을 달성하게 되는데, 이는 베네치아나 밀라노 인구의 2배를 상회할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도 파리(인구 40만)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였다. 어떻게 후진적인 농업 국가의 도시가 이토록 세계적인 규모의 도시가 되었을까?
초창기 스페인 당국은 나폴리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의 공공사업을 벌였다. 이러한 공공사업에는 당연히 많은 인력이 요구되었고, 많은 수의 임금 노동자들이 나폴리로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 유입된 노동자 수는 '수천 명'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던 이들은 나폴리에서 대규모 건설 사업이 끝난 이후에도 그대로 눌러앉으면서 사회적으로 문젯거리가 되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새롭게 성장하는 산업 분야에서 이들 노동력을 흡수했겠지만, 나폴리 왕국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나폴리에도 실크 산업이나 비누 등 일용품 산업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 규모는 보잘것없었다. 따라서, 정부가 마냥 이 노동자들을 방치할 경우 이들은 극빈곤층으로 전락, 불만분자로 변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문제 해결을 위해 당국은 복지 정책을 내놓았다. 먼저 이들을 위해 곡물 공급을 엄격히 통제하고, 이를 '정치 가격'에 공급했다. 연도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나폴리에 공급된 곡물의 가격은 시장 가격에 비해 20~50% 더 저렴했다. 1597년에는 흉작으로 인해 곡물 1토몰로(곡물 단위; 약 55리터)의 시장가가 6두카트로 뛰었지만, 나폴리에서는 이의 1/5인 1.2두카트의 가격에 공급되었다. 1570년대 기준으로 이와 같은 수도에서의 곡물 정치 가격을 유지하는 데 연 8만 두카트 이상의 재정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폴리 정부의 부담액은 점점 더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나폴리인들의 조세 부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직접세였다. 1550년 직접세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육박했다. 이 비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떨어지기는 했지만, 훗날에도 여전히 전체 세수의 과반을 차지했다. 직접세의 근간을 이루는 세목은 토지세와 난로세[Focatico]였다. 다만 나폴리 왕국에서 성직자, '빈곤층'과 노인, 그리고 "나폴리 시민"은 난로세 면제 혜택을 누렸기 때문에 단순히 나폴리 시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세금 부담의 상당 부분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나폴리 시민들에게는 다양한 형태의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나폴리에서 사는 것 자체가 곧 왕국에서 누릴 수 있는 공식적인 이권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수많은 빈민들이 나폴리로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도시의 인구는 폭발했다. 그러나 이 거대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으며, 이로 인해 지방의 희생이 뒤따른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7세기 중반 나폴리 시의 인구는 30만에 달했지만 왕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포자(Foggia)의 인구는 채 2만 명에 못 미쳤다. 왕국의 대도시는 나라에 부와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국에 기생하여 기력을 빨아먹는 존재였던 것이다.
(19세기 나폴리의 빈곤층, 라차로니(Lazzaroni))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스페인 지배 시기에 남부 이탈리아의 경제가 무작정 추락과 정체만을 반복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에는(이 시기에는 스페인 본토의 경제도 양호한 편이었다.) 농업과 제조업에서의 성장이 감지되었고 인구도 증가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부채 부담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나폴리의 부채도 덩달아 급증했고, 이에 신민들의 세금 부담은 무거워졌다. 1550년 133만 두카트였던 왕국의 세입은 1638년 580만 두카트로 증가하는데, 이는 물가와 인구의 증가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세금 부담 또한 매우 높아졌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왕국의 부채 부담은 16세기 카를 5세의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증가한 바 있었지만 16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네덜란드 독립전쟁, 30년 전쟁 등의 영향으로 왕국의 부채는 비상식적인 수준으로 급증했다. 1575년 나폴리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왕국의 새로운 세금 도입이 신민들을 '절망에 빠뜨렸'고, 무법자로 만들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과세 부담이 막중해짐에 따라 무법자들이 (특히 왕국의 남부 지방에서) 도처에서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인 당국은 나폴리의 도로망 개선을 위해 투자를 경주했었으나 육로의 치안이 매우 악화되었기 때문에 왕국의 육상 교통은 점점 쇠퇴했다. 이에 왕국은 치안 특별세를 신설하여 도적들을 격퇴하려 했으나 그럼에도 치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따라서 왕국의 지역 간 교역은 거의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비록 바다에서도 오스만 해적이나 달마치아 해적, 혹은 바다의 무법자 베네치아인들이 있었지만 육로에 비하면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지배기 남이탈리아는 '스페인 제국'의 막대한 전비 지출의 희생양이 되었고, 인민들은 엄청난 조세를 지불해야 했지만, 왕국의 재정 지출은 언제나 수입보다 많았고 부채는 점점 늘어만 갔다. 1574년에는 전체 지출의 34%가 부채 상환과 이자 지급에 쓰였는데, 이 비율은 1605년에 50%에 육박했고, 그 이후로는 예산의 과반이 부채를 갚는 데 쓰였다. 고율의 과세 정책은 곧 인민들의 근로 의욕을 꺾어 놓았고, 교통로의 치안을 불안하게 만들어 교역과 제조업을 위축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세금 기반을 약화시켰으나, 당장 부채를 갚아야 하는 통치 당국은 오히려 남은 세금 기반을 더더욱 쥐어짜는 정책으로 맞대응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경제는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남부를 해방시키지 못한 남부 해방
"남부 문제가 갖는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다. 반도의 북부와 남부 간에는 인간 활동의 범위, 총체적 생활 양식, (중략) 관습과 전통, 그리고 지적, 도덕적으로 심오한 차이가 존재한다."
-주스티노 포르투나토(이탈리아 왕국의 정치인/역사가), 「남부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국가」 中
19세기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이탈리아가 외세의 압력과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훗날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 운동)를 주도한 북이탈리아의 자유주의자들은 부르봉 왕가의 압제에 신음하는 남부의 형제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사명이라고 믿었다(최소한 겉으로는).
한편 남부(양 시칠리아 왕국)는 여전히 반동적인 전제 정권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시칠리아 혁명이 일어나 남부도 정치 체제를 입헌 군주정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 혁명으로 일구어 낸 성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수 세력의 반격을 받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상륙)
그러나 서구 사회 전제정의 최후 보루로 여겨졌던 이 왕국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실 이들의 멸망 과정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는데, 뜬금없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일개 유격대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이었다. 상륙 당시 1천 명에 불과했던 '붉은 셔츠단'은 군율이 해이하기 그지없었던 양 시칠리아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를 장악했다. 시칠리아 섬이 붉은 셔츠단의 손에 떨어지자 남부의 칼라브리아주, 풀리아주를 포함한 주들이 나폴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더기로 우루루 항복했고, 결국 나폴리 왕국은 무너졌다.
900만 명의 신민을 거느렸던 양 시칠리아 왕국이 일개 특공대에 의해 무너진 이 사건은 왕국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서 버텨 왔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남부 사회 내부적으로는 끝내 양 시칠리아 왕국의 낡고 허약한 체제를 타파하지 못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상업이 외국인에 의해 지배를 당했고, 중과세에 신음하면서 산업이 질식되어져 왔기 때문에 혁명의 동력, 즉 부르주아 계층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근대의 조류에서 남이탈리아의 운명은 현지민 스스로 개척한 것이 아니라 또다시 "외세"에 의해 결정되었다.
*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본토)과 양 시칠리아 왕국의 비교
북부의 오랜 상업 도시인 제노바는 18세기 초에도 네덜란드에 이은 제2의 대외 투자국이었다. 페르낭 브로델 같은 학자들에 의하면, 제노바의 자본주의는 아예 몰락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은 이 제노바의 자본을 종잣돈으로 삼아 이탈리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산업화를 달성하여 리소르지멘토의 주역이 되었다. 반면 이들에 의해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합된 남부 지방의 산업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으며, 비교 우위를 갖는 농업도 몇몇 대도시와 주요 항구의 인근 농토들을 제외하면 조방적으로 운영되었고 투자 수준도 형편없었다.
초창기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은 영국, 프랑스 등 선진 열강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8% 안팎의 저관세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베네토 지방을 수복하고 통일을 완성한 이후 상대적으로 열강과 좋은 외교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이 줄어든 이탈리아 왕국은 유치 산업의 보호를 위해 관세율을 18% 수준까지 인상시켰다. 또한 로마 점령, 친독일 정책, 프랑스의 튀니지 정복 등으로 인하여 전통적인 주요 무역 대상국이었던 프랑스와 무역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이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의 농산물 교역 수지는 악화된 반면, 북부의 직물업은 오히려 번성했고, 양모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에 남부의 지주들은 이제는 하나의 전통이 된 농지 인클로저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다.
당시 농업 분야에서 발생한 극심한 실업 문제는 남부나 북부나 대동소이했지만, 사회의 농업 의존도가 더 높은 남부에 상대적으로 더 큰 문제를 야기했으며, 이탈리아 정부의 농업 진흥 정책은 남부가 아닌 북부의 포강 유역 지대에서 우선적으로 시행되었다.
* 이탈리아의 지역별 산업화 지수(이탈리아 평균 = 1.00)
안토니오 세라의 예견대로, 수확 체증적인 북부의 산업 경제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 반면, 농지라는 자원에 의존해야 했던 남부 경제는 정체 내지 더디게 성장했고, 통일 이후 남부와 북부의 경제력 격차는 오히려 더욱 벌어졌다. 립친스키식의 설명을 빌어 말하자면, 이탈리아 통일로 인해 북부와 남부가 '자유 무역'을 하게 되어 새로운 자유 무역 지대를 확보한 북부의 공업 경제는 보다 더 특화 성장한 반면, 북부에 비해 열위에 있었던 남부의 공업 경제는 되려 쇠퇴했다.
이처럼 남부 이탈리아는 통일 이후에도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자화되었으며, 이 지역은 이러한 역사의 길을 밟아 온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북부 위주의 산업 정책을 펼친 것은 산업 경제의 흥성이 부국으로의 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애초에 북부 출신자들이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정치 체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남부보다는 북부 위주의 정책을 내놓았고, 남부 경제는 북부의 그것과 판이했기 때문에 북부에게는 이익이 되는 정책이 남부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시칠리아)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남부의 낙후된 경제 기반과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안을 가결했으나, 아직까지도 남부와 북부는 별천지인 것으로 보인다. 남부 이탈리아는 풍요로운 자원과 축복받은 기후를 가진, '천국(Paradise)'에 비유되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에 걸친 "외세"의 지배하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이들이 남긴 부(負)의 유산을 대물림하면서 점차 피폐해졌다. 그들의 역사는 그들이 비운을 선택하거나 비운이 그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인들에 의해 비운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로 '비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