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갈맷길은 사포지향/四抱之鄕(바다, 강, 산, 온천)인 부산의 지역적 특성을 담고 있어
바닷가를 걷다보면 어느덧 산속이고, 산을 벗어나면 강이 있고, 몸이 노곤하면 온천이 반겨준다고 하지만
오늘의 이 3코스 2구간은 철저하게 부산의 시가지와 산복도로를 지나는 코스로
그대신, 근현대사를 비롯한 문화유적이 많아서 그만큼 발길을 잡아두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곳이다
11:40 범일2동 주민센터 출발 / 평소보다 시작 시간이 많이 늦었다
오늘은 부산진성에서 증산공원까지 이르는 '부산포 개항가도'를 따르면서 트래킹이 시작된다
부산진시장을 지나
지하 통행로를 통해 좌천동으로 간다
옛날에는 철로 건널목과 차단봉이 있었고 간수가 지키고 있었다
저기 옛 부산진성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 정발(鄭撥) 장군이 전사한 증산(甑山)공원이 보인다
좌천동 가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옛 삼성극장과 삼일극장이 있던 방향의 시가지 모습
일신기독병원을 지나면
일신기독병원은 1952년 9월 17일 호주의 선교사들이 부인병원으로 설립하였다
이내 정공단(鄭公壇)이 나온다
정공단은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충장공 정발(鄭撥) 장군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분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외문(外門)으로 들어가면 중문(中門)이 있어 사적(私的) 공간과 제단을 구분하고 있다
단의 중앙에는 정발(鄭撥) 장군의 비와, 그 오른쪽에 장군의 막료였던 이정헌(李庭憲)의 비가 있고
남쪽에는 함께 전사한 여러 군민들을 모신 비석과
남쪽 한 단 밑에는 충직한 노비인 용월(龍月)의 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동쪽에 장군의 애첩인 열녀 애향(愛香)의 비가 있다
열녀 애향은 부산 충렬사의 의열각에도 모셔져 있다고 한다
충장공 정발 전망비(戰亡碑)
담벼락 한 쪽에 세워져 있는 송덕비들을 살펴보다가 반가운 이름을 보았다
그 이름은 다름아닌 개성(開成)학교를 세우신
선각자 박기종(朴淇琮) 선생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위해 앞장서신 선생의 정신을 기리며 머리를 숙인다
정공단 앞에 있는 독립유공자 정오연 생가터
일신여학교와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한 호주의 선교사들은 한 집안의 아버지와 딸들이었다
아버지 제임스 맥켄지(한국명 매견시)는 부산진일신여학교를
딸들은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하여 선교와 교육, 의료활동 등 다방면으로 헌신을 하였다
부산진교회
1892년 미국의 선교사에 의해 이 자리에 한옥 예배당이 건축된 것이 부산진교회의 시작이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1895년 10월 15일 한 칸의 초가집에서 시작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경남지역 최초의 신여성 교육기관이었고
3.1독립운동의 깃발을 처음으로 올렸던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본 건물은 1905년 4월 15일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1925년에는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전하여 동래 일신여학교로 개명하였으며
1951년에는 동래여자중학교와 동래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었고
1987년 3월 현재의 금정구 부곡동으로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독립선언문 가벽
독립선언문
독립선언문 가벽에는 또다른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그 주인공은 학교 선배(4회)이신 박재혁 의사와 최천택 의사이시다
두 분의 애국충절에 깊이 머리숙여 경의를 표한다
박재혁(朴載赫) 의사
박재혁 의사는 의열단 단원으로, 의열단이 감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진영.밀양 폭탄사건에서
의열단 탄압에 앞장 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1920년 9월 14일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하여 찾아가
부산경찰서장을 향해 폭탄을 던져 중상을 입히고 결국 사망하게 하였다
폭탄 투척 과정에서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된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왜놈 손에 죽기 싫다며 단식을 감행하여 사형 집행 전인 1921년 5월 11일 순국하셨다
박재혁 의사 동상은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수변공원에 있다
최천택(崔天澤) 의사
최천택 의사는 박재혁 의사와 부산공립상업학교 동기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을 함께 모의하여 성사시킨 이후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으나
박 의사가 끝까지 단독범이라고 진술하여 풀려난 뒤에도
독립군을 돕기위한 자금을 모으고 청년.사회운동 등에 헌신하며 지속해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청동 민주공원에 의사의 기념비가 있다
장건상(張建相) 선생
일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 외무차장,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한 돌립운동가
대청동 민주공원에 가면 선생의 동상이 있다
언덕길에서 내려다 본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진교회와 정공단
언덕길에서는 증산 아래의 금성고등학교가 보이고
증산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맞은편에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이 있다
안용복(安龍福) 장군은 동래출신 어민으로 수군(水軍)인 능로군(能櫓軍)이었는데
일본에 건너가 왜인들에게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 받아온 업적을 세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수영사적공원에는 안용복 장군 사당과 위패를 모신수강사(守疆祠)가 있으며
충혼탑과 함께 동상도 있다
<참고사진> 수영사적공원에 있는 안용복(安龍福) 장군 동상
왜(倭)의 막부가 독도가 조선땅임을 자인한 두루말이 문서를 오른손에 쥐고
일본을 향해 호령하고 있는 안용복 장군의 늠름한 모습
기록을 보니, 처음에는 일본인 어부들에 의해 강제로 피랍되어 갔다 왔으나
두번 째는 1696년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나온다
안용복 장군 도일선(渡日船) 모형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증산공원으로 올라가는데
중간에 도로가 있기 때문에 내려서 한 번 갈아타야하는데.....
그 길 옆 벽면에도 박재혁 의사에 대한 기록물이 붙어 있다
의사께서 폭파한 당시의 부산경찰서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 맞은편에서 증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경사도가 37도에 계단수가 190개로 주민들에게 지옥의 계단으로 불리던 곳이었는데
주민편의를 위해 경사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2단으로 운행되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증산공원으로 올라가는데 증산 왜성의 흔적이 보인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부산진성을 헐고 그자리에 본성(本城)인 증산 왜성(倭城)을 쌓았고
그 본성을 방어하기 위해 동남쪽 해안가인 지금의 자성대가 있는 곳에 지성(支城)을 쌓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 수군은 지성을 일부 개보수 한 뒤, 진을 지성으로 옮겨 이를 부산진성으로 사용하였고
이후 방치되다가 일제 강점기 때 증산을 깎아 부산진성 앞바다를 매립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이후 주변 개발로 인해 폐허가 되고 그 흔적은 여기에 아주 조금만 남아 있는 것이다
12:35 증산(甑山) 정상 / 해발 130m
바다에서 바라보면 이 산의 모양이 시루(甑)와 같이 생겨
가마(釜)와 시루를 관련시켜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가마'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솥(가마솥)이 아니라 쇠를 녹이는 '철가마'를 이름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富山浦라고 불렀으나 1481년(성종12년)에 釜山浦로 바뀌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수정산인데
봉우리를 망원으로 당겨 보니 통일교 통일동산에 있는 제일성지(第一聖地) 비석 옆의 태극기가 보인다
2층 누각인 전망대에 올라서니 .....
부산항과 영도 봉래산 너머로 부산 앞바다가 훤하게 조망이 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은 이렇게 조망이 좋은 증산을 두고 왜 바닷가 쪽으로 부산진성을 옮겼을까?
바다에 인접해 있어 선제적인 수비가 더 효율적이었을까....
그래도 이곳에 망루 하나 정도는 있었겠지 ..... 그러나, 증산 망루에 대한 흔적이나 자료는 없다
그런데, 증산공원에서 사달이 났다
증산공원 정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던 길을 따라 그대로 내려갔던 것.......
시그널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를 않아 그제서야 선답자의 기록을 보니 잘못된 줄 알았지만
다시 올라가는 대신 좌천동 산복도로를 따라 빙 둘러서 가기로 하고 진행하다가
여기에서 증산공원 정문에서 내려오는 갈맷길과 합류를 한다
이후 여기에서부터는 제대로 갈맷길을 찾아 가는 것이다
산복도로는 조망이 시원하게 열려 눈이 참 즐겁다
길 이름인 망양로(望洋路)답게 바다 쪽 전망은 항상 열려 있다
수성초등학교를 지나고
완만한 길을 따라 오르내리는데 배가 고프다
시계를 보니 1시 25분이다 ...... 조금 더 참았다가 계획대로 초량에서 군만두 먹어야지 .....
갈맷길이 갑자기 여기에서 넓은 길을 버리고 오른쪽 좁은 길의 계단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
계단길이 장난이 아니다
힘들여 계단을 올라가서 계속 가니 여기에서 큰 길과 만난다
아마도 지름길로 유도를 한 것 같은데 이럴 필요는 없는것 같다.... 조금 돌더라도 전망보는 재미가 있는데 .....
저기 중앙공원 충혼탑이 보이고
영도 봉래산이 조망되고
시야를 아래로 돌리니 부산고등학교가 보인다
왼쪽이 부산중학교, 오른쪽이 부산고등학교 운동장인데 부산고등학교 건물이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부산중학교 교사는 바다를 보고 있는 모양인데 언덕 아래에 있어서 그런지 여기서는 보이지 않네
13:53 유치환 우체통
청마 유치환은 이영도 시인에게 20여 년 동안 5천통이 넘는 편지와 엽서를 보냈다는 것은 유명하다
주변에는 엽서를 쓰는 카페 들이 있다
청마의 고향인 거제 둔덕면 방하리에는 청마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고 거기에도 청마 우체통이 있다
그리고, 인근 산방산 기슭에는 청마의 묘소가 있다
여기에서 산복도로를 벗어나 산 아래 동네로 내려선다
초량성당
14:16 드디어 초량전통시장까지 왔고
중학교 동기들과 함께 자주 이용하였던 남해태양횟집을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향한다
구(舊) 백제병원(百濟病院)
1927년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이었다
도심 한 가운데에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진관
차이나타운
1884년 이곳에 청나라 영사관이 생기면서 형성된 부산 최대의 중국인 거주지역으로
화교중고등학교와 중국식당들이 밀집하여 있다
텍사스 거리
텍사스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금은 미군은 떠나고
러시아 선원들이 달러환전이나 쇼핑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었으나
그마저도 코로나 여파인지 한산하게만 보인다
외제 양주가 귀하던 시절, 선물용 양주를 구하느라 이곳을 종종 찾기도 하였다
신발원과 원향제가 보이고
부산화교중고등학교
초량 근대역사 갤러리
초량 주변의 옛 풍경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부산역 변천사
첫댓글 영남아
서두는 내 어릴적(중.고 때) 놀든 곳이다
잘 봤다
국6학년때 수정동에서 좌천동(잘못 내려온 산복도로 근방) 으로 이사 왔으나 학교는 수성국민학교를 그대로 다녀 졸업했다
좌성국민학교로 전학했으면 4번째 국민학교가 될뻔했다 그때는 언덕을 넘어 범내골로 하여 공작창을 지나 개성중.고로 통학했다
증산공원 아래 수정동 쪽 산 허리에 공동묘지가 있었고 그 아래 살았는데 그 당시 파내고 주택가를 만들어 버렸지
나는 깔닥고개 중간 쯤 영등사 절 옆동네고 석규는 동명사장(강석진?) 집이 있는 아래 평지 동네에 살았지
그 당시 박통이 부산오면 동명사장 차로 다녔다든구나
사진보니 마니도 변했네
정발 장군 사당을 어찌도 그리 자세히 보노
일신병원은 없어졌나?
일신병윈은 그대로 있다
블로그에 나온다
그리고, 수성초등학교도 그때하고는 많이 변모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