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1】
20대 청년에게는 숨이 막히는 광경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지금까지 세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도시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저렇게 아름다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 살고 있는 기분일 거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잘 다듬어진 도로,공원,선착장들이 있었고 수백 개의 아치형 다리가 놓인 운하가 놓여 있었다.다리들은 상당히 높게 놓여 있어서 돛을 단 배들이 아무런 불편없이 그 밑을 지나다녔다.
땅밑으로 하수구 시설이 되어 있는가 하면,경찰과 소방조직,신속한 우편제도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정말 정신이 아찔해지는 광경이었다,700여년 전에 살던 젊은이에겐 더욱 그러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험가의 한 사람인 마르코 폴로였고, 그 아름답고 훌륭한 도시 항주(抗州)는 부강한 고대 중국-그때 유럽인들은 중국을 Cathay라고 불렀다-의 여러 도시 중 하나였다.
(홍콩의 세계적인 항공사 Cathay Pacific을 많이 들어보셨죠?
고구려 시대부터 우리의 접경지대를 항상 공략하던 '거란족'을 뜻하는 단어가 러시아어로는 '키타이',유럽에서는 '카타이',영어식 표현으로는 '캐세이'이고 지금은 중국의 영어식 표현이 China이지만 중세 이전의 중국을 유럽에선 '캐세이'라고 불렀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일기에다 항주가 전세계의 어느 도시보다 훌륭하다고 쓰고 있다.
그의 눈에는 그 도시가 그 제국의 수도 북경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마르코의 집안은 온 세계를 널리 다니는 여행가의 집안이었다.
그가 중국에 도착한 것은 1275년이었는데,11년 전에 그의 아버지 니콜로와 숙부 마페오는 이미 중국을 여행한 일이 있었다. 그들이 다시 베니스로 귀국길에 오르기 전에 중국의 황제는 그들한테서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들은 약속대로 중국에 다시 갔고,이때 17살의 마르코를 데리고 갔던 것이다. 3년에 걸친 그들의 여행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터키 남단 이스켄데룬만의 작은 마을인 아야스까지는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내려갔고,거기서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까지는 말을 타고 갔다.
페르시아를 가로질러 발크에 이르고 거기서 옥수스를 거쳐 와칸으로 가서다시 파미르고원을 건넜다.
그들은 다시 카시라그,아칸드,코탄을 거쳐 고비사막을 지나서 마침내 중국땅 서주에 도착했다.
꼬박꼬박 일기를 적은 마르코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얼어붙은 산을 기어올라야 했고,때로는 억수 같은 비와 모래폭풍 그리고 홍수,눈사태와 싸워야 했다.아프카니스탄에서는 마르코가 길을 잃는 바람에 여행이 1년이나 지체되었다.산적이나 전쟁을 피하려고 길을 우회하거나 계획을 수정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마르코는 그의 일기에 빠짐없이 적어 두었다. 그는 여행 중에 만난 경이로운 광경이나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불을 붙이자 목탄처럼 타면서 열을 내는 검은 돌(석탄)을 보고 놀랐다. 램프의 연료로 쓰이는 땅에서 솟아나는 물질(석유)도 보았고,실을 뽑아 옷감을 짜며,불에 넣어도 타지 않는 물질도 시험해 보았다.
악어를 보고 '사람을 삼킬 만큼 큰 주둥이를 가진 길이가 열 걸음이나 되는 큰 뱀'이라고 썼는가 하면 야크를 '코끼리와 비교될 만한 들소'라고 표현했다
야자열매는 '사람의 머리만큼 크고 맛이 좋으며 우유처럼 하얀 열매'라고 썼다. 중국의 황제는 (당시는 몽골족의 元나라) 이 젊은 손님을 좋아한 나머지 코끼리 사냥을 하러 갈 때에도 데리고 갔고,황제의 사치스런 대리석 궁전과 여름철 휴양지의 행궁에도 출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기록에서 1백명 또는 그 이상의 아름다운 후궁들을 뽑기 위해 2년마다 한 번씩 채홍사가 파견된다고 적고 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