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 사이
최영록<영문과 76학번>
최근 슬하 자식 50여명이 모여 아버지께 상수연(上壽宴:우리 나이 100세를 축하하는 잔치)을 차려드렸다. 대가족의 경사를 맞이해 <아버지-100년의 봄, 100장의 기억>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선물해 드렸는데, 평생 동안 갖고 계시던 자료와 사진 100장을 골라 주제별로 정리, 편집한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당신이 77세때 손수 써놓으신 발자취(연보)와 윗대로부터 물려받았거나 어릴 적부터 당신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모든 자료들(예를 들면, 1940년대 초 초등학교 성적표와 상장, 결혼 때의 사성과 납폐문서 등), 30여년 동안 써오신 일기장, 메모지들을 연도별로 정리해 놓은 것들이다. 평생 농사만 지으며 쓴 아버지의 일기장 30여권은 어느 해 우리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환히 알 수 있는 가족의 역사서이자 영농일기인 셈.
아버지의 사진과 여러 문건들을 정리하면서, 기억(記憶)과 기록(記錄)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새삼 성찰하게 됐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해도 세월이 흐르다보면 누구라도 가물가물해지게 마련인데, 기록은 자료로 분명히 남아 있기에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은가. 아버지가 그 자료들을 보관하고 기록해 놓지 않았다면 우리집의 세세한 역사를 복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증조부가 부동산(땅)을 산 매매문서까지 있었다. 하여, 목차에 <아버지는 자료 보관·기록의 왕> 항목을 넣었다.
우리 모교의 정문에는 기둥도 없이 커다란 사각형 돌에 교명(校名) ‘성균관대학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고, 그 밑에 ‘1398’이라는 숫자가 있다. 1398은 아시겠지만 모교의 건학(建學)연도이다. 개교(開校)가 아닌 건학이라는 낯선 용어도 우리 대학이기에 가능하다. 그러니까 성균관대학교는 올해 건학 628주년의 해이다. 근대적인 의미로 600년을 넘는 ‘대학’이 지구촌에서 몇 개나 될까. 우리 대학은 북경대, 동경대, 하버드대 등과 비교할 수 없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오래된 유서깊은 대학이다(필자 조사). 600년의 역사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기록이 없었다면 알 수 없는 일. 그런데, 우리는 정조때 민종현이 편찬한 14책 7권의 『태학지』(太學志) 를 갖고 있다. 유일한 왕립 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의 역사를 기록한 이 책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는 건물·석전(釋奠:공자 제사)·학사행정·역대 사실 등을 세세히 알 수 있다. 역사, 제도, 규정 등 국가교육 지침이 담긴 <성균관 백서>에 해당하는 이 책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교육사를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끔찍한’ 일로써, 귀중한 문헌이 아닐 수 없다. 더 다행인 것은 모두 국역이 되어 있어 우리가 금세 접할 수 있다는 것.
그런가하면, 우리에게는 또 윤기(尹愭, 1741~1826)가 지은 『반중잡영』(泮中雜詠)이라는 책도 있다. 칠언절구 220수로 엮어진 이 책은 20년간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만학도 유생이 쓴 ‘성균관 생활보고서(리포터)'인데, 당시 대학생들의 숨결을 생생히 느끼고 엿볼 수 있다. 『태학지』가 하드웨어라면 『반중잡영』은 소프트웨어이다. 이런 기록들이 있었기에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정은궐 지음)도 가능했을 터. 소설을 극화한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도 기억하시리라. 타임머신을 타고가 성균관 대학생들의 생활상을 엿보는 거의 유일한 문학적 자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자랑스러운 ‘기록의 나라’였다. 현재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만도 20건. 세계에서 4번째이자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단연 으뜸인 것은 모두 까닭이 있다. 한 국가의 거시사(巨視史)도 결국은 한 기관이나 한 가정의 미시사(微視史)가 바탕이 되지 않을까. 기록을 중시하는 민족은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