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55
3월7일[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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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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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yCHab0asrA
[수원교구 최재관 암브로시오(안녕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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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 이상 슬퍼하고 통곡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구약 시대를 종결짓는 동시에 신약시대를 활짝 여신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이 풍기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강렬한 투사의 이미지입니다. 그는 사악하고 구린 유다 고위층 위선자들과 죄인들의 악행을 강력한 어조로 경고했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신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회개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은 예수님을 꼭 빼닮았습니다. 적대자들의 위협 앞에서도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칭찬이나 격려의 말이 아니라 듣기 싫은 쓴소리를 거침없이 퍼붓는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무고한 죽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서막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례자 요한의 삶은 참으로 씁쓸하고 고독하고 팍팍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닦느라고 그는 일찌감치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라고는 전무한 황량한 장소였습니다. 그저 하늘과 구름, 흙과 먼지만이 전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조용하고 고독한 광야에서 하루 온종일 기도하고 수행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했습니다. 그의 특기는 단식이었습니다. 그의 취미는 기도였습니다. 그의 필살기는 고행이었습니다. 메뚜기나 들 꿀 같은 최소한의 음식과 보기가 민망할 정도의 낙타 털옷을 입고 그야말로 자연인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재미라고는 단1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쇠락과 더불어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타나신 메시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가시는 곳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그분은 잔치 초대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얼마나 자주 초대받으셨던지, 설교 말씀 중에 비유를 드실 때, 자주 잔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그분의 삶은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잔치를 좋아하시고 축제를 즐기셨던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는 끝났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고 통곡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대대적인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 내내 함께 하시기에 당연히 우리들의 이 세상 여정 역시 지속되는 축제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니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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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eZupsDYcs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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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떠나는’ 방법>
아지즈 ‘지즈’ 샤베르시안은 인터넷·SNS 시대에 가장 유명해진 ‘피트니스 인플루언서’ 중 하나로, 호주 출신의 러시아계 젊은 보디빌더였습니다. 자신을 “신이 빚은 몸”이라고 칭하며 SNS에 끊임없이 사진과 영상을 올려 수많은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파티, 근육, 셀카”의 결합으로 2010년대 초중반 젊은 층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근육만 좋다면 삶의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퍼뜨리며 ‘지즈’를 하나의 밈이자 문화 아이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불과 22살의 나이에 태국 여행 중 사우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사후 스테로이드 등 약물 사용이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고, 가족 역시 심장 관련 질환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무리한 몸집 키우기와 스테로이드가 청년을 얼마나 위험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운동은 단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몸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지즈는 운동을 해서 자기 몸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고 사람들의 시선과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단식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와 따지는 이들이었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단식의 목적이 당신이어야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단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빼앗기면 그분께 다가가기 위해 단식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합당하기 위해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행위입니다.
‘마크 월버그’는 197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도체스터에서 태어났습니다. 빈곤과 범죄가 공존하던 이웃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일찍부터 폭력과 마약, 도둑질 등에 노출되었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그는 10대 후반 이미 여러 범죄를 저질러 법정에 서게 되었고, 실제로 교도소 생활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 시절 그는 폭력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행동으로도 비판받았는데,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폭행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신앙에 눈뜨게 된 계기는, 교도소 생활 도중 자아를 성찰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이대로 가다가는 내 미래가 정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교도소 안에서 가톨릭 사제와 대화를 나누며 점차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마크는 출소 후 “지금이야말로 인생을 완전히 바꿔야 할 때”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지역 본당 신부님과 꾸준히 만나 상담하고 고해성사를 보며, 세례성사 때 했던 서약을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신앙은 내게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는 닻(anchor)과 같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마크 월버그의 하루 루틴은 ‘절제와 규칙성, 그리고 신앙’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매우 이른 새벽(대개 오전 2~3시경)에 기상해 첫 번째로 기도 시간을 갖습니다. 운동으로 몸을 깨운 뒤, 가족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며, 이후 촬영 일정이 있을 경우 그 스케줄에 맞춰 움직입니다.
마크는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미사에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든, 하느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라고 직접 밝혔습니다. 가정에 대한 책임도 매우 중요시하여,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를 위해서는 피트니스나 식단 관리도 철저히 계획합니다.
“기도와 운동,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나를 지켜준다.”라는 그의 말처럼, 마크는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가꾸는 데에 균형 있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마크 월버그가 “절제의 삶이 기쁨이 된다”고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방탕의 끝자락에
서 봤고 거기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누렸던 부와 명성은 결국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했다. 마음속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아아인맨의 로버트 나우니 주니어는 치즈버거의 맛을 느끼지 못해 마약을 끊었습니다. 마약을 끊는 일이 단식인데, 잃어버린 치즈버거의 맛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크 월버그에게 있어서 단식은 하느님과 가족을 만나기 위한 나의 노력이었습니다. 내가 단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달라고 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단식의 본래 의미를 잃습니다. 단식은 내 육체의 욕망 때문에 만나고 있지 못한 누군가를 만나러 떠나는 여정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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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론과 방송을 배울 때입니다. 현명한 독자는 주어지는 정보의 행간과 문맥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행간은 단순한 글의 의미뿐만 아니라, 글 속에 직접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의미나 의도를 뜻합니다. 문맥은 어떤 단어나 문장이 쓰인 전체적인 분위기나 맥락을 가리킵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글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향하는 달을 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단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단식은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식은 음식을 끊거나 절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단식은 단순히 배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행위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우리는 단식의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배척하고 외면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불법 체류자들을 단속하고 추방하는 정책이 강화되었습니다. 법적으로만 보면 그들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었으니 단속하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땅을 찾았을까요? 기근과 전쟁, 가난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듯이, 우리는 이들의 ‘행간’을 읽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앞세우며 형식적인 신앙을 강조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한다."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랜 시간 음식을 끊고 기도한다고 해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한다면 그 단식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첫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단식이란 내 배를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난민과 이민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입니다. 둘째,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불의한 법과 제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들이 불법을 저질렀으니 당연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나,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셋째, 마음을 새롭게 하는 단식을 해야 합니다. 단식은 단순한 절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단식을 통해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형식의 단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정의를 실천하는 단식을 할 것인가? 우리는 법과 제도의 ‘문맥’만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억눌린 이들의 ‘행간’을 읽으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단식입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단식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실천할 수 있는 단식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내일 할 단식이 단순한 음식 절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단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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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속죄의 날에 지키도록 정해져 있었는데, 공적으로 집단에서 지키거나 개인이 따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단식은 의도하지 않게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어긴 것을 본래대로 회복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또한 단식은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속죄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후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단식을 권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문헌인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할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단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시지 않습니다.(마태 6,16-1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이 회개해야 할 때라고 보았습니다.(3,2 참조)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혼인하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때라고 보셨습니다.(이사 62,5 참조)
단식의 실천과 관련하여 세례자 요한이 강조한 회개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치의 초대는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삶은 비이성적인(irrational) 것이 아니라 이성에 지배되지 않는(nonrational)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단순히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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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시의 그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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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실제로 굶더라도, 위선자들의 단식은 단식이 아닙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때문에, 즉 이미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단식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왜 요한의 제자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했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요한의 증언을 믿은 사람들은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요한 1,37) 그것은 사실상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낸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에 많은 사람들이 그 증언을 안 믿었거나 알아듣지 못했고, 그냥 세례자 요한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신랑이라는 말은 원래 세례자 요한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7-30)
<세례자 요한은 지금은 회개할 때라고 보았고, 예수님은 지금은 기뻐할 때라고 보셨다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설명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메시아 강생의 기쁨을 말했고, 예수님도 복음을 선포하실 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강조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선포 사이에는 모순되는 점이 없습니다.>
3)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엄격하게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했는데(마태 3,4), 요한의 제자들은 그 생활을 본받으려고(또는 흉내 내려고)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려고 자주 단식을 했는데(루카 18,1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단식을 ‘위선’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위선자들이 실제로 밥을 굶는 단식을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심을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의도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거짓 단식이 될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단식을 단식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라는 뜻입니다.
4)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단식을 행합니다. 그것도 겨우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을, “죄를 짓고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때”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짓고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가 회개하고 주님에게로 되돌아올 때, 그때 회개의 단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꼭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5) 당연한 말이지만, 단식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오늘은 단식하는 날이니 단식하시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잔인하고 가혹한 일이 될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데 무슨 단식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런 이가 있다면, 단식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챙겨가서 먹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경우에,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신(마태 8,20)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고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은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느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은(마태 12,1), 그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또 어떤 병에 걸려서 음식을 아예 먹지 못하거나, 아니면 음식을 특별히 조심해서 관리해야 하는 병자들은, 글자 그대로 먹을 것이 있어도 먹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단식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우리 교회가 금육재와 단식재 규정에 여러 가지 예외 조항을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그런 상황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입니다. <‘법’에 사랑이 없다면, 그 ‘법’은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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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함께>
마태오 9,14-15 (단식 논쟁-새것과 헌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늘 그렇게
지금여기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기뻐합니다
슬퍼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슬퍼합니다
즐거워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즐거워합니다
아파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아파합니다
흥겨워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흥겨워합니다
울부짖으시는
하느님과 함께
울부짖습니다
일어서시는
하느님과 함께
일어섭니다
짓밟히시는
하느님과 함께
짓밟힙니다
살아나시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납니다
죽임 당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죽임 당합니다
늘 그렇게
지금여기에서
하느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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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인구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된 단어가 있습니다.
(단식!!)
오늘 독서에서는 단식의 효과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바꿔 얘기하면, "제대로 된 단식을 하였을 때, 너희 목소리가 저 높은 곳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이??" 단식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올바른 단식은 그 목소리가 하늘까지 전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독서는 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단식이 알아야 되겠지요?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사순 기간 동안 적어도 세 번 '한 끼'의 단식을 합니다.
재의 수요일에
사랑의 단식 권고일에
주님 수난 성 금요일에
'단식'이라는 말은 먹을 것이 있음에도 의지적으로 의식적으로 먹는 것을 참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이 단식과 비슷한 말이 또 있습니다. '굶다' - 이 '굶다'는 말은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단식'과 '굶다'의 차이는'안'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먹는 것을 포기하는 의미로 단식을 해야 하는데 한 끼를 먹어서는 안되는 날 한 끼 굶는 날로 생각들을 합니다. 단식의 의미를 잘못알고 있는 것이지요.
단식은 자신의 의식적으로 먹음의 욕구를 참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우리 교회의 전통인 '단식'과 요즘 유행하는 '다이어트'를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다이어트의 목적이 뭡니까? (살을 빼기 위해서)그러면 단식의 목적은 뭡니까?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욕구 중에 하나인 식‘욕’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먹는 것을 참는 것이 단식과 다이어트인데 그 목적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단식의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먹어야 될 음식이 있는데 먹지 않았으니 먹지 않은 음식이 남아야 합니다. 금육 고기 먹기를 포기하는 날이기에 먹지 않은 고기가 남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단식해야하니까 몰아서 한 번에 두 끼의 식사를 하고 금육해야하니까 놔뒀다가 내일 먹는 것은 단식의 의미와 금육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단식했으면 한 끼의 식사가 남아야 하고 금육을 했으면 먹지 않은 고기가 남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가난한 이에게
이렇게 단식의 의미와 목적과 방법을 짧게 말씀드렸는데 새겨서 실천으로 옮기셨으면 합니다. 내가 하는 행위에 신앙이 담겨있지 않다면 그 행위는 푸닥거리에 불과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옮겨지는 행동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그런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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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주에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녹화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평화방송이 서울 명동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통 체증으로 운전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하철 타고 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덜 걸릴 것 같아서 직접 운전을 해서 방송국으로 갔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성당에서 방송국까지 1시간 20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1시간 넘게 촬영하고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켜니 1시간 40분을 예상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운전하는데, 안내하는 길이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저의 경험상 분명히 막히는 길인데, 그쪽으로만 안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2~3분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하고 난 뒤라서 너무 피곤했는데, 막히는 길로 안내하니 더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고, 제가 아는 길로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알던 길이 더 막히는 길이었습니다. 분명히 더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2시간 30분 동안 운전해서야 집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방송에서 연예인이 말했던 이런 우스갯소리가 생각납니다.
“남자가 꼭 따라야 할 여자가 둘이 있다. 내비게이션과 아내 말은 잘 들어야 한다. 목적지까지 가야 하니까.”
자기 판단이 맞을 때도 있지만, 그 판단이 오히려 자기를 힘들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들을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현재의 가톨릭 신자들은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만 단식합니다. 그러나 당시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에 두 번 단식했었습니다. 단식은 불의한 사회 구조를 정화시키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며,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목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단식이 남에게 보이려는 형식적인 행위, 자기 과시의 한 방편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단식 행위가 옳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들 나름으로는 올바르다고 판단했겠지만, 주님이 제외된 단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단식할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에 동참하는 단식,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단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된 판단보다,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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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오. 9,15)
일상적인 우리 삶에 함께 있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며 삽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혹은 자연이든 건강이든 잃고 나서 그 소중함을 우리는 조금이나마 깨우치게 됩니다.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던 사람, 재물, 사랑, 우정 등 모든 것들은 조금씩 변하거나 사라집니다. 청춘도 지나가고 열정적으로 추구하던 꿈이나, 지난날 우리가 이룬 크고 작은 성취들, 모든 것들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았던 그 모습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매일의 삶은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기쁨의 축제인 우리 삶은 순간을 경축하며 모두가 행복하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매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날입니다.
신랑이신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세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신랑이신 주님이시지만, 주님의 현존은 지금 여기뿐입니다. 지금 여기만이 우리의 과거를 꾸미고 미래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의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자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혼인 잔치에 오셔서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계시는 주님을 잊고 삽니다.
수도 생활을 시작하며 약 37년 전 필리핀에서 수련을 하던 때입니다. 우리 수도회가 국제 수도회이기에 한국인 2명 필리핀인 8명 인도인 1명 모두 11 명이 함께 수련을 받았습니다.
수련 기간에는 주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도 매일 하지만, 서로 다른 성격과 문화 배경을 가지고 만난 청년들이 함께 살면서 인간관계의 불화도 가끔씩 생깁니다.
어느 날 영적 동반자를 모시고 수련자들 상호 불편했던 인간관계가 있으면 마음껏 솔직하게 털어놓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동안 쌓아 둔 분노를 나는 한 형제에게 쏟아내었고, 그 형제도 되받아치면서 5분 이상을 서로가 옥신각신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가만히 듣고 계시던 영적동반자 수녀님께서 우리에게 “두 분의 감정은 다 이해됩니다. 그런데 두 분의 다툼 중에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서로의 불편한 감정에 온 마음을 빼앗겨서 지금 여기에 계시는 신랑이신 주님의 현존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는 자기중심적인 삶 때문에 신랑이신 주님을 잊은 날들을 상기하는 시기입니다. 우리 마음을 빼앗겨 주님의 현존을 잊고 제 멋대로 살았던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삶을 새롭게 음미할 수 있다면, 신랑과 함께 우리는 삶을 경축하게 됩니다. 당연하게만 여기던 우리의 사람과 자연, 사랑과 우정을 지금 여기에서 따뜻하고 소중하게 품을 수 있다면, 사순 시기는 신랑과 함께 하는 은총의 혼인 잔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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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오늘 복음은 단식의 참된 의미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의미에 대한 깊은 묵상 없이, 그저 남들 앞에서 자신의 종교적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단식을 실천했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지듯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답하시지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참된 단식이 어떤 의미인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단식은 그저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것에 목적이 있는게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기쁨의 잔치를 열어주시는 주님을 빼앗겼을 때, 그분을 되찾아 다시 내 마음 안에 모시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빼앗길까요? 재물에 대한 탐욕에,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나 자신을 주님보다 앞세우려는 교만에 우리는 주님을 자주 빼앗깁니다. 바로 그럴 때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탐욕, 욕망, 교만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다시 주님을 모시려고 하는 게 ‘단식’인 겁니다.
그 단식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안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내 마음이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올바르게 식별하여 제대로 채워넣는 일입니다. 즉 단식은 그저 비운다고 끝나는게 아니라, 올바른 것을 제대로 채워넣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지요. 지금 내 안에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참된 그 무엇, 나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본질적인 그 무엇이 결핍되어 있으면 나는 마음에 헛헛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헛헛함은 결핍된 그것을 제대로 채우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내 몸에 수분과 비타민이 결핍되어 그로 인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콜라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고 해서 그 증상은 사라지지 않지요. 단지 배만 부를 뿐입니다. 이상하게 배가 잔뜩 부른데도 마음이 계속 헛헛하고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바로 그 때가 우리에게 단식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내 안에 있는 쓸 데 없는 것들을 온전히 비워냄으로써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꼭 있어야만 하는데 현재 결핍되어 있는 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먼저 나를 비우는 것이지요.
우리 마음 속 헛헛함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사랑을 느낌으로써만, 그렇게 그분과 진정으로 일치됨으로써만 비로소 채워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는 사악한 세력은 우리가 각자의 헛헛함을 온전히 마주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니가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런거니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으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마음 속 헛헛함을 허기짐으로 착각하여 계속 먹게 만듦으로써, 먹는 행위 자체가 주는 원초적인 쾌락에 중독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과 그분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참된 단식이 우리를 그 중독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철저한 배고픔과 무력감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회복함으로써, 내가 평소에 당연한 듯 누렸던 모든 것들이 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덕분이었음을 깨닫고 그분께 대한 감사와 사랑이 깊어짐으로써, 그렇게 느낀 사랑을 이웃에게 구체적인 방식으로 실천하여 완성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마음 속 헛헛함을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우게 되는 것이지요. 이번 사순시기 동안 그런 단식을 한 번 제대로 실천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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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과 ‘신랑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사실, ‘단식’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단식을 앞세우던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께 따졌고,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신이 ‘신랑’(묵시 19,6-9)임을 계시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고(이사 54,5-6;62,4-5;호세 2,16-20),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요한 3,29)이라 불렀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당신을 ‘신랑’(마태 22,2)으로 비유하셨으며,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에페 5,23-32).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단식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는 ‘단식해야 할 이유’와 함께 당신의 수난 예고와 당신이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인 메시아임을 계시합니다. 곧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단식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새로운 의미의 단식으로, 결국 단식은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곧 사랑으로 행하는 단식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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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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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이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참된 단식”-
일기쓰듯하는 강론입니다. 어제는 제 인생중에 획기적인 날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수도사제생활하다 보니 참 부끄럽게도 받는 일에 익숙해졌고 받은 것에 감사함을 거의 잊고 지냈으며 주는 것을 거의 잊고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어제는 봄소식을 전하는 마음으로, 봄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늘 고맙게 생각하던 차에 치과병원에 용기를 내어 소박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꽃 한 다발을 사들고 방문했습니다. 생전 처음이요 제 자신 품격도 높아지는 듯 참 흐뭇했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문득 이런 사랑의 꽃선물이 단식보다 백배는 좋겠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단식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詩같은
하루
詩같이
살자”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꽃같은 삶, 시같은 ‘사랑의 삶’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단식일 것입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집회35,6)는 얼마전 말씀이 생각났고, 이웃을 방문하거나 만날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아야 겠다는 마음다짐도 새로이 했습니다. 더불어 생각난 것은 결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꽃’이나 ‘시’를 선물하기 위해 꽃다발이나 시집을 살 때는 절대로 값을 깎는 불경不敬을 저질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순간 들었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충고도 좋습니다.
“타인의 결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감수성은 지식이 아니기에 남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로 나타난다.”<다산>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를 지켜서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논어>
경청과 어짐의 자세가 바로 참된 단식의 정신일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너그럽고 인정이 많으며 슬기롭고 덕이 있다(Generous, humane, wise, and virtuous)’라는 순수한 우리말 ‘어질다’의 뜻도 어감도 참 좋습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단식입니다. 단식을 해서 구원이 아니라 사랑을 많이해서 구원입니다. 단식은 상대적일뿐 절대적 가치는 사랑입니다. 배고픈 이는 먹어야 하고 비만하고 배부른 이는 단식이 필요합니다. 말많이 하는 직업의 사람들은 침묵해야 하고 침묵이 일상화된 독거노인은 말해야 합니다. 단식도 침묵도 상대적 수행일뿐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을 권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이웃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하느님만이 아시는 자발적 겸손한 사랑의 단식, 자유롭게 하는 단식을 바라십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할 것이고, 한번뿐인 귀한 혼인잔치 같은 인생! 고해인생이 아닌 행복한 축제인생을 누리시길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슬픔이나 우울, 심각함은 결코 참된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 유우머가 참된 영성의 표집입니다. 왜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드는 지요. 굳이 단식을 하려거든 나팔을 불지말고 마태복음의 예수님 가르침처럼 하느님만 알고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기쁜 마음으로 축제인생 분위기에 추호도 손상을 주지 않도록 함이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예의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된 단식의 정신은 아마도 예수님의 롤모델로 삼으셨을 이사야 예언자가 보여줍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실천이 바로 참된 단식의 진수임을 밝히는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오늘 이사야의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단숨에 읽히는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빠진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우리의 창백한 단식 수행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인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실천이 참된 단식이요 이런 정심으로 사순절을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에 쏟아지는 주님의 축복 말씀이 우리 마음을 환히 밝히며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사랑의 혁명적 예언자이자 신비가요 영성가인 이사야는 불멸의 시인입니다. 이사야의 말씀 전부가 살아 약동하는 시요, 우리를 깨달음과 자유로움으로 이끄는 이런 생명과 빛과 희망이 넘치는 시가 참 좋은 시입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살아있는 시인지요! 수천년 전 이스라엘의 예언자 시가 시공을 초월하여 역설적 문명의 야만시대에도 그대로 통하니 하느님의 선견지명이 놀랍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 거룩한 사순시기 우리 모두 참된 단식의 정신으로 자유로운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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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가장 훌륭한 단식>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그런데 따지듯이 물은 것이 아니라 여쭌 것인데 제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지요.
어쨌거나 이 질문에 약간 삐딱한 마음으로 이렇게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꼭 단식해야 하는 건가? 그것은 단식 강박이 아닌가? 어쩌면 자기학대일 수 있지 않을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에 저의 답은, 적어도 억지로 하는 단식은 아니어야 하고, 자기학대에 불과한 단식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뭐든 다 좋자고 하는 것이니 단식도 그래야 하고, 그렇기에 어제 성숙하고 슬기롭게 선택해야 함에 관해 얘기했듯이 단식도 성숙하고 슬기로운 단식을 선택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저는 물만 먹는 단식을 주로 했는데 요즘 와서는 효소를 먹는 단식을 주로 합니다.
그러나 뭘 먹으며 하는 단식이냐보다 곧 방식보다, 무엇을 위해 하는 단식이냐 곧 목적을 더 따져 단식해야 할 것입니다.
미용 목적의 단식, 건강 목적의 단식, 치료 목적의 단식, 항의 목적의 단식과 같이 목적 단식 가운데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단식이 있는가 하면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단식이 있는데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이웃 사랑 단식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이니 이 단식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 사랑 단식은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는 단식입니다. 곧 이웃을 흡족하게 할 뿐 아니라 하느님도 흡족하게 하는 단식이고,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단식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목적으로 단식하면 어떤 효과가 그 안에 숨어 있습니까? 나의 건강, 나의 기쁨,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이 그 안에 숨어 있지 않습니까?
미용 목적의 단식만 하면 그 목적 하나만 이루는데 사랑의 단식은 미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는데도 나의 미용에도 좋고, 이웃도 행복하게 하고 나도 행복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나를 구원합니다.
마음먹기 쉽지 않겠지만 이왕 하는 단식, 이런 단식을 목적으로 하는 단식을 하라고 권고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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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식, 많이가 아니라 잘>
“저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회개의 사순절에 실천해야 할 것으로 단식, 자선, 기도 이 세 가지를 권면하는데 그것은 그제 읽은 복음말씀대로입니다.
사실 회개한 사람과 성인들은 예외 없이 이 세 가지를 잘한 사람들이기에 우리도 회개하여 성인이 되려면 이 세 가지 실천을 잘해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중 오늘은 단식에 집중하여 교회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들은 단식을 많이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단식을 아무리 많이 하였어도 어떻게 많이 했다고 주님 앞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단식을 많이 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 중요한 거야!’라고 흔히 얘기하듯 단식도 많이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환갑이 되던 해에 서품 30주년이 겹쳐 자연스럽게 제 인생과 수도 생활을 함께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 든 생각이 제가 60년을 그리고 사제생활 30년을 참 열심히 살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살았는데 잘 산 것은 아니었다는 반성이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열심히’가 아니라 ‘잘’이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지요.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이 중요하고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그런 조로 얘기합니다.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요,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요,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 사랑을 거스르지요. 내 배 부르기 위해 남의 입의 것 빼앗고, 높이 오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잘하는 단식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음식을 끊는 것보다 욕망을 끊는 것이요, 욕망을 끊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겁니다.
내 입에 넣기 위해 남의 것 빼앗던 우리가 내 입에 들어갈 것으로 자선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단식인데 그러나 오늘 주님은 여기서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신랑을 위한 친구의 단식을 가장 완전한 단식의 예로 제시하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가 먼저고 음식은 늘 2차적인 겁니다. 사람보다 먹는 것이 중요한 식도락가는 맛에 탐닉하지만 사랑이 중요한 사람은 맛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즘 와서 저의 최고의 식탁은 맛집에 가서 먹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정성껏 준비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 맛있게 먹어주는 식탁이고, 그래서 협동조합을 시작하고 센터가 마련되면 이런 식탁을 마련할 것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열두 분의 조합원을 번갈아 초대하여 미사를 봉헌한 후 제가 준비한 식탁에서 주님과 제자들처럼 사랑의 나눔을 하는 겁니다.
음식은 내 배를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라고 있는 것이니 사랑을 배운 우리는 누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쁘게 축하하며 먹고, 안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넘어가지 않아서 먹지 않습니다.
세월호 단식투쟁을 할 때 옆에서 폭식한 사람들처럼 그래서도 문제지만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주기를 바라는 사람 앞에서 단식하는 것도 문제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단식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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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
오늘 복음(마태 9,14-15)은 '단식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왜 단식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예수님)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인 유다교 지도자들은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루카18,12 참조),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
오늘 독서(이사 58,1-9ㄴ)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단식이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단식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단식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는 여러분을 떠나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은 손을 깨끗이 씻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순결한 마음을 가지집시오.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7-8.10)
이번 사순시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을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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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 15)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보게 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우리의 삶에서
빼앗겼는지를
깨닫는 사순의
단식입니다.
단식으로
숨겨진
우리 마음이
드러납니다.
가면을 벗고
판단을 멈추는
단식입니다.
우리자신을
만나는
진정한
단식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단식의
정신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신앙인의
참된 자세와
참된 정신이
요구되는
사순입니다.
우리 존재의
의미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단식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치러야만 하는
고통을
피하지 않습니다.
단식은
사랑의
행동이며
사랑의 참된
실천입니다.
단식의 첫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내적침묵입니다.
먼저 단식해야 할
우리자신입니다.
몸과 마음의
유혹을
이겨내면서
우리는
성장합니다.
빼앗긴 신랑이
되돌아오는
신랑의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는
희망찬 사순의
단식입니다.
단식은 우리에게
일깨움을 줍니다.
좀더 건강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부터
먼저 바꿔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소중한 인격이며
소중한 단식의
아름다운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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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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