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모든 佛像이 석가모니 진짜 모습이 아닌 이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실의 모습은 있기는 한데 부처님의 형상은 본래 그리거나 만들지도 않았었는데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열반)500년동안 그림으로나 형상으로는 표현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생존시 큰 깨달음(해탈 열반의 경지가 부처자리)의 자리는 말과 글로도 표현 할 수 없어
부처님도 말없이 세곳에서 전하셨는데(삼처전심)어디 감히 부처의 모습이나 현상을을 만들수가 없었
다고 한다.
그렇게 부처님 열반에 드신 후 500년 넘도록 부처님의 형상은 표현이 안되어 오다가 인도의 서북부
지역까지 점령해 들어온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세력하 통치시대에 만들어지게 되는데 간다라
지역에서 나오는 불상들의 모습은 거의 모두가 완전 그리스 사람들의 얼굴형이다.
지금도 파미르고원 실크로드 부근 알렉산더왕이 동진했던 지역에는 그의 병사들이 현지인들과 결혼후
내려오는 집단촌이 있는데 서양인의 모습이다. 그렇게 되는고하니 당시 불상을 만드는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기에 정치적으로 가장 강자인 그리스의 티벳지역 점령군 통치자 총독이 우연한 기회에 부처
님의 경전을 접하고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그런 그리스의 총독이 이렇게 훌륭한
성인의 모습이 왜 없느냐는 의아심에 그리스인 들에 의해 불상이 최초로 만들어 지게 된다.
당시 승려나 불자들의 눈에는 처음에는 못마땅 했으나 막상 조성해 놓고보니 그리 나쁜것만 아니였고
대업을 이루신 부처님을 기리는 상징도 되고 차츰 경외하는 존숭의 예배 대상으로 사찰의 법당에 모셔
지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티벹쪽 으로 서진하여 중국을 지나 우리 한반도에 그리고 현해탄 넘어
일본까지 인도의 남동진한 불상은 세일론(현재의 스리랑카)라오스 캄보디아 버마 태국 월남 으로 지나
오게 될때의 특징은 그 지역의 살고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 간다는 것이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실존 당시의 실제 모습은 두가지가 있는데 대영 박물관에 있는 석존 상호는 눈섭이
짙고 상꺼풀이 선명하고 아주 미남형의 인도인의 전형적인 미남형의 상호이라 실제 석가모니 부처님
의 상호로 보기힘들고 가장 현실적이고 상호도 당시 부처의 나라인 샤카족이 살던 가비라국 사람들은
인도의 전통적인 높은 코 와 짙은 검은 눈썹과 두꺼운 쌍거풀 보다는 현재의 네팔사람들과 의상호와
중간정도의 상호 들이였다.
부처님 재세시 10대 제자중에서 설법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는 부루나 다라미자 尊者가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그 초상화를 기준으로 상호를 보게되면 굵은선
의 부드러운 적당한 곱슬 머리에 수염도 적당히 있고 이마나 안면의 선이 아주 서구도 아니고 우리쪽
의 몽골리언 모습에 가까운 티베트인들과 의 중간 형이며 어깨 골격도 넓고 강하며 석굴암의 부처님
정도의 비율의 골격에 인간적인 굴곡이 강한 아주 호남형으로 앞가슴도 적당히 넓게 벌어진 모습 등으로
보아 키도 약 1m87cm~1m90cm정도로 짐작되는 상호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상화가 실제로 있다는 점에 놀라는데 위의 그림이
대영박물관에 있는 부루나 다라미자 존자가 그린 그림이다.>
2.석가모니의 혈통
석가족은 현재 네팔(티벳남부) 포탈라카국 감자대왕의 후예로서 지금의 네팔 타리이지방 카필라국에
정착하였고 코살라국의 주인이 되었으며 카필라국의 수도난다(정반왕)는 마야부인에게서 석가를
낳았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과 藁離族은 동쪽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것으로 추정하는 석존몽고인설을 주장하였다.
마야부인은 常盤大定의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코리족(藁離族,九黎族)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정한 모습은 그리이스의 화풍이 들어간 아테네식도 아니고 후에 전통을 이어간
아리안(현재의 이란 및 인도의 종족)계통의 심목고비가 아닌 몽고계 인것이 확실하다.왜냐하면 현대
네팔에 샤카족이라 하여 석가모니의 후손들이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
다.
3. 원전인용
곽박이 말한다.
[浮 屠 出 此 國 中 也 。 晉 大 興 四年 , 天 竺 胡 王 獻 珍 寶 。]
부도출차국중야 진대흥사년 천축호왕헌진보
부도(浮屠)가 이 나라(조선)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4년에 천독(天竺=천축)국의 호왕(胡王)이 진귀한 보물을 선물했다.
곽박이 [호왕(胡王)]이라는 표현을 쓴것을 보면 곽박은 고조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호(胡)]라는 지명은 [만주]이기 때문.(고조선이 東胡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다)
원래 대표적인 [호인(胡人-만주의 주인)은 고조선,고구려, 발해 등 한민족
곽박은 [천축호왕(天竺胡王)]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진의 곽박이 고조선의 위치가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것.
진(晉)나라에 선물을 주었다는 [천축호왕(天竺胡王)]은 [고구려왕]으로 추정.
당시 2-3세기 만주지역의 대표는 고구려였기 때문.
그리고 곽박은 [부도(浮屠)가 이 나라(조선)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부도(浮屠)란 원래 부다(붓다=부처), 불교를 뜻하는 말.
중국의 最古역사서 산해경에는 `붓다는 고조선 사람으로 천독에서 산다' 천독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
이 분분하다 , 천축국이라느니 혹은 인간교화의 뜻이라느니 등등...확실한 것은 2,500여년전에 오신
붓다는 아리안이 아니라 동양인 즉 몽골로이드이었다는 것,그리고 그 전통이 고승의 입적후 남기는
浮屠에 남아있으며 부도의 중국음차는 바로 <불타= 붓다=부도>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