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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77) 何得美人兮 願從與遊 (하득미인혜 원종여유 : 그리운 님을 어디서 만나 , 받들어 모시고 놀 것인가)
한신은 <치속 도위>라는 관리로 따분하게 살아가자니 마음이 울적해 견딜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장량의 <증표>를 내보이면 한왕의 대우가 대번에 달라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않은 한왕에게, 이제 와서 증표를 내보인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원수가 되어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지 못할 바에는, 사내 대장부가 무엇 때문에 구차스럽게 이런 산속에서 썩어날 것인가 ?)
한신은 몇 날 몇 밤을 두고 혼자 고민을 하다가 어느 날 아침 말을 타고 집을 나서며, 수행병(隨行兵)에게 이렇게 말했다.
"며칠 동안 먼 곳에 좀 다녀올 테니, 너는 따라오지 말고 집에 있거라."
한신은 운명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 중원(中原)으로 떠나려는 것이었다.
한신이 길을 떠난 지 두어 시간 후에, 소하는 한신이 행방 불명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하여 부리나케 한신의 집으로 달려와 보니, 한신은 이미 집에 없지 않은가.
(내가 염려하던 불상사가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구나 ! )
소하는 가슴을 치며 탄식하다가,
"한 대인이 오늘 아침 언제쯤 어느 방향으로 떠나가더냐 ?"
하고 집사(執事)에게 물으니,
"오늘 아침 인시(寅時 :아침 3시~5시 사이)에 동문에서 말을 타고 나가셨습니다."
소하는 그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동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말을 막 올라 타려고 보니, 동문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시(詩)가 한 수 나붙어 있었다.
...
日未明兮 小星競光 (일미명혜 소성경광)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작은 별이 빛을 다투고
運未遇兮 才能晦藏 (운미우혜 재능회장)
아직 운을 만나지 못해 재능은 숨겨져 있고
霜蹄견滯兮 身奇殊鄕 (상제견체혜 신기수향)
준마가 다리를 절어서 몸을 타향에 기탁하네
龍泉매沒兮 差鈍無鋼 (용천매몰혜 차둔무강)
용천검이 묻혔으니 쓸모없는 무쇠가 되었고
芝生幽谷兮 爲誰與採 (지생유곡혜 위수여채)
지초가 깊은 골에 그윽함은 누구와 더불어 캘 것인가
蘭長深林兮 孰含其香 (난장심임혜 숙함기향)
난초가 깊은 숲속에서 자라니 그 향기를 누가 맡을수 있겠나
何得美人兮 願從與遊 (하득미인혜 원종여유)
그리운 님을 어디서 만나 받들어 모시고 놀 것인가
同心斷金兮 爲鸞爲鳳 (동심단금혜 위난위봉)
마음과 신의를 같이해 난새가 되고 봉황이 될 것인가.
...
소하는 그 시를 읽어 보고 가슴이 저려 오는 비애를 느꼈다.
단순한 무장으로만 알고 있었던 한신이 시문(詩文)에서 조차 이처럼 탁월한 재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구구 절절에 나타난 한신의 애타는 심정이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한신같이 뛰어난 인물을 그냥 도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소하는 조복(朝服)을 입은 채로 한신의 뒤를 맹렬히 쫒기 시작하였다.
중문을 나서면 중원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소하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 가며, 자꾸만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한낮이 기울도록 달려 갔지만, 한신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장수 하나가 백마를 타고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햇소 ?"
초부(樵夫 :나뭇꾼)가 대답한다.
"보았지요. 한참 전에 이곳을 지나 갔으니까, 지금쯤은 6,70리도 더 갔을 것이오."
소하는 점심도 굶은 채 계속해 한신의 뒤를 쫒았다.
그러나 해가 저물 때까지 말을 달려, 한계령(寒溪嶺) 골짜기 까지 이르러서도 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때는 7월 중순이건만, 산속의 밤은 가을같이 차갑고, 장마로 물이 불어 계곡을 건널 수가 없었다.
때마침 달이 솟아올라서, 달빛으로 건너갈 길을 찾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문득 <호호호호>하는 말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옳다, 됐다 ! 한신은 길이 막혀 이 부근 어디엔가 숨어있는게로다 ! )
소하는 그런 생각이 들자, 높은 바위에 올라서서 두 손을 입에 모아대고 외쳐댔다.
"한장군은 내게 한마디 인사도 없이 도망을 왔으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소. 내가 이곳까지 쫒아왔으니 속히 나와주시오."
목이 터져라 세 번 네 번 애타게 외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더 외쳐대는 가운데, 문득 어디선가 말이 달려오는 기척이 들려온다.
(옳지 ! 이제야 한신이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구나 ! )
소하가 크게 기뻐하며 인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더니,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한신이 아니라 등공(騰公) 하후영(夏侯英)이 아닌가 ?
소하는 깜짝 놀라며,
"아니, 등공이 여기 웬일이오 ?"
하후영이 대답한다.
"승상께서 한왕에게 환멸을 느끼시고 중원으로 도망을 가신다기에, 저도 승상과 운명을 같이하고자 쫒아오는 길이옵니다. 승상께서는 어디로 가시든지,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소하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내가 한왕을 배반하고 도망을 가다뇨 ?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몸은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한왕을 배반할 사람이 아니오."
"한왕을 배반할 뜻이 없으시다면, 무엇 때문에 온 종일 말을 달려 , 한밤중에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
"내가 한밤중에 여기까지 온 것도 한왕에게 충성을 다하려는 것 때문이었소. 한신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없이는 한왕께서 천하를 도모할 수가 없으시겠는데, 한신이 도망을 쳤기에 그를 찾기위해 여기까지 쫒아온 것이오."
그때 한신은 불어난 물에 막혀 계곡을 건너지 못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숲속에 숨어 있다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소상히 듣고 크게 감동하였다.
(과연, 소하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충신이로구나 ! 저런 충신을 재상으로 쓰고 있는 한왕의 장래는 반드시 영광스러우리라 ! )
한신은 숲속에 숨어서, 소하의 인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재상에 오른 사람들은 흔히 , 영화를 오래누리려고 어진 사람들을 시기하고 헐뜯기가 보통이 아니던가 ?
그런데 소하 승상은 나를 대원수로 발탁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여 애를 써올 뿐만 아니라,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조복을 입은 채로 여기까지 쫒아오셨으니, 세상에 이처럼 고매하고 믿을 만한 인격자가 어디 있더란 말이냐 ?
옛글에 <사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 내 비록 대원수가 못 되는 한이 있어도, 소하 승상 같은 인격자를 배반하고 도망갈 수는 없는 일이다 ! )
이렇게 결심한 한신은 숲속에서 달려나와 소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
"승상 각하 ! 제가 각하의 고귀하신 뜻을 몰라 뵙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소하는 불현듯 나타난 한신의 말을 듣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감격 어린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씀을 ! 장군을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있는 것이오. 백년 지기와 다름 없는 우리 두 사람이 마음을 모으면 무슨 일이든 불가능하겠소 ? 기왕지사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어서 나와 함께 돌아가십시다."
한신은 감격의 눈물을 지으며, 소하와 함께 귀로에 올랐다.
한편, 조정에서는 승상 소하가 별안간 행방 불명이 되어 버린 사실을 놓고 야단 법석이 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소문도 돌았다.
(대왕 전하가 승상의 조언을 들어주지 않더니만, 결국은 한신과 함께, 도망을 가버렸구나 ! )
이런 뒷공론을 듣자 , 한왕은 크게 노하며 말했다.
"승상 소하는 풍패(豊沛)에 있을 때부터 나와 생사를 같이해 오면서 의병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던 그가 느닺없이 한신과 함께 도망을 갔으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 소하와 나는 공적으로는 군신지간이지만, 사적으로는 형제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러던 그가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갔으니, 이제부터 나는 누구를 믿고 살아갈 것인가 ! "
한왕은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저녁 때의 일이었다.
금문(禁門)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시종이 급히 달려 들어오며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
"대왕 전하 ! 승상께서 한신과 함께 지금 돌아오고 계시옵니다."
"한왕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노여움을 금할 길이 없어, 금문 밖으로 달려나가 소하를 나무란다."
"경은 나를 배반하고 도망을 갔다가 , 이제서야 돌아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
소하가 국궁 배례하며 아뢴다.
"대왕의 과분하신 은총을 입고 있는 신이, 어찌 도망을 갈 수 있으오리까 ? 다만 도망을 가는 한신을 붙잡아 오려고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웠을 뿐이옵니다."
그러나 한왕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경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지금까지 나의 휘하에서 도망을 가 버린 장수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소. 그들이 도망갔을 때에는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유독 한신만은 붙잡아 오려고 했다니, 그런 모순된 말씀이 어디있단 말이오 ?"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지금까지 도망간 장수들은 모두가 대단치 않았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애써 붙잡아 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옵니다.
그러나 한신의 경우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다르옵니다. 한신은 천하에 둘이 있을 수 없는 <국가 무쌍(國家無雙)>의 인물입니다. 대왕께서 언제까지나 이곳 파촉에 머물러 계시려면, 한신 같은 인물은 필요치 않으실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항우를 정벌하고 천하를 도모하시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한신만은 반드시 붙잡아 두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그에게 군사 전권을 맡겨서 천하를 도모 하셔야 하옵니다.
이런 신의 당부를 대왕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소신도 오늘로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나 짓겠습니다."
소하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태도로 나오자, 옆에 있던 하후영이 한왕에게 간한다.
"대왕 전하 ! 승상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승상의 말씀대로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해 주시면 어떠하시겠습니까 ?"
그러자 한왕은 여전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짐작컨대, 경들은 한신의 언변에 현혹되어 그를 큰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대원수를 그런 식으로 임명해서는 안 되오.
대원수란 일국의 흥망을 좌우하는 자리인 만큼, 그 자리를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는 말이오. 대원수가 되려면, 적어도 깊은 경륜도 있어야 하고 병법과 전술에도 능통해야 하는 법이오.
만약 우리의 통수권(統帥權)을 한신에게 내맡겼다가 아차 실수하는 날이면, 우리들은 모두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한신으로 말하면, 자기 부모의 시신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위인이오.
게다가 그는 항우를 3년이 넘도록 섬겨 오면서 겨우 <집극랑> 벼슬밖에 지내지 못한 사람이오.
승상은 그러한 그를 어떻게 일국의 대원수로 등용해 달라고 고집하시오 ?"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대왕께서는 보이는 조건만으로 판단하지 마시옵고, 한신의 무서운 의지를 함께 생각해 주시옵소서.
일찍이 대성 공자(大聖孔子)는 <상갓집 개>라는 모욕을 당해 가면서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로 유세(遊說: 설득)를 다닌 일이 있었사온데, 그것은 공자가 무능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거리의 무뢰한들에게 조롱을 당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사오나, 그런 수모를 당한 것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한신이 거지꼴을 하고 다니며 시정배에게 수모를 당한 것은 때를 못 만났기 때문이었으니, 그 점을 거듭 고려해 주시옵소서."
한왕은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반문한다.
"그렇다면 한 마디만 더 묻겠소. 한신이 항우를 3년이 넘도록 섬겨 오면서, 겨우 집극랑 밖에 지내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소 ?"
소하가 다시 아뢴다.
"대왕 전하 ! 제아무리 명마(名馬)라도 백락(伯樂) 같은 명기수(名騎手)를 만나지 못하면, 한평생 노마(駑馬: 둔한 말)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되는 법이옵니다.
사람의 경우도 그와 같아서 한신은 천하의 기재이면서도, 항우라는 주인을 잘못 만났기 때문에, <집극랑>에 머물러 있게 되었던 것이옵니다.
<승상>이라는 직책이 어진 사람을 구해 오는데 있는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대왕께서는 신이 한신의 변론에 현혹되어 그를 과분하게 평가하고 있는 줄로 알고 계시오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한신은 천 년에 한 사람쯤 있을까말까 한, 대원수 재목이기에, 이처럼 간곡히 말씀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소하가 이렇게 까지 말을 하였으나, 한왕은 한신을 대원수로 등용할 생각이 없었던지, 얼른 이렇게 대답을 돌려 버린다.
"날이 저물었으니, 그 애기는 이만 해 두고, 내일 아침 조회(朝會)에서 다시 논의해 보기로 합시다."
소하가 퇴궐하여 한신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니, 한신이 말한다.
"승상께서 아무리 애써 주셔도, 제가 대원수로 기용될 가망은 거의 없는 것 같사옵니다."
소하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힘차게 흔든다.
"무슨 소리 ! 만약에 귀공을 대원수로 발탁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관직을 박차고 낙향해 버릴 생각이오."
한신은 소하의 동지적 의리에 크게 감동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음이 산란하여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한밤중에 소하로부터 <곧 와 달라>는 전갈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달려와 보니, 소하가 묻는다.
"귀공이 초나라에 있을 때, 범증은 귀공을 높이 써주도록 항우에게 여러 차례 진언(進言)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귀공은 범증에게 어떻게 보였기에, 그처럼 높게 평가하게 된 것이오 ?"
"한신은 지난날의 일들을 신중이 회고해 보다가 대답한다.
"초나라에는 명장이라는 인물들이 많기는 하오나, 제가 존경하는 분은 오직 범증 군사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범증 군사를 만나기만 하면, <만약 군사께서 항왕을 받들고 천하를 통일하시려거든, 지금 유방을 죽여 버리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군사의 뜻대로 천하를 통일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여러 차례 말씀 올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범증 군사는 그때부터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때에 항왕이 범증 군사의 진언대로 저를 높이 써주기만 했다면, 저는 오늘날 이곳으로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소하는 한신의 자신에 넘치는 판단을 듣고 탄복하며,
"만약 귀공이 장량 선생의 증표를 가지고 왔더라면, 지금까지와 같은 노력이 없더라도 , 대번에 대원수로 발탁이 될 수가 있었을 터인데...."
하고 혼자말로 탄식해 마지않았다.
한신은 자기를 위해 이처럼 애써 주는 소하를 보자, 장량에게서 받은 증표를 끝까지 숨겨 두고 있기가 몹시 괴로웠다.
그리하여 머리를 수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승상 각하 ! 실상인즉, 저는 장량 선생께서 주신 증표를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 소리에 소하는 까무러치 듯 놀란다.
"뭐요 ? 장량 선생이 주신 증표를 가지고 있다고 .... ?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아직까지 숨겨 두고 있었소 ?"
한신은 품속에 간직해 두었던 증표를 소하에게 말없이 내밀었다. 소하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반 조각과 한신에게서 받은 반 조각의 증표를 서로 맞춰 보았다. 그러자 두 개의 조각은 한개 처럼 감쪽같이 꼭 맞는 것이었다.
소하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이런 증표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여태까지 숨겨 두고 있었느냐 말이오 ? "
하고 한신을 나무란다.
한신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한다.
"제가 제대로 된 실력이 검증되기 전에, 남의 소개로 발탁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량 선생께서 주신 증표를 일부러 숨겨 왔던 것이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역시, 한 장군다운 생각이셨구려. 그렇다면 그토록 숨겨 오던 증표를 지금은 왜 내놓으셨소 ?"
하고 캐뭍는다.
한신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이 이상 숨기는 것은, 의리에 벗어나는 처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뇨 ? 도대체 무슨 의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란 말씀이오 ?"
"장량 선생의 증표를 내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승상께서는 저를 대원수의 재목이라고 독자적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제게 있어서, 승상은 그처럼 고마운 어른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감히 승상을 끝까지 속일 수 있으오리까. 그래서 장량 선생이 주신 증표를 이제야 내놓게 된 것이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감명을 받고, 한신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증표를 진작 내보였던들 모든 문제는 옛날에 해결되었을 텐데 그것을 끝까지 숨겨 두고, 나를 골탕을 먹였단 말이오 ?"
한신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가 그 증표를 처음부터 내놓았다면, 승상께서도 저의 재능을 지금처럼 깊이 인정해 주지는 않으셨을 것이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장군은 증표 하나를 내보이는 데도 이처럼 계략이 깊으시니, 누가 감히 장군을 당해 낼 수 있겠소.
하하하 ..! 아무튼 이제는 귀공이 대원수로 발탁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니까, 우리끼리나마 축하주부터 나누기로 합시다."
그리고 소하는 주안상을 성대하게 차려 내오도록 명했다.
초한지(楚漢誌) (78) 고천문(告天文 : 진정코 바라는 바는 하늘에 호소하라)
다음날 아침.
소하는 단신으로 입궐하여 어전에 부복하고,
"대왕 전하 ! 이제 알고 보니, 한신은 장량 선생께서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하고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상주(上奏)하였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뭐요 ? 한신은 장량 선생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구요 , 그게 사실이란 말이오 ?"
"예, 그러하옵니다. 그가 가져 온 증표와 신이 간직하고 있던 증표가 여기 있사온데, 두 개의 증표를 맞춰 보니 조금도 틀림이 없사옵니다."
한왕은 소하가 내놓은 두 개의 증표를 손수 맞춰 보고 나서,
"증표가 이렇게도 꼭 들어맞으니, 한신은 장량 선생께서 보내신 사람이 틀림없구려. 승상이나 장량 선생은 한신이란 사람을 대번에 알아 보셨는데, 나는 그의 인품을 끝까지 몰라 보았으니, 진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오.
두 분이 이미 천거하셨으니, 그렇다면 오늘이라도 한신에게 대원수의 직책을 맡기기로 합시다."
그러나 소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신은 워낙 자존심이 강하고 예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정중한 의식 절차를 밟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원수로 임명하시면 ,그는 결코 오래 머물러 있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대원수로 임명하여 녹(祿)을 후하게 주면 그만이지, 그 이상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오 ?"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대왕께서는 대장들 다루기를 어린아이들 다루듯이 해오셨습니다. 한신을 그런 식으로 다른 대장들 처럼 다루신다면, 녹을 아무리 후하게 주신다고 하여도 그는 결코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옵니다."
"음 ....., 나에게 그런 잘못이 있었던가요 ? 그렇다면 승상이 지적하신 잘못을 고쳐가기로 하겠소.
그럼, 어떤 절차를 밟아서 임명하면 좋을 지, 승상은 기탄없이 의견을 말씀해 주시오."
잘못을 알면 솔직히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시정해 나가는 것이 한왕의 특징이었다.
"대왕 전하 !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소하는 세 번 숙배(肅拜)하고 나서,
"한신을 대원수로 맞아들이시려면, 대왕께서 친히 목욕 재계를 하시고, 마치 그 옛날 황제(黃帝)가 풍후(風后)를 맞아들이고, 무왕(武王)이 태공망(太公望)을 맞아들인 것처럼, 제단을 쌓고, 길일을 택하여, 성대한 의식을 베풀어 임명하셔야 하옵니다."
"승상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신은 과연 거물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가 보구려, 그렇다면 제단을 어떤 규모로 쌓는 것이 좋을지, 승상이 설계도를 직접 만들어 보아 주시오."
그로부터 며칠 후, 소하는 <제단 설계도>를 손수 작성하여 한왕을 찾아 왔는데, 그 규모는 방대하고도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우선, 제단의 높이는 30장(丈)에 이르고 그 넓이는 3천 평이나 되었으며, 제상(祭床) 좌우에는 정병(精兵) 50명이 각각 부월(斧鉞 : 도끼)을 들고 정렬(整列)해 있도록 하고,
동서남북 사방으로는 푸른옷에 푸른 깃발을, 붉은 옷에 붉은 깃발을, 햐얀 옷에 하얀 깃발을, 검은 옷에 검은 깃발을 각각 들고 서있는 100명의 의장병(儀杖兵)을 배치하는 규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 한왕과 한신이 마주서 있는 용상(龍床) 좌우에는 문무 백관들이 엄숙히 도열해 있는 가운데 삼현 육각(三絃六角 :악기)을 은은히 연주하게 하는 제수 의식(除授儀式)이었다.
한왕은 <제단 설계도>를 자세히 검토해 보고 나서, 승상에게 묻는다.
"대원수를 임명하는 절차가 이렇게까지 거창하고도 복잡하게 해야 하오 ?"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일국의 운명은 오로지 대원수의 활약에 달려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이런 의식은 장엄할수록 국가의 이익이 되는 것이옵니다."
"승상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이대로 합시다."
한왕은 대장 관영을 축단 도감(築壇都監)에 임명하여, 설계도를 내주며 명한다.
"기한을 두 달 줄 테니, 그동안에 이 설계도대로 제단을 축조하도록 하오."
관영이 명령을 받고 물러가자, 소하가 한왕에게 다시 아뢴다.
"대왕 전하 ! 아뢰옵기 항공하오나, 제단 공사가 완공된 뒤에 대원수의 임명식을 거행하기 직전까지는, 한신을 대원수로 임명하는 사실을 일체 비밀에 붙여 두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알겠소. 나도 진작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대원수를 임명하기 위해 제단을 축조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장들 간에는 하마평(下馬評)이 요란스럽게 떠돌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한왕과 수많은 전투에서 생사 고락을 같이해 오며 많은 공로를 세워 온 번쾌, 주발, 조참 등은 자기가 대원수로 승진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은근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라의 병권(兵權)을 총지휘하는 대원수의 자리를 설마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넘겨 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축단 공사가 끝나자, 한왕은 승상을 불렀다.
"제단이 준공되었으니, 이제는 임명식을 거행하도록 합시다."
소하가 아뢴다.
"날자는 이미 택일하였사옵니다. 그날 아침은 백성들에게 관도(官道)를 깨끗하게 쓸게 하고, 병사들도 착오가 없도록 출동 준비를 시켜 놓도록 하겠습니다.
한신은 지금 영내(營內)에 기거하고 있사오니, 그날에는 대왕께서 문무 백관들을 거느리시고 영내까지 한신을 직접 영접하러 가 주시도록 하시옵소서."
한왕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노기를 띠며 나무란다.
"아니, 대왕인 내가 한신을 직접 영접하러 가야 한다는 말씀이오 ?"
한왕으로서는 당연한 노여움이었다.신하가 될 사람을 대왕이 직접 영접하러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하는 침착하게 대답한다.
"물론 대왕께서 신하가 될 사람을 친히 영접하러 가신다는 것은 예절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되실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옛날의 성군(聖君)들도 현인을 맞아 올 때에는 모두들 그러하셨습니다. 그 옛날 무왕이 태공망을 맞아 오실 때에도 위수(渭水)를 직접 건너가 친히 영접해 오셨던 것입니다.
현사들이란, 워낙 기개가 도도하기 때문에 이처럼 예우해 주지 않으면, 처음부터 따라오려고 하지 않는 법이옵니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구려. 그러면 승상의 말씀대로 내가 직접 영접하도록 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마침내 그날이 되자, 한왕은 예복을 갖춘 뒤에 문무 백관들을 거느리고 한신이 거처하는 영내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다.
그리하여 한신을 수레에 태워 가지고 제단으로 향하니, 좌우 길가에서는 깃발이 펄럭이는데, 문관(文官)들은 아관(峨冠: 긴 모양의 쓸 것)을 쓰고 두 손을 읍하며 길가 좌측에 도열하였고,
무관(武官)들은 갑옷에 투구를 갖추고 , 한 손에는 장창을 움켜 잡고 우측에 도열해 있었다.
그런데 문무 백관들은 한왕이 대대적인 격식을 차려 ,대원수로 모셔 오는 인물이 다른 사람이 아닌 한신임을 알아보고, 모두들 기절 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더구나 한왕을 배행해 왔던 번쾌는 신임 대원수가 한신임을 알자, 옆에 따라오는 주발에게 노골적인 불평을 털어 놓았다.
"우리들은 오늘날까지 천신 만고 끝에 주상을 받들어 모셔 왔는데, 저런 거지 같은 놈을 대원수로 모셔 오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모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대장부로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다."
번쾌는 이렇게 말하다가 별안간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한왕과 한신이 동승하고 있는 어가(御駕) 앞으로 달려나가,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울분에 넘친 어조로 외쳤다.
"대왕 전하 ! 신 번쾌는 , 대왕 전하께 긴급히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대왕께서는 청허(聽許)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외치는 번쾌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한왕은 예기치 못했던 돌발 사태에 적이 놀랐다.
"번쾌 장군은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러시오. 어서 말씀을 해보시오."
번쾌는 수레 위에 앉아 있는 한신을 노려보며 볼멘 목소리로 외치듯 말한다.
"대왕 전하께옵서 대원수로 발탁하시려는 한신이라는 자로 말하면, 어려서는 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초나라에서는 겨우 <집극랑>밖에 되지 못한 보잘것없는 위인이옵니다.
그자가 우리 나라에 와 가지고 감언 이설(甘言利說)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아무런 공로도 없는 자를 대왕께서 친히 모셔다가 대원수로 등용하신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대왕 전하와 생사 고락을 같이해 오던 공신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것은 말할 것도 없사옵고, 항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를 얼마나 업신여길 것이옵니까 !
이 일은 국가의 흥망과 직결되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오니, 대왕께서는 거듭 통촉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것은 누가 들어도 당연한 불평이었다.
그러나 성토의 대상이 된 한신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수레 위에 의연히 앉아 있었다.
한왕은 창졸간에 뭐라고 답변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어벙하게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러자 승상 소하가 앞으로 달려나와, 번쾌를 굽어보며 큰소리로 꾸짖는다.
"번쾌 장군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그대들은 창검으로 적을 찔러 죽이는 재주는 있을지 몰라도, 한신 장군처럼 지략으로써 적을 섬멸시킬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이오.
쓸데없는 불평으로 민심을 현혹하려 하지말고, 이제부터는 한 장군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오.
승상인 내가 한 장군을 대원수로 천거하여 이미 결정한 일인데, 그대는 조그만 공로를 믿고, 대왕 전하앞으로 달려나와 불평을 마음대로 떠들어대고 있으니,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그리고 소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한왕에게 품한다.
"대왕 전하 ! 번쾌를 포박하여 하옥시켜 두었다가 의식이 끝나는 대로 참형에 처하여 국법의 지엄함을 밝혀 주시옵소서."
옆에 있던 하후영도 이어서 아뢴다.
"대왕 전하 ! 번쾌는 대왕의 행차를 문란케 했으므로, 마땅히 벌을 내리셔야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번쾌를 아끼시는 마음에서 벌하지 않으시면, 군율(軍律)이 어지러워져서, 장차 항우와 싸울 수가 없게 될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며 즉석에서 명령을 내린다.
"번쾌를 당장 포박하여 하옥시키라. 그의 죄는 후일에 엄중히 다스리기로 하리라."
번쾌는 그 자리에서 포박을 당하여 하옥되었고, 일행은 제단을 향하여 다시 행진하였다.
이렇게 번쾌를 하옥시킴으로서 행렬은 새삼스럽게 엄숙해졌다.
이윽고 일행이 제단에 당도하니, 좌우에 문무 백관들이 도열하여 한왕과 한신을 정중하게 맞이하였고, 동서 사방에 늘어서 있던 의장병들은 철포(鐵砲)를 세 번 쏘아 예우를 갖춘다.
한왕은 용상(龍床)앞에 서고 , 한신은 왕을 향하여 읍하고 마주서자, 삼현 육각이 유량하게 울려퍼지며 대원수의 임명식은 시작되었다.
태사관(太史官)이 한왕을 대신하여, 아래와 같은 고천문(告天文)을 낭독한다.
...
"대한 원년 중추 무인삭 병자일 (大漢元年 仲秋 戊寅朔 丙子日)에 한왕 유방(漢王 劉邦)은 천신(天神)을 비롯하여 명산 대천(名山大川)의 제신(諸神)에게 삼가 고하니,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오호, 하늘은 중생(衆生)을 낳아 주시되 목자(牧者)로 하여금 저희들을 다스려 나가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선정(善政)을 베풀지 아니 하면, 백성들은 도탄 속에서 허덕이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초패왕 항우는 진제(秦帝)를 정벌한 뒤에는 왕위를 찬탈함과 동시에 , 초회왕(楚懷王)을 시해하고, 죄없는 군사들을 무수히 살육했으니, 이는 진실로 천인이 공노할 중죄를 범한 것이옵니다.
이에 한왕 유방은 천신의 거룩하신 뜻을 받들고자, 의기(義旗)를 높이 받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신을 파초 대원수로 삼아 항우를 토벌함으로써, 도탄 속에서 허덕이는 만백성을 구출하여, 천하의 기틀을 바로잡고자 하옵니다.
신령하신 천지 신명께서는 이러한 저의 결정을 친히 굽어 살피사, 많은 보우(保佑)를 내려주시옵기를 한왕 유방은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삼가 바라옵니다."
...
한왕의 고천문 대독이 끝나자, 하후영은 한신에게 대원수의 인수(印綏)를 비롯하여, 활과 화살등을 내려 주며 말한다.
"대왕의 어명에 의하여, 대원수의 인수를 내리오. 궁시(弓矢)도 아울러 하사하는 터이니, 이것으로써 불의를 정벌함에 추호의 착오도 없도록 하시오."
한신은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한 뒤에, 인수와 궁시를 우러러 받들고 맹세한다.
"신 한신은, 대왕 전하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천지 신명께 굳게 맹세하옵나이다."
그러나 대원수의 임명식은 그것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장소를 달리해서, 승상 소하에게 대한 서약식(誓約式)이 있어야 했다.
한신은 인례관(引禮官)의 인도로 서약식장에 도착하자, 승상 소하는 서쪽을 향하여 서고, 한신은 소하를 향하여 서서, 서약문을 한신 자신이 낭독하였다.
서약문 낭독이 끝나자, 승상 소하가 한신에게 철부(鐵斧 :쇠도끼)를 내려 주며 말한다.
"어명에 의하여 장군에게 <정의의 철부>를 내리오. 이제부터는 천의(天意)로써 잔학 무도한 무리들을 가차없이 정벌하여, 천하 만민이 홍복을 고루 누릴 수 있도록 신명을 다해 노력하시오."
임명식이 끝난 그날 밤, 한왕은 한신을 따로 불러 축하연을 베풀어 주며 말한다.
"오늘은 장군을 대원수로 임명하였으니, 이제부터는 파초 대원수로서 막중한 임무를 유감없이 수행하기 바라오.
모든 통솔권을 장군에게 맡길 터인즉, 허(虛)를 보거든 지체 없이 찌르고, 실(實)을 보거든 신중히 머무르며, 군사가 많음을 믿고 함부로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념해 주기 바라오."
한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신은 어의(御意)를 받들어, 충성을 다하겠사옵나이다."
"고마우신 말씀이오. 수명(授命)을 무겁게 생각하되, 몸이 귀하다고 남을 업신여기지 말 것이며, 매사를 독단으로 처리하지 말고, 중지(衆智)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시오.
특별히 부탁할 것은 고통과 즐거움은 언제든지 병사(兵士)들과 같이해 주기를 바라오. 최고 지휘자가 솔선하여 이런 생활을 한다면, 그 군사들은 생사를 초월한 강군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대왕 전하의 지우(知遇)를 받았사온데 신이 충성을 다하는 데 어찌 신명을 아끼오리까 !"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승상은 장군의 경륜을 극구 칭찬하셨는데, 나 역시 장군의 경륜을 직접 한번 들어 보고 싶소이다."
하고 말했다.
한신은 자세를 바로잡고 아뢴다.
"대왕께서는 어차피 한번은 항우와 자웅(雌雄:숫곰과 암곰의 대결)을 결하셔야 하실 형편이온데, 매우 죄송스러운 말씀이오나, 대왕 전하의 용맹에 비하면 항우 따위는 결코 두려워할 상대가 못 되는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세상에서는 항우를 천하 제일의 으뜸 가는 영웅이라고 일러 오는데, 장군은 항우를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라고 하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
한신이 대답한다.
"물론 대왕께서 항우와 직접 힘으로 싸우시게 되오면, 대왕께서는 항우를 당해 내시기가 매우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그러나 신은 일찍이 항우를 섬겨 왔던 관계로, 그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항우가 한번 호령하면 만인이 벌벌 떨게 되는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진 사람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용기는 필부지용(匹夫之勇)에 불과합니다.
그는 부하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논공 행상조차 베풀 줄을 모르니, 그의 사랑이란 부인지인(婦人之仁: 마누라만 사랑할 줄 안다)에 불과한 것이옵니다.
게다가 항우는 천혜의 요소인 함양을 버리고 팽성에 도읍한 점이라든가, 의제(義帝)를 시해함으로써, 천하의 인심을 잃어버린 점등... 어느 하나도 존경할 만한 인물이 못 되옵니다.
그와는 반대로 대왕께서는 함양에 입성하셨을 때, <약법삼장>을 널리 공포하시어 민심을 간단히 한몸에 모으셨으니, 백성들 어느 누구가 대왕을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옵니까.
게다가 우리 군사들은 모두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열의에 넘쳐 있으니, 어느 누구라도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한신의 열화같은 변론을 듣고, 그동안 한신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후회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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