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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음모
근대시에서 돌아오는 차 안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어서 최복수는 지프의 속력을 줄였다.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와이퍼가 아래쪽으로 내려간 순간에는 이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세지는 것이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으나 벌써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한이 손바닥으로 유리창 안쪽에 덮인 습기를 닦아냈다. 근대시와 타운 사이에 위치한 도로인 탓에 가끔씩 근대마크를 붙인 트럭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갈 뿐 차량의 통행도 드물어진 시간이었다.
「오늘이 며칠이냐?」
문득 뒷자리에 앉은 김상철이 물었으므로 최복수는 긴장했다
그러나 대답은 이한의 몫이다.
「예, 11월 1일 입니다.」
반쯤 몸을 돌린 이한이 대답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20일이 되었구만.」
그러자 이한이 그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는 몸을 굳혔다. 황윤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중국인 거리로 그녀를 찾아 나서려던 그는 김상철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20일이 지난 것이다.
「눈이 꽤 오는구만.」
김상철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오늘 같은 날은 공사가 일찍 끝날 테니 초저녁부터 가게에 손님들이 몰리겠다.」
「어제 직업소개소의 왕씨라는 놈을 잡아서 창고에 가둬두었다.」
「그레고리가 그놈한테서 자백을 받아냈는데 황윤이는 색시방을 도망쳐 나오다가 잡혔다는 거다. 그것이 일주일쯤 전 일이라는데 황윤이의 생사는 알 수가 없다.」
지프는 마악 타운의 입구를 지나 위쪽으로 가고 있었다. 김상철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이한은 몸을 돌렸다. 이제 삼합회가 타운의 중국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타운을 혼란에 빠뜨렸던 지난번의 연쇄사건도 모두 그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나서 전쟁의 위기는 잠시 가라앉았다. 양대 세력인 마피아와 북한계가 모두 삼합회 농간에 놀아난 것이다.
삼합회는 자신들의 피는 한 방울도 홀리지 않고 별다른 투자도 하지 않은 채 타운의 3대 세력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환강부에서 중국인 거리로 위생점검을 나갈 것이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거리 안쪽의 민가까지 샅샅이 점검할 거야. 중국인 거주지는 위생상태가 나쁘다고 소문이 나 있거든.」
응접실로 들어선 김상철은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걸쳐놓고는 탁자 위에 있는 보드카 병을 들었다. 페치카에서 장작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방 안은 훈훈했다. 오늘은 근대시에 들러 유장석과 간부들을 만나고 돌아온 참이었다. 거의 매일 이곳에 찾아왔던 강미현은 며칠 전에 강회장을 따라 서울로 돌아갔다. 소파에 앉은 김상철은 술병을 기울여 두어 모금을 삼켰다. 짜릿한 알코올이 식도를 흘러 위장에 가라앉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방문이 열리더니 부하가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곧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30대 쯤으로 웃음을 띠운 환한 얼굴이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박기동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허리를 깊게 꺾으면서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박 선생님.」
그의 손을 잡으면서 김상철도 반가운 듯 말했다.
「바빠서 이제야 뵙습니다. 진즉 뵈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신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 송길수를 찾아와 김상철과의 면담을 요청해왔던 것이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소파에 마주앉았다.
「타운 호텔에 묵고 계신다구요?」
김상철이 묻자 박기동이 다시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예, 꽤 오래 되었습니다.」
「무역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본래 중국에 신발공장을 갖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만 두었습니다.」
요즘 들어 거래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김상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이 무역업자들로 개발에 필요한 갖가지 상품을 팔려는 사람들이었다. 잠자코 있는 김상철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인력수출이라고 하면 맞는 말이 되겠지요. 갖가지 인력을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업별로 나누면 군인에서 전기기술자까지, 그것을 또 여자만 분류해서 말씀드리자면 간호원에서 몸 파는 여자까지 …. 제가 다른 장사꾼처럼 샘플을 갖고 다닐 수가 없어서 유감입니다만 여하간에 어떤 종류의 인력이라도 공급해드릴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김상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 대단히 다양한 상품입니다.」
「예, 그리고 수량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품질에 대해서도 염려하실 것 없지요. 마음에 맞지 않으면 발 달린 인간이라 내보내면 제 발로 돌아갈 것입니다. 손해 보실 것이 없습니다.」
「근대리아 본부에 말씀해 보셨나요?」
「그쪽은 아시다시피 그룹차원에서 모집하고 있어서요.」
박기동이 상체를 조금 숙이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김 사장님께서 꼭 필요로 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 오래 기다리고 있었지요. 저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김상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럼 인력은 한국에서 데려오는 겁니까?」
「예, 고급인력은 주로 그쪽에서‥‥‥ 잘 아시다시피 아무래도 한국 사람은 그, 3D업종은 피하는 형편이라서요.」
「그렇다면 다른 인력은 어디서?」
「중국의 조선족이 제 주력상품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태국이나 필리핀, 또는 방글라데시에서 동원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김상철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박 사장님은 지금 나에게 어떤 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여자지요, 색시방의 여자 아닙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대답했다.
「지금 타운의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10대 1입니다. 여긴 치마만 둘렀다 하면 호박을 데려 와도 금값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김 사장님께서는 그‥‥ 마피아 사람들한테서 여자를 공급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김 사장님 소속 사업장의 여자들 질이 마피아나 북한쪽에 비해서 떨어져 있다는 건 사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것은 마피아가 제 사업장 우선으로 여자를 골라 보내고 남는 여자들을 김 사장님께 보내기 때문이지요.」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북한쪽은 아예 러시아 땅을 휘젓고 다니면서 조선족 여자들을 고릅니다. 그러다보니 김사장님 사업장 쪽 여자들 질이 떨어질 수밖에요. 그리고 수량도 제대로 공급이 안 되고.」
「아다라시, 아니, 처녀나 다름없는 조선족 여자들을, 그것도 반반한 애들로만 추려서 얼마든지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주 저렴한 수수료만 두당 계산해서 받으면 됩니다.」
차 안에 앉아 빈 벌판을 바라보던 이금철이 옆자리의 최태호에게 머리를 돌렸다.
「딱 어디가 요지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원체 도로가 넓은데다가 모두 길가의 땅이어서 ‥‥‥」
오랜만에 외출한 이금철의 행차여서 도로가에는 그들이 탄 네 대의 차량이 나란히 멈춰서 있다. 바람이 벌판 위에 쌓인 눈가루를 긁어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들은 지금 근대시에 건설될 거대한 상가부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업장당 5천 평에서 만 평까지 배분해주고 특별한 경우에는 5만 평 한도 내에서 조정해줄 수 있다는군요.」
최태호가 말하자 그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미 4백만 평이 넘는 상가부지에 각국의 투자단이 투자계획서를 제출해놓은 상태인 것이다. 그들의 옆을 지프 두 대가 스치고 지나갔다. 속도를 늦추고 길가에 붙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투자단 일행이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타운으로 돌아가자.」
이금철이 말하고는 고쳐 앉았다.
「곧 눈이 내릴 것 같다.」
힐끗 그의 눈치를 살핀 최태호가 시선을 앞으로 준 채 입을 다물었다. 늦은 오후인데다 하늘은 흐려서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평양의 해외사업반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스폰서가 되겠다는 자본주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초조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금철이 모두 도로가의 땅이어서 요지가 따로 없다고 말한 것은 그러한 허탈감을 달래려는 허세였다. 중심가에서 가까울수록 요지이고 그것이 이미 투자신청서를 제출한 각국의 투자단에게 선점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태호가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해외사업반이 조총련 사람들을 설득하는 모양이던데요.」
이금철은 잠자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몇 사람을 집중적으로 설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들었어. 그런데 조금 어렵다는 거야. 그럴 돈이 있다면 차라리 나진 선봉에 공장을 짓겠다고 반발을 한다는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들이지만 그럴 만도 하지. 이제까지 너무 쏟아 부은 덕분에 돈이 말랐으니까.」
「빠징코의 김원달 씨 같은 사람은‥‥‥」
「그 사람은 위험한 투자는 못하겠다고 거절했어. 시베리아 임차지는 한국 땅이고 한국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
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근대시에 진출하려면 타운에서처럼 1, 2백만 달러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최소한 천만 달러 규모의 투자계획서를 내야 검토를 한 후에 승인을 받는다.
최태호는 어금니를 물었다. 이제는 한국 쪽이 북한을 배제시키려고 일부러 조건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스폰서를 찾지 못하면 북한은 근대시에 기반은커녕 발을 딛지도 못한 채 좁은 타운만을 맴돌다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근대의 강회장, 이 영감탱이, 보통이 아니야.」
이금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땅에 엄청난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을 보라우. 러시아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 거기에다 일본의 야쿠자까지 돈을 싸들고 와서 기반을 잡도록 내버려둔다. 거기에다 한국과 우리까지 끼어들면 다섯 개 세력이 된다. 그것은 마치 동북아시아의 축소판과 같아. 근대리아 땅에 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 영감탱이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최태호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다섯 세력이 각각 제 나라의 국력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근대마크가 새겨진 코트를 입고 방한모에 마스크를 쓴 환경부 직원들은 사업장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에게도 경원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정기적인 위생검사 외에 불시검사를 실시하여 위생상태, 전기와 가스의 안전도검사, 구조물의 안전 상태까지 감독했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경비부보다 더 위력이 있는 기관이다.
환경부 직원들이 들어서자 왕씨는 웃음 띤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수고가 많으십니다.」
「방문은 모두 열어놓으시오, 화장실까지.」
앞장선 직원이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그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서 눈만 보였는데 아마도 중국계 조선족일 것이다. 왕씨가 옆에 선 사내에게 눈짓을 하자 사내가 몸을 돌렸다.
「이곳은 합숙소요? 웬 방이 이렇게 많아.」
직원이 안으로 들어서며 묻자 왕씨가 서둘러 따랐다. 나머지 직원들은 제각기 집 안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애들은 모두 치웠습니다.」
중국인 거리 입구에 있는 그릇가게 안이다. 가게 안쪽의 계산대 옆에 앉은 마연중이 사내 말에 입맛을 다셨다.
「며칠 전에는 서쪽 러시아촌을 불시검문하더니 망할 자식들이 오늘은 이쪽이네.」
「거리 뒤쪽을 재개발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일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상관없다. 그런데 환경부 직원은 모두 몇 명이나 돼?」
「20명 정도로 서너 명씩 한 조가 되어서 집중적으로 검사한다는데요.」
의자에서 일어선 마연중이 옷걸이에 걸린 슈바를 집어 들었다.
「봉우와 안망을 불러서 애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가라고 해라. 앞뒤를 지키란 말이다.」
긴장한 사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예, 형님, 지키라고만 합니까?」
「그렇다, 만일을 위해서. 놈들이 얼쩡거리다가 운 좋게 뭔가 찾을지도 모르니까.」
「예, 형님.」
「나는 대형한테 가 있을 테니 그쪽으로 연락하고.」
황윤이 눕혀진 곳은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 위로 벽에는 옷장까지 붙어 있는 방이었다.
「환경부 검사다. 금방 끝날 테니까 그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되겠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화씨가 말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주머니를 뒤져 기름종이에 싼 쥐똥만한 알약을 손끝으로 집어 들었다.
「자, 두 개만 드실까? 이것이면 아주 기분 좋게 주무실 수 있을 거야.」
그는 한 손으로 황윤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녀의 입속에 알약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주전자 물로 입 안의 약을 삼키게 하고나서 다시 그녀의 입을 벌려 입 안을 확인했다.
「자, 됐다, 주무셔라.」
다시 황윤을 눕힌 화씨가 침대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네 서방님 꿈이나 꾸거라, 이년아.」
그가 방을 나가자 황윤은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러진 왼쪽 다리는 부목을 대고 있었는데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성한 오른쪽 다리와 전신에 통증이 왔다. 도망치다가 잡혀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기 때문인데 일주일이 지났어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온몸에 열이 올랐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므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곧 아편의 효과가 올 것이었다. 그러면 통증도 두려움도 잊고 오직 뜨겁고 반짝이는 쾌감만이 온몸을 휩싸게 된다. 문득 이한의 얼굴을 떠올린 황윤은 눈을 떴다. 이제는 이곳으로 들어왔던 자신이 무모했다는 후회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고문에 견디지 못해 모든 것을 자백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도 없다. 이윽고 이한의 얼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그녀가 더 크게 눈을 부릅떴지만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던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이한이 턱으로 옆쪽을 가리키며 앞장을 섰다. 이미 밤 10시 가까운 시간이어서 기온은 영하 20도로 뚝 떨어져 있었다. 이한과 뒤를 따르는 최복수와 정기만 세 사람 모두 환경부원 차림이었다. 그들이 미로와 같은 좁은 골목을 걸어 나가는 동안 스치고 지나간 서너 명의 사내는 모두 놀란 듯 양쪽으로 비켜섰다.
이곳은 중국인 밀집 주거지역의 한복판으로 대낮에는 경비부원도 들어서기를 꺼리는 곳이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일부 조선족 경비원들은 중국계 사내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경향까지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한이 문득 걸음을 멈추자 최복수 등도 따라 멈췄다. 그들은 다시 갈림길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저 쪽이다.」
이한이 다시 오른쪽을 가리켰다. 소개소 왕씨가 말해준 대로라면 오른쪽 골목은 막혀 있어야 한다. 뛰듯이 골목길을 달려간 이한은 앞을 가로막은 나무문짝을 보았다.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문짝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나무문짝을 밀어젖혔을 때 안쪽에서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나타난 사내가 중국어로 물었다.
「무슨 일이요?」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정기만이 앞으로 나섰다.
「환경부 검사야. 소식 못 들었어?」
그는 선양 출신의 조선족으로 중국어가 유창했다.
「비켜 서. 우리도 시간이 없다.」
이한은 사내를 밀치고 앞을 가로막은 육중한 나무문을 밀었다.
그러나 안에서 잠근 문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 열어!」
정기만이 발길로 문을 걷어찼다. 환경부의 위생검사를 거부한다면 사업장이나 주택을 막론하고 폐쇄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정기만이 다시 문짝을 내지르자 고리가 빠지면서 문이 열렸다.
안은 넓은 마룻방으로 희미한 전등 한 개가 천장에 매달려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 들어선 이한은 아직도 남아 있던 사람들의 온기와 함께 콧속을 파고드는 매운 듯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편이다. 이곳이 왕씨가 말해주었던 아편방이었다. 그는 몸을 날려 반대쪽 문으로 뛰었다. 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대기실이 나타났다.
나무의자와 탁자가 어수선하게 놓여진 한쪽 탁자 위에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재떨이에 놓여진 담배연기였다. 이한이 다시 옆쪽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사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 밤중에 웬 환경부 검사요?」
40대쯤의 둥근 얼굴과 몸집을 가진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앉은 채였고 여유 있는 말투였다.
「이건 마치 범죄자 수색을 하는 것 같군요, 환경부원이.」
「이 새끼, 아편소굴을 운영하고 있었어. 당장에 체포하겠다고 해라.」
뒤따라온 정기만에게 이한이 뱉듯이 말했다. 정기만의 중국어를 들은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정말 놀랄 일이군. 이곳은 노동자 합숙소로 근대의 허가증도 받아놓은 곳이오.」
그는 이한에게 다가와 섰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등록증이 있는 근대리아 시민이오. 우리가 중국인이라고 해서 차별을 하는 겁니까?」
그러자 이한의 옆으로 최복수가 다가와 섰다.
「형님,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비부에 연락해서 이 새끼를 끌고 가.」
이를 악문 이한이 몸을 돌렸다. 실패다. 5개 조로 나뉘어진 환경부원들이 황윤이 있다는 색시방을 포위하듯 수색하게 했는데 그는 소개소의 왕씨가 자백한 대로 그들의 탈출 예정지인 이곳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환경부원들이나 그도 여자들은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철저히 조롱당한 것이다.
「그놈이 몸이 달았어.」
밀실에 앉은 진대원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며칠 전에는 러시아촌의 환경부 불시점검을 하는 등 사전에 꽤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 같다.」
「그래도 조금만 늦었다면 아편방에서 그년을 빼앗길 뻔했지 않습니까? 그놈들이 골목 입구에 들어섰을 때 겨우 연락을 받고 치웠으니까요.」
진대원의 기분이 좋아보였으므로 마연중도 여유 있는 말투이다.
「하지만 대형, 위선생이 경비소에 들어간 것이 걱정입니다. 김상철측이 악에 받쳐 있을 텐데 혹시나‥‥‥」
「내가 일부러 위형을 그곳에 남게 한 것이다.」
「위형에게 중국에 돌아가라고 했다. 경비소가 위형을 추방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낭패야.」
찻잔을 내려놓은 진대원이 정색을 했다.
「결국은 그놈들이 여자를 구하려고 움직이는군, 그따위 작전으로 여자를 구해내려고 하다니, 우리를 어떻게 보고‥‥」
「제 생각입니다만 놈들이 오늘밤은 헛탕을 쳤지만 그냥 물러날 것 같지 않은데요. 아마 다시 시작할 것 같습니다.」
마연중의 말에 진대원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용준에 대한 원한도 있는데다가 우리 세력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도 할 테니까.」
「여자는 어디에 두었지?」
「마작방의 공씨한테 맡겨두었습니다.」
진대원이 생각에 잠긴 듯 벽을 바라보았으므로 마연중도 입을 다물었다.
왕씨가 소개소로 돌아온 것은 다음날 아침이다. 직원이라야 하북 출신의 상군이라는 젊은이 한 사람뿐인 조그만 사무실이었지만 중국인 거리에 한 곳밖에 없는 소개소였다.
「감기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빗질을 하고 있던 상군이 묻자 그는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김상철의 부하한테 납치되었을 때 왕씨는 상군에게 전화를 걸어 감기로 사무실에 나가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제가 어제 저녁에 숙소에 들렸었는데 안 계시더군요. 옆방의 모선생도 모르신다고 하고.」
「몸이 조금 풀려서 마작방에 갔었어.」
자리에 앉은 왕씨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력서가 20여 장 모여져 있었는데 어제와 그제, 이틀 동안의 실적으로는 적은 편이다.
「이봐, 상군, 그 동안 별일 없었나?」
그가 묻자 상군이 다가와 섰다.
「별일 없었습니다. 소개료 받은 것이 50달러 조금 넘고 또‥‥‥」
「누가 나 찾지 않았어? 마선생이나 또 다른‥‥‥」
「찾지 않았습니다.」
숨을 내려쉰 그에게 상군이 말을 이었다.
「어제 트럭 편으로 백 명이 넘게 들어왔다니까 오늘은 꽤 올 것 같은데요.」
근대리아에 연고를 찾아오는 사람은 적었고 대부분 무작정 들어왔으므로 그들이 들릴 곳은 이곳뿐이다. 왕씨는 입맛을 다셨다.
이 자리는 곧 달러박스였다. 직종과 남녀의 차이에 따라 소개료는 각각이었지만 수수료는 달러로만 받는다. 특히 여자 고객들 중에서 색시방 지원자를 넘겨줄 때 업주로부터 받는 사례금 몫이 제일 컸다. 그는 책상을 열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봐, 어제 우리 거주지에서 무슨 일 없었나?」
「글쎄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던 상군이 그를 바라보았다.
「참, 어제 저녁에 환경부 직원들이 위생 점검을 했다고 합니다. 그 화선생네 색시방하고 그 근방의 합숙집들을‥‥‥」
「일부는 위쪽의 아편방까지 갔던 모양인데 허탕을 쳤다더군요. 그래서 홧김에 아편방에 있던 위선생을 데려갔다고 합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한 상군이 몸을 돌리자 그는 다시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놈들의 구출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에 마음이 놓인 것이다. 거기에다 그 끔찍한 송가놈도 앞으로 다시 만날 날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쪽만 모르고 있으면 지난 이틀간은 악몽으로 접어두고 다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이 열렸으므로 그는 머리를 들었다. 마연중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웃음 띤 얼굴을 보는 순간 왕씨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난 이틀간의 악몽보다 더한 것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한의 눈이 벌개진 것은 낮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대작하고 있는 것은 김상철이었다. 송길수는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더니 다시 오지 않았으므로 둘이서 잔을 주고받는다. 오전 10시 30분이었지만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잔뜩 흐린 날씨였다. 보드카를 한 모금 삼킨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지금 서울에서 내 친구와 결혼해서 살고 있지.」
그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지금도 내가 이곳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내 친구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아.」
「무슨 일이냐 하면 내 친구가 그 여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녀를 속였다는 것이다. 그놈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여자에게 알려질까봐 교도소에 있는 내 부친한테도 그 말을 전해주지 않았거든.」
술잔을 든 채로 잠자코 있는 이한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서울에 갔을 때 숨어서 그 여자를 훔쳐보았다.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 보고 싶어서.」
「그래, 기다려주지 못한 그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내 친구하고 함께. 그러면 미련도 없이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김상철은 여자 이야기는커녕 집안 이야기조차 꺼낸 적이 없다. 이한은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졌다.
「이해하는 척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잊을 수도 없었다. 행복을 바란다는 따위의 우스운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감히 나설 처지도, 분위기도 아니었으므로 이한은 술잔만 내려놓았다.
「지금도 그 두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끓어오른다. 그들이 차라리 사고라도 나서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으니까.」
이한을 바라보며 김상철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한테 내색한 적이 없고 어떤 행동을 한 적도 없다. 그저 그들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에 칼질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살아왔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만 될 것 같다. 이것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내 개인의 일이야.」
이한이 머리를 숙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서둘렀기 때문에 형님 체면에 먹칠을 했습니다.」
「이놈아 체면은 무슨, 우스운 소리 말아.」
쓴웃음을 지은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네가 답답한 것 같길래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한 것뿐이다. 넌 기다리면 된다. 희망이 있어.」
코즈모프 바의 밀실 안이다. 소파에 앉은 이금철은 최태호와 함께 들어서는 사내를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등을 기대고 앉은 여유로운 자세였다.
「위원장 동지.」
다가선 최태호가 입을 열자 그는 천천히 몸을 풀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누가 보아도 의식적인 행동이다.
「어서 오시오.」
사내를 향해 그렇게 말했지만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들어설 때부터 웃는 얼굴을 허물지 않고 있는 사내는 박기동이었다.
「박기동이올시다.」
「나, 이씹니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마주앉았다. 박기동의 옆자리에 앉은 최태호는 이제 이금철에게 맡겼다는 시늉으로 아예 딴전을 피우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이 아주 좋습니다.' 하고 방을 둘러보던 박기동이 감탄하는 시늉을 했지만 말을 받는 사람은 없다.
「참, 이번에 북한 축구팀이 말레이시아를 깼더군요. 축하드립니다.」
3 대 0으로 이겼지만 그전에 중국에 연패를 당해서 월드컵은 이미 물건너 갔다.
「올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릴 모양이던데요.」
그렇게 말하는 박기동은 웃는 얼굴 그대로였는데 참지 못한 것은 최태호였다.
그가 상체를 세우고 헛기침을 했을 때 이금철이 입을 열었다.
「그래, 박선생,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요?」
「아, 그거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전 장사꾼이니까 장사하려고 뵙자는 것이지요.」
박기동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만나 뵈려다가 타운 호텔의 터줏대감이 다 되었습니다.」
「우리하고 장사를 하겠다고?」
「아, 네.」
「어떤 장사인데?」
그러자 박기동이 정색을 하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장사라고 하시니‥‥ 제가 물건을 팔려는 것으로 오해하신 모양인데 사실 사려고 왔습니다.」
「무얼 말이요?」
「여자를 삽니다.」
이금철과 최태호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제는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는데 무게중심이 박기동 쪽으로 넘어가 있다.
「여자를 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맛살을 찌푸린 이금철이 묻자 박기동이 헛기침을 했다.
「색시방 여자, 클럽 종업원, 가게 점원, 안내원, 거기에다 앞으로 근대시에 들어설 수많은 호텔과 클럽, 유홍업소에 필요한 여자 말씀입니다.」
「‥‥‥」
「물건만 대주시면 얼마든지 사드릴 수가 있습니다. 몸값을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수수료를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수수료는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어야겠지요.」
「잠깐만.」
이금철이 그의 말을 잘랐다.
「말하자면 우리가 물건을 대면 당신이 넘겨받는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공급처에 다시 넘기고, 수수료를 받고 말이야.」
「맞습니다.」
「이것 봐.」
이금철이 최태호를 불렀다. 그리고 턱으로 박기동을 가리켰다.
「똑똑히 봐두라우. 이것이 바로 한국 장사꾼이야. 이놈들은 이렇게 해서 돈을 벌었다구.」
눈을 껌벅이고 있는 박기동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이놈은 우리가 죽겠다고 만들어 내면 수수료만 떼어먹고 다른 곳에 넘긴다는 거야. 머리 돌리는 것 좀 보라우.」
박기동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혹시 직접 공급하실 데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물론 내가 필요 없지요.」
「당신은 있나?」
「물론입니다.」
「어디야?」
「김상철 씨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러자 숨을 들여 마신 최태호가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이금철이 박기동을 노려보았는데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계약을 했다구? 김상철이와?」
「앞으로 김사장한테 필요한 인력은 모두 내가 공급합니다.」
「아무래도 러시아 땅이나 중국 땅에 있는 조선족들을 모으기에는 이쪽이 나을 것 같아서 찾아왔지요. 하지만 내키지 않으시다면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을 수밖에요. 물론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박기동이 커피숍에 들어서자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손영만이 반색을 했다.
「오후 내내 안 보이시던데, 여자 만나러 간 거요?」
앞자리에 앉은 박기동이 머리를 저었다.
「난 낮거리는 안합니다.」
「그럼 우리 슬슬 나가볼까.」
저녁 8시가 되어 있어서 타운 전체가 북적이는 시간이다. 손영만이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갑시다. 내가 한잔 살 테니까, 내일 서울로 돌아갈 테니 오늘밤은 비상금을 풀 생각이오.」
「방에서 한잔 합시다. 나가야 소란스럽기만 하고‥‥ 어디 반반한 여자 하나라도 있어야지.」
「하긴 러시아 여자들하고는 사이즈도 안 맞고.」
손영만은 이제 박기동을 깍듯이 대접하고 있었다. 대개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들끼리는 서로 업종이 다르더라도 경계심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했다거나 골탕을 먹은 사례가 많은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에게 더 큰 경쟁의식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실적을 가져가야 하는 상사원들로서는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이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대다. 그러나 손영만은 지금 기대에 차 있었다. 박기동이 김상철과 친밀한 관계라는 것이 사실이었고 힘들게 가져왔던 변기 샘플 두 개도 김상철의 저택에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물론 계약이 되었을 때 거래금액의 5%를 박기동에게 수수료로 떼 줘야 하지만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 선 그들은 커피숍을 나와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방에서 손영만의 환송파티를 하려는 것이다.
「박기동 씨, 잠깐만 보십시다.」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몸을 돌렸다. 슈바 차림에 방한모를 쓴 두 사내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박기동 씨, 잠깐 우리하고 같이 가주셔야겠는데.」
사내 한 명이 부드럽게 말하고 신분증을 꺼내보였다.
「경비본부에서 왔습니다. 저기 전화로 본부에 제 신분증을 확인해 보십시오.」
근대리아에서는 연행해가기 전에 반드시 본부에 확인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경비부원의 신분을 가장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끄덕인 박기동이 손영만을 바라보며 웃었다.
「환송파티가 조금 늦겠는데요, 손형.」
「박형, 무슨 일로‥‥‥」
얼굴을 굳힌 손영만이 묻자 그가 어깨를 슬쩍 치켜 올려 보였다.
「낸들 압니까? 하지만 손형이 나파스 클럽의 송길수 지배인을 찾아 이일 좀 전해줄랍니까? 그 사람이 김사장의 심복이거든.」
그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프런트의 전화기를 향해 다가갔다.
장동택은 안기부에서 근대리아로 파견된 사내로서 경비본부에서의 직책은 보안과장이었다. 보안과는 경비본부의 직할부서였고 주업무는 이름 그대로 보안에 관한 모든 것을 통괄하는 것이었는데 쉽게 표현하면 근대리아의 안기부였다. 따라서 5명의 간부는 모두 안기부원 출신이었고 50여 명의 직원들은 대부분 사상이 투철한 한국인이었다.
장동택이 근대시 서쪽에 위치한 보안과의 작전주택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 30분이었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밖의 기온은 영하 3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타운에서만 해도 대여섯 명의 동사자가 생긴다.
그가 아래층의 조사실로 들어서자 방 안에 있던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를 취했다. 장동택은 부하들의 절도 있는 자세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그가 해병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30대 후반이 된 그가 아직도 20대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절도 있는 생활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가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놈 데려와.」
그러자 부하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가는 사내, 의자를 준비하는 사내, 그리고 자료를 챙기는 사내들로 나뉘어져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장동택은 팔짱을 끼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큰 몸집에 두터운 입술을 꾹 다물고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고 있는 그의 별명은 동탁이다
삼국지에서 동탁은 초선이란 계집에 빠져 엉망진창의 삶을 살았는데 그가 그런 엉뚱한 별명을 듣게 된 것은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하들이 박기동을 데리고 들어서자 그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박기동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이것은 박기동의 장사꾼 생활에서 비롯된 습관이었지만 상대방의 대부분이 그런 모습을 보고 호감을 느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철썩!」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박기동이 옆으로 자빠질 뻔하다가 겨우 몸을 세웠다.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두 눈과 입이 쩍 벌어진 얼굴이 되었다.
「이 개새끼야, 너 이금철이 왜 만났어?」
장동택이 다시 팔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박기동이 몸을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01놈이.」
장동택의 다른 쪽 손이 날아가 그의 뺨을 다시 쳤다.
「두 번 묻게 하지 말란 말이다. 너, 이금철이 왜 만났어?」
「예, 사업관계로 ‥‥」
「아이고!」
박기동이 비명을 지른 것은 장동택의 구두 끝이 그의 정강이를 내려쳤기 때문이다. 조인트를 깐 것이다.
「사업? 니가 무슨‥‥‥」
장동택이 반쯤 몸을 일으키고 윗도리를 벗어던지자 부하가 그것을 집어 들어 옷걸이에 걸었다.
「너, 이 새끼, 부도내고 도망 나와서 한국 땅은 밟지도 못할 놈이 무슨 사업!」
「아이고.」
이번에는 맞은 것도 아니었는데 장동택이 불쑥 상체를 들이대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비명이다.
「너, 이북으로 넘어가려고 그랬지?」
「아이고, 제가‥‥‥」
장동택은 상체를 번쩍 세웠고 박기동은 몸을 젖히려고 하다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너 같은 놈은 산 채로 묻어도 혼적도 남지 않는다. 찾을 사람도 없고.」
장동택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이 새끼, 며칠 전에는 김사장 찾아가더니 오늘은 이금철이를 만나? 이놈이 무슨 이중간첩이야, 뭐야?」
몸을 세우고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은 박기동은 이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이고, 잠깐만요, 제가 무슨, 정말로‥‥‥」
손을 휘저으며 박기동이 정신없이 말했다.
「저는 장사하러 갔습니다. 정말입니다. 물어보십시오. 여자장사를 하러 가서 ‥‥」
「뭐여!」
장동택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주위 사내들의 얼굴에도 호기심이 가득 담겨졌다.
「여자장사?」
「예, 여자를 모아달라고, 제가 판다고, 예, 김사장께 팔고, 그렇게 해서 ‥‥‥」
겨우 일어나 의자 귀퉁이에 엉덩이 끝만 걸친 박기동은 평소와는 전혀 달리 두서없는 말로 해명을 해댔다.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듣고 난 장동택은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여?」
「사기치는 겁니다, 남북한 양쪽에다.」
부하 한 명이 단언하듯 말했다. 벽 쪽에 서 있던 부하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이 새끼 혹시 삼합회 끄나풀인지도 모릅니다. 양쪽을 이간질시켜서 ‥‥‥」
「아이고, 무슨 말씀을‥‥」
이제 박기동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았고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유능한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촉망받던 중소기업 경영자로 승승장구 하다가 부도를 맞은 것이 1년 전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떠돌다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근대리아로 들어온 것이 말 그대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김상철이 방에 들어선 것은 다음날 아침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나무의자에 넋을 잃고 앉아 있던 박기동은 그를 보더니 금방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아이고, 김 사장님.」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
방 안으로 들어서던 장동택이 그 말을 들었다.
「뭐? 오해? 저 새끼가, 저 ‥‥‥」
그는 김상철의 옆에 서서 박기동을 노려보았다.
「오늘 비행기 편으로 널 한국으로 보낼 작정이었어. 그런데 김 사장께서 보증을 서주셨다, 알겠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는 박기동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당분간 너를 김 사장께 맡긴다. 하지만 명심해 둬, 넌 우리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한바탕 경고를 받고난 박기동은 김상철을 따라 작전주택을 나왔다. 길가에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오르자 박기동이 옆자리의 김상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신세를 졌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금철이가 여자를 조달해준다고 합디까?」
「예, 지원자가 얼마든지 있다고. 하지만 김 사장님이 받으실지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소?」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어째서?」
「누구 손을 거치나 여자는 마찬가지기 때문이지요.」
「건설현장 노동자들처럼 훈련받은 공산당 조직원을 내 사업장에 넣는단 말인가?」
「근대리아에 있는 조선족 대부분이 북한계 아닙니까? 그건 예상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
「사업장에 넣은 후 우리 사람을 만들면 됩니다. 이제 곧 북한에서도 몰려올지 모르는데 조선족마저 경계한다면‥‥‥」
한동안 앞쪽을 바라보던 김상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요.」
「제가 중국과 러시아를 떠돌아다녀 봐서 아는데 북한에서 교육시킨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박기동의 말투에 열기가 띄워졌다.
「그리고 건설현장을 보십시오. 공산당 조직이 세력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서울에서 부도를 내고 도망쳐 왔더구만,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에다 사기혐의로 기소된 수배자 신분이던데……」
그러자 박기동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패가망신 했습니다.」
「타운 호텔에서도 사기를 친 것 같던데.」
「타운 호텔에서라니요.」
눈을 둥그렇게 뜬 박기동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 없습니다.」
「변기사업을 하는 사람한테서 나하고 로비하는 데 필요하다고 만 달러를 받았다는데 ‥‥」
「아니, 그것은 빌린 겁니다.」
김상철이 앞자리에 앉은 송길수를 바라보았다.
「누구 말이 맞는 거냐?」
송길수가 몸을 돌려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박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박기동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아주 잘 하십니다, 박선생님은.」
「안으로 데려가, 내 숙소로.」
장인규가 날이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장 클럽의 현관 앞이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장인규는 황윤을 가로막고 섰다. 길바닥에 앉아 있는 황윤은 창백한 얼굴로 몽롱한 시선만을 이리저리 굴릴 뿐 입도 열지 않았다. 사내들이 달려들어 황윤을 안아들었을 때 장인규는 황윤의 치마 속의 다리 한쪽에 부목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텅 빈 클럽을 지나 안쪽의 숙소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어서 식사 중이던 종업원들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황윤은 조금 전에 클럽 앞의 길가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클럽의 종업원 하나가 길가에 두 다리를 쭈욱 펴고 앉아있는 황윤을 처음 발견했는데 다리 한쪽이 이런 상태라면 제발로 왔을 리는 없다. 황윤은 장인규의 침대 위에 눕혀졌다. 여자들이 달려들어 눈에 범벅이 된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동안 그녀는 순한 어린아이처럼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번갈아 말을 시켜도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지 않는다.
「아편을 먹었어요.」
중국계 여자 하나가 장인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편 먹으면 이래요, 내가 알아요.」
장인규가 뒤쪽에 선 사내에게 몸을 돌렸다.
「나파스 클럽으로 연락을 해. 거기에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녀는 다시 침대 위에 누운 황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여자들은 그녀의 얼굴과 손발을 물수건으로 씻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가서 안토노프를 데려 와.」
장인규가 말하자 누군가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안토노프는 러시아인 의사였다.
이한이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20분쯤 지난 후였다. 그때는 이미 안토노프가 진찰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잠자코 황윤을 내려다보았다.
「아편을 먹였다는 거야. 그래서 의식이 없어.」
옆에 선 장인규가 낮게 말했다.
「다리가 부러진 채 부목을 잘못 댄 것 같다고 해. 몸에 타박상이 많고.」
「그놈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꼴로 돌려보냈는지 알 수가 없어.」
「살 수는 있답니까?」
중얼거리듯 이한이 묻자 장인규가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아직 안토노프가‥‥‥」
「눈을 깜박이는 걸 보면 우리를 알아보는 것 아닙니까?」
「아니, 처음부터 그랬어.」
그러자 안토노프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본부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낫겠소. 아직 의식이 없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가 마약중독이요, 외상도 많고.」
차에서 내린 이유미는 가벼운 걸음으로 호텔 현관을 들어섰다.
조금 턱을 든 자세로 시선을 곧장 앞쪽으로 뻗은 채 로비를 횡단한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섰다. 12월 초순의 오후, 맑은 날씨였으나 기온이 낮았으므로 주위에 선 사람들은 모두 두터운 겨울옷 차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가 라운지에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던 홍만규가 손을 들어보였다. 밝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군.」
그녀가 앞자리에 앉자 홍만규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멋져, 정말 아름다워.」
「그런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요.」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당신도 양복이 어울려요, 넥타이도.」
라운지에는 두어 팀의 손님뿐으로 한산했다. 차를 주문하고 난 홍만규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맥도웰과 1시 약속인데 괜찮다면 당신과 같이 가고 싶은데 … 같이 식사한 지 오래 되었지 않아?」
「아니, 됐어요.」
홍만규가 추진하고 있는 대형 유통합작 회사는 내년 초에 출범할 예정이었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종업원이 돌아가자 그가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회사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잘 돼가요, 회사는.」
「정말 맥도웰한테 같이 안 갈 테야?」
「우리 이혼해요,」
그러자 홍만규가 알아듣지 못한 듯 부드러운 표정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뭐라고 했어?」
「이혼하자고 했어요.」
「당신 무슨‥‥‥」
차츰 굳어지기 시작하던 그의 얼굴이 이유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을 때는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난 당신한테 더 이상 미련 없어요. 헤어져 주세요.」
「이것 봐.」
「그랜드 여행사 지분 모두하고 여행사 빌딩을 저한테 위자료로 넘겨주세요, 난 그것만 가지면 돼요.」
「며칠 안에 정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오늘부터는 집에 오시지 마세요. 내일 중으로 당신 짐 모두 꾸려서 청담동 신명인의 아파트로 보내든지 아니면 본가로 보내드리든지 할 테니까.」
「당신 정말 왜 이러는 거야?」
홍만규가 눈을 치켜떴다. 하얗게 되었던 그의 얼굴이 차츰 붉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야?」
「조금 심하게 할까요? 당신이 거부한다면 내일 중으로 간통죄로 고발할 작정이에요, 그리고 법적으로 위자료를 청구할 생각이고. 당신 재산의 반을 받아낼 수 있다면서 사건만 맡겨달라는 변호사들이 많더군요.」
「이 ‥‥ 이런.」
「증거도 모두 갖춰져 있으니까 추태 보이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내 말은 이제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건가?」
「네, 그래요. 필요 없어요, 이젠.」
「여행사와 빌딩을?」
「집까지 끼워넣을까 했는데 그건 뺐어요.」
「당신, 이제 보니 정말‥‥‥」
「내일 아침에 당신 사무실로 제 변호사가 갈 거예요, 서류 가지고, 그 안에 당신 변호사와 상의해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 선 이유미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집에 우리 어머니를 오시라고 했어요. 당신은 미국 출장을 갔다고 했으니 나타나시면 안 돼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이연희 여사는 핸드백을 소파 위로 던져 놓더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에이, 엄마는 참‥‥‥」
코트를 벗으면서 박미정이 그렇게 말했지만 웃는 얼굴이었다.
이곳은 친정집이다. 안인석이 오사카로 떠난 후에 그녀는 친정을 찾아오는 횟수가 늘었다.
「당신이요?」
이쪽에 등을 보인 채 어머니가 소리치듯 말했다. 회사에 계신 아버지께 하는 전화였다.
「여보, 미정이가 애를 가졌다우. 금방 미정이하고 병원에서 오는 길이에요. 3개월째라고 합디다.」
박미정은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것이 현실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얘, 아버지 전화 받아라.」
활짝 핀 얼굴로 어머니가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병원에서부터 어머니는 줄곧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저예요.」
「이놈아, 축하한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안 서방도 좋다하겠구나, 연락했느냐?」
「아뇨, 아직.」
「연락해라, 어서.」
「예.」
「오늘은 거기 있거라. 그리고 앞으로는 몸 관리를 잘해야 돼.」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미정이 어머니를 홀겨보았다.
「어머니, 또 어디다 전화할 데 없어요?」
「있다. 네 이모하고 숙모, 아이구, 참.」
어머니가 웃는 얼굴로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네 시댁에 연락을 해야지. 그건 네가 할래? 아니면 안서방이, 아니 그것보다 네가 먼저 안서방한테‥‥」
자리에서 일어 선 박미정은 화장실로 들어섰다. 말로만 듣던 헛구역질을 시작했을 때 박미정은 그것을 무심히 넘겼었다. 그러다가 생리가 끊긴 것을 알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았던 것이다. 화장실에서 입을 헹구고 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모한테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안인석이 박미정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후 6시경이었다.
「자기 바빠요?」
「아냐, 조금 있다 퇴근하려고.」
「저녁 꼭 챙겨 드세요.」
그는 당분간 지사원 두 명과 함께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저, 나 오늘 병원에 갔다 왔는데 ‥‥‥」
박미정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나 임신했어요. 3개월이래.」
「뭐라고!」
퍼뜩 머리를 든 안인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직원은 없다.
「그거 정말이야?」
목소리가 컸으므로 앞쪽의 직원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놀랬어요?」
「그럼, 아니, 그게 정말‥‥」
안인석이 말을 더듬자 박미정이 웃음소리를 냈다.
「지금 어머니한테 와 있어요, 친정.」
「그래?」
「좋아요?」
「그걸 말이라고 해?」
「잠깐만요, 엄마가 바꿔 달래요.」
곧 이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아, 축하하네.」
「예, 저도 정말‥‥‥」
「애 아빠가 되겠어, 이젠.」
「예….」
통화를 마치고나자 퇴근시간이 되어 있었다. 앞쪽 자리의 서현섭이 코트를 걸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안 형, 서울 전화야?」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서현섭이 궁금한 듯 다가섰다.
「뭐, 무슨 일 있어?」
안인석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오사카 지사는 상무급 지사장에 현지인을 포함한 지사원 수가 30명이 넘는 1급 지사이다. 지사원은 근대그룹의 주력기업인 근대상사, 중공업, 전자와 해운 등에서 파견된 사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전자는 네 명이었다. 안인석과 함께 회사를 나와 식당에 마주앉은 서현섭도 전자 소속으로 그와는 입사 동기였다. 그러나 신입사원 때 오사카에 파견된 서현섭은 고참이다. 안인석은 현지 사정과 업무현황에 밝았고 거기에다 일본어까지 유창하게 하는 그에게서 배울 것이 많았다.
「왜 그래? 우울하게 보이는데.」
「그렇게 보여?」
「그래, 아까 전화 받고나서부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안인석이 정종 잔을 들고 한 모금에 삼켰다.
「술이나 들자구. 오늘은 그냥 술이나 실컷 마시고 싶구만.」
「그릴 때도 있지.」
식당 안은 퇴근한 직장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논현동이나 인사동 골목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다음날 아침. 홍만규의 사무실 안이다. 홍만규는 두 사내와 마주보며 앉아 있었는데 머리가 반백인 사내는 자신의 변호사인 최기욱 씨였고 검은 머리에 혈색이 좋은 사내가 이유미의 변호사 고동호 씨다. 고동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야비하느니 어쩌느니 따질 것이 못 되지요. 우리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여기 최 변호사님도 계시지만 고발하면 구속되십니다.」
그러자 최기욱이 나섰다.
「그거 마음대로 안 될 거요. 사진 몇 장 가지고 확실한 증거라고 볼 수가 없지.」
그는 화난 듯 목청을 높였다.
「고변호사 당신도 판사생활을 했으니 생각해봐요. 신명인이란 여자하고의 증거라는 것이 사진 몇 장하고· 그래 아파트 등기부등본인데, 그것이 확실한 간통의 증거란 말이요? 어림도 없지.」
간통이라는 말에 홍만규가 문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최기욱이 말을 이었다.
「해봅시다. 우린 무고로 맞고발을 할 테니까. 그리고 이유미 씨가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위자료는커녕 이혼도 힘들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최 변호사님께서 억지를 쓰시는 겁니다.」
고동호가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이것은 내놓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동호는 가방을 열고 탁자 위에 소형 녹음기를 내려놓았다. 긴장한 홍만규와 최기욱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방 안에는 헐떡이는 숨소리와 여자의 신음소리로 가득 찼다.
「여긴 그렇고.」
혼잣말을 하며 고동호가 테이프를 뒤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켰다.
'좋았니?' 하고 남자가 물었는데 호흡이 조금 가쁘기는 했지만 바로 홍만규의 목소리였다.
「응, 자기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애.」
이것은 아마 신명인일 것이다.
스위치를 누른 고동호가 홍만규를 힐끗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길어요. 여섯 시간짜립니다.」
「이런 개 같은‥‥‥‥」
얼굴이 시뻘겋게 된 홍만규가 악문 잇사이로 말했다.
그러나 두 변호사는 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30분쯤 후에 고동호는 홍만규의 사무실을 나와 근처에 있는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커피숍 입구로 최기욱이 들어섰다. 그는 곧장 고동호에게로 다가와 앞자리에 앉았다.
「여행사는 해외 지점의 자산과 기타자산까지 합하면 백억이 넘어. 그리고 여행사가 들어 있는 빌딩도 시가로 백 억 정도고. 모두 2백억이 넘는 위자료야.」
최기욱이 말하자 고동호가 빙긋 웃었다.
「그러니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해두었지 않습니까? 홍만규는 제 애비 재산이 2천억이 넘습니다. 그만큼은 내놓아야죠.」
「내가 홍만규 아버지를 알아. 그는 교도소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놓지 않을 거야. 다행히 그것들이 홍만규 명의로 되어 있으니까 망정이지.」
「어쨌든 이 건은 그대로 간통죄로 들어갈 수 있는 사건입니다.」
「가운뎃다리 한번 잘못 놀려서 2백억이 날아갔군.」
「수고하셨습니다, 최 선배.」
「내가 무슨‥‥‥」
고동호가 양복 가슴 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 탁자 위로 밀어놓았다
「여기 약속대로 1억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러면서도 최기욱은 손을 뻗어 봉투를 거머쥐었다.
「그나저나 그 여자, 통이 크네. 난 10년이 넘도록 홍씨 집안을 맡았어도 이런 목돈은 못 만졌어.」
「통이 남자 이상입니다. 머리 좋고.」
「당신은 얼마 받았어?」
「에이, 최 선배도.」
「그런데 참, 그 녹음은 누가 했어? 해결사를 시켰나?」
「아니오, 그 신명인이의 기둥서방 되는 놈을 시킨 겁니다.」
「허어.」
「그 여자 머리 좋다고 안했습니까? 덕분에 나나 최선배까지도 주머니돈도 채우고‥‥‥」
「언제 골프나 가지, 우리.」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강미현은 아버지를 따라 2층의 서재에 들어섰다. 강회장은 포항의 영빈관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내일쯤 상경할 예정이었다.
서재에 마주앉자 강용식이 피로한 듯 어깨를 두어 번 손으로 주무르더니 입을 열었다.
「그 김상철이란 자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하자.」
강미현이 몸을 굳혔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더니 똑바로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네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고 또 너에 대해서 유난하신 분이라 내가 조금 방관하는 것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야.」
강용식은 차분한 성격으로, 강미현은 이제까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인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지난번 네가 할아버지 모시고 근대리아에 간 것도 홍보필름 제작보다는 그자를 만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그렇지 않니?」
「네, 아버지, 그랬어요.」
「그자는 운송사업까지 맡게 되었고, 상가 관리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근대리아의 실력자가 되었어.」
「능력이 뛰어나고 거기에다 운도 강한 자라고 하시더구나, 할아버지께서는.」
「곧 아버지께 인사드릴 거예요. 지금은 그곳 일이 바빠서‥‥」
「그런 뜻이 아니야.」
강용식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난 네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근대리아나 그룹의 장래와는 별개로 네 인생을 걱정해서 말하는 거야.」
「할아버지나 또는 김상철의 야망에 자칫 네가 잘못 끼어들어서‥‥ 그래, 심한 표현이지만 희생물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동그랗게 뜬 강미현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건 제 스스로 찾은 감정이에요. 누구의 강요는 전혀 없었어요.」
「알고 있어, 이제까지 이야기는.」
강용식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가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름대로 김상철의 주변이나 성격도 파악해 놓았어.」
「그는 널 사랑하고 있느냐?」
「네, 아버지.」
「믿을 수가 있겠어? 말하자면 너처럼, 이건 비교할 성질은 아니다마는, 너처럼 절실한 감정이 그에게 있던가?」
「확신해요, 아버지.」
「그 사람.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도 아시겠네요. 그래서 혹시 제가 대신, 아니면 정략적으로 저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지 마세요. 그쯤은 저도 알 수가 있으니까요.」
「나는 이제까지 할아버지의 충실한 수족이었다. 뭐, 아들이니 수족보다 더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지. 나는 할아버지가 벌여놓으신 사업의 뒤처리를 해왔어. 우린 아주 호흡이 잘 맞는 상하관계였고 부자지간이었다.」
잠자코 있는 강미현을 향해 강용식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번 사업에 … 근대리아 말이다. 김상철이 대단히 중요한 자라는 것에는 할아버지나 나나 의견이 같아. 그리고 할아버지가 너와 김상철이의 교제를 허락하신 것에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할아버지로서는 당연하신 처사였으니까.」
「넌 김상철이 하루하루를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아느냐?」
「네, 아버지.」
「할아버지를 거론할 필요 없이 그런 남자에게 이 애비가 딸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으냐?」
「‥‥‥‥」
「감정을 누르고 냉정해지거라. 강우진의 손녀이고 강용식의 자식으로, 근대그룹의 두 번째 후계자가 될 신분으로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
「나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제일 잘 아는 것이 김상철이 본인이야.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약속을 할 수 있을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입장을 무시하고 여자에게 무엇을 강요할 수 있을까 하고.」
「그 사람은 저한테 약속하지 않아요. 내일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강미현이 말했다.
「그 사람은 이미 할아버지, 아버지의 의도를 알고 있어요.」
「다행이다.」
「그 사람을 조사하셨다면 여자관계도 아셨을 텐데요. 그 사람이 결혼하려던 여자와 그 사람의 친구가 결혼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는 아직도 김상철 씨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어요. 왠지 아세요? 그는 그 여자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했던 거예요.」
「알고 있다.」
다시 강용식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친구가 배신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아무래도 서울에 두면 안 될 것 같아 오사카로 보내게 했다.」
「‥‥‥‥」
「이번 일도 내가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더욱이 이 일은 내 딸 인생에 관한 일이야. 그렇다고 교제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네가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러려면 이제 누가 노력을 해야 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것이 네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란 것을 명심하란 말이다.」
첫댓글 ^^
강미현 아버지가 일본으로 보낸것이였군!
로열패미리의 힘 다시느껴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
즐감
잘 읽고갑니다~~
어려운 사랑 이야기.
잘~보고 갑니다~~~^^
즐감중임다
즐감요
감사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