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공군(조선 민주주의 인민공군 : DPRKAF)의 태동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생공군들이 대개 동맹관계에 있는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듯이, 북한 역시 소련군에 의해 이때부터 신의주, 평양, 정주,
진남포, 청진 등지에 일본군이 쓰다버린 비행장을 정비하고 항공분야 경력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50명의 경력자들을
신의주로 집합하여 10월 25일 "신의주항공대"를 조직했고 이것이 바로 북한공군의 모태가 됩니다.
이곳 신의주항공대에서 중심역할을 했고 나중에 인민군 공군사령관이 된 인물은 리활(당시 30세)로, 그는 일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으로 당시 이미 2천시간의 비행기록을 가진 베테랑이었지요.
이밖에도 나중에 북한공군의 고위직을 맡게 된 허민국(당시 29세, 후에 La-9 사단장), 강치우(당시 26세, 후일 기술부사단장),
김기옥(24세, 후일 제1연대장), 김한욱(21세, 후일 제2연대장)등 20명이 모두 일본군 출신입니다. 나머지는 10명이 중국비행
학교 출신, 만주군 출신 및 기타 공장에서 근무하던 기술자들이 약 20여명 이었습니다. 이들은 45년부터 소련군 진주당시 파괴된
일본육군 훈련기인 95식 복엽훈련기(북한에서는 연습기라고 호칭)를 수리해 신의주, 평양, 정주, 진남포, 청진을 운항했습니다.
그후 이들은 보충된 인원 80명을 합한 1백30명이 현재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의 전신인 민청에 가입, 철두철미한 사상교육을
받아 공산주의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비행조종술과 전술훈련의 기술지도 및 후원을 맡아 북한공군의
산파역이 된 인물은 이 부대로 소련공군이 파견한 마이오리 맥심 소좌 입니다.
사진 중심이 김일성이고 우측의 인물이 리활
이 항공대는 제1기생과 2기생을 모집하고 해외에서 귀국하는 항공 기술자를 흡수, 4백명 이상으로 불어난 가운데 46년 5월 평양
근교 용강 비행장으로 이전해 평양 정치학원이라 개명하고 일본군 출신 조종교관들에 의해 조종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들을 전투요원화 하는 훈련은 소련군들이 주도했고, 46년 10월에는 항공대 1, 2기생과 평양 정치학원 1기생 가운데 성적이
우수하고 정치적인 결격사유가 없는 열성분자 300명이 선발되어 비행훈련차 3년 8개월간 소련으로 유학, 키예프에서 Tu-2 쌍발
폭격기로 여명시간 폭격훈련(야간 폭격훈련)을 받고 한국전쟁 발발 직전 귀국했습니다.
48년7월에는 전문학교출신 780명을 선발, 모스크바 남방 약 80 ㎞지점에 있는 제2항공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연길(연변 조선족
자치구 수도)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48년 10월에는 철수하는 소련군으로부터 평양 비행장과 함께 그곳에 남겨진 IL-10,
Yak-9 등의 전투기와 Po-2 훈련기를 인수받았으며 49년 3월에는 김일성이 직접 소련을 방문해 원조를 요청하여 그해 12월까지
전투기 30대를 추가 도입해 항공사단으로 증편되었고 이때 왕연이 사단장, 리활이 부사단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어 50년 4월에는 전투기 약 60대를 추가로 도입했습니다.
이후에도 소련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연포비행장 노선으로 계속 항공기를 북한군에 공급, 한국전 직전까지 북한군은 IL-10 71대,
IL-2 4대, YAK-9 100대, Po-2과 Tu-2 18대, 일제 전투기 및 연습기 4대, M-2 다목적기 1대 등 합계 198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는등, 공군력 확충에 상당한 힘을 쏟았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또한 북한공군병력은 소련에서 양성된 인원을 제외하고도 자체적으로 모집해 2,200명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비행장은 신의주,
평양, 연포, 선덕, 함흥, 원산, 평강, 신막, 해주 등 국내의 9개 기지만으로 모자라 중국의 연길 비행장까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즉, 북한공군의 발생지는 신의주, 훈련지는 평양학원, 북한공군의 창설자는 일본군출신 한국인 이활과 소련공군 마이오리 맥심
소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2007년에 사망한 리활의 경우 영화 매니아인 김정일의 지도로 그를 기린 "붉은 날개"라는
항공전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북한이 방송매체등을 통해 자체적으로 최초의 비행사라고 발표하고 있는 인물은 조국 해방전쟁 승리기념관 강사였던 김기옥 으로, 북한방송들은 지난 94년 5월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가 김씨에게 70돌 생일상을 보낸 사실을 소개하며 그를 "우리나라의 첫 비행사 영웅"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김기옥은 북한 공군군관학교를 1기로 졸업한 후 한국전에 참전해 51년에 "전투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중대장으로 1950년 7월 11일부터 12월 3일까지 약 반년간의 임무에서 B-29 전략폭격기 3대를 포함해 11대의 UN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합니다. 그에게 격추된 조종사 중에는 2차대전 당시 에이스로 명성을 떨쳤던 미공군 소속 토마스 젤레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당시 토마스 젤레스는 평남 개천 비행장 상공에 매복해 어떠한 항공기도 이륙하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김기옥 상위가 MIG-15bis를 몰고 과감히 이륙해 토마스 젤레스의 F-86을 격추해버렸다고 합니다. 김기옥 상위는 종전 이후 공군 중장까지 승진을 거듭하고 예편한 후에는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하다가 지난 2000년 11월, 76세로 사망했습니다.
위 사진은 왼쪽으로부터 김기옥, 리문순, 강종덕, 백기락 입니다. F-80 제트전투기 2대를 격추시키고 전사하였다고 전합니다. 이 전과는 모두 Yak-9P로 올린 것으로 추정되나 미군측의 기록에는 이 기간 동안 썬더제트 2대가 지상공격을 마치고 귀환도중 연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Yak-9P를 마주쳐서 교전을 회피하고 급히 빠져나왔다고 기술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보면 아마도 그가 모는 북한공군 Yak-9P를 공중에서 마주쳐 급히 도주한 기체를 과장 해서 격추전과에 포함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리문순에 관해 북한측이 기술해 놓은 자료에는 "1950년 6월 우리 인민공군의 추격기 조종사인 리문순 동무는 서울상공에서 처음 으로 비-29와 맞다들었다. 그의 비행기는 기술적으로나 무장과 장비에 있어서 적기와는 대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적기의 약점을 제때에 간파한 리문순 동무는 유리한 공격위치를 차지하고 번개같이 달려들어 단발에 적기를 요절내었다" 라고 하며 이밖에 "12대의 적기와 맞서 굴함없이 용감히 싸워 적기들을 쏴 떨군 김화룡, 강승현 비행사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불붙은 전투기로 적함에 육박한 백기락, 장세창, 최만호 동무들도 지난 조국해방전쟁에서 당과 수령을 위해,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싸운 용감한 비행사들이다" 라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격추시키고 5대를 격파하였다고 전하는데 모두 전쟁 후반에 올린 전과로 보아서 탑승기종은 MiG-15bis로 보입니다. 51년 6월 서해상에서 미해군 함정과 전투를 벌이다 "채 침몰되지 않은 적함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함선의 심장부로 돌입하여 비행기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기락이 5기의 전과를 올리고 미군함정에 돌입하여 최후를 마친 탑승기는 Yak-9P였다고 합니다.
그밖에 사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리동규는 한국전쟁에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1950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서울과 대전등지 상공에서 B-29기 한대를 포함한 모두 5대를 공중전에서 격추시켰다고 전하며, 현재 북한공군내에는 한국전쟁중 여러대의 미군 기를 격추시킨 리문순과 리동규등의 '영웅'비행사들을 기리기 위해 제887비행부대 예하에 그들의 이름을 따서 `리동규영웅 비행 대대'와 `리문순영웅 비행대대'가 정식으로 편제되어 있습니다. 북한공군은 불과 2년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량유지조차 어려운 연간 20~40시간의 비행훈련밖에 수행하지 못했고 교탄의 확보조차 어려워 실탄사격은 몇년에 한번 실시할 정도라고 전해져 우리에게는 마치 그것이 북한공군 몰락상의 전부라고 여기는 경향이 팽배해 있는데, 실제 그들의 사기는 그 어떤 국가의 공군 못지않게 높기만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길게 설명할것 없이 리뷰의 끝에 작년자 로동신문에 실린 수기를 첨부하였으니 길고 장황한 글이지만 문맥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서 탐구해볼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클릭하셔서 열람하시길 권합니다.
# 한국전쟁과 그후 북한공군의 격추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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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S 의 빛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