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고 말해. 그럼 크게 꾸짖지는 않을게.
-진실은 늘 혹독한 시련을 맞이하는군.
이봐.. 내겐 시간이 많질 않아. 이런 말장난으로 시간 때울..
-말장난? 네가 한 짓이 뭔지 몰라서 이러는거야, 지금?
영호는 아까부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화만 내고 있다.
그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나는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가 받아들여 줄때까지
내게 금같은 시간들을 허비하고 있을 뿐이다.
짹깍짹깍 돌아가는 낡은 벽시계가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침묵으로 다가올 때쯤
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그래, 영호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거다.
무언가를 완벽히 정리할 시간이...
주방은 그대로다.
내가 쓰던 고물 가스레인지부터 퀘퀘한 냄새가 나던 전자렌지까지..
왠지 성의없어 보여 싫어했던 전기밥솥과
혼자만 시대를 달리한 작은 가마솥.
언제부터 밥을 먹지 않은거지...?
물기가 사라진 싱크대 앞에 섰을때,
나는 밀어치는 화를 어떻게 참아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내가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나?
그가 밥을 먹었는지, 대체 언제부터 이런 삐딱한 생활에 물든건지..
내가 떠나던 그 날하고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 이 집에서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건지...!
고개를 돌려 바라본 냉장고 문에는 오래전 우리가 함께 찍었던
낡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 죽을때까지 함께..]
저건 누가 썼더라..? 아! 내가 썼었지. 맞아,그래.
사진 속에는 밝게 웃는 두 남자가 있었다.
장소는 무슨 놀이공원 같군.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청년과 열 아홉의 소년.
형제라고 하기엔 너무도 다정한 모습.
그렇다면 부자간인가?
아니,아니.. 이젠 바보가 되어가는군.
영호는 젊은 나이에 일찍 성공한 인터넷 벤쳐 사업가였다.
게임 프로그래머들을 양성하며 사회에 자신의 기반도 다지고
어느 정도의 부와 재력을 과시하며 부러울 것 없이 살던 그였다.
그가 게임에 푹 빠진 열 아홉의 소년을 만난 것은
하나도 이상할게 없었다.
그땐 회사 일이었다.
그 둘의 만남은 공적인 것 그 이상의 것이 없었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대요.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해야지..하고 마음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죠.
사랑하고 나니깐 당신인 것 처럼..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난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영호가 소년의 고백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고통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자신의 집에 어린 소년을 들이기까지
사회적 편견과 비난 따위가 무서웠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소년을 택한 영호였다.
그런 영호에게 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울다 지친 영호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아이인지 모르겠군.
나는 가만히 그 옆에 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 올렸다.
그래도 이불은 영호의 목에 와닿을 뿐이다.
그래, 나는 작다.
엄마가 처음 영호와 나의 동거 사실을 아셨을 때가 생각난다.
“어차피 공부엔 흥미 없는 녀석..
빨리 사회에 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며..
집에 찾아온 영호에게 거하게 밥상을 내주시던 어머니였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아침 일찍 엄마가 미역국을 들고 찾아 오셨다.
쨍그랑...
아니, 좀 더 둔탁한 소리였던 것 같다.
굵직한 보온병이 박살나는 소리.
어머니가 바닥으로 내려 주저앉던 소리.
놀란 영호와 내가 침대 바닥으로 떨어지던 소리.
영호는 어른이었다.
비수같은 그 시선들을 견뎠다.
사람들의 소리없는 채찍을 묵묵히 맞고만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랜다.
소문은 빨랐다.
그 옛날 천리마처럼..
나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나는 바보처럼..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002년 12월 1일.
커다란 욕조에 몸을 담고 서서히 조여오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것이 내 마지막이다.
-제발..흑흑..제발 안돼... 데려가지마. 제발....
그는 연신 ‘제발’을 외쳐대며 내 몸을 거두는 장의사에게
매달렸었던 것 같다.
내 어머니는 이미 실신 상태였으며,
내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계셨다.
내 죽음에 방문객은 없었다.
다들 더러운 새끼 하나 잘 죽었다며 속으로 욕을 해대고 있었으니까...
누군가가 뒤를 돌아섰을때...
그의 뒤에 대고 이별을 고하는 것 만큼 비겁한 짓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니까....................
-당신도 인정해야해.
나는 죽었어.
당신 때문에 저승가는 길을 늦추고 싶진 않단 말야..
솔직히 난... 겁쟁이 일지도 몰라.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문제를 회피하고 싶진 않았어.
하지만 그거 알아...?
당신을 만나는 동안...
나한테 사랑은..늘 고통이었어.
고민하고 아파해야 하는 문제였다구...
새벽이 온다.
간간히 들려오는 흐느낌 따윈 아무 상관없다는 듯,
그렇게 소년은 떠나갔다.
영호는 생각했다.
자살...?
웃기지 말라고 해.
사람들이 죽였어!! 사람들이 죽인 거라구!!
이건 명백한..살인이잖아..........
2002년 12월 15일...
서울시 마포구 B아파트 A동 302호.
서른 한 살의 청년, 살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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