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정말이지 예정에도 없던 일들로 휙휙휙 마구 지나갔다.
하지만 계획이 없어도 하루가 온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복에 겨운 일 인 듯하다.
아침 일찍부터 맛있는 점심을 해줄테니 놀러오라는 지인의 전화를 받고
친구의 아버지 부음에 먼 길 떠나려던 신선에게 물었다.
"언제쯤 문경으로 갈 거임? 난 점심 초대 받아서 나가야 하는데 점심 먹고 갈 예정이면 밥이 있으니 스스로 챙겨 먹고 가겠습니까요?"
"걱정하지 말고 나가셔...난 나대로 알아서 나갈테니까"
신선의 직업 자체가 자유로운지라 출근 시간에 얽매여 길을 나서지는 않지만 그래도 출장 다녀오거나
굳이 집을 나서지 않아도 해결될 일 이거나 오후에 나가게 되면 점심은 반드시 집에서 챙겨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더러는 선약이 있거나 불시에 초대를 받게 되면은 일상에 변동사항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이런 경우, 예전에는 정말 서로의 일정에 관여하지 않은 채 별 생각을 하지 않고 편편히 집을 나서고는 했으나
요즘은 쥔장보다 늦게 집을 나서야 하는 신선의 경우가 생기면 그것도 참 마음이 불편한거다.
물론 예전에는 그것 조차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 먼저 나갈게"였지만 요즘은 그런 소소한 일상 조차도 눈치가 보이긴 한다는 말이다.
암튼 지인이 굳이 표고버섯밥을 해준다는데 마다 할 이유는 없는 법이이어서 신바람 나게 휘리릭 달려갔더니만.
너른 뜨락에 내려쪼이는 햇살은 그냥 좋고 반갑다고 아는 척 하며 마구 짖어대는 무설재에서 집을 옮겨 간 명견 "갭틴"이 반긴다.
"어서 와, 내가 빨래를 좀 널어야 하니 몸에 좋다는 햇볕이나 쬐고 있어"
"당연하지...이즈음에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햇살을 마구 즐기자고 ㅎㅎㅎㅎ"
그렇게 마당에 서서 빨래를 너는 주인 아낙을 보자니 참으로 부지런 바지런 하다.
세상에, 지인이나 쥔장이나 햇살 아깝다고 여기는 마음은 똑같은 듯하다.
햇살이 아깝다고, 조금 있으면 황사 때문에 봄 햇살을 마구 쬐지도 즐기지 못할 거라고...이런 저런 온갖 빨래들을 아침부터 쉼없이 돌렸단다.
게다가 그동안 방치하였던 김치통들을 깨끗이 씻어 햇볕에 널어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자니 영락없는 현모양처 주부다.
"내가 말이야...지난 겨울에 어찌나 게으름이 나던지 김치는 먹기만 하고 김치통을 씻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던져놓았잖아?
추우니까 아무 것도 하기 싫더라고...이제 살 것 같아서 조금씩 꼼지락 거리는 중이여. 슬슬 바쁜 일상이 시작되겠지?"
"그러게...벌써 표고버섯도 말렸다니 부지런도 하다. 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말이여"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빨래를 널고 지인의 집으로 들어가 그녀가 준비한 성찬으로 식사를 하려는데
참 손발이 빠른 그녀는 이미 많은 준비를 마쳐놓았고 쥔장은 그저 그녀가 차려주는 성찬에 탄성을 지르며
맛있게 먹어주는 일만 남았다.
요즘 거의 육식과는 담쌓고 채식을 기본으로 식단을 구성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대로 야채로 채운 성찬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고 아니어도 식단을 조절한지 오래된 쥔장네 보다 더 풍성한 그녀의 성찬에 힘입어
마음껏 식탐을 채우니 서너명이 먹어도 넉넉할 양을 둘이서 천천히 수다와 함께 결국은 죄다 해치웠다.
그러니까 또 절제를 잃어버린 것이다.
집에서는 식사량을 조절한답시고 작은 그릇에 조금만 먹으면서도 집바깥에 나가면 왜 그리 식탐이 생겨 자제력을 잃은 것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
그런데 그렇게 성찬과 차를 마시면서도 내내 머릿속에는 이세돌 구단의 결과가 궁금하였다.
성급한 마음에 티비를 보면서 성찬을 누리자고 할 수는 없었으나 실제로 할 이야기가 많앗던 우리는 티비 시청은 불가라
마음 한 켠이 자꾸 이세돌 구단이 사투를 벌이는 대국, 그쪽으로 쏠리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돌아나오려는데 문득 액자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지인의 시어머니께서 89세의 연세에도 지역 문화센터를 다니시면서 시작詩作을 하신 결과 물이라고 했다.
첫 귀절을 읽는데 울컥, 마음이 아려왔다.
누구나 그리는 삶이 아닌가 싶은...그리고 한참을 먹먹한 마음으로 지인과 또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마음이 바쁘게 이세돌 구단의 대국으로 쏠리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 편히 티비로 시청하고자 다시금 지인의 집을 나섰다.
허나 이미 4번째 대국에서 승리를 하였으므로 다섯번째 대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마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신경이 쓰였던 까닭에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해가면서 제발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발길은 또 그동안 적조하였으며 최근에 심장 스턴트 수술을 받았다는 도예가 김한사 선생님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 김한사 선생님은 집에 없어 가볍게 커피 한잔 마시고 되돌아나오려려다 잠시 그 안주인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쥔장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윤석남 화가의 언니가 금광면 오흥리, 그러니까 무설재 근처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그녀를 방문하기로 전화를 드리고 휘리릭 날아갔다.
오래도록 조선일조, 동아일보 기자였다가 지금은 서예가로 이름이 높은 윤석연 여사님이 불현듯 찾아들었어도
반갑게 맞아주시니 어찌나 고맙던지....이런 저런 세상사 이야기와 문화계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초저녁이 되어 돌아서려니 "지나가다 자주 들르시라"는 말이 어깨 너머로 들려온다.
아니어도 드를 걸음이지만 순순히 들려달라 자청하시니 괜히 고맙기까지 하더라는.
2006년에 금광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안성으로 거처지를 옮기고 나서 산책과 서예와 건강식으로 자신을 가다듬어
한때 무리되어 잃어버렸던 건강을 다시 되찾고 지금은 활력적으로 살아가신다는 그녀의 나이는 83세.
그러나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고 오목조목 예쁘장하게 잘 늙어간 얼굴로
나이듦의 미학을 온전히 보여주는 모범사례를 보는 듯히여 더욱 반가웠다.
게다가 먼 길 마다하지 아니하고 자동차가 없으면 찾아가기가 고약한 "던지실 성당"으로 매주 미사를 보러 간다는 말에는 숙연해질 수밖에.
차량이 없는 지라 걸어서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45분 거리를 웬만한 눈이나 엄청난 비가 오지 않고는 빼먹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녀의 신앙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는 것이요 그녀의 간절한 신앙 덕분에 쓰러져 회생가망이 없던 자신의 건강이
누구도 죽음 가까이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만큼 단단하고 확실해졌다고 믿는 마음이 숭고해보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하루동안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나이가 이런 때" 라며 세월과 나이값만 따지면서 쓸데없는 어른 노릇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내내 스스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인생길을 거침없이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참으로 그 시간이 귀하고 쥔장에게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겨질 것 같아 좋았다.
나이가 들었어도
가정의 대소사를 놓지 않고 지키는 평범한 주부일지라도 누리는 소소한 일상을 거부하지 않는 그녀의 나이듦이 아름답고
일간지 기자로서 전문직 종사자였으나 과거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현실의 지금을 잘 살아내는 커리어우먼의 모습도 보기 좋고
도예가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며 묵묵히 제 길을 비켜주는 아녀자도 참으로 아름답다.
그들 모두, 나이듦을 마음 아파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나이듦의 미학을 실천하는 중이겠다.
그런 이웃들이 쥔장 주변에 있다는 사실도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요
비록 인공지능 알파고에 패배를 하였으나 새삼 인간의 진면목을 일깨워준 이세돌이라는 바둑의 고수가
우리나라 국민이라는 사실이 고맙고 그 또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나이 들었어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둑계의 거목으로 건재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나이든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탄력을 갖게되는 것이 아닌지 싶은 개인적은 생각.
오늘 아침,
괜시리 뿌듯하고 흐뭇하다.
계절을 잊지 않고 복수초가 피.었.다
첫댓글 좋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숨어계시네요~! 그래서 더 살만하다는~! ^ ^
맞아요...멋지고 근사한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있는 안성은 그래서 더더욱 살맛나는 곳이긴 하죠.
덕분에 인생도 매우 즐겁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