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태커 대장(왼쪽), 체리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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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 15분 체리와 테리 부부의 구조 요청 소리가 들려왔다. 리지웨이와 라이차트는 급히 그들에게로 달려 내려갔다. 테리의 수염에 얼음 조각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그는 저체온증으로 사시나무 떨듯 전신을 떨고 있었다. 체리는 횡경막의 통증으로 호흡곤란을 겪고 있었다. 리지웨이가 저체온증에 걸린 체리의 장갑 낀 손을 잡아보니 나무토막 같이 딱딱해진 상태였고, 그녀도 혹한으로 몸을 몹시 떨고 있었다.
리지웨이와 라이차트는 체리를 양쪽에서 부축하며 제5캠프로 인도했다. 그들은 체리와 테리에게 급히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분당 2리터의 산소가 흐르도록 조치를 취했다. 리지웨이는 제5캠프에서 밤새 산소 공급 부족으로 인해 심한 두통을 앓았고 또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소변이 무척 마려웠지만 밖의 혹한과 맞서기가 두려워 그 욕구를 끝내 억제했다.
아침에 맑은 날씨 속에 로스켈리와 리지웨이가 앞장서고, 라이차트, 윅와이어, 체리, 테리가 뒤따라 출발했다. 스노돔 뒤쪽에 바위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그곳에서 아브루치 등반 팀과 북동릉 직등 팀이 갈라서야 할 것 같았다. 리지웨이가 북동릉 직등루트를 살펴보니 우측의 설원이 점점 더 가팔라지며 높이 솟아 있었고, 그 위쪽에 높이가 30m쯤 되는 가파른 빙벽이 버티고 서 있었다. 빙벽 위쪽에서 경사도가 조금 낮아졌다가, 8,473m 지점에서 가파른 바위 밴드(rock band)로 정상까지 트래버스를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밴드 위에는 눈이 덮여 있어 등반의 난항을 예고했다. 그날 로스켈리와 리지웨이의 목적지는 멀리 위쪽에 위치한 바위 버트레스(Rock Buttress)였다.
윅와이어, 손가락 몇 개 잃어버릴 각오로 등정 추구
체리는 제5캠프 위쪽에서 심한 복통을 일으켜 더 이상 등반이 불가능했다. 라이차트, 윅와이어, 테리가 그녀의 짐을 나누어 자신들의 배낭 위에 추가했다. 체리는 그 자리에 서서 등반하는 동료들을 응시하며 자신의 등정 꿈이 눈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실망하여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녀는 정상의 꿈을 접어야 했다. 두 팀은 바위에 도달하여 서로 포옹하며 작별하고, 정상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 라이차트 일행은 아브루치능선을 향해 눈더미 위로 사라졌다.
동벽 트래버스는 라이차트가 선등했는데 심설이 허리까지 차 올라왔다. 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습기 찬 눈 속에서 헤맸다. 오후 4시경이었는데, 아브루치능선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라이차트, 리지웨이, 테리 세 사람은 K2 동벽의 심설지대에서 시간이 부족해 트래버스에 실패하고 침묵 속에서 제5캠프로 귀환했다.
한편 북동릉 직등조 로스켈리와 리지웨이는 각자 무게가 23kg 이상 되는 배낭을 짊어지고 설원의 심설 속으로 직등하여 폴란드 대의 제6캠프지, 즉 죽음의 지대에 도착했다. 로스켈리는 바위 버트레스 밑에 위치한 빙탑 아래 7,986m 지점에 텐트를 설치하고, 자신의 얼음처럼 차가워진 발가락을 리지웨이의 복부에 대고 녹였다. 그의 발가락 몇 개의 끝은 몇 년 전 다울라기리 등정 시에 동상이 걸려 절단된 상태였다.
얼마 후 로스켈리는 동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바위 버트레스 아래쪽의 심설 속을 뒤져서 며칠 전 라이차트와 윅와이어가 운반했던 두 개의 가스통과 식량 주머니를 찾아냈다. 그들은 계속 눈을 녹여 많은 양의 음료수를 마셨다.
- ▲ 리지웨이(왼쪽), 윅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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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다음날 아침 6시 15분 텐트에서 기어나왔다. 설벽의 경사도가 눈사태가 빈발하는 각도를 이루고 있어서 위험도가 너무 컸다. 로스켈리가 심설 속에서 선등하며 헤매다가 등반을 포기하고 그들은 제6캠프 속에서 적설이 다져지기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라이차트, 윅와이어, 테리 3인이 다시 제5캠프를 출발하여 동벽의 트래버스를 재개했을 때, 북동릉 직등 루트의 제6캠프 아래쪽에서 수 차례 눈사태가 발생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라이차트는 우선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허리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러셀하여 길을 트고 되돌아와 짐을 운반하여 동벽의 중앙까지 진출했다.
윅와이어가 짐을 벗어놓고 선등을 교대했다. 그는 180m 떨어진 곳의 모퉁이까지 진출했다. 그가 모퉁이를 돌아서니 경사도 45도의 설사면이 아브루치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윅와이어는 자신의 짐을 회수하러 가고, 라이차트와 테리는 아브루치능선에 먼저 도달했다.
라이차트와 윅와이어는 이탈리아 초등대가 1954년, 그리고 일본대가 1977년 최종캠프로 이용했던 아브루치 숄더(7,900m) 위쪽에 최종캠프 제6캠프를 설치하기를 원했지만, 어둠이 다가오는 늦은 시각이어서 그들은 서둘러 아브루치능선 상의 7,849m 지점의 크레바스 밑에 2인용 텐트를 설치하고 아브루치능선 제6캠프를 구축했다. 만일 눈사태가 발생하거나, 300m 위쪽의 정상 피라미드에 위치한 빙탑이 붕괴된다면 크레바스의 뒷벽인 빙벽이 보호막 구실을 할 성싶었다.
그들은 K2에서 62일째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동안 눈과의 싸움, 가파른 빙벽을 오르는 일,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일에 매진했고, 수없이 희망과 좌절을 반복 체험했다. 그들은 아브루치능선 상부에 도달했으나 너무 지친 상태여서 의기양양함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은 당장 음료수를 장만하기 위해 눈을 계속 녹이는 일, 다음날 사용할 장비를 챙기는 일, 너무 늦잠을 자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일 등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9월 6일 새벽 1시 반, 텐트 밖의 기온이 영하 30℃쯤 되는 것 같았다. 새벽 4시30분 라이차트와 윅와이어는 각자 산소 한 통을 배낭 속에 챙겨 짊어지고, 서로 자일을 묶은 후 휘몰아치는 강풍을 맞으며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아브루치능선 상의 8,077m 지점 위쪽에서부터 산소를 사용할 계획이었다. 테리는 동상을 염려하여 출발하지 않고 제6캠프에 혼자 남았다.
윅와이어는 빠른 속도로 등반하는 라이차트를 따라 잡으려고 급히 발길을 옮기다가 숨을 헐떡거렸다. 그의 장갑 속에서 손가락들은 혹한에 얼어서 무감각 상태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열정을 품었던 K2를 등정할 수만 있다면, 손가락 몇 개는 동상으로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지대에서 몽유병 환자와 같은 동작으로 등반을 계속하고 있었다.
- ▲ 왼쪽부터 로스 켈리, 크리스 샨들러, 다이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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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차트, 산소 연결호스 훼손으로 무산소 등정 시도
한편 북동릉 직등 조, 로스켈리와 리지웨이는 제6캠프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오전 7시에 등반을 재개했다. 리지웨이가 로스켈리의 확보를 받으며 설벽을 횡단하고 코너를 돌았다. 그는 심설 속의 험로를 돌파하느라고 한 시간 동안 한 피치도 전진하지 못했다. 그는 숨은 크레바스를 발견하고 건너갈 브리지를 찾고 있었다. 그가 크레바스를 건너는 데 성공한다 해도 절망적인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크레바스 건너편의 적설량이 너무 많아서 그의 어깨까지 차오를 듯싶었고, 따라서 눈사태의 위험성이 너무 컸다. 그때 로스켈리가 코너를 돌아 올라와 소리쳤다.
“제1캠프의 롭(Rob) 대원한테서 무전 연락을 받았는데, 라이차트와 윅와이어가 아브루치능선에서 정상을 향해 등반 중이라고 해. 우리도 짐을 꾸려 아브루치능선으로 건너가 내일 등정하자.”
말로 하기는 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원조 없이 2인용 텐트, 식량, 연료, 난로, 침낭, 깔개, 파카, 카메라, 등반 장비, 2개의 산소통, 산소마스크, 모두 합쳐 각자 27kg의 짐을 짊어지고 동벽을 트래버스해야 할 판이었고, 게다가 죽음의 지대에서 3일 밤을 보내고 지친 몸으로 등정을 시도해야 할 운명이었다.
리지웨이는 절망상태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만난 셈이었다. 그는 잠시 숙고한 끝에 대답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
로스켈리가 말했다.
“꼭 필요한 장비만 챙기자.”
그들은 북동릉의 마지막 관문, 즉 헤드월의 빙벽과 암벽에 접근도 못 하고 하산해야 했다.
그들은 자일을 남겨두고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그 조치는 자일을 묶지 않고 눈사태 위험 지역인 동벽을 트래버스해야 하고, 더구나 아브루치능선의 보틀넥 위쪽의 위험한 빙벽구간을 로프 없이 트래버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짐 무게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편 아브루치 팀은 오전 7시 30분 1977년 일본 대의 제6캠프지(8,077m)에 도달했다. 윅와이어는 산소를 사용하기로 했고, 라이차트는 위쪽 보틀넥에서 산소를 사용하기로 했다. 쿨와르 속 가파른 지점에서 윅와이어가 선등을 교대하고 먼저 쿨와르에 오른 다음 라이차트와 연결된 자일을 당겨 주었다. 윅와이어의 확보를 받으며 라이차트는 산소를 사용하며 좌측 빙벽의 좁은 통로를 프런트 포인팅으로 올랐다.
- ▲ K2 북동릉의 가파른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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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차트가 등반 중에 그의 산소 장비가 말썽을 일으켜 그는 어렵사리 그 피치의 등반을 마치고 마스크와 연결된 고무관을 살펴보았다. 산소 장비를 운반 중에 크램폰의 아이젠 발에 찔려 구멍투성이였다. 그는 산소 장비를 벗어놓고 무산소로 등반하여, 윅와이어가 선등하며 킥스텝으로 만들어 놓은 스텝을 따라 설벽으로 전진을 계속했다.
이제 수직고도 366m만 돌파하면 K2 정상이었다. 라이차트는 자신의 배낭마저 눈 위에 벗어 놓고 맨 몸으로 윅와이어를 뒤따르고 있었다. 윅와이어는 라이차트가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하더라도 혼자서 등정할 각오였다. 그들은 선등을 교대하며 죽 같은 무른 눈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라이차트가 좌측의 정상 능선 쪽으로 오르고 있었다.
8,534m 지점에서 산소를 사용하던 윅와이어가 무산소로 등반 중인 라이차트를 앞질렀다. 윅와이어는 등반 중에 파카에 넣어둔 수통을 분실하는 바람에 라이차트의 수통에서 물을 몇 모금 얻어 마신 것 외에 하루 종일 물 구경을 하지 못해 목이 탔다. 윅와이어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의 가족들, 아내, 자식들, 부모를 생각했다.
1938년 이후 다섯 차례 실패 후 미국인 초등정 성공
그가 마지막 가파른 설벽을 오르자 정상 능선이 나타났다. 황금빛 저녁놀이 그들을 환영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한쪽 무릎을 눈 위에 대고 쭈그리고 앉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나란히 정상을 밟았다. 미국 대는 1938년부터 K2에서 다섯 차례의 실패를 겪고 나서, 드디어 미국인의 숙원을 성취했다. 라이차트가 미국 국기와 파키스탄 기를 들고 사진촬영을 했고 윅와이어도 등정사진 촬영을 마쳤다.
오후 5시 15분이었다. 라이차트는 즉시 하산을 시작했다. 윅와이어는 언 손으로 필름을 교체하고 K2 정상에서의 풍광에 취하고, 파노라마를 촬영하느라 6시10분에 너무 늦게 하산을 시작했다. 300m 아래쪽에서 라이차트가 하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윅와이어가 K2의 8,473m 지점까지 하산했을 때 어둠이 찾아왔다. 그날은 달도 뜨지 않았다. 곧 캄캄한 암흑세계가 시작되었다. 그는 텐트와 침낭도 없이 한데서 비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강풍이 불고 있었다.
윅와이어는 암흑 속에서 비박 색을 뒤집어쓰고 K2의 상부 빙사면에 앉아 깜빡 졸다가 깨어나 보니 몸이 빙사면으로 조금씩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비박 색 속에 넣어둔 그의 배낭과 산소통의 무게, 그리고 강풍의 밀기 작용 때문이었다. 그의 아래쪽에 낭떠러지가 있었다. 그가 발뒤꿈치로 설벽을 파고 버티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위쪽으로 더 올라가 다시 자리를 잡아야 했다.
- ▲ 등정자 라이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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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비박 색을 벗으니 몸이 굳어진 상태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비박 색을 끌면서 위쪽으로 기어 올라가 몇 시간 전에 깎았던 층계에 도달했다. 그는 비박 색의 구석에 아이스 액스를 박고 다른 쪽 구석에 아이스 해머를 박아 고정시키고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는 혹한(영하 40℃) 속에서 동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혈액 순환을 촉진시키려고 손과 발, 팔과 다리를 계속 움직였다. 그는 과거에 미국의 마운트 레이니어(4,392m)의 윌리스 벽 등반 시에 겪었던 고초와 마운트 매킨리(6,194m)의 남벽을 단독으로 등정할 때 겪었던 비박을 회상하며 고통을 참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은 마운트 레이니어도, 마운트 매킨리도 아니었고 산중의 산, 꿈의 산, K2(8,611m)였다. 그는 그래도 이 고통의 밤도 끝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벽녘에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얼어서 무감각해졌다. 비박 색의 천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새벽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하산을 시작했다.
한편 그 전날 오후, 로스켈리와 리지웨이는 아브루치능선 상의 제6캠프에 도착했다. 그들은 제5캠프로 하산하는 테리를 만나 라이차트와 윅와이어가 정상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이 아브루치능선에서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 8시에 등정자 라이차트가 캠프로 귀환했다. 그의 코와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리지웨이가 물었다.
“윅와이어는 왜 안 오지?”
라이차트가 대답했다.
“그는 정상 부근에서 비박하고 있는 것 같아. 아니면 아직 하산 중이거나.”
그날 밤 제6캠프의 기온은 영하 40℃였다. 그들은 윅와이어의 안전에 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윅와이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날 로스켈리와 리지웨이는 새벽 3시 반에 제6캠프를 출발하여 아브루치능선의 정상 피라미드 밑을 등반 중이었다. 표면이 단단하게 언 설원은 강추위에 얼어붙은 바다의 표면처럼 수많은 작은 초승달들 모양의 얼음이 돌출되어 있었다. 암흑, 강풍, 혹한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단단한 눈을 파고드는 삐걱거리는 크램폰 소리와 그들의 거친 호흡소리가 덧붙여 들렸다. 그들은 보틀넥 위쪽까지 산소를 사용할 계획이었다.
리지웨이는 8,000m의 고도에서 4일째를 맞이했지만, 2년 전 에베레스트의 같은 고도를 등정할 때보다 몸의 건강상태가 더 좋게 느껴졌다. 그들은 아침 7시 반에 8,230m 지점의 좁은 쿨와르, 보틀넥을 등반했다. 강풍에 눈보라가 심했다. 앞서 보틀넥의 상부를 등반하던 로스켈리는 하산하는 윅와이어를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함께 휴식을 취했다. 그는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 돌아왔다. 곧 리지웨이도 그들과 합류했다. 로스켈리가 질문했다.
“혼자 하산할 수 있어?”
윅와이어가 대답했다.
“더 어려운 위쪽 빙벽 트래버스 구간도 무사히 하산했는데, 이 쿨와르 하산은 문제없어.”
- ▲ 1938년 미국 K2 등반대 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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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윅와이어와 작별하고 등반을 계속했다. 로스켈리는 산소 장비를 벗어 놓고 무산소로 등반했다. 그는 빙벽과 암벽의 트래버스 구간을 무사히 돌파했다. 리지웨이는 산소를 계속 사용하며 트래버스 구간을 돌파했다. 그 지점에서 리지웨이의 산소 장비가 고장이 났다. 그도 무산소로 등반했다. 두 사람은 오후 2시 반에 정상 피라미드의 8,534m 지점을 등반 중이었다. 그들은 선등을 교대했다. 리지웨이는 환각이 일어났다.
그들은 마지막 15m 의 설사면을 오르고 서로 손을 잡고 K2 정상(8,611m)에 도착했다. 로스켈리는 기념품으로 몇 개의 돌을 채취했다. 리지웨이도 로스켈리의 흉내를 냈다. 그들은 사진 촬영을 끝내고 하산을 시작했다. 리지웨이는 배리 비숍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상에는 정복자들은 없고, 오직 생존자들만 존재한다.”
윅와이어, 하산길 비박 후유증으로 폐 일부 절제
로스켈리는 오후 5시에 제6캠프로 하산했고, 리지웨이는 한 시간 후인 6시에 하산했다. 윅와이어는 비박 중에 손과 발에 동상을 입고, 오전 9시에 하산하여 탈진상태로 라이차트와 침낭 속에서 휴식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로스켈리와 리지웨이는 그들의 텐트 속에서 휴식을 취했다. 로스켈리가 스토브에 눈을 녹이다가 가스통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들의 텐트 속의 사방이 불바다가 되었다. 그들은 급히 텐트를 빠져나와 불타는 침낭을 끄집어냈지만, 침낭의 일부가 불에 타고 텐트도 불에 타 사용이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라이차트와 윅와이어의 비좁은 2인용 텐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로스켈리가 불탄 텐트 안을 뒤져서 매킨리 침낭과 리지웨이의 파카를 찾아냈다. 로스켈리는 일부가 불에 탔지만 더 따뜻한 침낭을 리지웨이에게 양보했다.
다음날 오전 11시 그들은 하산을 시작하여 제4캠프에 도달했다. 윅와이어는 비박의후유증으로 폐렴에 걸려 베이스캠프에서 들것에 실려 후송된 후, 미국의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다. 그는 폐의 일부분의 절제 수술을 받았다.
로스켈리는 다음해 네팔의 가우리샹카(7,134m) 서벽 등정에 성공했다. 라이차트와 로스켈리는 1982년 미국 에베레스트 컁슝벽 원정대에 참가했는데, 로스켈리는 지나친 인공 보조 등반에 실망하여 원정대를 탈퇴했다. 라이차트는 다음 해 대원 5명과 함께 캉슝벽 등정에 성공했다.
후일담이지만 크리스와 체리는 결국 결혼했다. 두 사람은 캉첸중가 등반 중에 크리스가 정신이상으로 인해 체리를 구타하고, 자신은 절벽으로 뛰어내려 사망했다. 체리는 손과 발에 심한 동상을 입고 가까스로 구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