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촌(外人村)
김광균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불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어휘풀이]
-모색 : 해가 저물 무렵의 색채
-산협촌 : 산 골짜기의 마을
-역등 : 역(驛) 구내를 밝이는 등불
-화원지 : 꽃밭
[작품해설]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는 소리마저도 회화적 수법으로 변용, 색채와 그림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이미지즘의 특성을 대변하고 있는 작품이다. 서구적 영향을 받아 시각적·회화적·공감각적 이미지가 적절히 표현되었고, 소재마져도 서구풍의 ‘외인촌’을 택하였으나, ‘고독한’ ‘공백한’ ‘여윈’ 등이 환기하는 애상감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국적 정취를 통해 인생의 무상감과 고독한 영혼의 구제를 보여 주는 한편, 회화적 수법을 통해 한국 서정시의 표현 기교을 혁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서구의 모더니즘 시가 표방하는 비서정적인 견고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 이른바 한국적 모더니즘의 전형이라 평가받고 있다.
외국인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외인촌’을 무대로 저녁 황혼무렵부터 밤까지의 시간적 전개로 이루어진 이 시의 심상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정적 속에 잠기어 가는 마차로 대표되는 저녁놀 진 산협촌의 고운 정경을 묘사한 1연과, 저물 무렵 정적으로 잠긴 마을과 흐르는 시냇물의 2연은 정중동(靜中動)의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3연은 웃음과 꽃다발이 흩어진 벤취를 그린 공감각적 이미지이며, 별빛 내리는 외인 묘지를 그린 4연은 시각적 이미지, 마지막 5,6연은 성교당의 종소리를 분수로 표현한 공감각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 시는 이와 같이 무기력성·폐쇄성·비생명성을 표방하는 정적 이미지와 생동감·역동성·생명력을 표상하는 동적 이미지가 복합되어 삶의 다층성(多層性)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전통적 정서인 애상감과 서구적 주지주의 사학을 교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작가소개]
김광균(金光均)
1914년 경기도 개성 출생
송도상업고등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시 「가는 누님」 발표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가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설야」 당선
1950년 이후실업계에 투신
1990년 제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사망
시집 : 『와사등(瓦斯燈)』(1939), 『기항지(寄港地)』(1947), 『황혼가(黃昏歌)』(1969)
『추풍귀우』(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