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꽃 은방울, ‘다시 행복해진다.’
◀은방울꽃(나태주 詩) ◼이영화(테너)
◀Lily of the Valley(은방울꽃) ◼나상현씨 밴드
◀The Lily of Valley (I have found a friend in Jesus) ✱찬송가 88번 ◼Acapeldridge 4중창
◀Miss Dior ✱향수 광고
◀마포종점 ◼은방울 자매
◉화려한 꽃 잔치가 펼쳐지는 5월입니다.
사방에서 등장하는 색깔 없는 흰 꽃마저
찬란함과 화려함을 뽐내고 있어서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하지만 정작 5월 상징 꽃인 은방울꽃은 화려함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습니다.
반그늘에서 커다란 녹색 잎에 덮여 숨바꼭질하듯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3월 말, 4월 초에 집에서 30m 정도 올라간 뒷산 구릉지 빈터에 초록색 잎들이 촘촘히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그곳에서 만나던 또 한 무리의 반가운 친구들입니다.
참나무와 낙엽송, 잣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반그늘 지역입니다.
나무 사이 사이로 내리는 봄의 햇살 받으며 쑥쑥 자란 난 이 잎들은 4월 말이면 잎들끼리 어깨를 마주하며 작은 군락지를 이룹니다.
◉빈 땅 아래서 겨울을 지내고 세상으로 얼굴을 내민 여러해살이 은방울 잎들입니다.
그래서 열 평 남짓 공터에 또 하나의 초록과 흰색의 별천지가 만들어집니다.
4월에 꽃대가 올라오더니 지난주부터 그 꽃대에 꽃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땅에 자라는 기품 있는 우리 식물 은방울꽃입니다.
◉고개를 들고 화려함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 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만나기 어렵습니다.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지 않으면 인사조차 나누기 어렵습니다.
◉허리를 굽혀 잎 사이로 마주한 은방울꽃은 방울같이 예쁜 꽃을 보여주고 은은한 사과와 레몬 같은 향기를 전해줍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의 정신을 잠시 놓게 만듭니다.
크기가 6mm 전후의 앙증맞은 작은 꽃입니다.
땅을 보고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 방울 같다고 해서 은방울꽃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보다는 이 꽃을 보고 은방울이란 말이 생겼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1930년대 ‘조선식물항명집’에 ‘은방울꽃’이라는 예쁜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방울을 닮은 난초 같다고 해서 ‘영란’(鈴蘭)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모레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사찰의 처마 끝에 달린 풍경(風磬) 같다고 해서 풍경란(風磬蘭)이란 이름도 얻었습니다.
옛 어른들은 짙고 그윽한 그 향기에 향수란(香水蘭)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풀꽃 시인 나태주는 2007년 교장 퇴임을 앞두고 췌장암으로 생사를 오고 가는 투병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기적적으로 회복해 그때부터 17년째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흔아홉 살인 그는 공주에서 ‘풀꽃문학관’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새 삶이 고맙습니다.
◉그는 투병을 거쳐 새롭게 시작한 자신의 삶을 은방울꽃에 비유해 시를 썼습니다.
‘다시 행복해진다’,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꽃말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작곡가 정연택이 곡을 붙여 가곡 ‘은방울꽃’이 만들어졌습니다.
‘누군가 혼자서 기다리다 돌아간 자리 은방울꽃 숨어서 남몰래 지네 누군가 혼자서 울다간 떠나간 자리
어여뻐라 산골 아씨 또다시 왔네’
박원후의 피아노 연주에 테너 이영화가 그려낸 ‘은방울꽃’입니다.
https://youtu.be/cGnK1Zxmcpo?si=xhoNJ9rVZPf-tq5Q">
https://youtu.be/cGnK1Zxmcpo?si=xhoNJ9rVZPf-tq5Q
◉지구상에는 크게 봐서 세종류의 은방울꽃이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은방울꽃 유라시아 지역의 유럽 은방울꽃 북미지역의 은방울꽃이 그것입니다.
사는 지역이 달라도 모습이나 살아가는 과정은 비슷합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은방울꽃은 특별한 5월의 꽃으로 대접받습니다.
◉종명 마할리스(Majalis)는 5월에 속해있다는 의미입니다.
학명 ‘Convallaria’는 골짜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Convallis’ 와 백합인 ‘Leirion’의 합성어입니다.
‘Lily of the Valley’(골짜기의 백합)가 영어에서 은방울꽃이 된 이유입니다.
‘May Lily’, ‘May Bells’라 부르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은방울꽃을 뮤게(Muguet)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아예 그 이름을 Le Muguet de Mai(5월의 은방울꽃)라고 붙여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5월 첫날은 이 꽃을 주고받는 날입니다.
독일어도 ‘5월의 종(鐘)’ (Maiglockchen)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은방울꽃이 5월의 상징이 된 것은 이때 피기도 하지만 로마인들이 5월 초에 열었던 꽃의 여신 Flora 축제 때
이 꽃을 주고받은 데서 비롯됐다고 전해집니다.
◉은방울꽃은 결혼식 부케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왕가 결혼식에서 인기가 높아 1957년 모나코의 왕비가 된 배우 그레이스 케리가
은방울 부케를 사용해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후 1981년의 웨일즈의 공주 다이애나 등 왕실 결혼식에 부케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2년 전 서거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특히 이 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해 2022년에는 가수 서인영이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일본에서 은방울꽃을 공수해 와 부케를 만드는 등
부산스러운 모습이 방송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이혼 소식이 전해진 것을 보면 꽃말처럼 반드시 다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국내 드라마에 등장했던 ost로 ‘은방울’을 만나봅니다.
2022년 드라마 ‘멜랑꼴리아’에 등장했던 노래입니다.
싱어송라이터 다니엘(Daniel)이 불렀던 원곡을 나상현씨 밴드가 드라마를 위해 다시 불렀습니다.
멜랑꼴리아(Melancolia)는 우울과 슬픔, 우울증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한 사립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수학 교사와 수학 천재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입니다.
‘은방울’(Lily of the Valley) 노래가 왜 여기에 등장했을까?
◉드라마 감독이 1년 전에 나온 이 노래는 선곡했다는 것은 2011년에 만들어진 ‘멜랑꼴리아’라는
같은 제목의 유럽 영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울증과 불안감을 다룬 SF 판타지 성격의 이 영화 포스터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이
은방울꽃 부케를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인상 깊은 은방울꽃이 10년이 지나 같은 제목의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게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서울대 출신 두 명과 연세대 출신이 한 명이 만나 구성한 나상현씨 밴드는 몽환적인 기타 멜로디와
신시사이즈 사운드에 담담한 목소리를 얹어 서정적이고도 감성적인 노랫말을 풀어갑니다.
‘그리운 시간들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면서, 새하얀 모습으로 내가 좋아하던 그때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더라
My love is a flower in your hands
우리의 시간이야
I’ll give you something unforgettable
영원한 마음이야‘
https://youtu.be/0rQXyvmp0rE?si=Rz-nyKJOFzur0zZU">
https://youtu.be/0rQXyvmp0rE?si=Rz-nyKJOFzur0zZU
◉은방울꽃은 종교와도 연관이 깊습니다.
종교학대사전에는 성모마리아의 꽃으로 부르며 청아함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마리아가 흘린 눈물이 은방울꽃이 됐다는 전설까지 만들어져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88장도 바로 이 은방울꽃을 등장시켜 예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제목이 바로 ‘The Liiy of the Valley’(은방울꽃) 또는 ‘I have found a friend in Jesus’ (내 진정 사모하는)입니다.
다만 한국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이 찬송가는 은방울꽃을 말하는 ‘The Lily of the Valley’를 ‘산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로 직역해 부르고 있습니다.
은방울꽃이 백합과지만 엄연히 다른 꽃이라는 점에서 오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구세군 찰스 플라이(Charles Fry)가 19세기에 만든 찬송가 ‘은방울꽃’을 CCM을 부르는
사중창단 아카펠드리지(Acapeldridge)의 노래로 만나봅니다.
https://youtu.be/QS6KMx_0NDQ?si=DGQFF7l84OUxD0Ov">
https://youtu.be/QS6KMx_0NDQ?si=DGQFF7l84OUxD0Ov
◉차이코프스키와 카르멘의 조르제 비제가 그의 음악 속에서 은방울꽃을 녹여내는 등
특히 유럽에서 은방울꽃은 음악 창작물의 소재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대중음악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국의 퀸의 프레드 머큐리는 은방울꽃을 소재로 한 노래를 만들어 3집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습니다.
◉은방울꽃 이야기에서 향수(香水)를 빼놓고 가기가 어렵습니다.
크리스찬 디오르는 1950년대 은방울꽃의 향기에 매료돼 명품 향수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여성들에게 익숙한 디오리시마(Diorissima)입니다.
19세기에 세워진 영국의 유서 깊은 향수회사 펜할리콘(Penhaligon)이 은방울꽃으로 만든 향수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은방울꽃의 향기를 알아채고 이 꽃을 향수란이라 불렀던 우리 옛 어른들의 안목도 대단합니다.
크리스찬 디오르는 디오리시마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 향수를 개발해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DIOR의 새 향수 광고를 하나 만나보고 갑니다.
https://youtu.be/3pbpWAt1Dxs?si=lWi-sL8Hi3ZscqkQ">
https://youtu.be/3pbpWAt1Dxs?si=lWi-sL8Hi3ZscqkQ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꽃, 행복을 준다는 꽃, 좋은 이미지의 꽃이지만 은방울은 생명체 전체에 독이 있습니다.
특히 꽃에 있는 맹독이 강합니다.
그래서 야생동물도 미리 알고 피해 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잎이 명이나물로 불리는 산마늘이나 둥굴레, 비비추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잘못 알고 먹으면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생명까지 잃기도 합니다.
독은 약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좋은 의약 재료로 개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직접 손을 대면 곤란합니다.
눈으로, 코로, 마음으로 교감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은방울꽃은 자연스럽게 원조 걸그룹으로 불리는 ‘은방울 자매’를 떠올리게 합니다.
1962년에 결성됐으니 만들어진 지 62년, 한 갑자가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현역으로 불리는 여성그룹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해체되지 않고 존속하는 여성그룹입니다.
원년 멤버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이민 가기도 했지만 새 멤버를 영입해 지금도 간간이 무대에 오릅니다.
◉이들이 부른 ‘마포종점’은 추억의 트롯 명곡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는 그 시대를 기억하게 만드는 추억의 노래입니다.
은방울 같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며 듣는 사람에게 추억으로 행복을 안겨줍니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으로 이 노래가 나온 이듬해인 1968년에 서울에서 전차가 없어졌습니다.
자연히 마포종점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련한 지난날을 돌아보게 만드는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이 오늘 노래의 종점입니다.
https://youtu.be/swgiGwCVFSQ?si=Opny6qCK3St_-_5T">
https://youtu.be/swgiGwCVFSQ?si=Opny6qCK3St_-_5T
◉앞서 만났던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은방울꽃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감동을 주는 짧은 시입니다.
‘자세히 봐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 짧은 전문이 서울 교보빌딩 광화문 글판에 걸리면서 국민 애송시가 됐습니다.
◉부처님의 자비(慈悲)는 사랑(慈)과 슬픔(悲)이 합쳐진 말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타인의 슬픔에 같이 슬퍼하는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주위의 어려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사랑을 공유하는 자비의 ‘부처님 오신 날’이 의미 있는 날입니다.
모두가 그 의미를 새겨보는 값진 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배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