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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9월10일 주일 [(녹) 연중 제23주일]
[수도회] 사랑의 충고로 실현하는 사랑의 소명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제 33,7-9
○ 제2독서 로마 13,8-10
† 복음 마태 18,15-20
◈ 오늘의 묵상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내 것을 다 주고도 못 준 것이
없는지 둘러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내가 지닌 소유와
집착, 이기심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야 하는
의무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면,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의 정신을 완성한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칩니다.
사랑은 자비와 선의로 채워지지만, 그렇다고 악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와 거짓 앞에서 사랑은 침묵하고 인내하기에 앞서
올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한 정의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웃과의 사랑을 관계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가르치십니다. 죄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에 그를 꾸짖는 행위도 사랑에 속합니다. 혹시라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상대의 진의를 왜곡할 수 있기에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은 다른 두세 사람의 증인 앞에서 진실을 고백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기기만과 편견에 빠진 사람까지
끌어안으라고 예수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행위가
자칫 불의를 용인하고, 거짓을 인내하는 위선적인 사랑으로
변질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는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고 강조합니다. 무뎌진 마음으로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악에 맞서 선의
승리를 선포하고, 거짓과 위선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사회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의
악의 연대가 강해 보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신앙 공동체의
영의 연대가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우리의 예언자 직무를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희망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2017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3,7-9
제2독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3,8-10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우리나라의 우울증 환자 숫자가 글쎄 전 세계 4위라고 하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을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튼 그만큼 우리나라가 스트레스와 소외감이 많은 나라임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에게 커다란 축복은 상상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상력은 꿈
꿀 수 있는 힘이고, 이를 통해 희망을 품고 또 그 희망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울증 환자가 많아질까요? 상상력이
없어져서일까요? 상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상상력을 키우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즉, 긍정적이고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부정적이고 절망을 바라보는데
상상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큰 선물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또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이 오히려 하느님을 느끼고 함께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하십니다. 어떤 분께서 기도 중에 분심이 너무 많이
든다면서, 이 분심 때문에 도저히 기도할 수 없다면서 분심 퇴치의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더군요. 분심 퇴치의 방법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지요.
“그 분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시고, 그 분심 안에 계신 주님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주님과 대화해보세요.”
분심 안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까요? 어디에나 다 계시는
주님께서는 이 분심 안에서도 계시기에 그 안에서도 충분히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분심 자체에 너무 깊이 빠져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분심으로 주님을 못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만나면 모든 상상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희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해당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향해서도 이러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죄를 지은 형제를 처음에는 단둘이, 그 다음에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 그리고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향해서 몇
단계에 걸린 계속된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력이
그냥 가능할까요?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마음을 간직해야만
가능합니다.
나의 조그만 노력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면서 쉽게 포기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희망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
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어른의 불완전함을 깨달으면 청소년이 된다. 어른을 용서할
줄 알면 어른이 된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할 줄 알면 지혜로운 자가
된다(앨든 나우랜드).
상사화입니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습니다.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해서 상사화랍니다.
노인의 지혜(최천호)
오래전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 한복판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원에서 불이 나더니 마을을 향해 사방에서
덮쳐오는 거센 불길에 마을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모두에게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큰 원을 그려 그 안에 불을 지르자!”
마을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노인이 말대로 했습니다. 불에
타버린 공간이 어느 정도 나타나자, 노인이 외쳤습니다.
“모두 그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시오!”
노인은 한 번 불에 탄 자리는 다시 불이 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마을 사람들을 지혜로 무사히 구해내었습니다.
‘백발은 인생의 면류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다양한
정보습득으로 지식수준이 높다 하나, 인생을 살면서 몸소 배운
‘진짜 경험’에서 나오는 삶의 지혜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삶의 지혜를 인정할 수 있고 또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누구의 그림자일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충고로 실현하는 사랑의 소명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일
에제 33,7-9; 로마 13,8-10;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사랑의 충고로 실현하는 사랑의 소명
오늘의 말씀들은 관계 안에서의 사랑의 충고에 대해 가르칩니다.
예언자는 주님의 자비뿐 아니라 경고도 충실히 전해야 할 소명을
지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의 소명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우리는 소극적으로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는 것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은
형제자매들이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충고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어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공동체생활을 교란하거나 공동체의 신용에
해를 끼친 죄를 짓거든 먼저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단둘이
만나’ 충고하라 하십니다. 그래도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사랑의 힘을 모아 타이르라 하십니다.
그마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회공동체에 알리고, 그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가 회개할 때까지 공동체에서 격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지은 사람을 처벌하고 단죄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아픔’ 중에 있는 형제자매가 치유될 수
있도록 끝까지 사랑의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모두가 당신의 생명 안에서 창조의 숨결을 이어가고,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제적 충고를 하는 것이 좋을까요?
무엇보다도 충고하기에 앞서 자신부터 사랑의 충고를 바라시는
‘자비이신 하느님’과 일치해야겠지요. 기도하며 사랑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 충고하려 할 때, 자칫 자신만이 옳고 더 낫다는 교만과
사랑이 빠져버린 이성적 판단으로 오히려 그 사람의 영혼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충고는 사랑의 마음으로 하되, 말하기에 앞서 죄지은 형제자매의
마음을 들어주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어려움과 아픔과
말 못할 고충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줄 때 비로소 그는 사랑의 충고를
들을 마음의 여백을 갖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짐을 느낄 때,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권고에 귀 기울이게
되고 행동을 바꿀 결심도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이신 하느님을 듣지 못하고서는 남의 마음을 들을 수 없고,
결국 참된 충고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적 충고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런 사랑의 경청에 뒤따르는 형제적 사랑의 충고가 죄지은
형제자매의 회개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는
충고는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충고는 사랑으로 돌아서도록 이끌어주시는 주님
안에서의 기다림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충고는 자기 생각을 주입시키려 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사랑 없는 비판을
받으면 온갖 방어기제를 사용하여 자신을 지키려 하고, 책임마저
회피하려고 하지요. 따라서 충고할 때는 다음과 같은 실천적인
점들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충고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은밀히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인격이 아니라
‘관련된 행위나 일어난 일에 대한’ 자신의 느낌만을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가능한 한 부정적 비평이나 충고는 피하되 꼭 해야
한다면 진지하고 솔직하게 해야 합니다. 충고는 구체적으로 하고
시정방법이나 대안을 제시하며, 상대에게 협력을 구하며 우호적으로
끝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사랑 안에 일치를 이루며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으로 서로를 부축하고 치유해주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뜻을 앞세운 ‘심판관’이 아니라
‘사랑의 기다림’을 안은 사랑의 치유자가 되어 다 함께 주님을
찬미하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진정한 사랑의 실천, 형제적 교정
2017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일
진정한 사랑의 실천, 형제적 교정
원선오 빈첸시오 신부님의 영원한 짝궁으로 아직도 오랜
내전(內戰)의 혼란에 시달리고 있는 수단 선교사 공민호 야고보
수사님께서 돈보스코 센터 설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셨습니다.
반백년 전, 풋풋했던 청년 수도자 공수사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선택을 하셨습니다. 당시 지구상 가장 가난했던 나라,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처참하게 파괴된 우리나라를 선교지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꽃같은 청춘을 이 땅의 청소년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셨지요.
그런데 공수사님께서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괘도에
올라선 어느 순간, 또 다른 어려운 선택을 감행하셨습니다. 또 다시
지구상 가장 어려운 나라, 거듭된 내전과 가난으로 하루하루의
생사가 제대로 보장이 되지 않는 수단으로 건너가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은 스스로의 상태를
표현하거나 방어할 재주도 능력도 갖추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세상은 강자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들과 피해자들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가련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세상에 외쳐야 할 사람들이 바로 성직자요
수도자, 선교사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언제나 보다 낮은 곳, 보다 가난한 곳, 보다 위험한 곳을 향해
교육자이자 수도자로서 순례의 길을 떠나시는 공수사님의 모습에서
참 선교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때로 총알이 핑핑 날아다니는 와중에도 공수사님께서는 더 이상
두렵지는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일부 지도층 인사들의 과도한
욕심, 물질만능주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끝나지 않는 내전, 그리고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이 참으로 불쌍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과 함께 엮어가는 수도공동체 생활 중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이웃 사랑의 실천은 어떤 것인가 고민해봅니다.
형제들을 향한 따뜻한 부성애도 아주 중요합니다. 흘러넘치는
일상적 친절과 배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형제들을 춤추게 하고
고무시키는 칭찬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끝없는 용서, 한없는 인내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더 가치있고, 꼭 필요하고, 차원이 다른
사랑의 실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형제적 교정’입니다.
그러나 형제적 교정은 말은 쉬운데,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고도의 조심성과 극도의 예민함, 숙련된 기술과 강도높은
기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 형제가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한 형제의 눈이 뭔가에
잔뜩 씌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형제가 본래의 정체성과
사명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래서 증거의 삶은 사라지고
반대표양이나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를 가장
사랑하는 형제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프겠지만 정확하고 예리한 형제적
교정 작업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작업이기에 적당히 해서는 낭패를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문제의 핵심과 정확한 현실을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교정 작업을 위한 로드맵을
세워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아주 실효성있는 교정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징 낳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오 복음 18장 15~17절)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성적인 절차입니다.또한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평정심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진정한 회개를 비는 마음, 그가 이번
기회에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예의와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나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에제키엘 예언서 33장 7절)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확실히 승리하는 총파업
2017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일
<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복음: 마태 18,15-20
확실히 승리하는 총파업
존스홉킨스 대학의 행동학자 존 B. 왓슨(John B. Watson)은 1919년
우연히 개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공포감을 느끼는 한 아이를
목격하게 됩니다.
‘공포는 선천적인 것일까, 학습되는 것일까?’
왓슨은 당시 재직 중이던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에서
일련의 실험을 계획하고 실시하는데 이게 바로 후세에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아기 알버트 (Little Albert)” 실험입니다.
이 실험은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인간에게 적용시킨 것입니다.
파블로프 실험은 1900년 초반 러시아 학자가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인데요, 개에게 종을 울리며 밥을 주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면
나중에 밥을 주지 않고 종만 울려도 개는 침을 흘린다는 실험입니다.
현실이 아닌 것에도 현실처럼 반응할 수 있도록 몸이 학습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기 알버트는 흰 쥐나 다른 종류의 동물들에 호기심을 느끼고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물을 만지거나 볼 때 뒤에서
쇠붙이와 망치를 부딪쳐 소리를 냈습니다. 알버트는 겁을 먹었고
이런 일을 반복하자 망치 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알버트는 털이 있는
모든 짐승들이나 가죽 옷, 심지어는 솜뭉치만 보아도 겁에 질리는
행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얼굴에 털 가면을 쓰고 다가가도
겁을 먹었습니다.
이 비 윤리적인 실험은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데 알버트는 6살에
‘뇌수종’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뇌수종은 스트레스로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른들의 호기심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어쨌든 이 비극적인 실험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이 필요이상의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면 그 사회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당연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그 속한 사회에서 각 개인에게
요구되는 합당한 역할을 수행해야 되는데 두려움은 그 역할수행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어떤 공동체에 속하도록
강요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파업’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지금 MBC와 KBS가 총파업에
들어간 지 며칠이 흘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때 임명되었던
사장들이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여 방송다운 방송을 할 수 없었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파업을 하는 공동체에 섞이게 된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합니다. 만약 파업이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위험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장이 물러났을 때
분명히 같은 비난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파업도 몇 명의 겁 없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됩니다.
MBC 파업도 김민식 PD가 올린 동영상이 큰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2012년 170일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5년 동안 드라마
연출은 할 수 없게 됐고 작은 골방에서 하루 종일 TV만 보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MBC의 왜곡된 뉴스를 1년 반 이상 보면 울화가
치밀어 처음엔 아주 작은 소리로 “김장겸은 물라나라!”를 외치다가
결국엔 사내에서 크게 “김장겸은 물러나라!”를 외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5월 말이었습니다. 결국
회사에도 나오지 못하여 자택대기발령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투쟁을 계속 하였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다시 MBC는 물론 KBS까지
총파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김민식 PD가 2012년 파업 때부터 받아오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다시 혼자 일어서게 된 이유는 그의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2012년 파업 당시 그는 회유파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강경파였던 동료 이용마 기자는 퇴사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상영되고 있는
‘공범자들’이란 언론장악의 실상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시사회에서 그가 울면서 자신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때 그가 끝까지 함께 버텼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단체에 속하든 이런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두려움이 없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공동체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그 배를 타고 있으면 영원한
생명을 따 놓은 당상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실 때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지금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가톨릭교회 단 하나밖에 없고 죄의 용서를 위한
권한이 교회에서 행사되고 있습니다. 이 단체에 머문다면 죄로
쫓겨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런데 파업하는 위험천만한 단체에 머물 용기는 아니더라도 교회에
머물기 위해서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바로 ‘복음전파’
소명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을
회개시켜야 합니다. 이 소명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파견하실 때
교회에게 준 사명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머물려면 선교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나에게 죄를 짓게 하면 그
형제에게 먼저 개인적으로 타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을 더 데려가서 타일러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그의 말마저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 취급을 하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교회 중심이어야
합니다. 나중에 교회가 약속된 영광을 받게 될 때는 그 복음전파
소명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지에 따라서 각자가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차범근씨가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라는 칼럼에 “나도 많이
비겁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세월호 비극이 터졌을 때
국수집 할머니가 국수집을 닫고 세월호 푯말을 들고 집회에 나가는
것을 보며 “저 국수집 주인은 괜찮을까?”라고 세월호 가족의
아픔보다는 국수집 주인이 먼저 걱정이 됐다고 합니다. 이것이 너무
미안하여 세월호 변호사인 박주민 의원이 총선에 출마했을 때 그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하기 두려워 결국
자신이나 아내의 이름이 아닌 친구 아내의 이름으로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촛불 집회 때도 얼굴이 나갈까봐 당당하지 못하게 자신을
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와대를 지날 때는 집에 간다고 하면
되는데도 거짓으로 둘러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지금 느끼는 것은 승리의 기쁨보다는 “나도 많이 비겁했다!”는
마음입니다. 김민식 PD도 상영정지가처분 신청을 뚫고 상영하게 된
‘공범자들’ 영화 앞에서 감격의 기쁨도 있었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과연 저항세력이 맞는가?”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교회에 속해있다고는 하지만 작은 두려움들
속에서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교회가 영광을 받을 때 저 역시 “저는 비겁했던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편을 명확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이면 당신도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이라는
뜻은 편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당신 편과 아닌 편. 그리고 당신의
편에게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거나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권한을
주십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란 것이 이쪽 편에도 저쪽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키게 만듭니다. 미지근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차갑거나 뜨겁거나 선택을 해야지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합니다. 파업을 할 때 두려움으로 이쪽에도 저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 제일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편에 확실히
서야합니다. 그러려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가 첫 보좌신부를 할 때 저에게 선교하셨던 할머니가 생각이
납니다. 제가 부임한지 약 반 년이 지났지만 신자들은 여전히 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워낙 큰 본당이었고
미사 후에도 고해성사를 주어야 해서 인사할 시간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후에 짬이 나사 뒷산에 올라갔는데 묵주를 드신
할머니가 다가오시더니 대뜸 “총각, 성당 다녀!”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성당을 다닌다고 했더니 어느 성당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밑에 있는 성당이라고 했더니 당신도 다니시는데 매일 미사에
나오신다고 했습니다. 저도 매일 미사 나간다고 했더니 그때서야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요즘 그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그 할머니는
확실히 교회를 선택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기셨고 또 교회를 파견하시며 세상과 싸워 이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총파업으로 세상을 이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받을 때 고개를 함께 들고 기쁨을 함께 나눌
일원들이 되기 위해 두려움 없이 이 싸움에 열렬히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확실히 승리할 총파업에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사랑하기를 멈추지마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9월9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루가6,1-5)
사랑하기를 멈추지 마라.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성체는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미사참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비를 청하는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에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악 법도 법”이라고 선언하고 결국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은 악법이 사람을
죽이는 폐해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유다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율법 중 하나였던 안식일은 하느님을
기억하며 제 삶의 처지를 반성하는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억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에 오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참으로 가난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비벼먹을 수밖에 없었고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빵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면서도
빈털터리로 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질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의 탐욕과 쉽게 결탁하여 종종 악을 불러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예언을 하고 미래를 알려 준다며 돈을 챙기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분명 예수님이 제자가 아닙니다. 일부 교파에서 교회의 세습
문제로 갈등을 가지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작은 차를 타시고
일반 숙소를 이용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니 후손에게도 재산이 아니라 신앙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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