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0626. 묵상글 (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48 추가
----------------------------------------------------
250626.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읍시다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되는 마지막 7장 끝부분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처럼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인가 또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모래위의 집을 것인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집 짓기는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평생과정임을 봅니다. 저의 평생 하루하루 매일 강론 역시 평생 예수님 반석위에 집짓는 마음으로 씁니다.
과연 지금 내 인생집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늘 점검해 봐야 하겠습니다. 바로 날마다의 미사전례 시간은 내 인생집이 예수님 반석위에 잘 지어지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잘 들여다 보면 산상설교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야 말로 바로 반석위 인생집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도들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모든 성인들 역시 성공적으로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은 분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데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구체적으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시종여일 말씀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같은 삶이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의 비유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수도원, 교회, 국가든 모든 공동체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 재직동안 12년 동안 거의 매일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삶과 동향을, 그리고 글을 읽었습니다. 이어 지금 저는 레오 14세 교황의 매일의 행보를 보고 배웁니다.
말 그대로 한결같이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다가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이요 뒤를 잇는 267대 레오14세 교황 역시 정중동의 행보중에 ‘경청과 균형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교회 일치와 화해를 위해 힘을 다하고 있음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레오14세 교황 역시 지금까지 평생 반석위에 인생집을 잘 지어오셨고 여전히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계속 잘 짓고 계십니다. 레오14세 교황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참으로 슬기로운 예수님 정통파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늘 새벽 읽은 레오 교황의 말씀중 몇 대목입니다.
“네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켜라.”(Keep your eyes on Jesus)
“사제생활에 열정적이 되라.”(Be passionate about priesyly life)
교황청을 방문한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갑시다. 우리의 희망! 그분은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
(Let’s go to Jesus, our hope! He can heal us!“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시 한 대목입니다. 중앙아시아(Middle East) 신자들에게는 “온교회가 너희와 함께 있다” 격려하였고, 방문한 주교들에게는 “친교의 사람들이 되라”(to be men of communion)고 호소하였습니다.
옛 현자도 인생집을 짓는데 한곁같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갈길이 멀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다산>
“짐은 무겁고 길이 멀기에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논어>
우보천리의 자세로 평생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어야 함을 배웁니다. 삶은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인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완성을 향해 지어가는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입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반석위에 지어지는 인생집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도외시 하고 제 좋을 대로 살아 온 이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참 냉혹하지만 우리의 무지와 태만에 죽비같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은 평범한 일상 모두를 통해 이뤄집니다. 창세기의 아브람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사가 참 복잡합니다. 사라이의 호의로 아브람이 그의 몸종 하가르를 통해 이스마엘 아기를 갖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가정은 큰 분란을 겪지만 하느님은 든든한 배경이 되어 하가르외 이스마엘을 돌봄으로 아브람은 위기를 벗어납니다.
아브람의 부족을 보완해 주면서 그가 인생집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되시니 말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져야 반석위에 인생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 온 아브람이기에 주님은 그의 일시적 부족을 보완해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온 슬기로운 이들과 실행하지 않은 어리석은 이들의 결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 실감나게 묘사됩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우리는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는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모래위에 인생집을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집짓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방법이자 비결은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끝까지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요, 아버지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평생 반석위에 인생집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250626.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6.26 04:34
- 감성과 욕망까지 주님의 종인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누구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그의 종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이 아니고,
마음으로 주님이지만 실천으로는 주님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주님이 입에 있는 종이 있고,
주님이 마음에 있거나 실천에 있는 종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남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라는 인간의 종으로서의 역사를 얘기하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자기주장이 강하고 제 뜻대로 하려는 경향이 강했을 때
수도원에 살면서도 저는 주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말로만 곧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나무라시지만
저는 입으로도 주님을 부르지 못한 종이었습니다.
내가 왜 종이야? 내가 왜 주님의 종이야? 하곤 했는데
종이라는 것이 싫어서 주님의 종인 것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삼십 중반이 지나서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마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이때 제일 많이 기도한 것이
삼종 기도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입니다.
의지의 작용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라는 저의 정체성을 명심하고 각인하려는 노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후 저는 인사이동 때 어디 가고 싶다,
어디는 가기 싫다고 하지 않기로 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일에서는 주님의 뜻대로 실천하려고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는 의지가 작용하지 않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내 좋을 대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좋을 대로 하기에 주님의 뜻을 생각지 않거나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내 좋을 대로 하곤 합니다.
내 좋고 싫은 것 곧 내 감성에
내 이성이 마비되거나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요즘 무엇을 먹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다.
생각 없이 입맛대로 먹지 입맛을 주님께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옛날 저는 프란치스코가 밥에 물을 타거나 재를 뿌려서 먹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까지는 못해도 맛있는 것을 골라 먹지 않으려고 했고
더 근본적으로 맛을 제 입에서 없애려고 곧 맛 있고 없고가 없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프란치스코처럼 주님께 입맛을 맞추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내가 프란치스코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프란치스코처럼 맛을 초월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주님의 종이 되려면 나의 싫고 좋음이 없어야 하고,
그것도 주님 때문에 나의 싫고 좋음이 없어야 하며,
욕망까지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성과 욕망까지 주님의 종이어야 하고,
좋아하는 것과 욕망하는 것이 주님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인데
그러니 주님의 은총을 청하며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50626.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항상 이야기의 결말처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늘나라의 참 행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설교는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리지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자기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에게서 오신 외아들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뜻과 그 실행방법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직접 겟세마니에서는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외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일’이요,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부당함을 당하고도 침묵으로 감싸주면서 억울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신 까닭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이라고 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가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
250626.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형제님은 의사에게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병자성사를 받으시면서 형제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기의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홀로 남게 될 아내가 걱정되어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내는 30년 넘게 투석을 받고 계신데, 그동안 형제님이 함께하며 매일 투석을 도와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떠나면, ‘아내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그 걱정에 눈물이 나셨다는 겁니다. 저는 형제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전엔, 이 성사를 ‘종부성사’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병자성사’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임하는 시간이고, 성령께서 힘과 평화를 주시는 시간입니다.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10년을 더 사신 분도 계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고 위로해 드렸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형제님과 그 가정 위에 하느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청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마카베오 하권의 신앙과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카베오 하권은 우리 신앙의 두 가지 교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 신앙’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오늘은 마카베오 하권에서 드러나는 신학 사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신앙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먼저,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7형제와 그 어머니가 박해 속에서 목숨을 잃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실 거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단지 이 세상 삶만 바라본 게 아니라, 죽음 너머의 삶, 다시 살아날 그날을 믿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고통을 보면, 그냥 억울하게 죽는 게 아닙니다. 자신들이 고통을 받음으로써 민족 전체가 정화되고, 하느님께 돌아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 고통이 누군가를 위한 대속이 될 수 있다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도 이어지는 개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죽은 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속죄 제물을 바칩니다. “혹시 그들에게 죄가 있었을지 모르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자”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지금도 연미사를 드리고, 연도 바치며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이들뿐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기억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성전과 율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장소, 바로 성전이 더럽혀졌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다시 정화했을 때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성당이 왜 중요한지, 성체가 왜 소중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입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을 보면, 하느님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힘든 시기에도 역사 안에서 함께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카베오기 하권은 가정과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도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신앙 선배로서 다음 세대에게 믿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이 책은 성전과 율법, 공동체의 신앙,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강조합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감동적인 장면은 일곱 형제의 어머니입니다. 자녀들을 끝까지 신앙 안에서 지켜내는 모습. 우리도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선배로서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그렇습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하는 신앙. 그 신앙이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단지 입술에서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병자성사를 받으며 눈물 흘리던 형제님처럼, 가족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그 삶. 그 삶이야말로 부활의 신앙이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신앙의 반석 위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
250626.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보살핌의 공동체!
하느님의 숨
2025.06.25. 20:1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6월 23일 수요일 - 스물다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변화의 공동체를 창조하기
서로간에 배려하는 관계성은 사랑과 신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랍비 샤론 브로스(Sharon Brous)는 의미가 충만한 공동체의 중심에는 개개인에 대한 보살핌과 서로에 대한 배려의 관계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상호 배려의 관계성은 사랑과 신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배려심을 갖고 우리 마음에 소중히 간직할 사람들이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그들이 잘못해도 그들을 용서하고자 하고, 그들도 우리를 똑같이 대해 줄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힘든 순간들은 물론이고 기쁨의 중대한 순간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함께할 때 우리는 번창하며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공동의 목적을 향해 이루어진 관계성은 서로에 대해서뿐 아니라 같은 꿈을 나누고자 하는 상호간의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만일 최선의 장소가 상호 배려와 공동 목적의 교차점이라면, 저는 그 교차점에 자리 잡은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싶습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모든 예식과 모든 봉사, 모든 함께함을 서로간의 연결됨을 심화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사람들을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는 개개인이기도 하고, 또 상처가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개개인이라고 여기며,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위대한 전체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종류의 공동체는 "당신은 어디에서 일합니까?"라는 질문보다는 "당신은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의해 추진력을 받습니다... 이런 종류의 공동체는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고 슬픔을 나누고 배우고 성찰할 정기적인 기회를 자기들의 영적인 닻으로 삼습니다. 이런 공동체는 더 넓은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의의 사람들의 집단적 힘을 인식하고 거룩한 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닦는 것을 우선시합니다. 이런 공동체는 단순히 사람들을 자기들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서로간의 소속감과 친밀감, 진실함, 사랑, 그리고 책임감을 키워주는 신성한 공간을 창출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입니다. [1]
우리 문화에서 수많은 사람이 겪는 집단적 외로움과 절망을 인식하면서 브로스의 공동체는 사람들을 그들이 있는 곳에서 만나는 데 더 심오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랑과 소속됨의 신학을 설교하는 일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들이 그 계명을 반드시 끌어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해온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멘' 효과입니다. 특히 힘든 날에에는 서로의 말을 듣고, 서로를 포용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신성한 계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에게 "아멘"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신성한 수치와 상처를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게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단절과 외로움, 암울함, 불안과 중독 등에 대해 진솔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소속감이 있는 공동체는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에도 우리가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 공동체가 우리를 감싸주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함께 걸어가기 시작하는 공간입니다.
여기서 과학적 데이터와 영적인 통찰력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단절은 우리 사회를 갉아먹은 어둠의 전염병입니다. 이에 대한 해독제는 풍요롭고 의미 깊은 연결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에제르케네그도(ezer k'negdo: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최초의 조력자 여성에 대한 히브리어) [2] - 즉 관심과 배려로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주는 사람, 밤새 우리와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사람, 참호 속에서 우리와 함께 몸을 숙여 머물러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우리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사랑으로 열심히 일해 줄 사람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최근에 흑인 모세와 테오도라와 같은 사막의 많은 교부들과 교모들이 아프리카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저는 제가 보고 자라왔던 많은 영성 공동체와 종교 공동체와는 달리 피부색이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 공동체들에 사는 신비주의자를 다시 상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계 어린이였던 저는 이와 같이 사막의 금욕주의자들, 즉 예수님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저와 닮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공동체를 희망했었습니다. 만일 제가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예수님과 같은 비현실적인 이미지에 예배를 드리라는 가르침을 받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리스도교를 얼마나 다르게 경험했었을까요? 저는 이 전설적인 개인들과 공동체들에 관한 이야기 전체를 들려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치유를 가져다줄 것이며, 편협한 미국의 종교 이야기들을 지적해 주는 의미심장한 반대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Roberta T.
References
[1] Sharon Brous, The Amen Effect: Ancient Wisdom to Mend Our Broken Hearts and World (Avery, 2024), 39, 41–42.
[2] Ezer k’negdo is the Hebrew word found in Genesis 2:18. 이 말은 주로 조력해 주는 협력자로 번역되지만, 본래 의미하는 바는 다른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외면하는 때에도 여러분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k’neged lo)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an ezer)입니다(Brous, 35–36).
[3] Brous, Amen, 44–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oel Muniz,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코로나 팬데믹 시가에 푸드 뱅크에 음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연대라는 단순한 행위 안에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나설 때 참된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이 조용하게 상기됩니다.
===============
숨영성 묵상글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한 길....
하느님의 숨
2025.06.26. 06:15
오래 전 종신서원을 준비하면서 30일간의 개인 피정을 할 때 저에게 큰 화두로 다가왔던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권고 말씀의 메시지를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저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을 성찰해 보게 됩니다.
권고 말씀 6번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견디어 내신 착한 목자를 주의 깊게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난과 박해, 수치와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등 모든 점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이렇게 업적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그저 이야기하고 설교만 하며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로서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작은 그리스도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과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권고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성령에 힘입은 고백이라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뒤에 당신을 참으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참으로 실행하는 삶!
어떤 영성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과 관련한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객관적인 사실이 참이나 거짓이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 객관적인 사실들의 예는 '하느님은 존재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이를 영원히 구원하신다.' 등등.... 이 사실들은 우리 신앙에 있어 근본적인 초석이 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이런 진리를 그저 말로 고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을 실행하고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일종의 화두로 우리에게 던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주님께서 예를 들어 주시는 이 많은 이들은 실제로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당신의 이름으로, 즉 당신의 현존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그런 일들을 일으키시는 분은 우리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성찰해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는 등의 여러 가지 기적들을 일으킨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의 선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참으로 의식하고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업적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것의 나의 것으로 취하는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과 자비의 일을 우리를 통해서 하시지만 우리의 힘을 빌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빌려 당신 사랑과 자비의 힘으로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선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선을 입는 당사자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되나, 매개자인 '나'는 그 선을 전혀 입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이렇게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과 같다."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즉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진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등등.... 이 모든 말을 아무리 한다 해도, 그것을 전하는 것마저도 하느님의 은총임을 인식하지 않는 한 그 선이 우리에게 작용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 말씀 2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자기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결국, 악마의 꾐에 빠져 계명을 거슬렀기 때문에, 먹은 것이 그에게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는 선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아담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선을 실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더 심오한 문제를 우리에게 화두로 던져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시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 화두에 잠시 머물러 보시면 뭔가가 영감으로 떠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영감이란 우리의 참된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세상적인 지위고하와 사람들의 능력과 재능 등의 문제는 그 사람 자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모든 사랑과 능력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달리 말해 우리 이런 세상적인 능력이나 재능 혹은 높은 지위라도, 아니 심지어는 영적인 능력까지도 그것이 어떤 사람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온전히 선이요 자비이며 모든 능력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유래한다는 진리를 얼마나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본래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해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참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즉 "저는 당신의 피조물 중 하나일 뿐입니다!"라고 겸허히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선을 실행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나'에게도 그 선이 작용하게 하는 참된 겸손이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주님께서 자신이 너무 꺼려하던 나환우들에게 데려가셨고, "나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는 실제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뒤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서 떠나올 때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가 참으로 자비를 입었던 것은 그 자비가 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우리가 비록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비천한 이일지라도 우리는 절대 하느님의 눈에 비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비천함을 들어 높여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적인 눈으로 자신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진정으로 하느님의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런 선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마음, 즉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화두를 던져 주고 계신 겁니다....
----------------------------------------------------
250626.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유다인을 자그마치 43만 7천 명을 학살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잘 알 것입니다. 나치 독일 패망 이후 도망자로 살다가 1961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기소되었습니다. 그가 직접 계획하고 명령해서 수많은 사람의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그는 끝까지 “어떠한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정신이 이상한 것일까요? 어떻게 그런 끔찍한 학살을 계획하고 명령했으면서도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했습니다. 그 결과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고, 그중 한 명은 “내 상태보다도 정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상이면서도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합니다. 악이 평범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스스로 악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학살이 아니라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법률을 준수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았고, 또 상대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도 가능합니다.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경우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더 나은 방법이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 이런 식으라면 자기도 모르게 끔찍한 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이웃 사랑을 강조하신 주님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이렇게 머물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 말씀을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진정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즉,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말씀하시지요. 외적인 신앙 고백이나 감정적인 열정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만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고 하십니다.
참된 신앙이라는 무엇일까요? 주님 말씀대로, ‘입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삶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깨닫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면서 사랑의 실천에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만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
오늘의 명언: 역경은 당신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할 용기를 준다(앤디 그로브).
----------------------------------------------------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카카오톡채널 ‘갑곶순교성지’- 소식에 들어가시면 다일 묵상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https://www.band.us/band/69309768
밴드 “복음 맛들이기”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고도미니코’로 들어가세요.
아주 가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아버지 뜻인 기쁨과 감사를 실천하는 삶을 / 연중 제 12주간 목요일(마태 7,21-29)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다 들어가는 게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만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이가 나에게,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고,
주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무엇이 ‘그분 뜻’이겠는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답은 영성 생활이다.
어떤 이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켰더라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다.
무엇이 과연 잘못된 걸까?
결과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버지 본래의 그 뜻을 실행한 것이 아닌 셈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주님의 이름만을 빌려 자기 스스로 여유로운 묵상과 내적 고민도 없이,
‘자신만의 성급한 결정’으로 야단법석을 떨면서 하느님의 뜻과는 상당히 먼 거리가 있었기에 그러할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주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이와 같이 현명한 이란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슬기롭고 지혜롭게 주님 빛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되,
그 끝에 대한 분명한 책임감과 건전한 현실 감각을 지니고 있으리라.
또 그는 영성 생활은 물론 매사에 단호함과 주의력을 단단히 가져서,
올바른 선택을 흔들리지 않게 실천하는 신앙인이리라.
그러기에 변화하는 상황에 주님 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길을 주의 깊게 찾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지혜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침묵과 내적 여유 속에 선입관과 욕심에 따른
성급한 결정을 피하려는 노력을 반복함으로써 얻을 게다.
따라서 주님 말씀을 늘 기도와 묵상 중에 새기면서,
현명하게 실천하려는 신앙인의 일상의 삶을 게을리 하지 말자.
사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아버지의 뜻’을 ‘기쁨의 생활’에서 찾으려 했다.
하느님의 설계도는 먼저 인간이 감사와 즐거움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거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인류이기에 감사와 기쁨은 삶의 의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가 불안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되리라.
그렇게 사는 것은 분명 ‘그분의 뜻’이 아닐 게다.
믿는 이로 믿음의 향기를 뿜어내면서 바쁘고 고난의 길 한 모퉁이에서 한걸음 물러난 삶을 제대로 살자.
그러기에 누가 뭐래도 신앙생활은 진국을 우려내는 것과 같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깊은 신앙의 맛이 자연스럽게 나오기까지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며 노력해야 할 게다.
미사와 성사, 기도와 선행, 희생과 양보 등 신앙생활의 실천 사항들을 묵묵히 이어 갈 때
얻을 수 있는 커다란 힘이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하지를 말자.
아버지의 그 뜻이 담긴 기쁨이 끊이지 않을 때, 비가 와 홍수의 그 난리에서도,
반석 위에 그 집처럼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따라서 주님 말씀에 기도로 귀 기울여, 기쁨과 감사로 ‘배려와 겸손’이 배어 있는 삶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자.
그분은 생명과 함께 우리에게 ‘자유 의지에 따르는 삶’도 주셨기에.
그러니 그 길을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이를 영성적인 삶이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이란다.
그러니 종말에 닥쳐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거나 숨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반석 위에 나의 집을 조금씩 지어 가자.
따라서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에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되어야 하겠다.
----------------------------------------------------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마리아사랑넷 홈페이지– 신앙생활– ‘오늘의 복음- 말씀 초대’에 들어가 맨 아래에 보세요.
----------------------------------------------------
==========================================================
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
양승국, 전삼용, 조욱현, 송영진, 정인준, 오상선 신부님의 강론 글
또는 묵상글은
조명연 신부님이 운영하는 다음카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의
신앙과 영성 뜨락 - 각 신부님 부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bbadaking
아니면 다른 신부님 등 묵상글 안내가 소개된
아래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nansimba].
[슬로운 묵상] 하늘의 온도 -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며,
내 삶의 순간들을 천천히 되돌아봅니다.
나는 언제 하느님과 가장 가까웠던가?
때로는 하느님을
나의 행복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 뜻대로 일이 잘 풀릴 때,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마치 하느님께 인정받은 듯 기뻤습니다.
그러나 진정 내가 하느님을 가장 절절하게 만난 순간은
그런 때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팠을 때,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돈 바로 그 순간,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분 자체로 충만한 사랑이심을 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런 나의 체험과 닮아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 주님 하며..
마치도 주님과 아주 가까운 듯 기도한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함께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갈 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간절히 청할 때,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길 때,
비로소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고, 그분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이 시작됩니다.
나는 이제 다시 조용히 기도합니다.
나의 삶이 그분의 뜻에 온전히 일치되도록,
하느님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하도록.
『하늘의 온도』
인간의 정상 체온이 36.5도인 것처럼, 믿음에도 가장 건강한 온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차가우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 뜨거우면 이기적 열심히 주변을 다치게 합니다.
입술로만 '주님, 주님' 부르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생명력 있는 36.5도의 평온한 믿음으로
하느님과 꾸준히 일치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
김명겸 요한 신부님.
+++++++++++++++++++
+++++++++++++++++++
----------------------------------------------------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리스트에서 작성자 “박영희”님을 찿아가시면 보실 수 있음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Izfk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정인준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O4U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기경호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현재는 과거 묵상글을 일부 수정하여 누군가
게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rqr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오상선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현재는 과거 묵상글을 일부 수정하여 누군가
게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
----------------------------------------------------
================================================
================================================
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66
6월26일 [연중 제 12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작은형제회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민원을 귀찮은 일로 생각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배석한 국무위원들에게 한 말이 제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수많은 민원들이 각 부처로 올라옵니다. 민원을 귀찮은 일로 생각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민원들 가운데 정당한 민원은 가급적 뒤로 미루지 말고 즉각 즉각 해결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주십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민원에 대해서는 책임자들이 직접 당사자들과 직접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 공동체도 귀담아 듣고 반성하고 성찰해봐야 할 부분입니다. 저도 작은 공동체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이런저런 민원을 자주 접수합니다. 돌아보니 민원에 대해서 귀찮아 하는 경향이 있었고, 때로 무시하고, 때로 자꾸 뒤로 미루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정당한 민원은 미루지 말고 즉각즉각 대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 온 종일 바빴습니다. 진입로 도로를 보수했습니다. 204호 전구를 교체했습니다. 변색된 변기도 교체하고, 문짝도 수리했습니다.
오늘 주님 권고 말씀이 유난히 제 가슴을 찌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거룩하고 선한 의지가 머리와 가슴에만 머무르지 않고, 발까지 내려오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조금이라도 실행하는 사람이 되자며 나름 발버둥 쳐야 하겠습니다.
호주머니에 쏙 들어갈 작은 노트 하나와 볼펜을 늘 지니고 다니다가, 그때그때 떠오르는 꼭 처리해야 할 일들, 미리미리 대처해야 할 일들, 읍내 나가면 잊지 말고 사와야 할 물품들을 열심히 적습니다. 실행한 사항은 하나하나 지워 나갑니다.
그러나 좀 더 노력할 측면이 있는 듯 합니다. 결심이나 과제들이 꼭 외적인 것들, 일과 관련된 것들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으로 넘어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눈여겨볼 인물이 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3대 총장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1856~1931)입니다.
그는 연초가 된다든지 연례 피정 끝에는 반드시 몇 가지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수립하고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서원이나 서품, 피정 등 영적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결심에 또 결심을 계속했습니다.
1889년 필립보 리날디 신부가 스페인 원장으로 발령나자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앞으로 청소년들에게 더 따뜻하게 대하겠습니다. 더 자주 그들과 대화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더 자주 그들 가운데 머물겠습니다.
관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필립보 리날디 신부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더 겸손해지고, 더 친절해지고, 더 신중해지고, 더 자애로워지겠습니다. 더 이상 거친 태도를 보이지 않겠습니다. 지치거나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이런 계속된 결심들이 그를 더 따뜻한 사람, 더 성숙한 사람으로 변모시켰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
<매일 강론을 쓰는 것이 힘들면서도 행복인 이유>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는 것’에 머무는 신앙과 ‘살아내는 것’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갈림길에서, 우리 자신을 비추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합니다. “아예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과 “열심히 듣지만, 들은 대로 실행하지 않는 사람” 중, 과연 누가 더 나쁘며, 자신과 공동체에 더 큰 해악을 끼칠까요?
오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 말씀과 함께 우리 삶에 더욱 와닿는 실제적인 예화들을 통해 완성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아예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선택은 분명 비극적이지만, 그 피해의 무게는 놀라울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됩니다. 이는 마치 의사에게 중병을 진단받고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소. 그런 치료법은 듣고 싶지 않소.”라며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그의 완고함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을 낳습니다. 그의 가족은 슬퍼하겠지만, 그의 선택이 병원의 다른 환자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그의 피해는 안타깝게도 그 자신과 자신에게 한정됩니다.
두 번째 유형은 ‘들으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위험합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 신뢰받는 ‘내부자’로서, 그의 작은 ‘불이행’ 하나가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외과 의사가 치명적인 감염을 막을 새로운 소독법을 교육받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는 그 중요성을 ‘듣고’ 알았지만, 자신의 경력을 과신하여 그 절차를 무시합니다. 그 결과, 수술을 받은 환자뿐 아니라 병원 전체에 감염이 퍼져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참사가 벌어집니다. 제가 알던 한 신부도 유능하다고 여겨지고 본인도 그렇게 믿었던 한 의사가 수술 후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을 하지 않아 돌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욱 실제적인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베테랑 시내버스 기사가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무사고 경력을 자랑합니다. 그는 정비팀장에게 “최근 타이어 이탈 사고가 잦으니, 매일 아침 출발 전 반드시 렌치로 타이어 볼트를 직접 조이며 확인해야 합니다. 눈으로만 봐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는 새로운 안전 수칙을 ‘듣습니다’. 그는 물론 그 중요성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 일을 20년이나 했는데, 척 보면 알아. 괜찮을 거야.’ 그는 가장 중요한 안전 점검을 건너뛴 채, 수많은 승객을 태우고 운행을 시작합니다. 결국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의 바퀴가 빠지면서 대형 참사가 발생하고, 수많은 승객과 다른 운전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칩니다. 대부분 대형 사고는 이렇게 터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마태 7,21) 경고하시는 대상이 바로 이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미사에 참여하여 말씀을 듣고,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큰일을 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미사를 통해 ‘안전 수칙’을 듣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정의를 실천하여라”,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섬겨라.”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는 교만함으로, ‘다음에 하지’라는 게으름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점검을 건너뛰고, 양심의 소리라는 경고등을 무시하고, 기도의 의무라는 타이어 볼트를 조이지 않은 채 세상을 향해 출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실행하지 않음’은 단지 우리 개인의 영혼을 좀먹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를 믿고 ‘신앙’이라는 버스에 함께 올라탄 우리 가족, 우리 자녀, 우리 이웃들을 영적 위험에 빠뜨리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저 신자라는 사람들을 보아라. 말과 삶이 저렇게 다르지 않은가”라며 하느님의 이름 자체를 모독하게 만듭니다.(로마 2,24 참조)
사도 야고보의 말씀처럼, “실천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일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야고 2,17 참조) 모래, 곧 실천 없는 마음으로 집을 짓는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와 용서 같은 아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사제가 되라는 뜻을 거부한 사람이 더 위험할까요, 사제로 살면서 사제답게 살지 않는 사람이 더 위험할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더 높은 수준의 영성으로 간다는 말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책임감을 요구합니다. 들으면서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아예 듣지 않으려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 듣지 않는 사람은 실행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읽으며 실천할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실천할 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저는 하.사.시.와 성경 묵상을 통해 매일 순종할 말씀을 찾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부족합니다. 자신의 길을 아주 명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특별히 매일 강론을 쓰면서 신자들만이 아닌 제가 실천해야 할 것을 찾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쁨이기에, 저는 힘들지만 죽기까지 강론을 쓸 것 같습니다. 말씀을 읽으며 순종할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것을 찾기 위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형제님은 의사에게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병자성사를 받으시면서 형제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기의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홀로 남게 될 아내가 걱정되어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내는 30년 넘게 투석을 받고 계신데, 그동안 형제님이 함께하며 매일 투석을 도와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떠나면, ‘아내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그 걱정에 눈물이 나셨다는 겁니다. 저는 형제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전엔, 이 성사를 ‘종부성사’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병자성사’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임하는 시간이고, 성령께서 힘과 평화를 주시는 시간입니다.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10년을 더 사신 분도 계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고 위로해 드렸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형제님과 그 가정 위에 하느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청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마카베오 하권의 신앙과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카베오 하권은 우리 신앙의 두 가지 교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 신앙’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오늘은 마카베오 하권에서 드러나는 신학 사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신앙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먼저,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7형제와 그 어머니가 박해 속에서 목숨을 잃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실 거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단지 이 세상 삶만 바라본 게 아니라, 죽음 너머의 삶, 다시 살아날 그날을 믿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고통을 보면, 그냥 억울하게 죽는 게 아닙니다. 자신들이 고통을 받음으로써 민족 전체가 정화되고, 하느님께 돌아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 고통이 누군가를 위한 대속이 될 수 있다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도 이어지는 개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죽은 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속죄 제물을 바칩니다. “혹시 그들에게 죄가 있었을지 모르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자”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지금도 연미사를 드리고, 연도 바치며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이들뿐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기억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성전과 율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장소, 바로 성전이 더럽혀졌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다시 정화했을 때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성당이 왜 중요한지, 성체가 왜 소중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입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을 보면, 하느님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힘든 시기에도 역사 안에서 함께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카베오기 하권은 가정과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도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신앙 선배로서 다음 세대에게 믿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이 책은 성전과 율법, 공동체의 신앙,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강조합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감동적인 장면은 일곱 형제의 어머니입니다. 자녀들을 끝까지 신앙 안에서 지켜내는 모습. 우리도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선배로서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그렇습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하는 신앙. 그 신앙이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단지 입술에서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병자성사를 받으며 눈물 흘리던 형제님처럼, 가족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그 삶. 그 삶이야말로 부활의 신앙이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신앙의 반석 위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참된 우정은 내가 잘나갈 때보다 실패하거나 곤경에 놓였을 때 더욱 드러나는 경향이 있고, 참된 신앙은 평온함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반석은 말과 기도가 아니라 당신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 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폭풍이 우리 삶을 덮칠 때까지는 누구도 자신을 참신앙인이라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반석 위에 굳건히 머무는 한, 그의 집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신심에 도취하지 않도록,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을 방패 삼지 않도록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때때로 진심과 행동이 없는 말들로 주님 앞에 나서지는 않는지요? 하느님과 우정의 친교를,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길은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아름답게 말하거나 성경을 잘 설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산상 설교의 결론은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우리 공동체는 기도와 실천, 찬양과 행동의 균형을 잘 지키고 있나요? 우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반석’은 무엇인가요? 삶에서 시련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 안에 진실하게 받아들여 그 말씀을 뜨겁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리하여 삶의 폭풍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21-29: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라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착하게 참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면서도 진실한 믿음의 행실이 따르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가를 모래 위에 집짓기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23절) 하신다. 이 말씀은 현세의 삶과 그것이 맺는 열매와 그 안에서 덕이 얼마나 큰 힘을 미치는가를 가르치신다.
덕의 힘은 삶의 어려움에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지닌다. 그는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어떤 재앙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반석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강물은 유혹과 박해의 형태로, 꿋꿋이 서 있는 듯 보이는 사람에게까지 들이친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바닥과 기초로 모시고 있지 못하면 무너지고 만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이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져 모든 박해를 이겨낼 수 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며,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유혹이 불어 닥치면 그 집은 무너진다. 사악한 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집은 모래 먼지로 가득하고 성난 물이 그 마음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이 혼탁한 죄의 강물은 그 집의 주춧돌까지 뒤흔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서 권위를 느꼈다고 한다. 그 권위는 그분의 말씀에서 드러난 사랑 때문이었다. 참사랑에서 참된 권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닮아갑니다>
마태오 7,21-29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내 말을 실행하여라, 청중의 반응)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닮아갑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
당신을
믿으니
닮아갑니다
나
당신을
닮아가니
참으로
믿음입니다
나
당신을
희망하니
닮아갑니다
나
당신을
닮아가니
참으로
희망입니다
나
당신을
사랑하니
닮아갑니다
나
당신을
닮아가니
참으로
사랑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쭉정이’일 뿐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1-27)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8-29)
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는 말씀은, “믿음이란,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실천하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신앙과 생활이 하나인 사람입니다. 지금 이 말씀에 대해서, “박해 때에 순교자들이 신앙을 ‘말’로 증언하고 고백한 일도 해당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신앙을 ‘말’로 증언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이라면, 그 ‘말’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 하는 말이고, 따라서 그 증언은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신앙을 ‘온 삶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순교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은, 박해 때에 신앙을 고백하고 죽었다는 그 하나의 일만 보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순교 성인들은 일생 동안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다가 순교로 그 신앙생활을 완성한 분들입니다.>
2) 22절의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은, 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사람들로 인정받지 못했을까? 그 일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일은 ‘불법’인 일이라는 것인데, 그 자신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일은 ‘주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으로’ 한 일이거나, 그 일들 자체가 거짓일 것입니다. ‘거짓 예언’을 하고, 속임수로 마귀를 쫓아내는 척 하고, 가짜 기적으로 사람들을 속였을 것입니다.
3) 25절과 27절의 ‘비’와 ‘바람’은, 환난과 박해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라는 결과에 초점을 맞춰서 ‘심판’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으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환난과 박해 때에는 신앙을 굳게 지키고, 심판 때에는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말로는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환난과 박해를 만나면 금방 신앙을 버리고, 그런 사람들은 심판 때에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돌밭’에 연결됩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실천하는 믿음은 말씀의 뿌리를 잘 내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실천 없이 말로만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씀의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4) ‘우리의 신앙은 시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환난과 박해를 단련과 정화의 기회로 삼을 수는 있지만, 신앙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가 ‘알곡’이고 누가 ‘쭉정이’인지, 즉 누가 ‘충실한 신앙인’이고 누가 ‘말로만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인지 환난과 박해 때에 잘 드러나게 된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실제 상황을 보면, 환난과 박해가 없을 때에도 신앙생활의 실체가 잘 드러납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상황에서는 주님을 아쉬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간절하게 주님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해 때에는 배교자가 많이 생기고, 평화로울 때에는 냉담자가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힘든 일이 전혀 없어서 편안하기만 한 때도 신앙생활이 위험해지는 ‘위기’가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음을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시련, 단련’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를 몰라서 시험해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아주 세세하게 잘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또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나에게 알맞은 은총을 주시고, 단련과 정화의 기회도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
[글라렛 선교 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오 복음 7장 21절)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신 말씀이다. 그분을 안다고, 그분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간단히 말해서 신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산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구원의 열쇠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못을 박으신다.
오늘의 말씀을 대하면서 진정성(眞情性)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진정성이란 쉽게 말해서 진실함을 말한다. 즉, 말이나 행동에 있어 진실함이 보일 때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고 표현한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신자가 아니어도 좋으니 잘 살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신자라 한다면 믿음에 책임을 지라는 말씀이시다. 결국 진정성의 여부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을 안다고, 그분을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의 고백에는 얼만큼의 진정성이 실려 있을까?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고백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이들은 삶 역시 진실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의 신앙에 구체적인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큼 진실한 신앙에 이르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다. 진실해야 한다. 적어도 하느님께 대한 고백은 작은 아멘 소리에도 진실해야 한다.
=====================
[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마다 늘 마음 한구석이 무겁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그리고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언뜻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망설임의 시간들이 내 생활 안에서 반복되기 일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전례 안에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주인이신 동시에 나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를 때마다 그 무게를 다 실감하지는 못합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습니다.”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참으로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고, 마음보다 중요한 것이 행동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그 고백은 이제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슬기와 지혜는 종말에 대한 배경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종말과 종말에 닥쳐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거나 숨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반석 위에 나의 집을 조금씩 지어 가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하나씩 실천에 옮기면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유다인을 자그마치 43만 7천 명을 학살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잘 알 것입니다. 나치 독일 패망 이후 도망자로 살다가 1961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기소되었습니다. 그가 직접 계획하고 명령해서 수많은 사람의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그는 끝까지 “어떠한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정신이 이상한 것일까요? 어떻게 그런 끔찍한 학살을 계획하고 명령했으면서도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했습니다. 그 결과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고, 그중 한 명은 “내 상태보다도 정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상이면서도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합니다. 악이 평범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스스로 악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학살이 아니라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법률을 준수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았고, 또 상대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도 가능합니다.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경우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더 나은 방법이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 이런 식으라면 자기도 모르게 끔찍한 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이웃 사랑을 강조하신 주님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이렇게 머물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 말씀을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진정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즉,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말씀하시지요. 외적인 신앙 고백이나 감정적인 열정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만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고 하십니다.
참된 신앙이라는 무엇일까요? 주님 말씀대로, ‘입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삶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깨닫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면서 사랑의 실천에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만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
[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예언을 하고 마귀를 몰아내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이 말은 꼭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물러가거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마귀를 몰아내고 기적을 행한 사람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셨을까요? 아마도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웠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빌려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하며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뜻을 실행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모래 위에 집은 지은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뿌리가 하느님께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는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그저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그것에 감사의 기도를 봉헌합니다.
우리들의 집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지어지기를 바랍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마태오 7,24,26)
말씀이 육화 되기 전에 우리는 불안했습니다. 우리는 원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편히 쉴 수도 없었습니다. 말씀이 육화 되셨기에 우리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처럼 우리도 말씀을 낳아야 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육화 되신 말씀은 우리의 삶을 빌려 육화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삶을 통하여 말씀을 낳지 못하면 우리는 ‘돌계집’처럼 됩니다. 하찮은 존재로 자신을 전락시킵니다. 말씀은 우리를 은총의 지위로 올려 주시지만, 말씀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받은 은총의 지위를 스스로 거부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삶은 천년을 살아도 하루살이처럼 허무하지만, 말씀을 실천하는 삶은 하루를 살아도 천년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기에 우리는 말씀을 살도록 이미 계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통하여 말씀의 빛을 비출 때, 그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평화와 안정을 누리지만, 삶을 통하여 드러내지 못할 때,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처럼 불안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평화를 얻어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새기며 실천함으로써 행복을 얻게 됩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만큼 우리는 참 행복을 얻게 됩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항상 이야기의 결말처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늘나라의 참 행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설교는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리지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자기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에게서 오신 외아들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뜻과 그 실행방법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직접 겟세마니에서는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외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일’이요,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부당함을 당하고도 침묵으로 감싸주면서 억울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신 까닭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이라고 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가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읍시다>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되는 마지막 7장 끝부분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처럼 반석위에 집을 지을 것인가 또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모래위의 집을 것인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집 짓기는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평생과정임을 봅니다. 저의 평생 하루하루 매일 강론 역시 평생 예수님 반석위에 집짓는 마음으로 씁니다.
과연 지금 내 인생집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늘 점검해 봐야 하겠습니다. 바로 날마다의 미사전례 시간은 내 인생집이 예수님 반석위에 잘 지어지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잘 들여다 보면 산상설교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야 말로 바로 반석위 인생집 짓기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도들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모든 성인들 역시 성공적으로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은 분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데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구체적으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시종여일 말씀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같은 삶이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의 비유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수도원, 교회, 국가든 모든 공동체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 재직동안 12년 동안 거의 매일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삶과 동향을, 그리고 글을 읽었습니다. 이어 지금 저는 레오 14세 교황의 매일의 행보를 보고 배웁니다.
말 그대로 한결같이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다가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이요 뒤를 잇는 267대 레오14세 교황 역시 정중동의 행보중에 ‘경청과 균형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교회 일치와 화해를 위해 힘을 다하고 있음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레오14세 교황 역시 지금까지 평생 반석위에 인생집을 잘 지어오셨고 여전히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계속 잘 짓고 계십니다. 레오14세 교황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참으로 슬기로운 예수님 정통파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늘 새벽 읽은 레오 교황의 말씀중 몇 대목입니다.
“네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켜라.”(Keep your eyes on Jesus)
“사제생활에 열정적이 되라.”(Be passionate about priesyly life)
교황청을 방문한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갑시다. 우리의 희망! 그분은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Let’s go to Jesus, our hope! He can heal us!“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시 한 대목입니다. 중앙아시아(Middle East) 신자들에게는 “온교회가 너희와 함께 있다” 격려하였고, 방문한 주교들에게는 “친교의 사람들이 되라”(to be men of communion)고 호소하였습니다.
옛 현자도 인생집을 짓는데 한곁같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갈길이 멀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다산>
“짐은 무겁고 길이 멀기에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논어>
우보천리의 자세로 평생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어야 함을 배웁니다. 삶은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인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완성을 향해 지어가는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입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반석위에 지어지는 인생집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도외시 하고 제 좋을 대로 살아 온 이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참 냉혹하지만 우리의 무지와 태만에 죽비같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은 평범한 일상 모두를 통해 이뤄집니다. 창세기의 아브람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사가 참 복잡합니다. 사라이의 호의로 아브람이 그의 몸종 하가르를 통해 이스마엘 아기를 갖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가정은 큰 분란을 겪지만 하느님은 든든한 배경이 되어 하가르외 이스마엘을 돌봄으로 아브람은 위기를 벗어납니다.
아브람의 부족을 보완해 주면서 그가 인생집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되시니 말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져야 반석위의 인생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 온 아브람이기에 주님은 그의 일시적 부족을 보완해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온 슬기로운 이들과 실행하지 않은 어리석은 이들의 결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 실감나게 묘사됩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우리는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모래위에 인생집을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집짓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방법이자 비결은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면서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요, 아버지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평생 반석위에 인생집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감성과 욕망까지 주님의 종인>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누구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그의 종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이 아니고, 마음으로 주님이지만 실천으로는 주님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주님이 입에 있는 종이 있고, 주님이 마음에 있거나 실천에 있는 종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남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라는 인간의 종으로서의 역사를 얘기하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자기주장이 강하고 제 뜻대로 하려는 경향이 강했을 때 수도원에 살면서도 저는 주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말로만 곧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나무라시지만 저는 입으로도 주님을 부르지 못한 종이었습니다.
내가 왜 종이야? 내가 왜 주님의 종이야? 하곤 했는데 종이라는 것이 싫어서 주님의 종인 것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삼십 중반이 지나서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마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이때 제일 많이 기도한 것이 삼종 기도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입니다.
의지의 작용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라는 저의 정체성을 명심하고 각인하려는 노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후 저는 인사이동 때 어디 가고 싶다, 어디는 가기 싫다고 하지 않기로 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일에서는 주님의 뜻대로 실천하려고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는 의지가 작용하지 않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내 좋을 대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좋을 대로 하기에 주님의 뜻을 생각지 않거나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내 좋을 대로 하곤 합니다.
내 좋고 싫은 것 곧 내 감성에 내 이성이 마비되거나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요즘 무엇을 먹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다. 생각 없이 입맛대로 먹지 입맛을 주님께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옛날 저는 프란치스코가 밥에 물을 타거나 재를 뿌려서 먹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까지는 못해도 맛있는 것을 골라 먹지 않으려고 했고 더 근본적으로 맛을 제 입에서 없애려고 곧 맛 있고 없고가 없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프란치스코처럼 주님께 입맛을 맞추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내가 프란치스코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프란치스코처럼 맛을 초월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주님의 종이 되려면 나의 싫고 좋음이 없어야 하고, 그것도 주님 때문에 나의 싫고 좋음이 없어야 하며, 욕망까지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성과 욕망까지 주님의 종이어야 하고, 좋아하는 것과 욕망하는 것이 주님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인데 그러니 주님의 은총을 청하며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가짜 신자들이 되지 말자!>
오늘 복음(마태7,21-29)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는 말씀과 '내 말을 실행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원(Identity)'은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구세주.구원자)로 믿으며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천국), 이미와 아직의 나라인 이제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사도들과 신앙의 선조들(교부들)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표지가 곧 부활'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 이제와 영원한 부활의 길을 완전하게 보여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26)
말씀을 듣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살려고 애쓰는,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려고 땀 흘리는, 그래서 마침내는 영원한 부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참된 신자들이 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5)
말씀이라는
삶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없다면
신앙은
방향을 잃고
쉽게 흔들립니다.
말씀은
신앙을
행동으로
이끄는
힘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가장 좋은
토대입니다.
믿음은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날 때
진짜입니다.
주님을
기초로 한 삶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석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분의 말씀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말씀 없는
삶이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신앙과
삶의 기초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붙들어주는
영적 기초입니다.
말씀을
살아내는 삶이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말씀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삶이 됩니다.
말씀을 삶으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슬기로운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 한 줄이
오늘 나를
움직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