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16 겸제 정선[鄭敾]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수묵, 79.3×138.2㎝, 삼성미술관 리움.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모습을 지금의 효자동 방면에서 보고 그린 것으로 정선이 76세에 그린 만년의 걸작이다. 화면 위를 가득 채운 바위의 대담한 구도와 먹색의 강렬한 흑백대비를 통해 마치 바로 앞에서 바라본 듯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1676(숙종 2)∼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아버지는 시익(時翊)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 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청하현감을 지냈다. 또 자연·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畫法)이나 채색화(彩色畫)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삼성미술관(三星美術館) 소장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는 인왕산의 둥근 바위 봉우리 형태를 전연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었다. 즉, 바위의 중량감을 널찍한 쉬운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하여 표현한다[적묵법(積墨法)].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의 「통천문암도(通川門巖圖)」에서는 동해안 바위 구조를 굵직한 수직선으로 처리하여 세밀한 붓놀림이나 채색·명암 등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두드러진 붓 쓰임의 한 예는 서울 근교나 해금강은 물론 우리 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묘사법이다.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린다.
삼성미술관 소장의 1734년 작 「금강전도(金剛全圖)」(130.7×95㎝)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을 하나의 큰 원형 구도로 묶어서 그렸다. 이는 기법상 천하도(天下圖)라는 전통적인 지도 제작
기법에 근거하며, 금강내산을 한 떨기 연꽃 또는 한 묶음의 보석 다발로 보는 종래의 자연 묘사시에서 조형적 원리(造形的原理)를 따오는 기발한 착상이다.
우선, 원형을 대강 오른쪽의 골산(骨山: 금강내산의 화강암 바위로 된 삐쭉삐쭉한 모습)과 왼쪽의 토산(土山: 금강내산의 수림이 자라는 둥근 멧부리)으로 구분하되, 골산은 예리한 윤곽선으로, 토산은 그의 독특한 침엽수법(針葉樹法)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다. 그 다음 이 원형 외곽을 엷은 청색으로 둘러 여타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산 자체만을 돋보이게 한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원의 중심이 되는 만폭동(萬瀑洞)에 일단 모이게 하여 구도상의 중심을 이룬 다음, 화면의 앞쪽으로 흘러 장안사(長安寺) 비홍교(飛虹橋)를 지난다. 이 그림은 실제의 자연을 새로 해석하여 조형화한 좋은 예이며, 오른편 위쪽에 쓴 제시(題詩)의 내용과 형태가 일치한다.
정선의 회화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 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寫意畫: 묘사 대상의 생긴 모습을 창작가의 의도에 따라 느낌을 강조하여 그린 그림)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이러한 그의 창의력은 그가 즐겨하였다는 역(易)의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의 소재·기법 어느 것에나 구애됨이 없이 소화하였으며, 심지어 지두화(指頭畫)까지도 실험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가까운 교류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 등 중국 고전 문학과 사상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을 조형 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미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시화첩(詩畫帖) 같은 것은 선비들간에 시 짓고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 놀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실경 산수화를 다루는 경우에는 시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정선은 이미 말한 노론의 명문인 안동 김씨네와의 관계에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과 우수한 수장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창흡(金昌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파벌에만 치우치지 않은 매우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의 계속적인 승진은 영조가 세제로 있을 때 위솔이라는 직책으로 있었기 때문에 입은 배려로 생각된다. 이것이 노년에도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하겠다.[검색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