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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9: 1-7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근원 복의 근원으로 계시고 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은혜와 신령한 복을 다시 주시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주신 은혜와 복을 회복하도록 주선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생물들의 번성이 인간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게 하시는 배려의 약속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또 식물에 이어서 동물까지 인간을 위한 식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제한을 두십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전통적으로 아담의 범죄이후 사죄의 한 방식으로 주신 제의식이 그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생명 보존의 원리 때문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인간 생명보존 법칙이 최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 흘림이 금지된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몇 가지 제한이 있게 되면서 생육과 번성이 약속되고 명령되고 있습니다.
1. 본문 1절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추론해 낼 수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주 그리고 그렇게 오래도록 그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기 때문에 노아는 그 막대한 두려움을 배척할 수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복 주셨다고 말할 때에 그는 단순히 그들에게 풍성한 호의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새로운 세상의 복원(復原)에 관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그들에게 공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음성’이 복을 준다는 그 자체에 첨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야생동물들이 하나님의 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그들의 새끼들을 생산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서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하나의 특권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 네 사람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게 하시려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미래의 삶의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이제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에 세상을 창조하셨던 동일한 말씀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또한 그분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지시하여 그들이 정당한 결혼을 회복하고 자손들을 생산하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손들이 그들에게서 출생하여 그들이 장차 이 땅 전역을 누릴 수 있게 하여 비록 이 땅이 황폐하고 사막으로 화해 있지만 이 땅에 다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무차별한 성 행위는 허용하지 않으셨으며 이전에 정하신 결혼 법칙을 새롭게 인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복이 어떤 의미에서는 불법적인 관계에까지 적용되어 거기에서도 자손들이 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한 생산입니다. 오직 합법적인 것은 분명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축복에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입니다.
이 말도 역시 주로 이 세상의 회복에 관련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은 동물들에 대한 주권을 인간들에게 남아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인간이 타락된 후에 짐승들이 새로운 흉포성을 부여받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에게 내려주신 그 짐승들에 대한 지배권 가운데 어떤 것들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또 약속하시기를 그와 같은 지배권이 계속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실상 그 짐승들이 사람들에게 맹렬하게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고 물어 뜯어 놓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웁게도 하나님이 그들의 사나움을 억제시키지 않았다면 인류는 완전히 그것들에 의하여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후의 혹독함과 불규칙적인 계절에 관하여 우리가 전에 말한 것이 역시 여기에서도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야생 짐승들이 창궐하고 여러가지 면에서 인간을 대항하여 포효(咆哮)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잘못되게 우쭐대고 있는데 왜 짐승들이라고 인간을 대항하여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표범이나 사자들이나 코끼리, 곰, 늑대들과 그 밖의 수없이 많은 짐승들이 이런 복종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들을 붙잡아 억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간들의 모든 것을 찢지 않고 삼키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안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경계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보호와 경계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 것입니까?
아마 그 동물들은 마치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으며 언제나 인간들을 해치려는 격렬한 욕망으로 살기등등해 있을 것이 아닙니까? 더욱이 동물들이 인간을 덮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야생짐승들의 잔인성을 억제시키신 그 구속력은 다름이 아니라 그분이 그 짐승들 속에 심어 준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들이 인간의 존재를 두려워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특별히 왕들에 관하여 이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호와께서 인간과 짐승들에게 두려움과 무서워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그 왕들이 통치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맨 처음에 사용했던 것은 인간 사회를 방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우선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짐승들을 다스리는 일반적인 권위를 주신 그 정도에 따라서 위대한 사람과 가장 작은 사람들 가운데도 그것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떻게 감추어진 은밀한 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은 짐승들의 잔인성이 아무리 팽배하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 피해나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가지 유리한 점과 그리고 한가지 더 널리 제공되고 있는 것을 여기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이를테면 인간은 자기들의 편의에 대하여 동물들을 보조물로 이용하며 또한 사람들의 방법과 필요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들을 이용할 수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들은 멍에를 매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으며 말들의 야수성을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도록 복종하게 만들었고 젖소들은 우유를 제공해 주며 우유를 짤 때에도 고통을 감수하게 하셨으며 양들은 털을 깎는 자의 손 아래서 묵묵히 순종하는 이 모든 사실들이 이 통치권의 결과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통치권이 엄청나게 감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체가 다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3. 본문 3절은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보다 더 한 걸음 나아가셔서 이 동물들을 인간에게 양식으로 허락하시고 그것들의 고기를 먹게 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지금 처음으로 이 원리가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추론하기를 홍수 이전에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었다고 하며 그때는 오직 땅에서 자연적인 실과들만 그들의 양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그렇게 충분한 근거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인간에게 주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부여하시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전에 주어진 것을 다시 상실했었는데 그것을 회복해 주시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상실 당했던 그런 것들을 다시 소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에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또한 짐승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결론이며 그 가죽들은 각각 그들의 옷을 만드는 데에나 천막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어떤 의무도 여기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전혀 중요성이 없기 때문에 이 제목에 관하여 전혀 아무것도 긍정을 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보다도 중차대한 것이라고 공정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강도처럼 우리의 식욕에 따라서 잡아먹거나 짐승들의 무죄한 피를 포악하게 흘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우리가 무엇보다도 중대시해야 할 것이며 또한 여호와의 손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을 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도 듣고 있으니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은 자유이지만 오직 우리는 그것을 양심의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만은 그것이 불결하다고 했습니다(롬14:14). 그리고 어디서부터 다음의 일들이 인간에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지 정숙한 마음으로 즐겨하는 것을 먹어야 되며 절제하지 않고 제멋대로 먹지 말라고 했으니 그렇게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통치권으로 인간의 손에 넘겨준 사실을 모르는 소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들을 거룩하게 하시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깨끗하게 그리고 정당하게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딤전4:5). 그러므로 “누구든지 빵 한 입을 먹는 자는 동시에 자기의 영혼을 더럽히면서 자기의 몸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라는 속담을 철저하게 배척해 버립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셔서 이것을 의심하거나 양심의 떨림으로 먹지 않게 하실 때에는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주시려는 의도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계시며 그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에 관해서도 바울은 ‘기도’를 조금 전에 인용했던 성경말씀에서 성화의 방법을 정의하는 가운데 ‘말씀’ 에다 추가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를 굳게 유지시?耭? 합니다. 그분은 그 자유를 대중식탁 위에서처럼 기록되어지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그분은 노아의 모든 자손들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선물을 전 세대에게 공통적으로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만물을 만드시는 분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신실한 자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대담하게 주장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땅과 하늘이 우리에게 공개하여 우리가 거기로부터 마치 그분의 창고에서 꺼내온 것처럼 양식을 취하게 하셨을 때 이것들이 멸망될 인간에 의하여 우리에게서 봉쇄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횡포입니다.
멸망될 인간은 달팽이나 파리 한 마리도 창조할 수가 없는 존재인데 이 사람에 의하여 그 모든 것이 두절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횡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외부적인 금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런 자행심(恣行心)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정당한 것으로 계획하신 것을 불법적인 것이라고 선언하게 하고 그들의 가공적인 법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해방시킨 양심을 소경으로 만들도록 허용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 심한 상처를 드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고대의 그분이 사람에게 부정한 동물들을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사실은 잠정적인 예외로서 여기서 모세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습니다.
4. 본문 4절은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니 ‘너는 살아 있는 동물에서 잘라낸 지체를 먹지 말아라’는 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헛된 장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피’와 ‘생명’이라는 말들 사이에 연결 접속사가 없기 때문에 모세가 ‘생명’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죄’라는 말을 주석적으로 부가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가 말하기를 어느 의미에서 살은 그것을 죄와 함께 포함하여 먹을 때에 생명으로 더불어 삼켜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과 피는 각각 다른 것이라고 표현되지 않고 동일한 것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가 그 자체에 생명이 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생명적인 영이 주로 죄 속에 거하고 있는 한 우리의 감정에 관련되는 범위 내에서 피가 생명을 상징하는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분명하게 선포되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들이 피를 먹는 것에 대하여 보다 더 큰 공포를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생명 자체들을 그대로 삼키는 것이나 살아있는 고기를 그대로 통째로 삼키는 것이 야만적이며 식인종적인 것이라며 사람들이 그것을 먹음으로 그들의 잔인성을 폭로시키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금지의 취지는 절대로 모호한 점이 없으니 이를테면 하나님은 그와 같이 인간이 동물의 피를 먹지 않게 하심으로 온순함에 습관화 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자신들을 절제하지 못하고 가히 동물의 피를 먹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인간의 피를 흘리는 데에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감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 규제가 고대의 법의 일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터틀리안이 말하고 있는 대로, 즉 그의 시대에는 미신적인 기미가 보이는 가축의 피를 맛보는 일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는 불법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이 의식을 준수하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에게 순간적인 양심의 가책을 주입시키려는 의도가 아니고 다만 무식한 자와 약한 자들에게 공격의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다른 방법으로 성화된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사도는 그렇게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본문 5절은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보다 명료하게 선언하고 계시기를 그분은 동물 자체에 관련되지 않은 피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하지 않고 계시니 그것은 인간의 생명이 귀한 것으로 여기고 계시기 때문이며 그분의 율법의 순전한 목적이 인간들 사이에 공통적인 인간성을 진작시키는 것을 촉진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롬이 (아크;위하여)라는 말을 표현하면서 그것을 부사적인 이접적인 접속사로서 간주하는 자들이 풀이하는 것보다 더 잘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 피를 요구하리라’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문자적으로는 ‘그리고 정말로 네 피를’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잘된 표현인 듯합니다. 그래서 그 문맥 전체는 다음과 같이 읽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그리고 너의 생명 ‘안에’ 있는 네 피 또는 네 생명과 ‘같은’ 네 피는 너에게 생기를 주며 활기를 일으켜 주는 것이니 그 피가 네 몸에 관련되어 있는 대로 내가 요구할 것이니 모든 동물들의 손에서 내가 그 피를 찾으리라. 그리고 내가 다시 말하노니 사람의 손, 곧 형제의 손에서 사람의 생명을 찾을 것이다” 라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이 네 가지의 살인죄에 대하여 구별방법을 설정해 놓았는데 그것은 천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아주 고귀한 것으로 여기시고 평가하셨기 때문에 살인자가 고통을 받지 않고 그대로 지내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보복을 받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여러 가지 말로 이 사실을 되풀이 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음의 사람들의 잔인성을 더욱 더 가증스런 것으로 표현하려고 그렇게 되풀이 하고 있으니 그들은 바로 자기들의 이웃에게 난폭한 손을 뻗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에 대한 보호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죽음에 대한 것을 복수해 주시는 분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에 관해서 말해 주는 공통적인 증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여 짐승에게 형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이것을 예증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만약 인간을 대표하여 그분에게 희생물이 되게 하시려고 맹목적인 충동으로 쫓기고 있는 잔인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고 계신다면 또한 성품의 지각과는 서로 상반되게 부정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자기의 형제에게 분을 내는 자가 받을 하나님의 진노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우리가 추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6. 본문 6절 상반절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입니다.
이 부분의 더 잘된 번역은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입니다. 이 문장이 여기서 추가되고 있는데 그 말은 확대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증인들 앞에서’ 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피가 흘려지게 될 것이다’ 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들은 억지 해석입니다. 이 언어는 오히려 범죄의 잔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는 자는 자기의 형제의 피와 생명을 자기 자신에게 끼얹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살인죄들에 대한 형벌에 대한 정치적인 법률이 여기서 단순히 의도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기만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니 법률이 제정한 형벌을 그리고 판사들이 집행하는 형벌은 모두가 이 하나님의 인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해 두는 것은 이 말들이 보다 함의적(含意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기록되기를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다”(시55:23) 라고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자는 고상하게 죽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기를 쓰면서 몸부림치다가 죽으며 또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판관들은 범죄자들을 눈감아 줄 수도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분야에서 집행 자들을 보내주시니 그들은 피를 흘리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보복을 내려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자에 대한 보복에 대하여 위협하시며 비난하고 계신 나머지 심지어는 살인자에게 보복을 하기 위해서 순회 재판관에게 칼로 무장을 시키시고 사람의 피가 형벌을 받지 않고 흘려지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7. 본문 6절 하반절은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입니다.
위의 교리에 대하여 보다 더 확증을 제시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선포하시기를 인간의 생명에 관하여 성급하게 그렇게 배려하지 않으시며 목적 없이 배려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게만 관련되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그들의 인격에 자신이 관여하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이 그들 자신들만으로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 안에 있는 그분의 선물을 보시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신중하게 관찰해야 될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상하지 않으면 그의 형제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은 없으니 분명히 형제를 괴롭히면 하나님에게도 그만큼 마음의 상처를 준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 교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망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 사실을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지워져 버렸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하여 쉽게 답변해 주겠습니다.
첫째, 그 형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직도 적잖은 숭고성(崇高性)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하늘나라의 거룩하신 창조주는 제 아무리 인간이 부패한다 할지라도 아직도 그분의 원래의 창조의 목적을 분명히 지키고 나아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예증에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며 다른 생명체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것을 인간들에게 부여해 주셨다고 했는데 과연 그 우수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8. 본문 7절은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입니다.
그분은 다시 말씀의 내용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손 번식을 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분이 “너희도 아다시피 나는 인류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도 그것에 참여해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그들에게 씨의 보존을 위탁하시면서 살인을 금하셨으며 난폭한 부정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저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가 전에 암시했던 대로 그들의 기가 꺾인 마음들을 격려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들에는 솔직한 교훈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역시 약속도 함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