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56
3월8일[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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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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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cNooKF9BQM
[예수회 양승환 크리산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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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복음서를 펼칠 때 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대목만 소개를 해드릴까요?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처죽일놈”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도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도 똑같습니다.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속이 많이 상하지? 내가 네 고통, 네 눈물 다 보고 있고 알고 있다. 힘들 때 내가 바로 옆에 있음을 잊지 말거라. 내밀고 있는 내 손을 잡거라. 일어서거라.”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위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 한 말씀을 또 던지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애지중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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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이 기쁘면 회개한 것이다>
페니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심한 재정난으로 자살까지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급기야 미시간 주 배틀 크릭에 있는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창문 너머로 찬송가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찬송가였습니다. 그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재기에 성공하여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풀이 죽어서 그곳에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 등장하고,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한 사람들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시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을 넘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회개의 의미를 모른 채 복음을 믿으려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맙니다.
회개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생일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보이면 회개 한 것이고 아니면 아직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를 죽이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인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참으로 고통임을 알아 나 대신 살아줄 예수님이 필요하면 그때 회개한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무리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회개 없이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시에 열심한 신자인 프랑케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부엌방엔 6년간 세 들어 살고 있는 서른여덟 살의 케테도 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온통비극이었습니다. 전화교환원인 남편은 가출했으며 남겨진 것은 가난에 중독된 창백한 세 자녀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케테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케테는 한 달에 한 번씩 지저분한 여관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가난과 고생으로 부쩍 늙어있었습니다.
참다못한 케테는 남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은 왜 이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나요? 기도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어.”
“아니에요, 지금 우리 곁에 있어요.”
“ ... ”
이 내용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벨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일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느님이 눈앞에 계셔도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에겐 도움을 청할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그것이 나에게 모든 고통을 이겨낼 참 기쁜 소식이 됩니까? 그러면 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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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에서는 사순과 대림이 시작되면 ‘성경 쓰기’를 권장합니다. 작년에는 ‘로마서’를 필사했습니다. 많은 분이 성경 필사를 하였고, 저는 작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선물 선정은 수녀님이 하였습니다. 사순 때는 믹서기를 마련했고, 대림 때는 멸치와 김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사순에는 구약성서 중에 ‘코헬렛,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를 필사하도록 했습니다. 코헬렛은 인간의 삶은 허무하지만, 최선의 삶은 하느님을 믿는 마음 안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토빗기는 ‘좋은 또는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주인공 토빗의 이름을 딴 것으로 삶과 죽음, 건강과 고통, 기쁨과 슬픔 같은 대립된 현실 모두가 결국 하느님께 달려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딧기는 아시리아 대군의 침략을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과부 유딧의 활약에 힘입어 그들에게 맞서 승리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을 희망하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그에 합당한 삶의 실천뿐임을 강조합니다. 에스테르기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학살될 위기에서 구원받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언급 없이도 섭리와 구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며, 신앙과 용기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오늘날에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도 많은 분이 성경 필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선물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사순 특강에는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사목하고 있는 신부님이 오십니다. 신부님은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10년 동안 선교사로 사목하였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지인들과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생들이 현장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과테말라 현지에서 지내면서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사제가 되면 선교사가 되겠다는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굳이 먼 타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후배 신부님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기름진 밭에서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시밭길에서도, 돌밭에서도 땀 흘려 1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보내 주는 글을 읽으면 하루하루가 북새통입니다. 납치의 위험도 겪어야 했고, 총을 든 강도도 만났었고, 온 몸이 썩어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라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도와 화려한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사목자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도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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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세리가 잔치에 참석하였습니다. 다른 세리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레위가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들은 무시와 멸시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세리들은 압제자인 로마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면서 같은 민족들을 이용하고 착취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않거나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 정결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세금을 부풀려 걷거나, 중간에서 자기 몫을 부정하게 챙기는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서는 예수님께서 잔치에 참여하시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리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식탁의 친교에 많은 세리가 참석한 것은, 세리들이 더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도 세리들이 의사가 필요한 병든 이며, 회개해야 하는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세리들을 멀리하고 자신들을 거룩한 상태로 지키려고 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함께하시며 그들도 거룩하게 하시고자 하셨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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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27-3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예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신다. 그는 돈 욕심이 사납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소유할 욕심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다. 세리는 본디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27절) 하셨다. 레위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다. 그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 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착취하던 직업을 버렸다. 수치스러운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누구든지 주님을 자기 안의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그분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로마 10,3 참조)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야고 3,2 참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그들 바리사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끝까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자신의 덕행으로 즐거움을 맛볼 사람, 그리스도를 자기 집안에 모셔 들인 사람은 큰 잔치를 마련한다. 그 잔치는 선행들로 차린 영적인 잔치로, 교만한 사람들은 맨입으로 돌아가고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배부르게 먹는 그런 잔치이다. 레위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의롭게 피어나도록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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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는 건강하냐?” 라고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32)
1)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제자가 되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부르심이 있었고, 부르심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따라나섰다는 것을 나타낸 말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지는 못했을 텐데, 아마도 마태오 사도는 그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고,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바로 응답했고, 응답한 뒤에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2) 여기서 ‘큰 잔치’는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또 자기를 제자로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베푼 잔치로 생각됩니다.
그 잔치에 동료 세리들이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태오 사도의 가족들, 친구들, 친지들도 참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이기도 했으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석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라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라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되고, 같은 죄인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염병자와 접촉하면 전염병에 걸린다는 생각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방인들이나 세리들과 전혀 접촉을 하지 않았을까? 만일에 실제로 그랬다면,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는데, 사실 실제 상황에서는, 친구로 사귀거나 어울리지는 않았더라도, 그들도 이방인들이나 세리들과 접촉했습니다.
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병자를 고쳐 주려면 그 병자와 접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면 죄인과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전염병 환자라도, 그 환자를 치료하려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너희는 건강하냐? 너희도 ‘병자들’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라는 말씀에(루카 6,41.42ㄴ) 연결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교만죄를 짓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비난하는 것은, 심판관이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너는 죄인이다.”라는 말은, 둘 다 죄를 짓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세리들보다 더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4)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난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또 이 말씀에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또는 병들었음을 부정하는 죄인들(병자들)이었고,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1,31-32)
먼저 회개하는 사람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회개를 끝까지 거부하면 그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병자라는 것을 부정하고,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병자는,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순 시기는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위선들을 찾아내고, 반성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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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홀로 너머 함께>
루카 5,27-32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홀로 너머 함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참으로
의로운 이
홀로 의롭지 않으니
곁에 있는 악한 이
의롭게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따뜻한 이
홀로 따뜻하지 않으니
곁에 있는 차가운 이
따뜻하게 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깨끗한 이
홀로 깨끗하지 않으니
곁에 있는 더러운 이
깨끗하게 씻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밝은 이
홀로 밝지 않으니
곁에 있는 어두운 이
밝게 비추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참된 이
홀로 참되지 않으니
곁에 있는 거짓된 이
참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새로운 이
홀로 새롭지 않으니
곁에 있는 낡은 이
새롭게 보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이
홀로 살아있지 않으니
곁에 있는 죽어있는 이
살아있게 북돋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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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회개한 이들과 아직 회개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복음 5장 28절) 간결한 부르심에 단순한 응답이 이어집니다.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라면 잇속 밝고 탐욕스러우며 민족의 반역자라 불리는 이들인데, 그런 레위가 한 랍비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따른 건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림에는 그의 내적 어둠에 빛이 비추는 것으로 이 순간이 묘사되기도 했지요.
자기 이익을 위해 온갖 비리와 권모술수를 동원하고, 동포를 착취하며 율법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들이지만, 양심이 일으키는 물음이나 회의까지는 끊어내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영혼에 각인된 하느님의 모상이 사람다움, 하느님 백성다움을 아주 잃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복음 5장 30정)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를 제자로 부르시고 스스럼없이 그 무리와 어울리시는 상황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겐 몹시 불편합니다. 부정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이도 부정하니 아예 상종을 안 하는 것이 답이라 여겼으니까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복음 5장 32절)
예수님은 율법이 죄인으로 분류한 이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그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십니다. 율법이 아닌 믿음이 주는 의로움입니다. 레위를 비롯해 주님 식탁으로 모인 죄인과 세리들은 이제 회개하여 의롭게 된 하느님의 새 백성입니다.
반면 여전히 율법에 묶여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여전히 매번 속죄 제물을 바쳐야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죄인들입니다.
제 아무리 완벽히 산다고 한들 수많은 율법의 금지 조항을 낱낱이 피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그 율법의 죽은 문자로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체가 죄인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그런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이사야 예언서 58장 9절)
아무리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겨도, 율법으로 타인에게 멍에를 지우고 지적하며 악의에 찬 비방을 일삼는다면 주님 보시기에 회개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야말로 율법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야 예언서 58장 10절)
오늘 부르심을 받아 빛 한가운데로 들어선 레위처럼, 아직 스스로 죄인인지도 모르면서 죄의 어둠 속에 갇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도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빛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초대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 드러난 회개는 주님과의 관계와 사람 사이의 관계 모두를 가리킵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이들, 곧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놓친 부분이 되겠지요.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이사야 예언서 58장 14절)
'기쁨은 회개하는 이가 얻는 선물'입니다. 회개가 단죄와 심판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서슬퍼런 비판과 오만한 무시를 잠재우니, 비로소 그의 눈에 모두가 형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형제인데(fratelli tutti)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제 회개한 이는 제도 안의 지위나 세상 재물 때문에 높은 곳을 차지한 게 아니라, '부서지고 낮추어진 마음' 덕분에 주님 곁자리가 허락되어 높은 곳에 이릅니다. 회개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을 끌어안는 탁월한 길입니다.
원죄의 상처와 나약한 인간 실존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회개는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회개하는 겸손이 필요하지요. 자신에게 빛이 필요함을 알고 청하는 겸손, 자신이 어둠임을 인정하는 겸손이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레위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에 흔쾌히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회개한 이의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길 축원합니다. 회개자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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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디서 정보를 얻습니까? 아마 요즘 사람들은 거의 스마트폰을 열고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정보를 얻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가 무조건 맞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질문하면 전문적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 심지어 초등학생도 답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었습니다.
이곳에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야단스러운 소음과 수만 가지의 관심사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 조그만 스마트폰 하나에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리도 많은 소리가 있는데 과연 주님의 말씀을 침묵 속에서 듣고 또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쉬울 수 있을까요? 너무나 많은 소리 속에서 주님께 대한 친미와 사랑 가득한 대화만 쏙 빼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동창 신부가 어느 순간 아침마다 일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나면 습관적으로 뉴스를 계속 검색해서 보는데, 아침이나 저녁이나 새로운 뉴스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똑같은 뉴스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음에 큰 반성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을 들어야 할까요?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서만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레위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큰 잔치를 벌이지요.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제자들에게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요?”(루카 5,3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세리를 커다란 죄인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매국노이고, 또한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화폐를 만지는 우상 숭배자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 아무런 죄가 없다고, 영적으로 건강하다면서 자기들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랑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많은 말들. 영적 교만으로 가득한 생각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과 전혀 다름을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라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세상 안의 기준을 따르면서 세상의 말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깊은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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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끼리끼리 논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까요? 비슷한 말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곤 그저 한마디 하십니다. “나를 따라라”라고 말입니다. 그 한마디로 세리는 큰 잔치를 엽니다. 그 잔치에는 세리뿐만 아니라 다른 세리들과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참석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잔치를 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일이든 결혼이든 회갑이든 어떤 잔치든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생면부지인 사람들일까요?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아는 사람들 혹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세리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는 모습을 서로가 위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참여한 다른 죄인들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주님께서 들어가십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주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죄인들 사이에 계십니다.
또한 우리 마음 죄스러운 그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서 계십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왜 당신의 스승은 죄인들 가운데 있는 것이오?’라고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스승님의 모습입니다. 죄인인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신 분. 우리를 지켜주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분. 우리들의 어두운 부분에 서서 빛이 되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스승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도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그러므로 기도는….
입으로 시작할지 모르지만, 몸에서 끝나야 합니다.
마음으로 시작하고 발과 손에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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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32)
초등학교 때 세례만 받고 그 후 냉담을 하고 있었던 어떤 형제님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착하게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 오던 형제님이 오랜만에 만나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신부님, 저는 아직도 멀었어요. 살다가 보니 항상 죄를 많이 짓고 삽니다. 성당에는 나가고 싶지만, 성당에 나가면서 또 죄를 짓게 되거든요. 성당에 나가면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차라리 안 나가는 것이 편해요.”
죄를 범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은 오히려 주님의 은총을 받는 마음의 통로입니다. 마음을 열고 그 은총을 우리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지은 죄가 많기에, 마음을 열기만 하면, 받는 은총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지은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고쳐먹지만 우리는 또 죄를 범하며 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고 싶지만 우리의 눈은 자꾸 다른 곳을 봅니다.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우리 마음은 자꾸 더 무디어집니다.
때로 우리는 사랑을 하지만 때로는 미워하며 삽니다. 선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던 때도 있지만 분노가 섞인 질투심으로 사람을 시기하는 때도 있습니다. 선과 악이 우리 삶에는 끊임없이 교차됩니다. 우리 삶은 불완전함에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기에 우리는 살면서 선인이 되었다가 죄인도 됩니다. 한번 선인이 되었다고 영원한 선인은 없습니다. 영원히 선하신 분은 오직 주님 뿐 입니다. 영원히 선하신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임을 알 때 우리는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르지 않는 완전한 사람이라면,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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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철저히 구별하라고 가르칩니다. 거룩한 것이 속된 것과 접촉하면 그 부정함이 물들어 거룩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데,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기에 내가 어렵게 지켜낸 거룩함이 속된 것에 물들지 않도록 철저히 구분하고 분리하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안된다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소소한 죄를 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백성도 아니고, 세리처럼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심지어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큰 잘못이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냐’며 따졌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시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은 ‘분리’나 ‘단죄’를 위한 게 아니라 올바른 ‘진단’과 ‘구원’을 위한 것이었지요. 일반 사람은 타인의 부정함에 물들어 자신의 거룩함을 잃게 되지만,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명으로 죄라는 걸 모르고 사시는 예수님, 마음 속에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그분은 오히려 당신 몸에 죄인들의 죄를 묻히심으로써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마치 빨래 비누가 자신의 몸을 더럽히고 녹임으로써 더러워진 옷감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이라는 빨래 비누는 세탁을 마친 뒤에도 더러워지지 않고 처음과 같은 깨끗함과 완전함을 그대로 유지한다는데에 있겠지요. 예수님은 그 놀라운 권능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시고, 보속을 행하기도 전에 먼저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리들만 그런 은총을 받은 게 아닙니다. 하루 하루를 허물과 잘못으로 누비며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분께 충만한 은총과 자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을 죄의 관점에서 심판하고 단죄하시려고 오신 게 아니라, 우리가 각자의 부족함 때문에, 또한 영혼과 마음에 든 여러 병증 때문에 그런 일들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음에 마음 아파 하시며, 우리의 그런 병증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해가도록 이끄시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님으로부터 그런 큰 은총과 자비를 입은 우리에게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 형제 자매에게 용서와 자비를 실천해야 할 소명이 주어집니다. 레위가 자신을 구원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잔치를 베풂으로써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던 수많은 죄인들을 주님께로, 구원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받은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내가 가진 재물과 능력과 시간을 주님 뜻에 맞게 잘 사용함으로써 아직 주님을 잘 모르는 이들, 그래서 죄의 어둠 속에 갇혀 불행하게 사는 이들을 그분께로 인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이번 사순시기 동안 우리가 열심히 수행해야 할 중요한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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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신학교 시절, 정리 정돈을 아주 잘하는 동기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자기 방에 들어오는 것을 항상 경계했는데 오와 열을 맞춰 잘 정리해 놓은 물건을 제가 하나 둘씩 뒤집어 놓거나 비뚤게 놓는 장난을 쳤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가지런히 정리한 볼펜을 하나 거꾸로 놓는다거나 책장에 꽂혀있는 같은 크기의 책 사이에 높이가 다른 책을 껴놓는다거나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방을 떠나고 나면 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이 흐트러진 물건을 찾아냈고 다음 날 그 답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물건이 자기가 원하는 그 자리에 있어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물건을 흐트러짐 없이 잘 정리해 놓고는 이것이 어그러지면 다시 정리하느라 애를 씁니다.
이와 비슷하게,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너무 계획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삶이 자신이 계획된 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오래전에 어떤 신자분이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저 평범한 것들입니다. 자녀가 제 나이 때에 대학에 입학하고 제 나이 때에 결혼하고 제 나이 때 자식을 낳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전혀 욕심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 우리의 인생은 결코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원하는 평범하다고 하는 것들이 어쩌면 제일 어려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삶은 바다와 같아서 쉬지 않고 요동치고 있고 바람은 계속해서 바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미리 찍어놓은 좌표에 순간순간 정확히 도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계획을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 비교적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할 때에 삶의 다양성은 더욱 커지고 한층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리 레위는 바로 이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보입니다. 세리란, 로마 치하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금을 받아내 로마에 상납을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매우 넓었으므로 모든 지역에 세금을 거두기 위한 순수 로마인을 파견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피지배 지역의 사람을 세리로 임명해야 했는데 자기 민족의 세금을 거두어 지배국에 상납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상납해야할 금액은 정해주되 실제로는 얼마를 걷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해야 돈에 눈이 먼 이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온전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리라는 직업은 지배 국가에 충성하며 자신의 이득까지 불합리하게 챙기는 매국노, 착취자에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과 겸상은 물론이요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평생 멸시와 지탄을 받아온 세리 레위에게 따뜻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를 따라라.”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그저 돈을 목적으로 살아온 그의 바다에 갑자기 예수님이라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는 그 바람에 즉시 몸을 맡기고는 자신이 정신없이 달려온 좌표, 즉 돈을 비롯한 세속의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분을 따라 나섭니다. 한편 레위의 대척점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로써 평생 율법을 지키며 하느님께 충실했던 이들입니다.
그들의 바다에 떠 있는 좌표는 오로지 하느님 하나뿐입니다. 문제는 이 고집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미워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은 그저 하느님만을 향해 헤엄칠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라는 따뜻한 바람이 장애물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끊임없이 강조하시던 사랑과 자비, 이해는 불필요해 보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이해될 리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삶 안에서 저마다의 좌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좌표에 너무 몰입하다 보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대로 듣게 되고 가끔은 장애물로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이 좌표는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자녀에 대한 욕심이 될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 혹은 저마다 짊어지고 있는 그러나 치워버리고 싶은 각자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헤엄치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부른 그 따뜻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당신이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이해를 실천하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되는 진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가 선포하듯, 이를 통해 우리의 빛은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며 암흑은 대낮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초대가 죄 많은 세리였던 레위에게 주어졌음은 종종 예수님을 잊고 살아온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과 안도감을 줍니다. 예수님께는 지나간 과거가 중요하지 않으며 앞으로의 미래가 훨씬 더 중요함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 우리들의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이따금씩 틀어지곤 합니다. 특별히 질병이나 죽음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과 이해, 자비를 실천하려 애써야 하겠습니다.
그 음성은 병든 이를 위해 달려온 의사의 진단처럼 우리를 더욱 좋은 곳, 편안한 곳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오늘 하루, 화답송과 같이 기도하며 주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는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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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러니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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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저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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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추종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레위와 예수님과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가 뜻밖에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분명 레위의 내적 갈망을 알아채신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선행하는 레위의 주님을 찾는 내적 갈망입니다. 만일 이런 내적 갈망이 없었다면 주님은 그를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
영원한 현재성을 지니는 말씀입니다. 삶의 방향을, 삶의 길을,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해, 또는 잃어버려 방황이요 혼란이자 불안이요 두려움입니다. 바로 레위가 주님을 만남은 그대로 구원이었으니 삶의 방향을, 길을, 희망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주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하시지 않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제대로 주님을 따라갈 때 제대로의 참삶입니다. 한두번 따름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버리고 비우고 주님을 따라야하는 “추종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이에 응답하여 오늘 복음의 레위처럼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다음 대목이 상징성이 깊습니다.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그대로 레위의 내적 갈망이 얼마나 컸던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새삼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제 지론이 생각납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새롭게 주님을 따라 나서는 파스카의 삶, 이래야 비로소 영적탄력 좋은 삶입니다.
삶은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여정입니다. 레위는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고,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주님의 제자들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이제 레위는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에 합류한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공동체에 합류한 우리를 방불케 하는 공동식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항의성 질문과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사람 눈에 세리와 죄인들이지 주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형제임을 몰랐던 편견에 눈이 멀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즉각적인 통쾌한 답변이 평생 묵상자료가 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왔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치료받아야 하는 “병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회개와 더불어 최고의 명의이신 주님으로부터의 치유의 용서가 이뤄짐을 봅니다. 치유받은 병자들의 공동체이자 용서받는 죄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의 공동체요, 날마다 용서받고 치유받아 새롭게 추종의 여정에 오르게 하는 미사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천주교는 힐링의 종교요 총체적 힐링에 미사전례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의인들은, 치유를 필요로하지 않는 건강한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모두가 주님의 부르심을, 용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병자라는 엄연한 사실이 우리를 참으로 겸허하게 합니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 이사야서 말씀도 사순시기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된 단식의 정신이자 회개로 용서받아 새롭게 주님을 따라나선 우리를 고무하고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내 제자들 공동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시야를 전 인류 가족인 사회 전반을 살펴보게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솟아 오르고. 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 회개의 실천입니다. 이사야가 제시하는 이상이 참으로 영감이 넘치고 아름답고 현실적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이런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입니다.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지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 지리라.”(이사55,12)
이어지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도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며 주일에 대한 우리 자각을 새롭게 합니다.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 읽어봅나다. 이렇게 주일을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청정욕淸淨慾도 듭니다.
“네가 삼가 주일을 짓밟지 말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 다면,
네가 주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주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너무 아름답고 고무적이라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 읽어보며 욕심을 내어 써 봤습니다. 비단 주일뿐 아니라 이 은총의 사순시기 이런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이 일상으로 확장되었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너무 지치고 피폐해진 영혼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관상적 삶에 참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시편86,11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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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은총의 지렛대와 마중물인 죄>
오늘의 주제는 죄인의 회개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래서 내가 회개해야 할 죄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별로 죄지은 것 같지 않고 뭘 회개해야 하지 하는 생각도 들면서 느닷없이 사는 게 다 죄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아니지, 사는 게 다 사랑이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거의 매 순간 사랑이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이 맞는지 생각해보니 둘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죄인이고 노상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저는 늘 사랑하고 있고 죄보다 사랑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에 어른들이 죄 고백하러 들어오셔서는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시며 사는 게 다 죄라고 하신 것도 이해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잘 못 느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죄보다 은총을 더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라는 말씀 말입니다.
저의 죄가 많고 많지만 제게 은총이 충만히 아니, 넘치게 주어지기에 은총을 보면서 저의 죄는 못 보는 것인데 이는 거지가 햇빛을 쐬면서 더러운 자기 몰골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만 보는 것보다 은총을 보는 것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옛날의 저는 저의 죄만 보고 하느님 은총은 못 봤습니다.
그러니 은총을 보게 된 것은 잘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을 보게 된 것이 하느님의 은총 중의 은총입니다.
문제는 은총을 누리기만 하고 죄는 보지 못하니 그것이 문제이고, 앞으로 별로 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죄를 은총의 지렛대 정도로 삼고 살겠습니다. 또는 저의 죄를 은총의 마중물로 삼으며 살고 싶습니다.
이런 저, 너무 뻔뻔한 죄인이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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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5,30ㄴ)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루카5,27ㄴ-32)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십니다.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레위라는 세리는 로마의 협력자로서, 당시 유다인들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런 세리들을 창녀들과 같은 무리로 죄인 취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을 부르시고, 그런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심으로써 죄인들이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초라한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의기양양한 모습을 드러낸 바리사이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세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죄인이라고 숨어버리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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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 32)
사람들의
잔치와
하느님의
잔치는
다릅니다.
우리를
회개의 잔치로
이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타인의 잔치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들의
잔치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너무나 많은
판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행복입니다.
단순한 행복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죄인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길에서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합니다.
회개는
사랑의 바보가
되는 단순한
기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이
너무나
똑똑한 척
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하는
죄인들의
잔치입니다.
우리의
셈법으로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느님의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회개로
회개는 잔치로
우리를 이끕니다.
죄인을
불러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감사
드립니다.
전혀 다른
바보들의
행복입니다.
관점이
바뀌는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
(2)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루카 복음 5장 31절)
예수님께서는 모순으로 가득찬 여기 이곳 아픈 세상에오셨다. 우리가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건강한 삶은 회복될 수 있다. 병든 이들을 치유하시고 죄인들을 부르시는 소명이 곧 교회의소명이다.
아픈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뜻은 거역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병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치유가 문제이다. 아픔은 치유를 향해 나가야한다. 아픔과 죄를 탓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위로하여 주신다.
스스로 의롭다고 스스로 건강하다는 착각의 기준을 바꾸는 사순시기이다. 절실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근본적인 치유와 용서이다. 다시금 누구를 위한신앙이고 다시금 누구를 위한 교회인지를 묻게 된다.
모두를 살게 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병든 우리자신을 먼저 치유하여주신다.
사순 시기는 자연스레 우리 자신에게로 안내한다. 병든 제 자신을 치유시켜 주시고 죄 많은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여전히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 삶이다. 한마디로 아픈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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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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