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라고 하기 보다는 드라마였습니다. 야나첵이 20세기 초반에 작곡한 오페라 <예누파> 그라인드본 페스티발 실황입니다.
먼저 등장인물을 보면...
1. 예누파 : 아름다운 아가씨. 코스텔니츠카의 양녀. 스테보를 사랑하여 혼전 임신 상태로 시작.
2. 스테보 : 농장주인. 젊은 부자.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경향. 코스텔니츠카의 시조카.
3. 코스텔니츠카 : 종교적이고 엄격한 성격의 과부.
4. 라차 : 고아. 스테보의 할머니에 의해 양자로 키워졌으나 편애로 인해 반항적 기질. 코스텔니츠카와 친밀함.
정말로 간단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건 아직 <예누파>가 대중적이지 않고, 더군다나 체코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직 접하지 못하신 분들이 많을 것같아서입니다.
1막.
라차는 연모하는 예누파가 스테보와 사랑에 빠진 것을 괴로워하여 스테보의 할머니에게 불만을 표시합니다. 스테보는 징집 면제를 받아 술에 취해 친구들과 집에 옵니다. 그의 분방하고 충동적인 성격을 묘사하는 일련의 장면이 등장하죠. 친구들이 예누파와 스테보의 사랑을 축복하는데 코스텔니츠카 등장하여 스테보가 1년 동안 술을 끊으면 결혼을 허락한다고 선언합니다.
스테보는 여전히 예누파를 사랑한다고 하며 그녀의 뺨이 너무 아름답다고 치하합니다. 스테보 퇴장하자 라차 등장하여 예누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냉정하게 거절당합니다. 라차, 스테보가 아름답다고한 예누파의 뺨을 칼로 그어버립니다.
2막.
5개월 후. 코스텔니츠카의 집. 예누파는 스테보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코스텔니츠카가 예누파를 숨겨놓고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코스텔니츠카는 스테보를 집에 오라고 해서 예누파가 깊은 잠에 빠져있는 동안 스테보에게 예누파와 아이를 한번 보라고 합니다. 스테보는 예누파가 이젠 무섭다고 하고 그녀나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갑니다. 더구나 시장의 딸하고 결혼할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때 라차가 등장하는군요. 절망한 코스텔니츠카, 라차에게 예누파와 결혼하라고 권하면서 사실을 이야기해줍니다. 라차는 받아들이지만 스테보의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번민합니다. 코스텔니츠카는 아이는 이미 죽었다고 말하죠.
라차가 퇴장하자 코스텔니츠카는 예누파의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얼음 구덩이에 던져버립니다.
예누파가 긴 잠에서 깨어나 성모에게 기도하고 있는 동안 코스텔니츠카가 등장하여 아이는 죽었고 스테보에 대한 것은 잊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라차와 결혼하라고 합니다. 라차 등장하여 예누파에게 청혼하고 둘은 결혼하기로 합니다.
3막.
3개월 후. 라차-예누파 결혼식날. 시장부부와 라차가 형제의 우애로 초청한 스테보/카롤카(시장의 딸) 커플이 참석했습니다. 차분한 결혼식 풍경입니다. 스테보의 할머니가 라차-예누파를 축복하고난 후 곧바로 떠들썩하게 냇가에서 얼음에 갇힌 아이의 시체를 찾았다는 사람들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경악하는 코스텔니츠카, 예누파.
코스텔니츠카는 자신의 짓임을 밝힙니다.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 것은 예누파에게 죄가 전가될까봐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처절한 참회를 하고 시장과 더불어 퇴장합니다. 사람들이 코스텔니츠카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가운데 라차는 이 모든 것은 예누파와 자신의 일 가운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예누파 또한 예전에 자신의 볼을 그어버린 라차의 일을 용서했다고 하고 둘이 포옹하면서 막이 내립니다.

지휘 : 앤드류 데이비스 / 런던 필
예누파 : 로베르타 알렉산더 / 코스텔니츠카 : 안야 실야 / 라차 : 필립 랑그리지 / 스테보 : 마크 베이커
그림은 2막에서 예누파가 성모에게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먼저 DVD 사진을 보시면 흑인 여성이 나옵니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외모이지요. 그녀가 근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볼을 가진 여성으로 출연하는데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도대체 내용하고 등장인물의 괴리가 너무 심합니다. 하지만 로베르타 알렉산더의 연기와 노래를 감상하면서 이야기 상의 인물과 등장인물이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어야 극이 훼손될 수 있을지....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녀의 강하고 매력적이고 회한에 빠진 공허감을 표현하는 감수성 깊은 노래들은 너무나 충분하게 감상자로 하여금 캘릭터에 몰입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지요.
그라인드본 축제 극장의 아름답고 절제된 무대에서 처음보는 매력적인 소프라노를 감상하는 일이 제겐 정말로 기억에 남는 추석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흑인만이 낼 수 있는 공명이 그녀의 목소리에도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로베르타 알렉산더를 보며, 그녀가 캐슬린 배틀 만큼만 어여쁜 자태를 지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따위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잘 연출된 무대연기와 더불어 세밀하고도 정확한 연기와 연기보다 더 훌륭한 노래를 선물했습니다.
예누파는 극중에 계속해서 등장하여 1막에선 아름다운 젊은이를, 2막에서는 비탄과 절망에 젖은 여인의 모습을, 3막 또한 내키지 않은 결혼과 아이의 죽음을 보는 어미의 모습과 이젠 다 용서하고 체념하는 장면을 표현해야하는 아주 어려운 캘릭터입니다. 이것을 너무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로베르타 알렉산더. 그녀의 외모가 떨어진다고 폄훼하는 어떠한 시도도 맹렬한 비난을 받아야할 것입니다.
라차 역은 유명한 테너가수 필립 랑그리지입니다. 그에 대해선 괜히 말을 보탤 이유가 없습니다. 약간 과장된 연기와, 필요 이상의 강렬한 목소리를 1막에서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를 제외하는 모든 영역에서 그가 왜 대표 테너로 각광을 받는지 이 한 편을 감상함으로써 이해를 할 수 있다고 하면, 물론 조금의 과장이 섞여있을 겁니다. 목소리의 힘. 마치 발음 하나하나를 배구선수가 구사하는 스파이크처럼 쏘아대는 그의 정열적인 노래와 높이높이 치고 올라가는 절규 등등이 기막혔습니다.
로베르타 알렉산더와 필립 랑그리지가 좋았다한들, 이미 세상의 많은 것을 경험하여 오페라를 자신의 큰 부분으로 만들어놓은 안야 실야. 그의 늙음이 창조해낸 하나의 도통함. 그것에 비하겠습니까.
<예누파> 이 작품 가운데 사실 가장 중요한 배역이 코스텔니츠카일지도 모릅니다. 따로 분장을 할 필요가 없게 보이는 늙어버린 안야 실야. 도대체 이렇게 각지고 완고한 모습을 가진 여인이 안야 실야였다니.... 뵘의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프라이야 역으로 찍은 사진을 뒤져보았습니다. 분명하게 안야 실야, 그녀가 맞더군요.
그녀는 나이를 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늙어 주름이 많은 모습을 했으면서도 얼마나 충실하게 관리를 했는지 그 비통의 캘릭터를 처절하게, 처절하게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목소리의 톤이야 여전했겠습니까만,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버리고 말았다고 하겠습니다. 안야 실야의 절규. 그녀의 표정. 몸짓 하나하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버리고 마는 혼신의 힘. 그 모든 것이 노래로, 연기로 뿜어져나왔습니다. 황두령 님 얘기대로 땀구멍 하나하나마다 내공이 분비되는 듯한 모습이었고, 실야의 코스텔니츠카 연기 때문에 이 작품과 공연은 최고의 평을 받아 마땅하리라 여겨졌습니다.
이젠 그녀의 대표작으로 베르크의 <룰루> 타이틀 롤 대신에 이 작품을 거명하려고 마음 먹게 만들었습니다.
올 추석의 가장 큰 선물은 이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음반을 한 번 볼까요?

지휘 : 찰스 매케라스 / 빈 필
예누파 : 엘리자베트 쇠더스트룀 / 라차 : 비슬라프 오흐만 / 스테보 : 페터 드보르스키 / 코스텔니츠카 : 에바 란도바 / 카롤카 : 루치아 폽
우리나라에서 구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예누파>입니다. 저도 이것 하나만 가지고 있습니다.
지휘자 매케라스 경은 실로 야나첵 스페셜리스트라 불릴 만합니다. 그의 오페라를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다 녹음한 사람으로 <작고 꾀많은 암여우> <카타 카바노바> <죽은 자의 집에서> 등을 시중에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이 음반보다 공연실황인 DVD가 음질을 빼고 평가하자면 더 좋습니다. 물론 제 취향이 결정적인 판단의 기준이겠습니다만.
지휘와 연주는 단연 압권입니다. 팀파니의 격정적인 포효와 금관의 폭발 등이 이 격렬한 오페라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몰아갑니다. 물론 빈 필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려한 현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고요. 매케라스의 이 음반을 들을 때, 전 이 오페라가 시골의 한 농장 주변을 둘러싼 도덕률과 인습, 그 사이에서 파생하는 인위적 죄악들의 이야기라기 보다, 훨씬 더 그 주제를 확장하여 거대한 시극을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물론 작곡가가 요구했을지도 모르는 가수들에 의한 드라마틱한 표현을 감안한다면 이런 연주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요.
하여간 매케라스와 빈 필의 이 방대한 연주는 이 드라마를 더욱 극적으로 몰아가는 엔진으로 가동합니다. 한 마디로 훌륭합니다.
타이틀 롤의 엘리자베트 쇠더스트룀은 처음 들어본 가수입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듯도 하고, 부드러운 듯도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라고 여기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쇠터스트룀의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목소리가 예누파의 성격이 요구하는 희생과 비탄과 용서, 그리고 화해를 잘 표현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라차 역의 비슬라프 오흐만, 스테보의 페터 드보르스키도 호연입니다. 오흐만 역시 처음 들어본 테너입니다. 그렇다고 얕볼 수는 없지만 아쉽게도 영상물로 본 가수가 필립 랑그리지였습니다. 그하고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요.
페터 드보르스키는 제가 좀 들어봤는데, 작품마다 기복이 이 테너보다 더 심한 사람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 <예누파>에선 좋습니다. 유약하고 변덕스럽고 충동적이고 어리광까지 붙은 캘릭터를 노래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아주 어울립니다. 역시 네모리노를 잘 노래하는 테너답습니다.
문제는 코스텔니츠카 역의 에바 란도바이죠. 코스텔니츠카를 노래하기 위해서는 사실 소프라노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겠습니다. 다만 목소리에 위엄이 있고, 강건하고 또 쇳소리가 날 만한 격정이 있어야하겠습니다. 란도바 역시 이런 것을 구비하고 있는 좋은 가수인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것이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서 만들어내는 코스텔니츠카, 다 합했을 경우에, 전적으로 안야 실야와 비교했을 경우, 물론 소프라노 였던 사람하고 메조 소프라노의 음색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치사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만, 호소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재언해서, 좋은 가수입니다. 하지만 극적인 커브를 구사하는 에이스 투수로는 조금 아쉽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녹음입니다. 매케라스의 지휘만 가지고도 이 음반은 구입하실 이유가 될겁니다.
아마존에는 뤼자넥이 코스텔니츠카를 노래하는 음반도 있군요. 무지하게 비싼 것이 흠이지만 참으로 듣고 싶은 음반입니다.

지휘 : 이브 쾰러 / 뉴욕 오페라 오케스트라 / 카네기 홀 실황
예누파 : 가브리엘라 베나츠코바 / 라차 : 비슬라프 오흐만 / 코스텔니츠카 : 레오니 뤼자넥 / 스테보 : 페터 칸자라스
고객 평점이 별 다섯개, 거의 만점인데 가격이 무시무시합니다. 2CD에 42달러 배송료 제외하고 5만원이 훨씬 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