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의 <구운몽>은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소유가 왕후장상의 묘지터를 보고 감회를 느끼는 것과 그들의 사랑의 소멸에 출가를 결심하는 ‘소유’편의 결말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로의 여행기가 서포의 <구운몽>이다. 그 바탕에는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소멸에 대한 공포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에 비해 최인훈의 구운몽은 죽음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그의 구운몽의 시작 부분은 이렇다.
관 속에 누워 있다. 미이라. 관 속은 胎집보다 어둡다. 그리고 춥다. 그는 하릴없이 뻔히 눈을 뜨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최인훈 <구운몽>의 시작부
관은 시체를 담는 곳이다. 즉 죽음이 있는 공간인데, 초두부터 죽음에 침잠된 문장이 등장한다. 그렇게 죽음은 소설 구운몽에 등장한다. 죽음은 서로를 포옹한 채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축이 된다. 이 출발점에서 영원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바로 이 지점이 서포의 <구운몽>과 최인훈의 <구운몽>이 합치하는 곳이다. 두 작품은 시작이 다르지만 지향하는 점이 같다는 것에서 좌우 위상이 뒤바뀌었지만 같은 물체를 의미하는 거울을 닮았달까. 즉, 이 두 작품의 영원 추구는 서로 시대와 소재가 다른 이야기를 ‘하나로 읽게 하는’ 것으로 작동한다. 이 작품들은 영원 회귀의 생애로 이야기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일회성
영원이 인간에게 도달할 수 없는 목표로 생각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짧고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은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영원성은 추구의 대상이 된다. 한번의 삶으로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일생을 보여주는 기존의 ‘傳’으로는 인생의 다면적인 모습을 통해 영원성을 보여주기 어렵다. 그래서 서포의 <구운몽>은 액자 소설 구조로 꿈의 서사를 차용해 두 자기의 목소리를 작품에 투입시킨다. 이 목소리는 제 나름의 이야기를 말하며 각각의 그림자가 되어 버린다. 즉, 이중의 삶을 보여주되 그것을 대비시켜 독자에게 제시하는 수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의 관심을 끄는 교묘한 수법이 되며 서포의 <구운몽>이 지니는 소설적 가치를 즉 삶의 탐색의 치밀성을 한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최인훈의 구운몽은 이중의 삶을 제시하는 서포의 <구운몽>과는 다른 구조를 취한다. 우선 그것은 이중의 삶이라기보단 아홉 개의 압축된 삶을 보여준다. 다시말해 사회의 이런저런 분절된 양상을 독고 민의 분절된 꿈 연속에 대입시킴으로서 더 다양한 영원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 삶들은 아래와 같다.
1.1.1.1.1.1.1. 독고 민으로서의 삶
1.1.1.1.1.1.2. 시인의 선생:시의 사랑을 경험
1.1.1.1.1.1.3. 기업 사장:조직과 경제를 경험(양소유의 부귀)
1.1.1.1.1.1.4. 춤추는 곳의 선생:신뢰를 경험(처첩의 신뢰)
1.1.1.1.1.1.5. 혁명 영도자(박사): 지성에 대한 경험(양소유의 知)
1.1.1.1.1.1.6. 에레나의 기둥 서방:애정을 경험(양소유가 처첩에게 지니는 애정)
1.1.1.1.1.1.7. 혁명 수령(5번과 연관)
1.1.1.1.1.1.8. 죽은 시체로서의 독고민
1.1.1.1.1.1.9. 되살아나 강의를 듣는 민
이 삶들 중에서 2-7번의 삶은 서포의 <구운몽>에 등장하는 소유의 부귀영화와 비견될 것으로서 독고민은 혁명 영도자(비록 그의 의식은 부인하고 있으나)의 삶이다. 그는 이 혁명 영도의 삶 속에서 그렇게 그를 사랑하고 원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숙’만을 원한다. 두 개의 구운몽에서 제시하는 인간상은 다면화된 삶 속에서도 사랑해 나가는 인간임을 이것에서 눈치 챌 수 있다.
서포의 <구운몽>에서 성진은 동해 용왕의 궁에 사례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팔선녀와 희롱하고 그네들에게 ‘사랑’을 느낀다.(물론 승려 생활의 적막함이 있었으나 그것은 팔선녀와의 희롱에서 즉 애정 놀이에서 비롯함이다.) 그것으로 인해 성진은 육관 대사에게서 파문당하고 인간 세상으로 추락하여 양소유가 된다. 그 소유는 팔선녀의 현신인 이처육첩을 각각 열심히 사랑한다. 성진이 소유의 꿈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얻고 대중을 구제하는 것도 대중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으로서 대중과 더불어 해탈하는 것이 대승법의 교리 아니던가.
최인훈의 <구운몽>에 등장하는 독고민은 그 한자인 獨孤民 그대로 외로운 홀로 외로운 민중이다.(서포의 <구운몽>에서도 양소유, 성진이라는 이름이 인물의 속성을 포함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외로운 사람은 숙에게서 온 편지를 통해 각성된다. 그녀의 편지는 민의 번뇌를 일깨운다. 그녀가 일깨운 번뇌는 그를 꿈 속에서 전생시키며 인간사의 온갖 형태의 애정들을 경험하게 한다. 서포의 <구운몽>에서 경험들이 꿈하나에 모두 들어가 있다면 최인훈의 <구운몽>에서는 그 경험을 하나하나 나열하였다고 보면 옳겠다.
인생의 다양한 면에서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왜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고 성진과 민의 꿈 속에서만 드러나는가. 소설이 시작하는 최초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의 애정은 억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성진은 불가의 계율과 그가 처한 종교 사회가 애정의 다양한 발현을 억누르고 있었으며 민의 경우에는 그가 처한 경제 상황이 그에게 애정에 관심을 둘 수 없게 하였다. 즉, 그들은 프로이트의 현실 원칙에, 라캉의 상징계적 질서에 눌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꿈이라는 수단을 통해 삶의 억압된 부분을 다시 불러온다. 이는 미국의 소설가 포우의 <어셔가의 몰락>, <윌리엄 윌슨>에 비견될 만한 것이다. 두 구운몽에서는 포우처럼 음습하게 억압된 것을 귀환시키기보다는 꿈이라는 형식을 차용하여 보다 덜 증후적으로 귀환시킨다. 다시말해 ‘꿈’이라는 무의식의 형상화된 수단을 빌어 초우가 주로 사용하는 화자에 의한 진술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힘을 가진 작품이 된다. 그렇게 <구운몽>에서는 애정이 다시 되살아나 환상 공간 속에서 재구성되어 부상한다.
•일회성을 넘어 영원으로
서포의 <구운몽>에서 양소유는 승상이라는 존귀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무상함을 깊이 느끼고 있던 터에 육관 대사와 만난다. 그리고 다시 성진으로 돌아와 해탈하게 된다. 즉 소유는 존재의 소멸이라는 숙명을 이겨내지 못할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존재의 소멸이 항상 한계 상황으로 제시되는 현실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신에게로 귀의하는 것이다.
실패한 혁명 주도자로서 독고민은 숙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로 인해 독고민은 허무함을 느낀다.
집착할 아무 까닭도 없어진 사람이, 집착할 아무 까닭도 없어진 사람에게 매달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바보는 끝까지 바보였다. 虛가 虛를 보고 있다.
-최인훈 <구운몽> 中
그의 이런 허무함의 인식은 독고민 그 사진이 제 자신으로 돌아가는 단서를 제공한다. 혁명 동지 중 한명이 내뱉는 말. ‘얼어 죽는 형제도 있을 거야.’ 는 독고민 원 존재의 운명을 암시하며 그래도 그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늙은 간호부장은 독고민에게서 죽은 아들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 숙과 민의 연애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계속 이어진다. 그 것은 결미에 그들이 나누는 키스가 계속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의 입맞춤은 끝나지 않았다.’
신성성과 사랑은 <구운몽>의 큰 틀로서 작품을 이루어 나가는 중요한 줄기가 된다. 하지만 이 두 요소는 각각의 이질성 때문에 융합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신성성 역시 영원하지 못한 인간이 영원성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과 최인훈 <구운몽>에서 사랑은 영원성의 획득 수단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의 주제는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여러분 피닉스는 또 다시 날까요?”
보내는 사람들의 외침.
“사랑이 있는 한 날 것입니다. 수령.”
-최인훈 <구운몽> 中
피닉스는 불 속에서 거듭 살아가는 신조이다. 그 새는 신성성과 영원성을 가진 새이다. 그 새가 살아나게 하는 힘은 바로 사람이다. 이 것이 두 주제가 연관성을 가지는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눈알 대신에 현미경 렌즈를 가진 이 상이 던지는 문제는 그러나 이런 감상만이 아닙니다. 이 화석은 그 흉측한 모양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의 통일감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최인훈 <구운몽> 中
서포와 최인훈의 <구운몽>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두 작품의 시대 뿐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의 제목이 가지는 상징성도 다르다. 서포의 <구운몽>이 성진과 팔선녀 각각의 꿈을 의미한다면 최인훈의 <구운몽>은 독고민 한 명의 아홉가지의 꿈을 말하는 것이어서다. 그러나 두 소설이 통합체로 보이게 하는 힘은 심저를 흐르는 유사성, 즉 영원성이 흐르는 까닭에서이며 그 영원성은 사랑의 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