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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0.(주일찬양예배) 안드레 선교사
바울의 간절한 소원
♡♥:*:...:*:♥♡로마서1:13~15♡♥:*:...:*:♥♡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당시 최대의 중심도시였던 로마를 향한 강한 열망이 나옵니다.
‘11절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13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은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복음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전 세계에 알려질 정도로 이미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로마에 가기를 소원했을까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불같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 의해서 로마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바울은 지식은 있으되 복음의 실체가 없는 로마교회에 영광스런 복음의 실체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열매와 결과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가지고 있다면 마땅히 우리의 삶과 인격 가운데 성령의 9가지 은사와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못하는 교회는 견고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있는 교회는 어려운 환경일수록 더 강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로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령의 은사도 없고 성령의 열매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가 있으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로마교회는 복음은 있으되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는 복음은 있는 것 같으나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지식의 은사는 문제가 뭐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답이 뭔지 아는 것이 지혜의 은사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만 있어도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고행이나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녀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영화롭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성령의 은사를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의 은사는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믿고 마음껏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은사는 한 가지입니다.
내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면 때를 따라 필요한 은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한 감격이 너무 컸습니다.
교회가 큰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초라해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무리 초라해보여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가장 큰 것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고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 가장 참된 것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이 지역에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풍성한 복음을 체험했다면 바울처럼 할 수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역대하 8장에 보면 네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마리아 성이 아람군대에게 포위당했을 때 성 안에서 양식이 떨어지자 자식을 잡아먹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네 명의 문둥병자가 어차피 죽을 거 하고 아람의 진영으로 갔을 때 그렇게 위세 당당했던 아람 군대가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애굽 쪽에서 자기 나라 군대보다 강력한 말발굽 소리를 듣게 하셔서 음식과 물품을 놓고 도망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문둥병자들이 실컷 먹고 마시다가 정신이 들자 ‘이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은 일어납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될 것 같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진짜 믿어버리고 내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 안식을 누리고 있으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 하늘과 땅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에게 쏟아지게 됩니다.
헛된 인생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정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대속하셨습니다.
값을 대신 지불하고 잃어버렸던 물건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대속이요, 속량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 값을 치르지 않으면 이 어둔 죄악 가운데서 빠져나올 수 없는데 예수님이 나 대신 그 죄 값을 치르심으로 나를 그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요19:30의 ‘테텔레스타이’는 실제 시장에서 쓰던 말인데 내 빚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청산했을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주께서 위하시는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은 실수하고 넘어질지라도 결코 나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우리는 정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진실로 안다면 절대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마귀의 참소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아름답게 보십니다.
율법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족하다고 우리를 정죄하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실수를 반복하고 연약하여 넘어질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죄 없다 여기시고 아무 흠이 없는 신부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 안에서 나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죄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복음을 확실히 믿는 자에게 무차별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머리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복음 위에 견고히 서 있다면 약속하신 성령님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게 됩니다.
우리가 정확한 복음과 믿음 가운데 서 있기만 하다면 약속하신 성령의 은사를 온전히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견고하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는 것은 이 복음 가운데 견고히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생명의 복음을 가진 교회와 개인은 깊은 환난과 짙은 어둠 가운데서 더 강한 빛으로 빛나는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바울은 이 복음 때문에 로마로 가고자 하는데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을 깊이 깨닫고 체계적으로 누리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깨달아지는 순간 죄로부터 자유해지면서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가 무차별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돋보기로 검은 종이를 태울 때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복음을 알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삶 속에 복음의 결과인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검은 종이가 태워지려면
첫째, 초점이 맞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탈 때까지 움직이면 안 됩니다.
돋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검은 종이는 나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인생입니다.
나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다 검은 종이입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대단한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길거리에 강도나 저나 하나 차이가 없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불이 붙으면 복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복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복 덩어리가 되면 내 안의 성령이 나타나서 새 생명으로 바뀌어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우리 인생의 본성은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직접 뭘 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대도 탐탁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아름다운 열매를 절대 맺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초지일관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번도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소금이 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누구나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들어가면 예수로 말미암아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지고 빛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빛인 것입니다.
내가 빛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빛을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노력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복음이 초점 자체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종교와 세상과 다 섞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복음, 어떤 때는 율법. 이러면 안 됩니다.
성경을 그대로 따라가 보면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는 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을 풀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벗어나는 순간 마귀의 송사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을 때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가 이 대속의 은혜를 벗어날 때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마귀의 참소를 받게 됩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가운데 들어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그 가운데 서 있으면 나를 정죄하고 넘어뜨리는 그 세력으로부터 우리는 이길 수 있고 성령의 역사는 다시금 충만하게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 안에서 약속하신 풍성한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복음의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은 희락의 영이요, 평강의 영이요, 기쁨의 영이십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생명으로 충만하면 여러분 주변에 많은 영혼들이 그 생명의 빛을 보고 이 교회에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