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한 남자 슈미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소외와 가족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어바웃 슈미트]는 지극히 할리우드적이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물적 지배 아래서 자기소외에 빠지기 쉬운 현대인들의 고독한 내면을 깊이 있게 전달하는 듯하다가, 가족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대를 깨닫는다는 할리우드적 결말로 귀순한다.
평생 동안 근무한 보험회사를 정년퇴직하는 날 아침부터 시작해서, 레저용으로 개조한 버스를 타고 부부가 함께 여행이나 하자던 부인의 돌연한 죽음을 거쳐, 마음에 안 드는 사윗감을 택한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까지 슈미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알렉산더 폐인 감독은 이중장치를 도입한다. 혼자서 리모컨을 돌리며 채널서핑을 하다가 멈춘 아프리카 아이들의 구호 모금 광고. 하루에 77센트를 보내면 아이는 행복하게 자랄 수 있고 편지 교환 등을 할 수 있다는 이 달콤한 유혹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풀면서 자기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보인다.
[어바웃 슈미트]의 중요한 극적 장치는 슈미트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얼굴도 모르는, 영어도 몰라서 편지 내용이 제대로 전달될지도 모르는, 탄자니아의 소년 엔두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슈미트의 편지 내용은 이중적이다. 실제 일어난 현실과는 조금 다르게 슈미트의 희망사항이 뒤섞여 재창작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슈미트의 나레이션으로 보이스 오버되는 편지내용을 들으면서 비로소 슈미티의 본심에 접근하게 된다.
소외는 혼자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정년퇴직하여 할 일도 없고, 40년 넘게 같이 산 아내도 죽고,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비로소 그녀가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분노하고, 결혼을 앞둔 딸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쳐도 딸은 반가워하지 않는다.
자기소외야말로 존재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자신에게 숨긴 부정했던 아내의 과거, 직장과 사회로부터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된 허탈감, 정년퇴직과 함께 슈미트에게 닥친 위기는 심각하다. 그런 현실을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내적차원을 상실하고, 마르쿠제가 말한 일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기를 슈미트는 어떻게 극복했는가?
얼굴도 본적 없는 탄자니아의 한 소년과의 관계 맺기는 슈미트가 가진 절대고독, 근원적 소외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하는 방법은 될 수 있지만, 슈미트라는 인간이 안고 있는 고독과 소외의 확실한 탈출구는 아니다. 그러므로 탄자니아의 소년 엔두구가 보낸 그림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열하는 슈미트의 모습은 정서적으로 커다란 힘을 발휘하면서 우리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은 아닌 것이다. 비범한 재능을 가진 알렉산더 폐인 감독은, 바로 이 부분에서 할리우드의 주류 보편적 질서와 타협한다.
영화적 가치를 막 실현할 수 있는 그 핵심에서 한 단계 전진하지 않고 보편적 가치로 회귀함에도 불구하고 [어바웃 슈미트]는 잭 니콜슨의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연기를 통해, 또 사돈을 전나로 유혹하는 [미저리]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 케시 베이츠나 형편없는 사윗감으로 망가진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의 더모트 멀로니 등의 맛갈나는 연기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소외의 본질 꿰뚫고 형상화 한 알렉산더 폐인의 탁월한 연출력을 통해 우리들의 가슴을 헤집는다.
잭 니콜슨이 아니었다면, 이런 가정법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의 연기에 기꺼이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우리는 다시 가정법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의 이름 대신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배우들의 이름을 대입해 놓고 상상해본다. 아니다. 아니다. 그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는 연기를 약속하는 배우는 없다. 오직 그 뿐이다. 잭 니콜슨은, 욕심 많고 괴팍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쓸쓸이 빠져있는 당신, 혹은 나의 모습을 또 다른 형태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언제나 같은 식당 같은 자리만 고집하던 작가, 길을 걸을 때도 보도블록의 맞닿은 선은 한사코 밟지 않으려고 이상한 스텝을 자초하며 기우뚱거리던 작가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캐릭터를 슈미트는 보여준다. 슈미트의 상황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 평생 일만 알고 열심히 보험회사에 근무했다. 누구나 슈미트의 능력과 성실함은 인정한다. 그러나 정년퇴직한 뒤 다시 어렵게 찾아간 예전의 직장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예전처럼 맞아주지 않는다. 삶은 그런 것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평생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아내의 배신은 어떠한가. 더구나 그 상대가 자신의 정년퇴직 기념식에서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던 가장 절친한 친구라면. 이제 그는 이 넓은 세상에 혼자 있다. 그러나 혼자 있다는 것이 외로움의 시작이자 끝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슈미트의 절대고독은 자신 내부에 있는 모순에서 온다.
또 사돈으로 등장하는 케시 베이츠는 어떤가. [미저리]에서 집요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의 원작자인 작가를 위협하여 자신이 원하는대로 결말을 다시 쓸 것을 강요하던 그녀는, 모든 집요한 스토커들을 미저리라는 보통명사로 만들어 버릴 만큼 잊혀지지 않는 악몽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다. [어바웃 슈미트]에서는 슈미트의 사돈으로 등장하지만, 목욕하고 있는 슈미트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같은 욕탕에 들어와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한다. 이 대담한 중년의 대배우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볼품없는 중년여인의 알몸을 변화시켜 놓겠는가?
좋은 영화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부딪쳤던 가치를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우리는 [어바웃 슈미트]가 아니라 슈미트라는 이름 대신 자기 이름을 대입시키며, 나에 대한 스스로의 이야기를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 자기성찰에 접근하는 통로를 이 영화는 제공해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