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우 곽종석은 1846년(현종12년)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월사리 초포(草浦)에서 곽원조(郭源兆)의 막내아들로 태어 났다.본관은 현풍(경상북도 달성군에 있는 지명) 곽씨이다. 6-7세에 사서삼경을 다 베우고 15-16세에는 고금의 정치제도 역사,지리,병법음악,의술,음양,불가와 노장의 글까지 두루 읽고 후일 올바른 방향을 정하여 본격 성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25세에 성주 대포(한계)리에 살고 있는 寒洲 李震相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한주 이진상은 퇴계 학맥의 정통을 이은 정재 류치명의 문인으로 곽종석 보다 28살 위였다. 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으로 부터 理學을 전수 받고 이진상의 학문에 깊이 존경을 표하고 이진상이야 말로 퇴계의 학통을 잇고 주자의 宗旨를 체득하여 士風을 일으킨 큰스승으로 삼았다. 이진상이 죽자 1만3천4백자에 달하는 방대한 행장을 지어 스승에게 올린다.
50세 되던해에 비안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않고 58세에 통정대부 비서원승이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니 고종은 의정부 참찬을내렸다. 그는 고종에게 국정수행의 4가지 차(箚)-건의 사항-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내용은 1.올바른 학문을높혀서 장려할것(崇正學), 2.민심을 수습하여 단결하게 할것(結民心), 3.군사의 체제를 정비 확충할것(定軍制, 4. 국가의 재용을 절약할것(節財用) 등이다.
1910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남 거창군 茶田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유림 대표단이 빠진 것을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이에 그를 중심으로한 유림단이 파리장서 사건을 전개하여 우리민족의 독립을 열국이 모인 파리강화회의 석상에서 요구한 사건이다. 이 파리장서는 그가 74세때 그가 짓고 유림대표137명이 서명한 2천6백7십4자의 장문으로 문인 심산 김창숙이 영어로 통역하여 중국과상해 파리로 보내졌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죽는다.
그의 이기사상은 4단10정경위도에서 잘 들어난다. 그는7情 대신 3개를 더하여 10情으로 다루었다. 10情으로 (愛,喜,樂,憂,哀,惡,怒,忿,欲,懼)나누고 이를 3가지로 묶을 수 있으며 결국은 欲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하였다.또한 그느 먼저 理가 없으면 陽이 없으며 理는 음양의 아버지요 천지만물의 할아버지라고 하여 理를 궁리하는것이 列聖의 心法이며 종지라고 하였다. 또한 4端을 날(날줄)로 보고 10情을 씨(씨줄)로 보았지만 性과 情을 각각 날과 씨로 본 농암 金昌協의 학설이나 理를 날에 비유하고 氣를 씨에 비유한 갈암 李玄逸의 주장도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대구의 낙동서원에 파리장서 기념비가 있어 영남 유림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일제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다한 그를 생각하며 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