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이었다. 보충자율학습이 극에 달해 있었다. 대전시내 인문계 고등학교는 일요일에도 학생들을 등교시켰다. 기독교 인권위원회 소속 몇 명의 목사님이 앞장서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다. 학생들의 종교의 자유(적어도 일요일 교회에 출석해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일요일 학생 등교는 하지 않아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도 대부분의 목사들은 서명에 동참하지 않았다. 젊고 개혁적인 소수의 목사들이 참여했을 뿐이다. 그래도 그 서명 용지를 들고 교육청을 항의 방문했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일요일 등교를 금지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그 뒤로도 고3학생의 일요일 등교는 대부분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
예배 마치고 와도 된다는 학교의 발표는 있지만 친구들이 일찍부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시간에 예배드리러 오기가 여전히 쉽지는 않았다. 한때 교실 뒷벽에 유행하던 고3 입시생을 위한 경구 -<내가 잠잘 때 친구는 공부한다.>-를 생각하면 그 이유를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터다.
그래도 그때는 교회 예배 인원이 줄어드는 문제라 그랬을까? 뜻있는 목사님들이 앞장서 항의라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강 의석 학생이 ‘퇴학·단식’의 외롭고 의로운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싸움을 할 때 이 땅의 천만 기독교인들은 외면했다. 마치 이천 년 전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예수를 당시 모든 사람들이 외면했던 것처럼. 그래서 오늘 나는 기독교인인 것이 부끄럽다.
국가보안법이 독재 권력의 정권보안법으로 위력을 떨치던 70-80년대 수많은 이 땅의 뜻있는 젊은이 · 지식인들이 억울하게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혹은 죽어갈 때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은 외면했다. 오히려 기독교를 이끌어간다는 소위 교계 지도자 목사들은 독재자를 위한 구국 기도회를 개최하였고 신도들은 반공궐기대회에 나가 장단을 맞추었다. 그래도 그때는 김 재준, 박 형규, 문 익환, 문 동환, 함 석헌 등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의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우고 함께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범인 문 귀동 경장이 집사라 해도 조금은 덜 부끄러웠다.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운동에 한기총이라는 수구 기독교 단체가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박 정희, 전 두환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수 십 만의 기독교도를 이끌고 거리로 나섰다. 대부분 기독교계의 신문들은 국가 보안법 폐지 반대 사설을 싣고, 각 교단별로 국가 보안법 폐지 반대 성명도 내고 있다. 기독교 120년의 역사를 돌아본 KBS의 객관적 프로그램에 항의하며 언론 탄압을 공공연히 자행하더니 드디어 오늘 시청 앞 광장에 그들 10만이 모였다. 자랑스런 『미국』의 국기 『성조기』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아테네 올림픽에서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의 상징으로 남북 선수들이 함께 들고 입장한 단일기를 불사르고 국가 원수를 심각하게 모독하는 난동을 부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구국 기도회를 개최했다. 9시 뉴스에 잠깐 비치는 한기총 고문이라는 순복음교회의 조모 목사는 아무리 양보해도 이 시대의 마귀라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이런 행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아직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의 집단적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인 것이 부끄럽다. 아니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이 땅에서 기독교는 희망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기독교는 결코 이 시대 구원이나 희망이 될 수 없다.
“주여, 저들은 지금 저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면서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 결코 저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린다, 사랑의 하나님을 향해.
내일부터 몇 사람이라도 더 이상 부끄럽기 싫은 기독교인을 만나서 뜻을 모아야겠다. 그들이 목회자든 평신도든 가리지 않고, 몇 명이 되든 신경 쓰지 않고 함께 작은 행동이라도 모색해야겠다. 1987년 6월의 그 거대한 물결도 애초에 몇 사람의 작은 몸짓에서 출발하지 않았는가?
첫댓글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이 되게 하옵시고, 모색은 주님의 모색이 되게하옵소서. 정의로우신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