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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 시집, <슬픈 노동>, 갈무리, 2002.
버스카드 시대의 의리지기
맹문재
1
컴퓨터, 디지털, 인터넷, 테크노, 사이버, 사이보그, 게놈,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명명되는 우리의 시대는 버스 차장으로부터 버스 카드로 바뀐 시대이다. 즉 차장 대신 카드가 통용되는 이 시대는 기계화된 시대인 것이다. 우리의 하루는 기계인 차를 타고 출근하는 것으로부터 컴퓨터 작업이나 설비 운전이나 수리 작업이나 전화 걸기 등 하루종일 기계를 만지는 작업을 하고 또 다시 기계인 차를 타고 퇴근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계인 전기 밥통과 냉장고와 가스 렌지와 보일러의 도움으로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하고 또 다른 기계인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오디오를 듣고 컴퓨터로 이메일을 하고 또 다음날을 위해 시계를 맞춘다. 우리의 상황은 기계에 의해 맞춰지고 우리의 의견은 기계에 의해 전달되고 우리의 세계인식은 기계에 의해 형성되고 그리고 우리의 지위는 기계에 의해 마련된다. 우리가 자동차와 컴퓨터와 냉장고와 관광 버스와 비행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계들이 우리를 선택한다. 수많은 차와 에어컨과 운동기구와 컴퓨터와 텔레비전과 전화기 등이 우리의 주식과 부동산과 시대 감각과 취미와 정보 보유량과 학벌과 사회적 위치 등을 참고해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버스 카드가 통용되는 시대에 인간 정신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로 여기던 의리와 인정과 아량과 양보와 믿음은 등은 기계의 가치에 이익이 되지 않는 한 아무 쓸모가 없다. 인간의 실존을 고민하며 아무리 열심히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1,000원의 요금에 해당하는 버스를 탔다면 그는 그에 해당하는 위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혹 그가 버스 카드의 잔고가 없어 1,000원의 차비를 낼 수 없다면 어떠한 인격과 품성을 지녔고 어떠한 교육을 배웠고 어떠한 인생관과 국가관을 지녔는가 등과 아무 상관없이 그는 그 이하의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버스 카드를 너무 믿고 비상금을 한푼도 갖지 않고 있어서 1,000원의 차비를 내지 못해 버스로부터 쫓겨났다면 그 난감함이란 참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해 버스 차장이 있었다면 아마 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솔직하게 얘기를 하면 버스 차장은 들어주었을 것이고 그 때 시인은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고마움을 가졌을 것이다.
진정 버스 카드가 지배하는 시대는 몰인정한 시대이다. 오직 기계의 가치만이 통용되고 추구된다. 기계는 끊임없이 자기 이익에 유리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조종하고 강요한다. 기계는 독재자인 것이다. 때로는 그 기계의 명령을 거역하고 일탈하려고 하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의 조건이 기계에 의해 전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계가 요구하는 대로 옷과 헤어스타일과 식사 습관과 계산법과 말투를 바꾼다. 측정, 생산, 마찰, 추출, 전용, 상승, 투입, 잘 굴러간다, 작동, 효과, 장치, 조절, 조립, 재배치 등 기계의 이익 창출에 유리한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노는 것도 그냥 놀 수가 없고, 쉬는 것도 그냥 쉴 수가 없고, 여행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취미 생활을 하는 것에도 스포츠를 하는 것에도 대공원에 가는 것에도 노래를 부르는 것에도 기계에 의지한다. 사랑을 하는 것에도 영화관람을 하는 것에도 기계가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는 것에도 마찬가지여서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왔다면 매우 즐겁지 않겠느냐(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는 논어의 말은 이제 맞지 않는다. 기계의 이익이 될 만한 정보와 제안과 대안이 우정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기계를 지배하는 대상이 있다는 점을 또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이다. 즉 돈이 자기 이익의 확대를 위해 기계에게 명령하고 지시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버스 차장으로부터 버스 카드가 지배하는 우리의 시대에 돈이 황제이고 기계가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신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김기홍 시인이 내세우는 의리란 어떤 것인가?
2
빚으로 공사하는 회사들 자빠지고
돈맛에 벌여놓은 낙지발 회사도 넘어지고
일 끊겨 돈 못 받는 인부들 속처럼
중단된 공사장 철근도 벌겋게 삭아내려
일 구하기가 사십대 노총각 이십대 처녀 붙들기보다 힘들어
자존심이란 자존심 팽개치고
어쩌다 기별 온 공사장에 우르르 모여든 떼거지들
서로 놀라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푹 퍼진 보리누룽지 빼앗길까
으르렁대며 핥아먹는 똥개들처럼
동지는 어디 가고
콩 한 개라도 나눠먹자는 심보는 어디 가고
앞 눈치에 옆 눈치 뒤꽁지 눈치보기
아따따 이러다가 모가지가 캭! 될라
철근 많이 메고 뛰어다니기
어느 놈이 슬라브에 방석 까냐
엉덩이 바짝 추켜들고 갈쿠리질
갈쿠리 반 바퀴만 돌리며 남의 속도 따라잡기
이러다가 이러다가······
남들 체조하는 일곱 시로는 불안해
은근슬쩍 오야지 눈에 띄게
삼십 분 당겨서 어두울 때 일 시작하기
캄캄해서 손 놓기
그러다가 굶었으면 굶었지 더러워서 못하겄네
떠난 사람 뒤에 안심하기
노임에 불만 없기
집에 가면 허리가 끊어질락말락
어쩔겨 묵고 살아야 쓴디
동지가 밥 멕여주간디
양심이 돈주간디
나중에 어쩔갑세
어서 나가 어서 나가
눈치보기 뛰어다니기 양심구기기 오줌참기 똥참기
점심 먹고 안 쉬기
그러다가 오늘도 떠나가는 사람
에라이 똥개 새끼들아 잘 처묵고 잘살아라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모냥이여
지독한 놈들
쓴 소주 나발 불고 굵은 소금 한 입 물고
소득없이 떠나가는
떠나가는 의리지기
「살아남기」 전문
“~기”라는 전성 어미의 사용이 눈에 띄는 작품인데, 명사화된 어휘들은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아울러 리듬을 타고 주체의 의지까지 확고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지난 시대 노동시들의 한계점이라고 일컬어지는 시의 산문성을 극복하고자 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의 산문성은 시를 깔끔하게 다듬는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세계를 보다 본질적으로 파악하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라는 단선적인 의지의 발현에 앞서 “누구 때문에 이 모냥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진정한 대항은 어떠해야 하는가의 천착이 보다 필요한 것이다.
위의 작품이 그러한 방향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버스 카드가 지배하는 오늘의 우리 시대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여실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구체적인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의 가치를 담아내야 할 시가 점점 일터에서 책상으로 옮겨지는 이 시대에, 심장의 고동에서 분출되지 않고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고 자기 정체를 확립하는 데에 있지 않고 시장의 상품으로 매겨지는 이 시대에 진정 미덕이 있는 것이다.
파펜하임(Fritz Pappenheim)은 현대인의 소외에서 고야(Goya)의 동판화 중의 하나인 <이빨 사냥>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빨 사냥>은 교수형에 처해져 올가미에 매달려 있는 한 사내에게 몰래 다가간 여인을 그린 그림인데, 그 여인은 교수형에 처한 사내의 이빨에 마법적인 힘이 있다는 미신을 믿고 이빨을 뽑으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에게 행운과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할지라도 죽은 사람의 이빨을 뽑는 데는 인간인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이빨을 얻어야겠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세속적인 가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결국 양심을 버리고 만다. 한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천 조각으로 가리고 시체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서 다른 한 손을 시체의 입 속에 넣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여인이 느끼는 공포 즉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공포감의 표정을 고야는 예리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위의 작품은 파펜하임이 그린 여인의 얼굴 표정과 같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구체적이면서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IMF로 인해 극도로 침체된 건설경기. 일용 건설 노동자들의 일자리 얻기는 “사십대 노총각 이십대 처녀 붙들기보다 힘”들다. “어쩌다 기별이 온 공사장에” 나가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모여든 인부들로 들끓는다. “으르렁대며 핥아먹는 똥개들처럼”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 속에서 화자는
동지는 어디 가고
콩 한 개라도 나눠먹자는 심보는 어디 가고
말았느냐고 절망한다. 그러나 그 역시 일자리를 포기하지 못한다. “가진 것이라곤/빚과 눈물과 짓밟혀 온/땅찔레 목숨이라/쓰러질래야 쓰러질 것이 없고/자빠질래야 자빠질 것이 없”(「휴면기」)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존을 위해 “자존심이란 자존심 팽개치고” 덤벼드는 것이다.
요행히 일자리를 얻어도 생존 경쟁은 계속된다. “모가지가 캭!” 되지 않기 위해 힘과 기술을 더욱 쓰고 처세술까지 발휘해야 한다. 공사장 감독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남보다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고, 철근도 많이 메고 다니고, 갈쿠리질도 빨리빨리 하고, 점심 뒤에 쉬지도 않고, 오줌까지 참는다. 노임에 대해서도 불만하지 않는다. “내려치고 후려치고 흠 잡아 치고/불만 있으면 떠나라/세상 활개치는 오야지”(「휴식시간」)에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동료를 보며 섭섭해 하거나 미안해 하기는커녕 “안심하”기까지 한다.
어쩔겨 묵고 살아야 쓴디
동지가 밥 멕여주간디
양심이 돈주간디
하며 애써 자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떳떳한 일이 아님을, “양심구기”는 일임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떠나는 동료가 “에라이 똥개 새끼들아 잘 처묵고 잘살아라”라고 욕설을 해도 맞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기형도,「안개」)나 “옆에 있는 동료도 믿기 어려웠다. 부당한 처사에 대해 말한 자는 아무도 모르게 밀려났다”( 조세희,「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와 같은 상황이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는 화자의 모습은 고야의 <이빨 사냥>에 등장한 여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양심을 저버리고 죽은 사람의 이빨을 뽑는 행동이나 “어쩔겨 묵고 살아야 쓴디”라는 변명으로 떠나는 동료에게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은 결국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작품의 “의리지기”는 소중하다. 노동 생산물이나 노동 생산과정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당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정체를 지키려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리지기”는 사용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지난한 노력의 결정체로 볼 수 있다. 시인이 첫시집 공친날(실천문학사,1987)에서 “흔들리지 말기/(중략)/쓰러지지 말기/(중략)/일어서기/(중략)/더욱 강하게 일어서서 사람답게 서는 날/싹뚝 잘린 무우 토막처럼 끝을 보기”(「흔들리지 말기」)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내었는데, 그러한 다짐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의리지기는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모냥”인가에 보다 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인식할 때 더욱 속이 차고 보편성을 띠어 이 거만한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이빨 사냥>에서 “의리지기”로 옮겨가는 길은 일용 건설자가 일자리를 얻는 일만큼이나 힘들다. 아니 더 힘들 것이다. 일자리는 요령이나 요행으로 얻을 수 있지만 의리지기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풀잎은 힘들게 잠에서 깨어났다. 언 이불을 밀치며
무단 결근했다고 들어먹은 욕이
성원 형님 등뼈에 달라붙은 배를 채우고
흙바람도 덩달아 푹 꺼진 눈자위를 채웠다.
식구들 떠올리면 억울도 비굴도 건너야겠지만
부딪치면 막상 신심이 약했을까
오야지 욕심 더럽다, 떠날 사람 다 떠난 뒤
폐자재 검부재기만 남아 낑낑대는
측간 옆 굼벵이 기어드는 자취방을 걷어차며
바람은 소리쳤다. 변성원이가 죽었다요. 형님!
나누어 줄 사랑조차 없었던가. 먼발치서
제 몫만 챙기던 동물들 기어와 어이! 어이!
울음을 흘리다 가명 뒤에 숨은 본명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화투나 돌리다가
찾아갈 것도 없고 남길 것도 없다
마누라 자식 하나 없는 놈 묻어 무엇하랴
일가 친척 서둘러 짐을 챙긴 뒤
오야지가 안 온다. 몰아치던 반장도 안 온다.
소주를 나발 불다 가슴을 쥐어뜯거나
더러는 취해 멱살잡이로 옷을 찢고
코피가 터져 범벅이 되서야, 부러
드러누워 하늘을 본다
… 병신아 … 꼴통아 … 미친놈아 …
하늘마저 미쳐 버렸나. 어찌 저리도 파랑가
차라리 잘 죽었어.
월급 한 번 받아본 적 없이
국가위기다 부도사태다 변두리로 떠밀리며 표류하며
실낱같은 빛을 찾아 헤매지만
따뜻한 이 한 줌의 뼈가 다시 살아나
거대한 산맥이나 바다를 이루지 못한다면
살아야 할 이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뼈를 뿌린다. 푸르러오는
산천 초목 공사장 폐자재 속에
모여 단단히 묶어 목말 하나 세우고
불구의 나라
메마른 강 뿌리에
눈물을 뿌린다.
「삼월의 죽음」 전문
‘의리지기’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즉 큰 희생이 따라야 하는지를 위의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식구를 떠올리면 억울도 비굴도 건너야겠지만/부딪치면 막상 신심이 약”한 “변성원.” 그는 그 억울함과 비굴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목숨을 끊고 말았는데, 그 희생이 바로 의리지기의 어려움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오야지”로부터 “무단 결근했다”고 욕을 들었지만 “등뼈에 달라붙은 배를 채”웠을 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변명을 해보았자 오히려 책임자의 눈에 벗어날 뿐이고 누구 하나 나서서 옹호해줄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버스 카드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모두들 기계의 가치에 어긋나는 의리와 같은 행동으로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떻게 해볼 수 없어 극도의 소외감 속에 갇혔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희생이 있은 뒤에야 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인간으로서의 의리를 자각한 것이다.
나누어 줄 사랑조차 없었던가. 먼발치서
제 몫만 챙기던 동물들 기어와 어이! 어이!
울음을 흘리다
자신들과 아울러 그의 본모습을 다시 보는 것이다. 또한 “마누라 자식 하나 없는 놈 묻어 무엇하랴/일가 친척 서둘러 짐을 챙”기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 미안함과 억울함도 교차한다. 더욱이 “오야지도 안 온다. 몰아치던 반장도 안 온다”라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까지 느낀다. 그리하여 거의 자학적으로 “소주를 나발 불다 가슴을 쥐어뜯거나/더러는 취해 멱살잡이로 옷을 찢고/코피가 터져 범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월급 한 번 받아본 적 없”으니 “차라리 잘 죽었”다고 자위 아닌 자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큰 슬픔과 희생을 통해 상실된 의리를 회복한다. 사람들이 화장한 그의 뼈를 다른 곳이 아니라 그가 일하던 작업장에 뿌리는 것이 그 구체적인 모습이다. 실제는 “강 뿌리”에 뿌렸다고 할지라도 “산천 초목 공사장 폐자재 속에/모여 단단히 묶어 묵말 하나 세”웠기 때문에 그의 작업장에 뿌렸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뼈를 뿌린 장소는 “불구의 나라”이고 “메마른 강 뿌리”여서 살아있는 자들의 “눈물”을 뿌린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슬픈 행동은 슬픔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뜻한 이 한 줌의 뼈가 다시 살아나
거대한 산맥이나 바다를 이루지 못한다면
살아야 할 이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처럼 희망적인 것이다. 그 희망이란 당연히 인간다운 세상이 실현되는 일이다. 학력과 성차와 지역성과 종교와 빈부와 외모 등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성실성과 창의력이 인정되는 세상. 또 자신이 몸담고 싶은 일자리가 있고 그 일자리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는 세상. 가정을 이끌 수 있으며 자기의 취미 생활과 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세상.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서 서로가 믿고 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등.
그러나 그와 같은 유토피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이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란 전쟁 같은 상황에 있다. “놈팽이 된 지 석 달/빛이 닿은 창가에 꿈바라기로 서성이다”(「집보기」), “축 늘어진 모가지 몇 개라도 바치고 싶은”(「봄날」), “힘께나 쓰는 놈들은 죄다 무너졌다”(「병원을 나서며」), “벗을 것 없이 벗어버린 날”(「비요일」), “배웠다는 놈들이 망쳐놓은 세상/벙어리 봉들은 다시 믿는다”(「수작」), “아내 앞에/어깨도 죽고 좆도 죽어/무엇을 내세워갈 수 있느냐”(「등불」), 이 일 저 일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개잡부”(「잡부 최씨 이야기」), “노임은 여지없이 꿈을 짓밟았습니다”(「소모품」) 등이 그 여실한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생존경쟁의 전쟁터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의 삶은 한층 암울하다. 유토피아의 실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줄곧 치닫고 있는 이 상업적 자본주의와 이를 강화시키는 과학기술의 속도를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삿속으로 채워진 이 자본주의는 우리를 그저 상품의 대상으로 조작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점점 무력해지고 일자리를 잃고 불안감을 느끼고 소외감을 갖고 심지어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게마인샤프트로부터 이동되어 게젤샤프트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소용없는 것이다. 이 세계는 서로를 교환가치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영특하게 사고 파는, 참으로 잔인한 곳이다. 그리하여 마치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등장하는 윌리와 같은 처지가 된다. 대량생산 체제하에서 방문 판매원의 설자리가 없음을 깨닫고 끝내 비극적인 삶을 맞이하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유토피아는 분명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4
슬프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낯설지 않은 공사장
아파트나 빌딩 혹은 하수종말처리장의 뼈대를 엮으며
우리들의 지친 꿈도 일으켜 세우면
뒤따라오는 힘찬 망치소리 활발한 동작들
때로는 몇 닢의 지폐에 피를 적시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병원에 실려가 남성 종식을 선고받고;
이 세상 큰 힘 앞에서 용기 내어 무엇을 다툴 수 있을까
소주 한 잔에 동지의 어깨나 툭툭 칠 뿐
어느 새 내려앉은 어깨에 얹혀 오는 노을을 짊어지고
가깝고 먼길을 흩어져 가는 하루살이
돌아가는 길은 오래도록 막히고
둥지에 고목처럼 몸을 부리고 나면
달려드는 아이들
주름 는 얼굴을 스치는 아내의 한숨 몇 조각
몇 닢 지폐 위에 떨어진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은 굳게 닫혀있고
서두르지 않아도 수월케 다가오는 꿈의 주인들이
두꺼운 하늘을 끌어내린다.
살아갈 이유란 결국
큰 성을 이루는 한 개 든든한 돌이 되기 위함인 걸
희망이 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슬픈 희망」 부분
위의 작품에서 화자의 위상은 “이 세상 큰 힘 앞에서 용기 내어 무엇을 다툴 수 있을까/소주 한 잔에 동지의 어깨나 툭툭 칠 뿐”의 정황과 같다. 이 세상의 큰 힘이란 많은 것을 상징할 수 있을 것이지만 경제적인 것도 그 하나일 수 있다. 아니 이 기계화된 사회에서는 가장 우선적일 수 있다. 경제적인 힘이 있는 한 정보력도 정치적 수완도 이데올로기적 보호도 이익 창출의 기회도 유리한 것이다. 그에 비해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개인은 대항할 힘이 없어 위의 작품에서와 같이 소주나 마시며 불만을 토로하고 신세타령이나 할 뿐이다. 이러한 면은 가정에도 적용되어 아내는 “주름 는” 얼굴과 “한숨”을 내뱉는다. 기계화된 사회에 종속되어 있는 개인의 상황은 진정 “돌아가는 길은 오래도록 막히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닫힌 문안에 갇힌 채 무너지지 않는다. 살아있음을 인식하고 “지친 꿈도 일으켜 세우”고 일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몇 닢의 지폐에 피를 적시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병원에 실려가 남성 종식을 선고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위험을 겪지만 중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는 “아파트나 빌딩 혹은 하수종말처리장의 뼈대를 엮”는 자신의 작업장을 “낯설지 않은 공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깝고 먼 길을 흩어져 가는 하루살이”의 삶이지만 “망치”를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일터를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인식은 자본가들이 내세우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도 보인다. 즉 노동이 없으면 임금이 없고 나아가 임금이 없으면 삶이 없다는 자본주의자들의 주장을 여지없이 수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에 속한 우리들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이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노동을 한 자만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일자리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겪었던 IMF의 가장 큰 고통은 일할 자리가 없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자본가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삼아 대량 해고를 하지 말고 일자리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작품의 화자가 자본주의의 요구를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겨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이익 창출의 요구를 꼼짝없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생존요건을 위한 정도만 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화자의 노동은 자본주의 성격을 최소화한 것이다. 물론 삶이 노동에 전적으로 포획되어 착취와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적극적인 대응 방안이 나타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위의 작품은 그 정도에는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자본주의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노동의 가치에 대항하는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어 소중한 것이다.
살아갈 이유란 결국
큰 성을 이루는 한 개 든든한 돌이 되기 위함인 걸
깨닫고 있는 데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여기서 ‘큰 성’의 영역이 가정을 의미하는지 사회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국가와 민족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화자가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화자는 그 이상향을 이루는 하나의 든든한 돌이 되는 데에 만족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왜소하게 보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왜소하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준일 뿐이다. 오히려 화자는 자본주의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의 인식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하나의 든든한 돌이 되는 것은 거대하거나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보다 실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서두르지 않아도 수월케 다가오는 꿈의 주인들이/두꺼운 하늘을 끌어내”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희망이 있다는 것은/사랑한다는 것이다”라는 논지가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싸움도 기대되는 것이다.
산 하나 쌓으니 산 하나 무너진다.
꿈을 가지면서 노예는 모습을 드러냈다.
육신을 무너뜨린 노동의 절반은 노예가 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말 매무새 단정한 옷차림은 사라졌다.
탈출을 꿈꾸지 마라. 그것은 싸움의 시작이다.
절망은 늪이 아니라 무르익은 유기질의 토양이거늘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너무 멀리 돌아 온 길을 후회하지 않으리
무너질 것도 없고 막을 것도 없다.
강 하나 막으니 강 하나 흘러간다.
「서시」 전문
“산 하나 쌓으니 산 하나 무너진다”라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이 비문법적인 모순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쌓아 가는 지속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산을 하나 쌓은 일은 완결적인 것이므로 정태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쌓는다는 것은 결코 완결된 것을 의미하지 않고 쌓아나가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산이 무너지고 마는 것은 실패나 몰락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쌓아 가는 주체는 분명 우리들이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피지배자에 속하기 때문에 주체적일 수만은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서 또 기계화된 사회 구조에서 약자이므로 종속될 수밖에 없어 “꿈을 가지”고 있지만 “노예”인 것이다. “육신을 무너뜨린 노동의 절반은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상징하는 “부드러운 말 매무새 단정한 옷차림은 사라”진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들.
그렇지만 화자는 “탈출을 꿈꾸지 마라. 그것은 싸움의 시작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자신이 처하고 있는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밀고 가는 그 과정은 험난한 것이지만 자신의 뿌리를 내리기에 의미가 깊다. 그리하여 화자는 “절망은 늪이 아니라 무르익은 유기질의 토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절망은 빛마저 빠져 나올 수 없는 블랙홀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거름으로 삼을 수 있고 적극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너무 멀리 돌아온 길을 후회하지 않으리
리라고 화자는 다짐하고 있다.
서로 바라본다는 것은 친밀하고 평온함이 교류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상호의 이해를 넘어 보다 행동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새겨야 할 것이다. 즉 서로 책임과 의무의 관계가 교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나 동료간에는 물론이고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사용자와 고용자, 주인과 고객 등의 관계에서도 해당되는 것이다. 이처럼 바라본다는 것은 서로간에 지극히 평등하고 자유스럽고 인간적인 것이다. 화자는 그 인간적인 곳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라면 “너무 멀리 돌아온 길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라면 기꺼이 닿겠다는 인식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선택한 길 앞에서 “무너질 것도 없고 막을 것도 없”어 “강 하나 막으니 강 하나 흘러간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흘러감이란 결국 싸우러 가는 길일 것이다.
버스 차장으로부터 버스 카드로 바뀐 시대의 우리는 모두 단자(單子)화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다. 거대담론이 무너진 곳에 싸움은 생계의 논리에 의해 함몰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싸움은 민주니 개혁이니 해방이니 하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고 적더라도 내 이익을 위한 것으로 즉 이기적으로 변화된 것에 있다. 나보다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있을 뿐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화되고 단자화된 싸움은 약할 수밖에 없다. 이 싸움에서 유리하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내에서 튀는 것에 불과할 뿐이어서 결국 시장성에 종속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연대의 지향이야말로 필요한 것이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를 바라”보려는 인식이 진정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설픈 고집은/어설픈 싸움은/노동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톱질」)라는 신중함은 두려움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강한 힘에 맞설 때는 부드러운 곡선을 살려/큰 각을 이루”(「가공」)어야 한다는 것은 지혜롭게 여겨진다. 그리고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보시던 그 신문이어라우/즐겨보시던 그 테레비여라우”(「눈을 어둡게 하는 것」)라는 판단은 타당하게 보인다. 그리하여 “아무리 작은 몸이라도 날아가면/큰 무기가 되는/이 귀엽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더욱 단단해진 돌맹이”(「자갈」)에 “연초록 진초록 울울창창 어우러질/꿈”(「봄날」)이 피어오를 것을 우리는 시인과 함께 희망한다. 슬프고도 단단한 우리들의 그 희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