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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요나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요나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가 우리 회중 가운데도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앞뒤로 좌우로 큰 은혜 받읍시다. 꼭 받읍시다. 은혜 못 받으면 한 주간 실패하겠지요. 우리 한번 주님의 긍휼하심을 사모하면서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박넝쿨 아래서. 죄송합니다. 목련꽃 아래서 했으면 분위기가 있을텐데 박넝쿨 아래서 이렇게 제목이 됐습니다만은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한 뜻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뭔가 해결되지 않는 갈등. 갈등이란 게 뭐냐 하니까 이 갈자가 보니까요 산에 있는 칡 갈자에요. 그래서 무슨 갈 무슨 탕도 있고 그렇던데. 무슨 탕? 갈근탕 맞아요. 칡의 뿌리 탕 난 그거 여태 있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갈등이라고 할 때 갈 자가 칡이 엉켜서 올라가는 것처럼 이게 갈이고 등은 우리 교회 가면 저 있어요. 등나무. 그 등나무 등자라는 것입니다. 등나무도 보니까 저건 혼자 올라가지 않아요. 서로 부둥켜서 뭐가 그리 좋다고 이렇게 같이 올라가는데 이 갈등이 있을 때 사실 이걸 우리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늘 실패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지만 우리는 말씀의 인도와 진리의 깨우침이 우리 속에 없으면 늘 문제 앞에서 주저앉아 버리고 전혀 성령을 기쁘게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우리가 넘어집니다. 그런데 넘어질 때도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주님의 길을 계속 갈 줄로 믿습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승리하신 분은 주님이 계속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 한 주간 실패하시고 또 영적으로 지쳐있는 분들은 오늘 저와 함께 이 말씀에서 새 힘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피아노를 가지고 똑같은 소리를 냅니다. 아름다운 연주가는 좋은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이 똑같은 저 피아노를 가지고 소음을 냅니다. 시끄럽습니다. 전혀 불협화음을 냅니다.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정서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 피아노가 나쁘다고 저 피아노가 잘못됐다고 탓하는 사람은 있어요? 없어요? 피아노가 저게 오래 되가지고. 그렇지 않아요. 피아노 탓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아름답게 행복을 누려가며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늘 예수 안에 있으면서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만 인상 다 쓰고 세상 근심 걱정 다 지고 무거운 짐 나 홀로 지고 멀리 멀리 갔다가 왔다가 늘 그렇게 살아야 되느냐 이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생을 탓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웃으며 행복하며 그리고 또 나름대로 넘어지지만은 일어날 때 오는 위로와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거예요. 이러기 위해서 우리가 인생을 탓하는 대신에 뭘 어떻게 해야 되느냐? 피아노 연주자가 잘하려면은 소음을 내지 않으려면 열심히 훈련하고 또 이렇게 잘 훈련해야 되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원리를 배워야 되고 훈련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냥 덮어놓고 치면 소리가 나긴 나지만은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에요. 인생을 그저 덮어놓고 연애하고 덮어놓고 결혼하고 덮어놓고 그저 살면은 그게 인생이 아니지요.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원리를 깨달아야 되고 배워야 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그 생명의 풍성함은 우리가 좋아하는 단어로 바꾸면 바로 행복인 줄 믿습니다. 행복할찌어다.
어저께 우리 세계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천주교의 바오로 2세가 장례를 소천을 해서 거창한 장례 엄숙한 장례를 했는데 저는 그 거창하기는 하고 좋긴 한데 그건 하나도 부러운 거 없어요. 괜히 의식 속에 그 어떤 그걸 통해서 의미는 좋지만은 그 의식 하나도 부럽지 않고 이렇게 요령 흔들고 고깔모자 쓰고 가는 것 나 가소로워요. 아주 저게 뭐 저러냐. 그러나 진정 그분이 위대하다는 것 정말 그분은 하나의 어떤 종교 지도자로 산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생을 참으로 잘 살았다는 그런 고백 하나를 듣고 제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많은 유언록을 남겼습니다만은 그 가운데 하나 그가 죽기 직전에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간호하는 분들에게 남긴 말이 신문에 대서특필 톱으로 나왔는데 그거 내가 쓰던 걸 그분이 썼더라고. 그게 뭐냐? 나는 행복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이거 내가 죽을 때 쓸라고 놔놓은 건데 이 어른이 그래 먼저 썼어요. 그분이 무슨 세계 평화에 여러 많은 일들을 했지만은 만약 그가 죽을 때 헛되고 헛되니 개코도 다 헛되다. 그거 인생 끝장난거지요. 그게. 그런데 독신으로 그리고 일생을 자유와 평화와 생명 존중과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기꺼이 그리고 어디 갈 때마다 항상 비행장에 내릴 때마다 땅바닥에 입을 맞추는 그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들이 잔영으로 남아 있습니다만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그가 남긴 말처럼 I am Happy. So Happy.
우리 한번 해봅시다. 옆의 분들을 서로 보면서. 따라서 합시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도 행복하십시오. 당신도 행복하십시오. 앞에는 확실히 밝아. 그래가지고 행복하시오 하는 사람이 진짜 행복이 있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저 한쪽 구석에는 지금 행복하십시오 하는데 마지못해 가지고 오만 인상 다 쓰고. 그래서 제가 오늘 9시 예배에 그랬어요. 우리 1년 365일 행복 하는 것도 어렵겠고. 왜? 싸워야 되니까. 그 다음에 또 70, 80 평생 다 행복한 그것도 거짓말이고 이번 한 주간만 다음주일 제가 마가복음 말씀을 섬길 때까지 한 주간 동안만 뭐 해보자? 그렇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거 말해야 되느냐 하는 사람 전혀 행복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는 모든 행복해야 할 조건을 하나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이미 다 받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 부를 때 말씀하기를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그랬어요. 내가 행복한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샘이 되라는 거예요. 샘은 퍼주고 퍼줄수록 더 신선한 물이 나오는 줄 믿습니다. 당신이 행복하십시오 한다고 해서 내가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고 내다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행복은 퍼줄수록 나누어질수록 더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그분의 그 고백을 들으면서 행복이라는 거 오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하고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더라 이거예요. 죄 짓고 나쁜 짓하고 우리가 무너져 가는데는 전혀 노력도 필요 없고 훈련도 필요 없지만은 그러나 좀더 삶의 질을 높이고 의미를 찾고 또 뭔가 영적인 걸 가기 위해서는 훈련되어져야 되고 노력되어져야 되고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줄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목적을 분명히 잡았다고 믿으시면 아멘. 그러면 아니에요? 분명히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름대로 세상의 어떤 출세와 성공 많은 걸 가져도 오늘 그 어른처럼 나는 행복하다고 그런즉 당신도 나처럼 행복 하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 인생은 별로 가치가 없다고 믿습니다. 또 예수 안에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또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어떤 그 연륜이 있고 또 나름대로 뭔가 직분도 거창하고 또 많은 것을 자랑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내 스스로 조용한 시간에 정말 나는 행복했구나! 정말 나는 복된 인생을 살았구나! 물론 전체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픔도 있고 실수도 있고 넘어짐도 있지만은 주님 예수 안에서 나는 복됩니다. 그러니 그대들도 이러면서 우리가 숨지는 그런 연습을 계속해 갈 수 있었다면 있다면 우리 주님이 무척 기뻐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요나는 1장에서부터 3장까지는 매우 그럴듯한 모습으로 갖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4장에 와서 보면 결코 그는 행복한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4장에 와서 그는 전혀 뒤틀려버린 옹졸하고 좁아터진 그리고 아직도 독을 품고 앉아있는 그 내면의 속에는 갈등이 칡넝쿨처럼 등나무처럼 가득 엉켜있는 그런 속사람을 찾아보는데 이 사람의 신앙을 제가 지난주에 초막 신앙이라 그랬습니다. 초막 인생이라 그랬습니다. 풀로 얼기설기 해놓은 초막. 다 타버릴 것들. 그러한 삶은 의미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요나를 붙들고 초막 신앙 속에 앉아서 자기 중심적으로 구경군의 관망자의 입에서 항상 율법과 또 다른 사람은 나보다 못하고 항상 판단하는 그런 자리에 앉아있는 요나를 끈질기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굳이 저 니느웨성을 구원해야 되는 그 이유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해 봐라. 네가 왜 성내느냐? 성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가 성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 그러느냐? 생각해 봐라. 너 저 박넝쿨 네가 심었느냐? 아닙니다. 네가 자라도록 물 주었느냐? 아닙니다. 네가 키우지도 심지도 배양하지도 않는 그 박넝쿨이 자랐다가 오늘 있다가 없어지는 저 풀도 있다가 없어지니까 네가 그렇게 아쉬워하고 화를 내고 그렇게 아끼거늘 하물며 내가 저 도성에는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12만명이 있다. 여기 앞뒤 분간하지 못하는 말은 유아들 어린아이들이 12만명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어른들까지 포함해서 영적으로 무지해서 어디가 앞뒤인지 모르는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12만명이 내가 아끼는 것이 그리고 여기 또 많은 짐승의 떼들이 있는데 그들을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네가 입이 10개라도 있으면 말해봐라. 이것이 4장 11절로 끝납니다.
조금 전 4장 1절서부터 시작해서 내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죽여주세요. 성내는 것 당연합니다. 그렇게 독을 품고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하고 있던 이 요나에게 4장 12절에 뭔가 나와야 됩니다. 니느웨는 니느웨이고 풀은 풀이지요 하든지 뭔가 대답이 나와야 되는데 4장 12절에 보니까 따라서 합시다. 유구무언이라. 없어요. 4장 12절에는 없어요. 백지예요. 유구무언이라고 되어 있어요. 입이 10개라도 말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요나에게 말씀하는 게 아니에요. 이 현대 요나들에게 오늘 이 말씀 앞에 선 저와 여러분들에게 4장 12절을 기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볼펜 있으신 분은 지금 설교를 잘 들으셨다가 4장 12절 나의 요나서 고백을 기록하시기를 바랍니다. 안 쓰시려면 안 쓰시고 자유지만은 그냥 백지로 유구무언이라고 해놓든지 아니면 주님 내가 오늘 깨달았습니다. 그런 새로운 영적 각성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박넝쿨이 초막에 올라가니까 얼마나 좋은지요. 햇빛이 중동의 낮은 뜨겁고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했다 그랬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계속 요나를 위하여 준비하는 도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도망가는 그를 위하여서는 뭘 준비했어요? 대풍 풍랑을 준비하셨고 제비를 준비해서 제비가 그 수백명 중에 너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다는 걸 지적하여 찾아내는 것 이것도 기적입니다. 풍랑이 나 때문에 일어난 것 이것도 기적입니다. 풍랑이 잔잔해지는 것만 기적이 아니고 내 삶이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며 나를 아주 뒤집게 만드는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도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한 제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대풍이요 폭풍입니다. 더나가서 하나님이 준비한 큰 물고기가 그를 죽이지 않은 것도 기적이고 토하여 내는 건데 그게 바로 니느웨 도성 앞 땅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하루만 외쳤는데 삼일 길을 돌아다니며 해야될 그 길인데 하루만 그것도 어디 회개하란 말이 아닙니다. 40일 후에는 여러분들은 이제 망한다. 하나님이 40일 후에는 이 성을 무너지게 할 것이라고 심판의 외침만 했는데 왕으로부터 다 뒤집어졌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짐승들까지 금식하며 악에서 떠나고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는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명을 감당해야 될 터인데 그는 초막을 짓고 그리고 그 박넝쿨 하나 올라오는 것이 그렇게 좋아 가지고 기뻐하다가 벌레를 준비해서 그 다음에 바람을 준비한 하나님의 손에 그 박넝쿨이 말라 비틀어져 버렸습니다. 다 날아갔습니다. 햇빛이 그냥 쪼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조금 전에까지는 좋아서 죽다가 금방 또 더위를 못 이겨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독을 품고 좌절하고 있는 이 요나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행복을 얻기 위하여 훈련받아야 할 요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박넝쿨을 통해서 요나의 무엇을 가르치고 또 깨우치고 변화되어서 그로 하여금 더 행복한 선지자 행복한 그리스도인 복된 인생으로 만들어가게 하실까를 생각해 본다면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박넝쿨도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자라게 하시고 또 벌레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벌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준비해서 물어버리고 줄기를 끊어버리게 한즉 말라죽더라 이거예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염려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의심하는 우리들에게 말씀했습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참새 새끼 한 마리도. 입맛 다시는 분이 더러 있는데. 그거 그냥 불에 구워 가지고 홀짝 하는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뭐한다고요? 떨어지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그랬어요. 이 땅에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은 다시 이어서 말씀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는 많은 그 말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참새 떼보다도 더 귀하니라. 아멘. 별로 실감이 안나시는 모양인데 정말 참새 시골에 가서 그 옛날에요 먹을게 없을 때 단백질 보충으로 밤에 등불 켜가지고 지붕 처마밑에 넣어가지고 잡아내어서 이걸 찹쌀에다가 막 해가지고. 그런데 나는 한번도 하나님한테 허락 맡고 잡은 적이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 참새의 장례식을 지키시고 책임지시고 주관하신다는 거예요. 아멘 입니까? 그런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는 많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참새 떼보다도 더 뭐하다? 귀하다. 아멘.
오늘 이 생명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고 무엇보다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이것은 우주적입니다. 대단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의 인생 계획을 다시 짜고 계십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입력시켜가지고 우리를 인도해가고 있다는 것을 믿을진데 우리의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 그리고 흉 불행뿐만 아니라 모든 아픔들 모든 사건들이 다 합력하여 그분의 섭리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을 믿는 이 영적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내 인생을 헤쳐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박넝쿨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깨우치는 것은 생명 사랑인 것입니다. 요나의 생각은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원수요 철천지 적국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마음에는 니느웨성이 무너져 빨리 빨리 멸망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저가 억지로 니느웨성에 하나님이 토하여 내시니까 가긴 갔지만은 40일 후에 너희가 망한다는 것이 회개하고 돌아서라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해서 회개하면 용서해주기 때문에 자기가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강제로 잡아서 니느웨성에서 외치라 그러니까 내가 하기는 하지만은 40일 후에는 이 도성이 무너진다 망한다 할 때 진짜 그것은 자기의 기대요 자기가 희망했던 그대로 되기를 바라는 소원이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성이 무너지기는커녕 회개하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초막을 짓고 앉아있는데 박넝쿨까지 생겼다가 말라죽게 되었으니까 그는 또다시 외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그 말이에요. 아주 죽겠다는 말이 입에 줄줄 달아져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정 영적 생명이든 육적 생명이든 사랑이 없는 삶은 그것은 매우 드라이합니다. 우리가 만약 의사가 되어서 생명을 돌보는 치료하는 의사라고 할찐대 단순히 돈만을 위하여 생명을 다룬다면 사람이 물건으로 보이고 돈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본다면 바로 그것은 주님의 손길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치료의 도구로 쓰임받는 귀한 소명의 직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무슨 음식을 만들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렇습니다. 생명을 사랑함으로 인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생명을 돌보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치원 아이들 아니 어린 탁아소 아이들 갓난아기를 본다 할찌라도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바로 생명의 관심인 하나님을 대리해서 내가 그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을 믿으실찐대 육신의 생명 돌보는 일도 그렇게 하나님이 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천하를 다 주고도 얻지 못할 영혼의 생명이야말로 얼마나 더 귀하고 귀하고 또 존귀하게 주님이 여기시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죽여도 그저 몸뚱이밖에 죽일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한 것은 우리 영혼의 가치가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 생명에 대한 애정을 더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요나 선지자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관점 자기 중심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저가 그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처럼 그 니느웨 도성에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능히 그러한 시험에서 초막 신앙에서 또 그리고 박넝쿨 신앙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을 터인데 그는 여전히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품지 못했기에 실패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오해로 들립니다. 똑같은 소리를 들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주 자주 실패합니다. 오해합니다. 때로는 서운해하기도 하고 분해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목사의 말에도 섭섭한 것이 많이 생깁니다. 이걸 가리켜서 무슨 병이라 그러느냐 하면은 섭섭병이라 그래요. 전혀 주의 종은 그런 의도가 아닌데 그런 영적인 의도가 아닌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섭섭병이 들어서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 안에서 독이 나오고 내 안에서 많은 엉겅퀴와 같은 것들이 얽혀서 영적인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가벼운 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감사가 나오는데 오히려 사랑이 없는 자세에서는 억울한 것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더위와 추위를 불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4계절 늘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곧 여름이 벌써 지금 좀 더워옵니다만은 더운 여름에는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이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우니까 뚝 뚝 떨어져 앉고 더우니까 잠도 잘 때 떨어져 잠을 자고 그렇게 합니다. 떨어져라. 좀 떨어져라고. 덥다고. 그러나 어린아이가 날씨가 덥다고 어린 갓난아기가 어머니를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정말로 사랑하는 그 어린아이는 품에 앉아야 되는 것입니다. 날씨 덥다고 어제 갓 신혼여행 갔다온 신혼부부가 떨어져 잡니까? 그거 앞으로 문제 있을 집안이지요. 날씨 덥다고 연애하는 커플이 떨어져 다닙니까? 손 안 잡고 다닙니까? 사랑하면 가까워지는 것이고 사랑하면 모든 짐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요나가 이 뒤틀린 심보 속에 행복을 잃어버린 것은 그 마음 속에 주님 사랑이 흘러서 이웃 사랑으로 나가지 못하는 여기서부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서 야곱이 7년 동안 그 간교한 외삼촌 밑에 많은 수고를 하고 무려 20년 동안에 10번의 노동 조건을 악한 방법으로 계약이 되었지만은 그는 라헬 하나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7년을 하루같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맘 속에 사랑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십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이 초막 신앙에서 벗어나고 그리고 박넝쿨 그 어떤 외적인 어설픈 인생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른 길이 없어요. 일단은 사랑해야 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밀려오고 또 그 사랑을 모든 이웃들에게 내 주변에 있는 가족들에게 나누는 것이 주님의 뜻이요 이것이 행복한 삶을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길인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아닙니까? 내가 병이 나아야만 행복하겠습니까? 로또에 당첨이 되어 돈벼락을 맞아야 행복하겠습니까? 모든 것들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조건이 인간의 조건이 만들어져야 행복하다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할 사람이라면 이 지구상에는 하나도 있다? 없다요?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없이 큰 은혜와 사랑을 입었은즉 영원한 생명을 얻었은즉 이제 나도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계속해서 퍼 올려야 실천할 때 우리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교황이 높은 자리에서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같이 뒤틀린 심정으로 제가 언젠가 행복하다 그랬더니만은 목사 당신은 행복한지 모르지만은 나는 불행해 죽겠다 그럽디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이 말하기도 참 힘들어요. 어떤 사람은 목사님이 행복하니까 우리도 행복하겠습니다 이렇게 알랑방귀도 뀌는데. 당신은 행복한지 모르지만 나는 불행해 죽겠다고. 그 소리를 내가 듣고는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그러다가도 교황님한테 내가 은혜를 입어 가지고 내가 해야되겠구나. 왜? 그는 높은 자리에 세계를 지배하는 그런 자리에 있어서 행복했을까요? 아니지요. 그가 무슨 결혼도 안 한 사람이 무슨 세상 재미가 있었겠어요? 그는 주님의 사랑 받아서 그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느라고 희생하느라고 던지고 포기하느라고 주님께로 오는 그 사랑을 실천하다가 그와 같이 행복한 줄 믿습니다. 아멘.
그런즉 이제부터 우리는 결단해야 됩니다. 내 환경이 조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행복해야 되고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복을 예수 안에서 다 이미 받았다는 것을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시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세상이 다른 눈으로 보인다 이거예요.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내 눈이 변화가 되는 것 뿐이고 관점이 바뀌어지는 것 뿐이라 이거예요. 이것이 은혜인 줄 믿습니다.
특별히 사랑의 마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자기 중심적 모순을 떨쳐버려야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박넝쿨을 이렇게 기뻐합니다. 그늘을 지어준다고 기뻐하고 그것이 또 바람에 말라서 죽는다고 그렇게 화를 내고 난리를 치는 이 요나라면 12만명이 전부 불과 유황불에 타 가지고 그냥 메뚜기 튀기는 것처럼 번데기 튀기는 것처럼 튀겨지고 바싹 그을러져서 그렇게 죽어야 속이 시원하다는 말입니다. 요나는 지금. 이것이 얼마나 이중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인생관이고 사람을 보는 인간관이고 불신자를 보는 세계관이냐 이거예요. 이렇게 자기에게 관계된 것은 별로 아주 사소한 것까지 하다 못해 박넝쿨이 자라고 소멸하는 것에도 기뻐하고 화내는 민감함을 보이는 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그 수십 명의 그리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의 생명에 대하여는 전혀 다른 각도를 가지고 있는 이 자기 모순적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오히려 확신시키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봤습니다. 도대체 요나가 그 뭐 박넝쿨 그거 올라왔다고 그렇게 기뻐할까? 물론 작열한 태양을 가리워주고 내 생각에는 아마 저 우리 요나가 좀 대머리가 아니었는가 생각이 되요. 햇빛이 너무 쪼여서 죽을 것 같으니까 땀이 뻘뻘 나고. 그러면 저 성안으로 들어가던지 하지 초막 쳐놓고 거기에 독을 품고 앉아서 성이 무너지도록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단순한 햇빛을 가리워준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더 한가지 우리의 경험 법칙상 비추어서 그가 기뻐한 이유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것을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확신입니다. 40일 이후에 니느웨 도성은 망해야 된다. 왜? 이스라엘 선민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되고 다른 나라는 다 망해야 된다는 이 자기 고집 자기 생각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해 줬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겠느냐는 거예요.
사람들은 거짓 확신 속에 속아 사는 줄 모르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에 빠져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자기 중심적인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죄사함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만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 동일합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편성을 인정하시고 이 사랑의 눈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여러 가지 많은 현장이 일어나겠지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왜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모태에서 이 어미니 모태 밖의 세상이 있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육신의 껍질 속에 있던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고 하늘의 집에 만약 우리가 들어간다고 한다면 우리의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많이 천국에 있다는 걸 그저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존 뉴턴이라고 하는 405장을 작사하신 그 목사님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라 그 밖의 많은 은혜를 찬송을 한 이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어느 글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엄청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첫째는 꼭 천국에 와야 될 줄로 생각되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천국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두 번째는 저 사람은 천국은 틀렸어. 전혀 엉터리야. 저건 가짜야 라고 하는 사람이 또 천국에 와 있으므로 두 번째 놀라고 세 번째는 뭐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구원받을 수 없는 아무리 봐도 더럽고 누추한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와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세 번째 놀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군가를 볼 때 여러분 그것이 정말로 자기 중심적인 것인지 주님 중심적인지 그 시각을 늘 바꾸는 훈련을 제대로 해야만이 우리도 행복하다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정죄하고 저건 망해야 되. 저건 불과 유황으로 완전히 부셔져야 된다고 하지만은 그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고 믿는다면 내가 어떻게 대해야 되느냐?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주님 중심으로 본다면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나도 기뻐해야 되고 주님이 아파하신다면 나도 같이 아파할 수 있는 이런 것으로 자꾸 바뀌어져 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행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라고 믿습니다. 아멘 입니까? 오늘 요나는 저 성이 다 망해야 되고 죽어야 되고 이런 독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그는 주님에게도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밀려오고 은혜가 밀려왔지만은 그 기쁨을 나누지 못하면서 이렇게 불행한 선지자의 모습을 남겨주고 있지 않는가 봅니다.
그러면 은혜로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요나는 더없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박넝쿨 칡넝쿨 무너졌다고 말라비틀어졌다고 죽겠다고 아우성을 지르는 이 요나의 내면은 뭘 얘기합니까? 생명을 살려야 되는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는 요나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10절 이하에 보니까 정말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요나의 눈에는 원수같이 보였습니다. 다 불타서 없어져야 되고 망해야 되는 대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눈에는 불쌍히 여겨야 되며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여진 줄로 믿습니다. 요나는 망하기를 원하였지만은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는 사람으로 요나가 쓰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요나는 싫어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낀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러면 이제 나도 그 은혜를 가지고 나도 살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인생으로 변화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더할 수 없는 은혜로 내 심령과 영이 살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로 남편을 살리시고 아내를 살리시고 자식을 살리시기를 바랍니다. 내 이웃을 살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는 데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사람들을 고단하게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자가 되지 마세요. 얼마나 나 때문에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 남자라는 것 때문에 내가 무슨 직분을 권세를 가졌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가족들이 아파하고 고통하고 있는가도 역지사지로 바꾸어 볼 수 있는 그러한 관점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이 자기 중심적 모순에서 벗어나서 주님 중심의 마음을 가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아멘 하십시다. 은혜를 받았으면 생명을 살리는 자로 우리의 삶이 열려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받았습니까? 용서를 받았으면 우리도 또한 용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배신자였습니다. 도망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죽음에서 용서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요나는 원수의 나라이지만 니느웨의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됩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니까 산에 올라가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지금 보고 있는지. 어쩌면 이 모습이 때로 우리의 어느 한때의 모습이 아닌지요. 우리 4장 5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입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겠다 이거예요. 도저히 이 마음 속에는 용서의 마음이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 소돔 고모라처럼 불타기를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나는 용서를 받아도 다른 사람은 용서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 죄의 대가를 받아야만이 속이 시원하겠다는 악한 생각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냥 용서한 것이 아니잖아요. 십자가에 죽으시며 모든 저주를 대신하심으로 희생하심으로 우리가 용서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손해를 봐야 되고 내 자존심이 상해야 되고 내가 포기되어져야 되고 손해를 받음으로 용서되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서른 다섯 살 나이에 암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병원에서도 참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왔습니다. 온 교회가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그의 영혼을 세워 가는데 차츰 조금씩 눈이 떠져갑니다. 이제 교회에서도 힘을 얻고 그 날도 이제 정한 날에 가서 예배를 드려주러 구역식구들이 갔습니다. 목사님하고 갔어요. 그런데 밖에서 보니까 왁자지껄하고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요. 우는 소리 들립니다. 악쓰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서 말려야지. 가서 내용을 듣고 보니까 이 딸과 친정 어머니와의 싸움이 붙었습니다. 이 딸이 집을 살 때 7, 8년 전에 둘이 돈을 합작을 해서 구입을 했습니다. 이제 팔아야 됩니다. 치료비도 필요하고. 팔았는데 이 돈을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 이거예요. 딸은 생각합니다. 어머니 내가 지금 이렇게 돈이 많이 필요하니까 어머니는 그 때 돈 투자한 것의 이자만 받아 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펄펄 뜁니다. 이것아 그러면서 또 악을 쓰면서 이자가 아니라 반반 투자한 거니까 이익금도 반으로 나눠야 옳지 않느냐? 이래가지고 둘이서 싸웁니다. 위암이 걸려서 위가 남산만큼 부른 이 딸과 이 친정어머니가 둘이서 악다구니를 쓰고 싸웁니다. 죽어라. 그런데 2주 후에 그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장례식장에 과연 그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있으며 그리고 2주 후에 죽어 가는 그 딸의 마음 속에 그 어머니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어떤 혐의가 있거들랑 재물을 재단에 두고 가서 서로 화해하라. 서로 용서를 하고 용서를 주고 용서를 받고 와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영혼의 축복을 위한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수 안에 있으면서도 한번 원수지면은 그 뒷자리에 가서 앉지도 않아요. 뒤통수 꼴 보기 싫다고 저리 보따리 싸 가지고 다른 데로 옮겨가고. 우리 교회는 그런 거 없어요. 그 정도는 저질은 아니지요. 내가 용서받았은즉 나도 용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주님 나는 정말 용서하기가 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용서하시라니까 내가 하긴 하겠습니다. 믿음 주시옵소서. 내가 기쁨으로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적어도 내가 원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더나가서 감사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이제 오늘 우리가 다 때가 되면 놓고 가는 것들뿐입니다. 조금 손해보면 어떻습니까? 자존심 조금 상처받으면 어떻습니까?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더 큰 걸 잃지 않도록 우리 모두 이 박넝쿨 교훈의 은혜를 깊이 누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자존심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 대단한 것 같지만은 별것 아니에요. 머리에 그저 뇌신경 핏줄 하나 터져 버리면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느 신경이 끊어지면 말도 못합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척추가 건드려지면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건데 그 자존심 그거 내려놓으시고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형상으로 내가 십자가에 죽는 그 은혜가 오늘도 확인되어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일곱 번이라도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할찌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도 용서하지 못하겠다 그럽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 번 세 번 용서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그래도 말합니다. 그래도 용서해라.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의롭게 사는 사람도 없고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악한 사람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저놈 미워한다. 죽어야 된다. 저것은 벼락을 맞아야 되는데도 그 사람하고 또 다른 친구하고는 잘 살아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런 영적 손실을 입지 않기 위하여서 주님이 주는 참 뜻을 깊이 영접하시면서 우리 속사람이 계속 성장하여서 우리의 집이 초막 신앙이 아니고 박넝쿨 신앙이 아니고 금과 은으로 믿음의 보화로 지어지는 상 받는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입니다. 여러분 볼펜을 내서 이제 어떡하시겠습니까? 11절 하나님이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나의 요나서 12절을 작정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몫이요 나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성내어 죽기까지라도 내가 원망할찌라도 내가 이렇게 침체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게 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여 내가 범죄 하였습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천부여 의지 없어 손들고 옵니다. 아니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한 말씀처럼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어 주시옵소서. 그런 은혜로 결단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