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시기의 전쟁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던 전쟁이었습니다. 부실한 도로사정, 예측할 수 없는 날씨, 한계가 있는 사람과 동물의 힘, 한정된 정부의 재정.... 14~17세기 유럽의 슈퍼파워로 군림하던 오스만 제국도 이런 불확실성에서 달리 답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발칸 지역의 습지대와 강들은 행군에 있어 끝없는 장애요소였고, 조잡한 화약과 무기 등은 어느 상황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었죠(특히 화약의 경우 오래된 것일수록 습기 등에 의해 손상될 수 있었기에, 오스만 군은 새 화약과 오래된 화약을 따로 보관했습니다) 행군 도중에 비가 온다든가 하면 원정은 지연될 수 밖에 없었고 1년 중 전투기간이 한정되어 있던 시기(4월~10월)이니만큼 원정의 지연은 그 한 해의 전과, 더 나아가서는 전쟁 자체를 그르칠 수도 있었죠.
그나마 발칸은 사정이 나은 경우였습니다. 1578~1590년까지 13년동안 카프카스 지역의 패권을 두고 사파비 왕조와 벌인 전쟁이나, 7세기 중반 무라드 4세가 친히 이끌고 페르시아와 싸운 이라크 전쟁 등 동방에서 이루어진 전쟁은 이런 외부 요소의 문제가 더 컸습니다. 카프카스 지역의 험준한 산악, 완전히 통제가 되지 않은 지방 베두윈 부족, 수도 이스탄불에서의 거리, 혹독한 날씨 등....
이런 불확실성에서 오스만은 보급 분야만큼은 통제력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군대는 위로 진군한다 라는 말도 있는 만큼 병사들을 어떻게 먹이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제아무리 날고 기는 예니체리나 카피쿨루 군단이라도 일단 먹여 주지 못한다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명령 불복종,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17세기 프랑스의 여행자 Jean de Thévenot(어떻게 발음하는거죠...) 는 오스만 군대는 절대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으며, 온 땅으로부터 그들의 주둔지로 음식을 가져온다고 평했죠. 발칸의 경우 오스만은 이 지역의 수많은 강들을 이용해 원정군에게 비교적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탄불부터 해서 오스만 지배 헝가리(오스트리아와 항상 일전을 벌여온..)까지 멘질 하네(mㄷnzil-hane)라고 불리는 식량 창고가 있어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이곳에서 보급을 받고, 적진으로 넘어가면 그제서야 같이 가져온 식량을 소비하기 시작했죠.
오스만 관료들은 원정이 있기 전 군대에게 필요한 식량의 양을 계산해야 했습니다. 매 원정때마다 원정군에게 필요한 식량을 두달 가까운 기간 동안 보급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주로 현지에서 구매하거나 위에 말한 창고에서 보급을 받았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현지 물가를 교란시킬 위험이 있었죠. 따라서 관료들은 이전 원정에서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또 새로 구입해야 하거나 보급해야 하는 식량은 얼마나 되는지 분석해서 필요한 식량의 양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또 다음해의 원정을 위해 그 해에 모은 식량을 몽땅 써 버릴 수는 없었으니 잉여분도 충분히 잡아야 했죠. 이렇게 남은 식량은 비축되기도 했지만, 봄이나 추수기에 구입한 가격으로 다시 산 지역에 팔았는데, 대개 원정이 겨울에 끝나다보니 식량 가격이 많이 오른 상황에서 정부가 저가로 식량을 판매하는 것은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군대가 한번 움직일 때 대체 얼마 정도의 식량이 필요했을까요. Perjes의 연구에 따르면 90,000명의 병력과 40,000명의 말이 30일간 움직일 때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려면 낙타 3만 마리가 7,600,000kg의 양을 운송해야 했습니다. 무라드 4세의 1638년 바그다드 원정 시 하루에 1인당 최소로 필요로 했던 식량이 약 600g의 빵과 600g의 비스킷이었는데, 2만명의 예니체리와 시파히 군과 말과 운송용 소를 먹이려면 두세 달 간의 원정기간동안 35,000~55,000마리의 낙타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발칸과 같은 지역이라면 흑해나 강을 통해 해상 운송이 가능했지만, 이라크와 같은 동방 지역의 경우는 쌩으로 육로 운송을 해야 했으니 오스만 군이 그 지역에서 특히나 고전을 한 게 무리는 아니죠.
여기에 추가되는 부담은 사람이, 그것도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들이 빵과 비스킷만 먹어서는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기 좋아하는 건(고기, 소화잘되는 고기!) 변하지가 않았고 오스만 군대도 마찬가지였죠.
병영에 주둔해 있을 때 오스만 병사들(예니체리나 카피쿨루같은 상비군들)은 하루에 약 3,000 칼로리 정도의 식사를 했습니다. 320 그램의 빵, 160 그램의 건빵, 160 그램의 쌀에 192그램의 양고기, 80그램의 버터로 구성되어 있었죠. 17세기에는 수도의 예니체리(이 시기가 되면 예니체리 숫자가 5만명을 훌쩍 넘어버립니다)를 위해 오스만의 유럽 영토에서 30만 마리의 양떼가 보내졌죠.
이런 고기 보급은 원정 시에도 이루어 졌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그다드 원정 당시 약 21개월의 원정 기간 동안 217,279 마리의 양이 도축되었습니다. 1690년대 역사가 메브쿠파티는 예니체리 군단이 하루에 소비한 양고기만 해도 2.34톤에 달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정도 되는 양의 곡물과 육류를 오스만 제국은 징발이 아닌 지역 상인을 통해 사는 방식으로 구했습니다. 즉 식량 운송비뿐만 아니라 식량 구입비까지 계산이 되어야 했던 거고, 만약 주둔지나 행군지의 작황이 좋지 않을 경우 비용은 더더욱 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정 비용도 문제였지만, 16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이 시달려온 화폐가치 하락으로 인해 고정된 임금을 받는 병사들의 고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죠. 1586년 오스만과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 시 타브리즈의 수비군들은 자신들의 지급받은 화폐의 가치는 이전의 3/5로 떨어졌는데 물가는 오르니 병사들의 사기에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이 시기 원정을 다룬 역사가 무스타파 알리에 따르면 당시 카프카즈 지역에 주둔하던 병사들의 급료는 하루 5 악체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밀가루 1옥카(okkas=1.28kg)에 66악체, 빵 1옥카에 알툰(altun)금화 두개, 즉 250악체(....)란 어마어마한 금액이 나왔습니다. 화폐가치 하락에 물가 상승이 겹치면서 이런 결과가 나온거고, 병사들이 당연히 이 지역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겠지요. 16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이 군대를 통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예니체리들이 부업에 나서고, 지방 반란이 급증했던 이유도 고정된 월급을 받는 병사들이 화폐 가치 하락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렸던 문제도 있지요.
그러나 물가가 오른다는 건 상인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오스만 군은 보급부대와 함께 다수의 상인들을 데리고 다녔죠. 1570년대 크레타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과 외과의들이 동행했고, 1730년의 동방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뿐만 아니라 제화공, 이발사 들도 동행했습니다. 이들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이나 무기, 장비들을 공급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도 챙겨 갔죠. '징발'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원정이 자신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항상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 나온 1730년 원정 시 참가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충분히 지켜지지 않았다고 느끼고 불만을 품고, 결국 이 불만이 폭발해 술탄 아흐메드 3세가 퇴위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기도 합니다.(중동에서 상인들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의 힘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후대의 이야기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 이란의 상인들은 영국의 담배전매권을 취소시킨다든지, 헌법을 도입하게 만든다든지의 압력을 가했죠)
오스만 제국이 한번 전쟁을 하려 치면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 같았죠.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목표를 세우는 것 부터 해서 군대를 소집하고 봉급을 주고 그들에게 식량을 보급하고 운송비를 부담하고 필요한 식량이나 말, 낙타, 소를 구입하고 빌리고.... 오스만 제국이 그렇게 넓은 지역을 다스리고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것을 해 낼 수 있는 조직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주목한 점은 이러한 과정이 강제 징발 같은 식이 아닌 정부와 민간 상인 간의 거래로 대부분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운송에 필요한 말과 낙타, 소를 구하는 데 있어서 오스만 제국은 징발보다는 구입 및 임차의 방법을 주로 택했고, 식량 보급에 있어서도 거의 구입(ishtira)으로 충당했죠. 또한 식량 구입 과정에 있어서 현지 물가를 최대한 안정시키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구요. 한 제국이 세 대륙에 걸친 영토를 수백년 동안 유지하고, 또 유럽과 이란 양측의 적과 끝없는 전쟁을 상대하면서도 버텨나갈 수 있었던 건 오스만 제국이 어느 정도 체제를 정비하고 유지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고도서 : Ottoman Warfare 1500-1700, Rhoads Murphey
수정 : 오스만 무게단위 계산 실수로 인해 본문 중 오류가 있었습니다. '1.8kg의 빵과 1.8kg의 건빵'이 아닌 '600g의 빵과 600g의 건빵'으로 수정합니다.
첫댓글 흠...역시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돈 + 돈 + 돈 이라는..ㅡㅡ
그건 그렇고 오스만 제국이 ㅋ 징발이 아니라 구입으로 보급했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Jean de Th?venot 장 드 뜨봉 정도 읽는거 같은데. 뭐 하여튼간. 전쟁은 소드맛스터 하나만 있으면 10만 기사도 도륙나는거 아닌가혀. 보급? 그게 뭐임? 우적우적.
ㅋㅋㅋㅋㅋ
원래 공비에게 보급은 사치임...
공비는 현지조달이죠.ㅋㅋㅋ
장 드 데브노 이게 맞을겁니다.
소드 맛스타는 범위기가 별로긔. 해답은 역시 대마법사.
생각보다는 꽤 나이스 하게 보급을 해결했네요. 우리는 제국이깐 닥치고 약탈 ㄱㄱ 이런식이 아니니 역시 제국은 그냥 굴러가는게 아닌갑네요.
뭐 많게는 15만 대군까지 동원하는데 이걸 현지 동원으로 충당하려면 오히려 저항군을 염려해야 겠죠 ㅡ,.ㅡ;;
징발이 아닌거부터가 신선한
음... 잘 읽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당시 유럽보다 투르크가 행정시스템이 괜찮았군요. 당시 유럽 군대는 '식량을 찾아 배회하는 군대'라고 표현한 구절이 기억나는데.ㅎㄷㄷㄷㄷ.
행정시스템이 엉망인 나라가 자그마치 6백년을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허허, 대단하군. 참고하겠뜸!
오스만군 메뉴를 보니 많이 먹었네요ㄷㄷㄷ
갑자기 유물과 사료로 보이는 대식인 조선군 보급은 얼마나 끔찍했을지 궁금하군요.
아아... 조선인들은 큰밥그릇 2~3그릇은 수월하게 먹었다든데 도대체 보급이 얼마나들었을지 ㄷㄷ;;;
곡물은 오히려 수송이 쉬웠죠;; 말려서 보내면 되니까.. 저장성도 용이하고.. 항상 문제는 맛잇는 고기였습니다. ㅡ.ㅡ;;
재밌게 읽었습니다. 헌데 이런 자료는 어디서 구하신건가요??
아래 참고도서 이름이 나와있습니다.
보급행정관들이 당시 수학지식을 가지고 엄청나게 골머리를 썩혔을듯 싶네요....
삼국지에서도 제갈량이 보급을 중요시 여겼죠 ..ㅋㅋ
그럼 수십만들 동원한적도 있는 중국군은 도대체 어떻게 ;;;;
전투병이 보급병의 1/3 수준이니까요. 중국역사서는 대체로 이걸 한꺼번에 표현하더군요.
백숙의왕 / 아마 당말부터 보급병이나 노역병의 언급을 하는경향이 적어지는거같더군요.